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12일 갑신 5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태묘에 고유하고, 정전에 앉아 즉위 교서를 반포하다
임금이 경진일로부터 재계(齋戒)하고 병술일에 법가(法駕)를 갖추어 태묘(太廟)의 악차(幄次)에 나아갔다. 정해일에 임금이 친히 강신제(降神祭)를 지내어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기를 마치고, 악차(幄次)에 나와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어가(御駕)가 돌아와 정전(正殿)에 앉아서 교지(敎旨)를 반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삼가 생각하건대, 상왕(上王)께서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순응하여 비로소 국가를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에 모범을 보였는데, 불행히도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워 후사(後嗣)로 삼고서 장유(長幼)의 차례를 빼앗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문란시키고자, 우리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하여 변고를 발생시켜서 화(禍)가 불측할 지경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祀)의 신령이 몰래 도와주고 충신 의사(義士)들이 마음과 힘을 다함에 힘입어, 간악한 무리들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나라의 운명이 편안하게 되었다. 삼가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내 소자(小子)가 몸이 적장(嫡長)의 지위에 있어 뒷 일을 능히 부탁할 만하다고 여겨, 이에 왕위에 오르라고 명하시었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이므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사양할 수 없게 되어,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 정축에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에 오르고, 열흘이 지난 정해일에 몸소 곤복(袞服)을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쓰고서 종묘(宗廟)에 제사지내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상왕께서 제왕의 정치에 염증이 나서 나 소자(小子)에게 맡겼으니, 원컨대 한 나라로써 영구히 봉양(奉養)하겠으므로 각 관사(官司)의 공상(供上)과 여러 도(道)의 진헌(進獻)은 한결같이 상왕이 왕위에 계시던 날과 같이 할 것이다. 지금 혁신(革新)하는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새로운 교화(敎化)를 선포해야 될 것이니, 그 홍무(洪武) 31년 9월 15일 이른 새벽 이전에 있었던 대역(大逆)·강도(强盜)·고독(蠱毒)111) ·염매(魘魅)112) 와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정도전·남은의 당여(黨與)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던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사유(赦宥) 면제하니,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해 말하는 사람은 그 고발한 죄로써 처벌하게 할 것이다. 무릇 백성에게 편리한 사의(事宜)를 조목별로 열거(列擧)하면 아래와 같다.
1.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제사는 마땅히 성심과 공경을 다하여, 진설하는 작헌(酌獻)의 기구는 정결하기를 힘쓰고, 예문(禮文)과 악장(樂章)은 절차에 맞도록 힘써서 감히 불공(不恭)함이 없게 할 것이다.
1. 문선왕(文宣王)113) 은 백대(百代) 제왕의 스승이니, 석채(釋菜)114) 의 제례(祭禮)를 마땅히 정결하게 하고 혹시라도 삼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기자(箕子)는 조선(朝鮮)에 봉토(封土)를 받아 실제로 풍화(風化)의 기초를 닦았으며, 고려 왕조의 시조(始祖)는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모두 동방 백성에게 공로가 있으니, 마땅히 제전(祭田)을 두어 사시(四時)에 제사를 지내야 될 것이다.
1. 하늘의 보고 듣는 것은 실상 백성에게 있으니, 그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제거하여, 내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뜻에 부합하게 할 것이다.
1.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니 의리상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게 된다.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시정(時政)의 잘되고 잘못된 점과 민생(民生)의 이롭고 해되는 점에 있어서 할 말을 다하여 숨기지 말며, 소민(小民)의 원통하고 억울하여 풀리지 못한 것은 또한 나아와서 고하게 할 것이다.
1.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함을 버리는 것은 정치하는 근본이니, 궁중(宮中)의 의장(儀仗)과 의복·기명(器皿)은 검소함을 따르게 할 것이며, 그 사치로써 아첨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헌부에서 이를 처벌하게 할 것이다.
1. 요사이 도읍을 옮겨 궁궐을 건축함으로 인하여 백성의 생계가 진실로 고생이 되니, 무릇 중앙과 지방의 토목(土木)의 역사는 일체 모두 정지시키어 백성들로 하여금 휴식하게 할 것이다.
1. 금년은 봄과 여름에 한재(旱災)와 황재(蝗災)가 서로 잇달아 바닷가의 주군(州郡)에는 더욱 그 재해를 입었으니, 내가 심히 상심(傷心)된다. 창고를 열고 곡식을 옮겨 진제(賑濟)를 시행하되, 혹시 더디어 늦추지 말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랑과 골짜기에서 죽게 됨을 면하게 할 것이며, 조세(租稅)는 그 손상(損傷)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그 수량을 감면하게 할 것이다.
1. 《육전(六典)》은 정치하는 법령이니, 마땅히 육조(六曹)로 하여금 관직을 임명하는 뜻을 강구(講求)하게 하여, 각기 그 직책을 다하여 감히 혹시라도 태만함이 없게 할 것이다.
1. 배 타는 군사는 나라를 위하여 외모(外侮)를 막아 물 위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으므로 고생이 더욱 심하니, 병조(兵曹)에서 마땅히 각도의 군호(軍戶)와 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상고하여 매 3정(丁)에 군인 1명을 세워 두 번(番)으로 나누어 윤번(輪番)으로 교대(交代)하게 하고, 그 집은 다른 요역(徭役)은 면제하게 할 것이다.
1. 화통군(火㷁軍)과 기인(其人)115) 의 역(役)도 또한 고생이 되니, 호조(戶曹)에서 마땅히 각 고을 향리(鄕吏)의 명수(名數)와 관시(官寺)·노비의 명수를 상고하여 그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그 정원을 다시 정하여, 그 수고와 편안함을 균등하게 할 것이다.
1. 둔전(屯田)의 법은 변새에 군사를 주둔시킨 것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평민(平民)을 노역시킨 것은 아니니, 수상(水上)과 육지(陸地)에서 주둔하는 군사가 경작하면서 전쟁하기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평민(平民)을 역사(役事)시키면서 둔전(屯田)한다고 칭호하는 것은 일체 모두 이를 폐지하게 할 것이다.
1.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한 것은 매우 백성에게 해로우니, 지금부터는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시켜 여러 도(道)의 토지의 넓고 좁음과 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조사하여 차등이 있게 나누어 정하게 하고,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는 주·부·군·현(州府郡縣)의 토지와 인구의 넓고 좁음과 많고 적은 것으로써 차등이 있게 나누어 정하게 하며, 수령(守令)들은 각호(各戶)의 토지와 인구로써 차등이 있게 나누어 정하게 한다면, 균등하지 않다는 탄식은 없게 될 것이며, 그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이나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 어려서 부모가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과 노쇠하여 느른한 사람, 폐질(廢疾)이 있는 사람으로서 동거(同居)하는 사람이 없는 자는 전체를 면제하게 할 것이다.
1. 농업과 양잠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로 하여금 군현(郡縣)을 나누어 독려하여 초겨울에는 제방(堤防)을 쌓고 화재(火災)를 금하게 할 것이며, 첫 봄에는 뽕나무를 심고, 5월 달에는 뽕나무의 열매를 심게 하여 감히 혹시라도 태만하지 말게 할 것이다.
1. 서울 안의 성균관(成均館)과 오부 학당(五部學堂)으로부터 서울 밖에서는 각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관(敎官)이 있는 것은 인재(人材)를 양성하기 때문인 것이니, 마땅히 때때로 고찰(考察)하여 그들로 하여금 혹시 태만하지 말게 할 것이다.
1. 백성의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守令)의 유능과 무능에 매여 있으니, 조관(朝官)의 6품(品) 이상은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그 출신 내력(出身來歷)을 갖추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시켜 상세히 고찰(考察)하게 하여, 이에 그 임무를 맡기게 하고, 감사(監司)는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을 엄격히 시행하여, 천거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죄를 천거한 사람에게 미치게 할 것이다.
1. 가난한 백성의 부채(負債)는 베[布]와 곡식을 논할 것 없이 본전(本錢) 하나에 이식(利息) 하나를 계산하여 더 징수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본전과 이식은 관청에 몰수하고 죄를 논단(論斷)하게 할 것이다.
1.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여 연향(宴享)과 재회(齋會)에는 반드시 먼 지방의 이어 쓰기 어려운 물건을 쓰게 되어서 지금까지 이르고 남아 있는 풍습(風習)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 금은(金銀)·주옥(珠玉)·진채사(眞彩絲)·화단자(花段子) 등 물건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게 할 것이다.
1. 고려 왕조의 말기에 처음으로 별안색(別鞍色)116) 을 설치했는데, 도리어 공조(工曹)의 권한을 침범하게 되니, 전혀 관직을 임명한 뜻을 잃었으므로 마땅히 제거해야 될 것이다.
1.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은 마땅히 금령(禁令)이 있어야 될 것이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이를 관장하게 할 것이다.
1. 어량(魚梁)과 천택(川澤)은 사재감(司宰監)의 관장한 바이니, 사옹원(司饔院)에 분속(分屬)시키지 말게 하여 출납(出納)을 통일하고, 산장(山場)과 초지(草枝)는 선공감(繕工監)의 관장한 바이니, 사점(私占)을 하지 말게 하고 그 세(稅)를 헐하게 정하여 백성의 생계를 편리하게 할 것이다.
1. 선공감(繕工監)과 사수감(司水監)에 바치는 시탄(柴炭)과 사복시(司僕寺)에 바치는 곡초(穀草)는 백성이 이를 심히 괴롭게 여기니, 마땅히 맡은 관사(官司)로 하여금 다시 소비하는 것을 정하여 전일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할 것이다.
1. 관청에 소속된 노비(奴婢)는 사람마다 역(役)을 서서 그들로 하여금 배고프고 춥게 하여 도망해 숨게 됨을 면치 못하게 하니, 지금부터는 매 2인에 1인을 사역시키어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하며, 그 자신이 죽은 사람은 본주인에게 충당해 세우지 말게 하고, 나이 만 60세가 된 사람은 역(役)에서 방면(放免)하게 하며, 매 10인에 1인을 뽑아 나누어 두목(頭目)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소속을 관장하게 하되, 만약 도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두목(頭目)을 책망하게 할 것이다.
1. 명칭과 실상이 서로 혼잡해서는 안 되니,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제외하고는 공사(公私)의 서장(書狀)은 표지(表紙)를 쓰지 못하게 할 것이며, 장흥고(長興庫)에 바치는 것은 그 소용에 따라 또한 마땅히 다시 정해야 될 것이다.
1. 평민(平民)이 심은 과실과 대나무를 관사(官司)에서 그 대금을 주지 않고 공공연히 가져다 쓰는 것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고, 각 관사(官司)에서 모두 과원(菓園)을 설치하고 심어서 용도에 공급하게 할 것이다.
1. 70세 이상 되는 늙은이는 정조(正朝)와 탄일(誕日) 등 경사(慶事)에 관계되는 외에는 조반(朝班)을 따라 조알(朝謁)하는 것은 면하도록 하여, 나의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 부응하게 할 것이다.
1. 외방(外方)에서 제련(製鍊)하는 철물(鐵物)은 전적으로 군기감(軍器監)에 맡겨서 그 본래 정한 월과(月課)의 수목(數目) 외에는 함부로 허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병기(兵器)는 흉기(凶器)이므로, 정조(正朝)와 탄일(誕日)의 하례(賀禮)에 군기(軍器)로써 바치는 것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게 할 것이다.
1. 군현(郡縣)의 공물(貢物)은 그 토지의 생산에 따라 다시 그 액수(額數)를 정하고, 그 생산되지 않는 물건은 수납(收納)을 면제하게 할 것이다.
1. 창고와 궁사(宮司)는 전적으로 삼사(三司)에 맡겨 그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할 것이다.
1. 쓸데없는 관원은 도태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상세히 의논하고 신문(申聞)하여 실제의 효과를 찾도록 할 것이다.
1. 여기에 기재된 중에서 미진한 사리(事理)는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계속해 의논하여 신문(申聞)해서 거행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