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P. 마틴, 『신약의 초석 II』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p. 241-256.
신성종, 『신약총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pp. 155-165.
로버트 H. 건드리, 『신약개론』 김일우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3), pp. 466-477.
도날드 거쓰리, 『신약개론』 나용화 박영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p. 566-584.
W. G. 큄멜,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p. 258-273.
1. 데살로니가 교회의 개척
A. 행 17:1-10. 바울이 처음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만난 일에 대한 기록
① 성공적 선교활동 결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로부터 큰 응답을 받음(4절, cf. 살전 1:9-10)
②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대로 바울과 실라가 밤에 베뢰아로 도피(10절)
③ 그들이 떠난 후 3-4주 동안 유대 회당과(2절) 야손의 집에서의(7절) 사역을 통하여 몇 가지 고무적인 결과들이 나타남 -> 영향력 있는 여자들이 따름 -> 바울이 떠난 후 귀부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그곳을 떠나버렸다는 비방이 떠돌아 다녔을 가능성이 있음
B. 유대인들의 복음 왜곡
① 예수가 인간 삶의 왕이시라는 바울의 복음을 왜곡하여 로마 제국에 모반을 일으키는 정치적 내용이라고 주장
② 마게도냐의 행정 중심 도시로서의 데살로니가에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로마 당국의 흥분
③ 야손의 증언으로 무마되고, 바울의 자유로운 여행은 허락받았지만, 말씀 선포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로부터 철수한 후 방문에 대한 거리낌을 가지게 됨(살전 2:17-18).
C. 어린 교회에 닥쳐온 핍박(1:6; 2:14; 3:3)
①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책임에 대한 깨달음으로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있었음(1:8)
② 용기 있는 증거에 대한 핍박
③ 핍박으로 말미암는 죽음 - 신자들의 때 이른 죽음으로 말미암는 반대자들 발생(4:13)
④ 기독교 메시지에 대항한 격렬한 활동이 뒤따름 - 유대 지도자들이 베뢰아까지 추격(행 16:13) - 바울의 고뇌의 기간 - 아덴으로 도피
D.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명성에 대한 회의 발생
① 아덴에 머무는 동안 디모데를 파송하여 자기 대신 사역하도록 함 - 디모데의 보고(살전 3:6-10, 아덴이나 고린도에서)156)
② 2:1-12. 바울이 받았을 비난들
ⓐ 비겁하게 위험으로부터 도망쳤다는 비난
ⓑ 빌립보에서 돈을 받기 위하여 필요한 기간만큼만(빌 4:6) 데살로니가에 있었다는 의혹
ⓒ 탐욕스럽다는 비난 - 귀부인들의 재정적 지원이 있었다면 더욱 가능성이 높음
E. 데살로니가 서신의 기록 목적 - 그 자신의 성격을 변호하며 그가 데살로니가에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의 선교적 목회적 동기들이 정당함을 해명하기 위함.
2. 바울의 자기변호
A.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연대 - 디모데와 실라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다시 만났던(행 18:5) A.D. 50년경
B.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목적
① 형제들이 시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함께 기뻐하기 위하여(3:6)
② 그들의 믿음을 강화하고 전에 일어났던 몇 가지 의혹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4:11ff.; 5:1, 14)
③ 그의 동기를 왜곡시키고 그의 성격을 공격하는 비방들에 대하여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2:1-12).
C. 바울의 자기변호에 대한 맑센(Willi Marxen)의 재구성
①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을 종교적인 사기 행위로 삶을 유지했던 이교도적인 “신의 사람들”(divine man, qeiovi andre")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여겼고 이에 대해 바울이 자기변호를 하고 있다고 주장
②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부정한” 행위들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강변한다(2:3).
③ 돈을 벌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치료 행위를 해주고 예언을 해주는 유의 종교적 교사들과 전혀 다른 부류임을 강조한다(2:4-6).
④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아첨과 찬양의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한 일이 없다.
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의지하지 않았고, 그곳에 거하는 동안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했다(2:9).
⑥ 그의 성격에 관한 묘사에는 아무런 결점이 없다(2:10)
D. 바울의 자기변호에 대한 슈미탈스(Schmithals)의 주장
① 바울은 자신의 고난에 관한 문제들에 대하여 변호하고 있다.
②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권위를 부각시키며 스스로 거룩한 자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손실이나 고난이 없는 자라고 선전
③ 바울은 이와 정 반대로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당함 - 빌립보(2:2),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고 지금 고린도에서
④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물들어 있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보기에 사도가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 이에 대한 바울의 변명이 필요했다고 주장
⑤ 반대 의견
ⓐ 데살로니가의 문제가 거짓 가르침이 그들 가운데 퍼져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2:1ff., 18f.; 3:9f.) - 그들의 믿음과 영적 안정에 대해서 바울은 확신하고 있다.
ⓑ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바울의 적들은 유대인들(2:14-16)
ⓒ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그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과 싸운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E. 양식비평적 연구에 의한 데살로니가서의 기록 목적 - P. Schubert, H. Boers,
① 전형적인 바울 서신의 6 단락(P. Schubert) - ⓐ 서두 ⓑ 감사 ⓒ 본문 ⓓ 사도의 파루시아(바울 자신이나 동료가 방문할 것에 대한 약속) ⓔ 권면(파레네시스) ⓕ 결언
② 데살로니가 전서에 나타난 파격 - 2:13ff.에서 두 번째 감사가 나타난다.
A) H. Boers는 이 구절이 A.D. 70년 이후 반 유대적 입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삽입된 것으로 취급한다.
ⓐ 2:13의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진술을 문맥 안에서 해석하기 어렵다.
ⓑ 이 구절이 예루살렘의 함락을 전제로 하는 것이요, 예루살렘 함락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주장
ⓒ 13-16절의 삽입 본문을 제거하면 12절에 이어 17절로 이어지고, 서신의 원 패턴에 어울리게 되며, 서신의 진정한 목적도 밝혀지게 된다고 주장
B) 2:1-12절이 변명의 어조를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신뢰와 우정의 감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 데살로니가전서의 목적은 “권면”이라(4:1, 10) - C. J. Bjerkelund의 주장: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 바울은 이미 감사의 부분에서(1:2-10)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표시했으며, 거기서 그는 그들에 대한 기쁨과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므로 마치 1:2-10이 신뢰와 우정의 감정을 표현했듯이 4:1-5:11은 하나의 권면의 부분으로서 변명의 부분과(2:1-12) 사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약속(2:17-3:13)의 부분과 함께 바울의 우정과 기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C) 고대 서신 양식의 구조에 맞추어서 연구하는 방법의 유용성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바울 서신들이 어느 특정한 패턴에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 데살로니가서신의 기록 배경 - 데살로니가서가 생각보다 후기에 기록된 것일 가능성에 대한 주장
A. 슈미탈스 -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접한 적들이 갈라디아와 고린도에서 그의 사역을 방해했던 영지주의적 기독교 이단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B.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1:8f.; 2:14)
① 1:5-2:12에 그 교회가 최근에 세워졌다는 시사들이 있다.
ⓐ 바울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사역할 당시의 일들을 거듭 언급하면서(1:5; 2:1ff.; 5:9f.), “너희도 알거니와”, “기억하거니와”, “너희가 증인이라”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 그들이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전제로 한다.
②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에게 질문의 서신을 보냈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가능성 - C. E. Faw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 . . 에 관하여”라는 말을 계속적으로 사용함으로(4:9, 13; 5:1, 12) 데살로니가전서가 하나의 목회적 답신이었다고 주장
C. 데살로니가전서와 사도행전의 역사기술 부분과의 상호관련성의 문제 -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이 그곳을 방문한 직후에 기록되었다고 볼 경우의 몇 가지 난점
① 행 17:4과 18:5에 따르면 디모데는 바울과 고린도에 함께 있지 않았다. 바울의 보냄을 받아 아덴으로부터 데살로니가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② 살전 3:1에는 바울만 홀로 아덴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③ F. F. Bruce의 설명
ⓐ 디모데가 아덴으로부터 데살로니가로 가서 교회의 상태를 보고 다시 되돌아 왔을 가능성을 추정
ⓑ 실라 역시 다른 용무로 마게도냐로 보냄을 받았을 것
ⓒ 바울이 디모데와 실라가 돌아오기 전에 아덴에 홀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살전 3:1의 복수형 movnoi -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를 방문했거나 아니면 50-52년에 거기에 잠깐 들러서 거기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Michaelis)
④ 사도행전이 바울의 활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했을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D. 데살로니가전서가 AD. 50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
① 4:13ff.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 몇 사람의 죽음을 상정 - 죽은 자들의 상태가 관심의 대상이 됨
② 단 한 사람의 죽음만으로도 파루시아 이전의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함
③ 박해를 당하는 시기 동안 죽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
4.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오해
A. 핍박 중의 교회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문제 - 신정론(神正論, 神政論, theodicy)157)
① 불행과 죄, 그리고 죽음, 특히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번영과 경건한 자들이 당하는 수난을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와 거룩하심과 그리고 사랑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 연구하는 문제 - 악한 자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최소한 마지막에는 인간의 외면적인 운명이 경건한 사람과 악인을 밝혀줄 것인가?
② 시편 73편 - 결론에서는 “나의 육체와 나의 마음은 약해질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마음의 힘이시오 나의 분깃이로다”라고 마감
③ 욥기 - 경건한 자가 이 세상에서 고생을 당할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은 그것을 이유로 삼아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욥도 결국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당신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당신의 뜻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 . . 그래서 회개합니다”(욥 42:2-5).
④ 이에 대한 대답 => 결론: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로 변환됨(겔 37:1ff; 시 16:10; 사 25:8; 욥 19:25; 단 12:2f.)
B.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야기된 혼란
① 파루시아의 지체 문제: 주님은 왜 오시기를 연기하시고 그의 왕국의 강림을 지체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다가올 왕국에서 받을 몫을 상실하는 것인가? 약속된 재림이 닥칠 때 살아남아 있지 않은 자들이 불리한 처분을 받는 것은 아닌가?
② 죽음의 문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죽는다면 그들은 어떤 상태에 있으며, 또한 슬퍼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친족들은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C. 바울의 답변(4:13-18): 파루시아의 지체나 죽은 사람에 대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는 훈계와 위로
① 미래 종말론의 결핍에 대한 훈계
ⓐ 우리가 죽음과 삶의 문제에 있어서 신자들이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확신 가운데에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 살아있는 교회나 이미 세상을 떠난 성도들 모두 최상의 결속 상태로 연합될 것(“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4:17)).
② 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오해에 대한 교정
ⓐ 종말론적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지 못함으로 제자도를 지키는 데 게을러지고 미래에 대해 무관심(5:2-10).
ⓑ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삶이요 따라서 그 삶은 이미와 이직의 긴장관계 속에서의 삶이다.
③ 바울의 책망 내용
ⓐ 악하고 부도덕한 삶의 자세들(4:3-8)
ⓑ 공동체 안에 사랑이 없음(4:9-12)
ⓒ 교회 생활을 제어하여야 할 엄정한 윤리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5:14-16)
D. 두 번째 편지에서 앞의 편지와는 정반대되는 교훈을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강조
① 전서 후에 후서를 보내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거짓 교사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일어남(살후 2:2)
② 거짓 사도들은 계시의 전달자로 자처하며 사도적 권위가 자기들에게 있음을 주장
③ 바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가짜 편지들이 나돌게 됨
④ “주의 날이 이르렀다”(2:2)는 생각으로 인하여 일상적인 일을 완전히 제쳐버리고 마지막 그 결정적인 사건을 열광적으로 사모하며 건전치 못한 방향으로 그것에만 몰두하는 결과를 낳게 됨(3:6-13)
5. 두 서신의 순서
① 전통적인 견해는 길이가 긴 전서가 먼저 쓰여진 것으로 이해
② 바울이 첫 번째 편지를 보낸 후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어려움
A. 디모데를 아덴에서 데살로니가로 보냈다는 사실(살전 3:1)이 데살로니가후서가 먼저 기록되었다는 이론을 근거로 하면 더 잘 설명된다.
① 디모데가 데살로니가후서를 갖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그 편지의 분위기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
② 바울은 고린도로 돌아온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 가운데 서있다는 좋은 보고를 받고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리고 좀 더 긴 편지를 써 보낸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기쁨과 확신의 분위기가 어울린다.
③ 평가 - 사실성이 거의 없는 추론에 불과하다
B. 바울이 그 교회를 거듭거듭 방문하기를 시도했다는 진술은(살전 2:17) 서신의 순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따를 경우 공허한 것이 되지만, 순서를 뒤집으면 의미가 있게 된다.
①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때의 상황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가 실지로 데살로니가로의 여정을 거듭거듭 시도했을 것이다.
②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러한 언급이 필요 없었다. 바울이 자신의 행실에 대해 변명한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C. 데살로니가전서보다 후서의 교회가 더욱 성숙된 교회로 보인다.
①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② 데살로니가후서가 어조와 정서에 있어서 유대적인 면이 많으나 데살로니가전서는 종말론에 있어서 좀 더 당당하다는 주장 역시 주관적이다.
③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묵시적 광신주의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큄멜)
D. 동일한 교회에 그토록 짧은 기간 내에 두 개의 편지를 전달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여러 해결책들
a) 데살로니가후서는 교회에 속한 소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것으로서 데살로니가전서와 동시에 보내졌다(하르낙), 전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후서는 공동체 전체에게 보내졌다(디벨리우스). - 왜 두 편지 모두 다른 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해소할 수는 없다.
b) 데살로니가후서는 빌립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데살로니가전서와 같은 시기에 보내졌다(슈바이처), 데살로니가후서가 베뢰아 사람들에게 보내졌다(고구엘): 폴리갑(11:3)의 언급에 의한 추론이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c)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의 저작이 아니기 때문에 두 편지를 서로 관련시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
① W. Wrede: 데살로니가후서가 전서를 문학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바울의 서명(2:2; 3:17) 역시 바울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이므로 후서는 위작이다.
② R. H. Fuller: 데살로니가후서 2:1-12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교훈과 데살로니가전서 4:13ff.과 고린도전서 15장의 종말론적 교훈이 서로 일치되는 점이 없다.
③ H. Braun: 데살로니가후서 1:5ff.; 2:12의 도덕적 교훈이 사도 바울의 저작임이 분명한 다른 서신들의 교훈과 대조적이다.
④ W. Marxen: 데살로니가후서 2:2이 영지주의적 이단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이다.
E.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공통 주제들
① 그리스도인의 삶에 부수적으로 뒤따르는 고난의 문제
②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위협
③ 자기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자기들의 순결한 영에게는 악이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자기들의 도덕적인 책임을 거부하는 게으른 광신자들에 대한 책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