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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비인가 모순인가
사계 님은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론은 그릇됐는가? ⑦>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에서 주입된 의는 ‘완전하고’, ‘이생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을 논리모순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사계 님의 이 말씀에는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처럼 정말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일까요, 아니면 정이철 목사가 아담이 영생을 받았지만 영생을 빼앗겼다고 말한 것처럼 정확한 개념 구분을 못해서 생긴 모순일 뿐일까요? 저는 사계 님의 이 발언이 모순이라는 것을 밝혀 보겠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영생(죽을 수 없는 상태)’과 ‘조건적 영생(죽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을 구분하지 못한 까닭에 아담이 영생을 받은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아담이 조건적 영생의 상태로 창조된 것처럼 했었지요. 마찬가지로 사계 님은 성화의 확정성과 점진성 개념을 명확히 구분을 못하고 계십니다. 점진 성화는 주관적이고, 그 출발점은 중생이며 종착점은 영화입니다. 여기서 ‘완전’이라는 말은 영화의 단계에서만 쓸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7문에 보면, 아무도 이생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화가 완전하지 않다면, 성화의 출발점인 중생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환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머레이 목사님은 “중생에서 주입된 의는 결코 이생에서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이 주관적인 면에서 완전이라는 말은 쓸 수가 없습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머레이 목사님뿐만 아닙니다)이 확정성화는 ‘죄 없는 완전함’이 아니라고 줄곧 말씀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완전하고”가 사계 님 말씀처럼 확정성화를 말하는 게 맞다고 가정해 볼 때(물론 저는 이것이 오독임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이 완전은 주관적인 완전이 아니란 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계 님께 도대체 어떤 면에서 완전하다는 것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사계 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사계 님의 모순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머레이 목사님이 “완전하지 않다”고 했을 때, 이것은 주관적인 면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말인데, 사계 님은 확정성화가 주관적인 것(의의 주입)이라고 하시면서도 ‘완전하다’고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정성화는 좀더 객관적인 측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확정성화란 성화가 확정되었다, 확보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확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더 객관적인 개념입니다. 구원 서정에서 이렇게 확정이 된 것 중 하나는 바로 칭의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화가 확보가 되었다, 확정이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성화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 성화에 확정적인 면이 있다면, 칭의와 나란히 놓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관적인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어도 자꾸 죄를 짓습니다. 물론 영화에 이르기까지 점점 자라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이 상태는 줄곧 변합니다.
여기서 구원 서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다음의 글을 댓글로 달았습니다. “칭의 행위는 하나님의 중생 행위의 토대 역할을 한다. 비록 (예를 들어) 시간상으로는 칭의가 새로운 출생 다음에 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는 중생의 토대다”(『삼위일체와 구속언약』, 존 페스코, 64쪽.) 이 글은 게할더스 보스 목사님 글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실성을 말할 때, 그 근거는 객관적인 면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칭의는 성화의 토대가 됩니다. 영화에 대한 보장도 칭의의 사실에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영생의 자격은 예수님이 능동 순종으로 얻으셨고 이것을 값없이 우리 것으로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영생을 우리 영혼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 물론 중생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이 칭의에 앞선다고 할 때, 이것은 우리의 중생이 칭의를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순서상 앞선다는 것뿐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성령님이 우리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에게 거룩성을 주입해 주시는 사건이라고 해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중생에서 주입된 의는 불완전한 까닭입니다. 완전한 의만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의는 오직 예수님만이 얻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관적인 면이 어떻게 완성이 될 것인가? 다시 말해 중생에서 시작해 성화를 거쳐 마침내 완전에 이르는 우리의 영화는 어떻게 보장이 되는가?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할 때, 그 토대는 당연히 객관적인 면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칭의는 중생에 앞섭니다. 더 확실히 말하면, 칭의는 중생의 토대가 됩니다. 이것이 구원 서정의 양면성입니다.
저는 사계 님과 염 목사님의 논쟁도 이 둘을 명확히 구분을 못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칭의가 중생에 앞서는 면이 있고, 중생이 칭의에 앞서는 면이 있습니다. 두 분이 이 개념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신다면, 두 분 사이의 간격도 많이 좁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다음 글도 댓글로 달았습니다. “선함이나 사랑스러움은 본질의 순서상 칭의에 앞서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해 나가시는 순서와 방법에서 선함이나 사랑스러움이 칭의에 앞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 안에 실제로, 그리고 영적으로 선한 것, 본질의 순서에서 칭의에 앞서는 것이 있다. 바로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기까지는 아무것도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믿음조차도 본질의 순서상 신자 안에 있는 어떤 선함이나 사랑스러움과 마찬가지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서야 받아들여진다.” 제가 누구 글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인용한 이 댓글은 에드워즈 목사님 글입니다. 제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까닭은, 에드워즈 목사님에 대한 염 목사님의 오해를 풀려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이 글은 칭의의 우선성을 가르치는 글, 사실상 염 목사님과 의견이 같은 글인 까닭입니다.
2) 같은가 다른가
사계 님이 또 하나 개념 구분을 못하신 것이 다음 글에 나타납니다.
“결정성화는 …(중략)… 유효한 부르심 및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단회 사건이다”는 존 프레임 목사님 설명에서 “동시”를 ‘=’가 아닌 ‘≠’로 표시해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처럼 확정(결정)성화를 칭의 뒤로 둬야 합니까?”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108)
여기서 사계 님은 ‘동시에 일어난다’를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것도 두 개념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 오해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권능에서는 같으시지만, 위격에서는 다르시다.’ 곧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십니다. 그렇지만 이 교리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일지라도, 개념 구분은 명확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권능에서 다르다고 주장하면, 이단입니다. 마찬가지로 위격의 구분을 없애면 이단이 됩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위격의 구분이 없으셨다면, ‘동시에’ 나타나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후크마 목사님 진술이 혼란스럽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과 확정성화가 같다면, 이 둘을 따로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같지만 이름만 다르다고 설명하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같다는 말은 정말 같을 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적어도 같은 것이 있을 때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같은 것이 있더라도 같은 것만 같다고 하고 같지 않은 것은 다르다고 해야 합니다. 후크마 목사님이 중생과 확정성화를 따로 다루었다면, 틀림없이 다른 면이 있어서 따로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다’는 진술은 신중치 못한 진술입니다. 같은 면이 있고 다른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과 하나와 배 하나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개수는 같습니다. 하지만 종류도 다르고, 무게도 다르며, 맛도 다릅니다. 이것을 ‘사과 하나=배 하나’라고 표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면에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것이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을 영어로 표현할 때 ‘simultaneous’라고 많이 하는데, 다음 페이지(https://www.vocabulary.com/dictionary/simultaneous)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The adjective simultaneous describes ‘something’ that is done at the same time as ‘something else’.” 롱맨 사전에서는 이 말을 “‘things’ that are simultaneous happen at exactly the same time.”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같다’와 ‘동시에 일어난다’는 분명히 다른 개념임에도, 사계 님은 두 개념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동시에 일어난다’를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중생=회심=칭의=양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들은 다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풍성한 내용은 다 같은 것으로 축소되고 말겠지요.
‘중생과 확정성화가 같다’(『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178쪽)고 하신 후크마 목사님의 글과, “확정성화를 ‘중생’이라는 주제에 포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존 머레이 조직신학 2권』, 297쪽)고 하신 머레이 목사님 글 중 하나만 사실입니다. 둘 다 사실일 순 없습니다. 물론 머레이 목사님은 이 글 바로 앞에서 “중생은 확정성화에서 극히 중요한 요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것이 ‘중생과 확정성화가 같다’는 뜻을 담은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확정성화란 점진성화의 객관적 기반을 다지는 내용인 까닭에 점진성화의 출발점인 중생이 당연히 확정성화에서 극히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지, 여기서 후크마 목사님과 같이 ‘중생=확정성화’라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계 님과 같이 확정성화를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중생과 확정성화의 구분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실상 의미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계 님이 연중론자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중생도 주관적 변화이고 확정성화도 주관적 변화라면, 사계 님은 주관적 변화에 두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셈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계 님의 의도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연중론의 변형이 아니라고 어떻게 항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중생=확정성화’라고 생각하실 뿐입니까? 그렇다면 용어만 다른 같은 실체를 뭐하러 헷갈리게 따로 다룹니까? 존 머레이 목사님이 발견하신 것은 새로운 용어일 뿐입니까?
부디 사계 님이 생각이 좀더 명확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의의 주입을 꺼려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위 즉 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천주교나 감리교는 영의 상태 변화 즉, 의의 주입을 강조하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가 뿌리가 되고, 우리 개혁주의는 법적정 칭의 즉, 의의 전가를 강조하기 때문에 전적 은혜인 것이죠
글쎄요. 의의 주입 자체를 꺼릴 필요는 없습니다. 의의 주입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만 꺼리면 됩니다. 하지만 의의 주입도 구원의 큰 은혜입니다. 의의 전가를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의의 전가'만' 강조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율법주의 진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 선생님이 중생의 도리를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닉네임 칼빈과 어거스틴은 의의 전가만 주장했고, 특히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의의 주입을 적대시했습니다.
결국 의의 주입은 천국 상급은 인생의 공로를 주장하게 되지요.
포도원주인이 일꾼들에게 그 삯을 공평하게 준 예화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중생, 성화는 성령님에 의한 빛의 조명입니다.
조명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카리타스 여기에 인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가톨릭 교회 탓에 '의의 주입'이라는 말 자체를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16세기가 아닙니다. 반대를 하시려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가 잘 귀를 기울이셔야지, 의의 주입이라는 말을 썼다고 무작정 행위구원론자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까?
@닉네임 님이 의의 주입을 인간의 영에 주입된 것으로 주장하는 게 맞다면
의의 주입이 되는 순간 신인협동으로 흘러갑니다. 자유의지가 생기게 되는 거고, 의의 유일성은 훼손되고 말지요.
섭리론과 견인의 관점에서도 논리상 의의 주입은 맞지 않지요.
@카리타스 성화 자체를 부인하시는군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도 있습니다. 다만 이 은혜를 칭의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가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의의 주입이 없다고 하는 개혁신학자는 없습니다. 용어만 달리 쓸 뿐이지요.
@닉네임 성화를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중생은 성화로 이어지는데 완전 성화는 없는 것이지요.
제가 문제제기하는 것은 의의 주입으로 신자가 주체적인 자유의지가 생기냐는 겁니다.
님은 성화에 있어서 신인협동을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카리타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3).
그 신인협동은 바울부터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바울부터 정죄하고 오십시오.
@닉네임 결국 님은 천주교처럼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시는군요.
서신서에 행위를 권면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신자에게 성령의 조명과 말씀을 통한 권면으로 전진하게 하기위함이라 하였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도 그렇고
우리 신자들 마음의 상태입니다.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98
위 링크 글에서 “결정성화(물론, 중생과 중복하는)는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를 가진다.”는 존 프레임 목사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은 무엇을 뜻합니까? 칭의 전 회심이나 칭의 후 점진성화를 뜻합니까?
이 문장을 ‘중생은 우리에게 마음과 의지와 애정에 대한 기본적인 새로운 전환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를 가진다.’로 바꾸면, 안 됩니까?
저도 이 부분을 여러 번 봤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프레임 목사님은 여기서 'reorientation'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책 전체에서 'reorientation'이라는 말은 결정성화를 설명할 때 두 번 말고는 쓰신 적이 없습니다. 중생 부분을 읽어봐도 이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중생과 겹친다(overlap)는 말도 정확히 무슨 의미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프레임 목사님의 생각을 추적할 또 다른 근거는 "41. 중생과 회심"의 첫 대목인데, 여기서 '객관적, 주관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확정성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시지 않아, 프레임 목사님의 정확한 생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원칙은 '좀더 분명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을 하자'입니다. 구원 서정을 가장 분명히 밝히신 분이 레이몬드 목사님이시고, 저는 그래서 여태껏 레이몬드 목사님의 틀이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현재 제 생각은, 레이몬드 목사님이 제시한 구원 서정이 옳다고 생각할 근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계 님과 같은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사계 님의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안을 하나 드리자면, 중생을 "초기 성화"라고 표현하시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로 토마스 보스턴 목사님이 중생을 설명할 때 쓰신 표현입니다.
1. Initial sanctification, which is the implanting of the seeds of grace in the soul at first, and is the same with regeneration, 1 John 3:9 wherein the Spirit of Christ comes into the man's heart with his graces, and takes possession of him for God. The whole soul is cast into a new mould and frame, and the image of God is drawn anew upon it. <An Illustarion of the Doctrines of Christian Religion>
번역본이 없어 영어로 쓴 점 죄송합니다.
@닉네임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주말에나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카나리아 朴埰同 괜찮습니다. 아무 때고 여유 있을 때 쓰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