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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6:1-22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청년들을 심방할 때 적잖이 듣는 아픔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해석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이 일은 직장 생활하는 청년들한테서 주로 듣는데, 그리스도인 상사나 동료에게 부당한 언사를 듣거나 대우를 받으면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어렵고 신앙에 회의감까지 든다는 게 그 내용입니다.
그때 얘기를 듣는 저도 마음 한편이 답답해집니다. 그리고 긴 한숨을 쉽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비단 각박하게 돌아가는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오래전 다윗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55:12-13, 새번역)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참 경악스러운 반전이 단 두절로 이뤄진 노랫말에 담겨있습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 그 비방자가 바로 내 동료, 친구라고 합니다. 말할 수 없는 비애감에 젖은 다윗의 절규가 얼마나 절절할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도 이 황당함을 넘어선 쓰림을 겪어 본 적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달부터 살피기 시작한 책, 욥기의 주인공 욥에게서도 이 아픔을 간접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욥이 의인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욥에게 그의 죄 때문이 아닌 그저 하나님의 용인으로 인한 재난이 몰아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 결정을 알지 못했던 욥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소리쳤는데,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가 그에게 화를 더합니다. 네가 마땅히 벌 받을 만한 일을 했으니 이런 것 아니겠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서 회개하라고 처방까지 합니다.
당연히 욥은 억울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항변했습니다. 나는 가족만 아니라 전 재산을 잃을 만한 죄를 범한 적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일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욥이 신성모독까지 한다며 그를 나무랍니다. 이제 그들이 보기에 욥은 중증 환자여서 처방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욥과 세 친구의 대화가 한 바퀴 돌자 친구들 입에서 ‘회개하라’는 말이 사라집니다. 대신, ‘네게 이 징벌은 마땅하다’라며 비수를 휘두릅니다. 이렇게 세 친구 중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자신의 두 번째 말을 마치자 욥도 다시 입을 엽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두 번째 항변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욥의 대답(1-6절)
(1-2)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욥은 엘리바스만 아니라 마주한 세 친구에게 말합니다. 이미 숱하게 들은 말들을 지금 또 들어 전혀 새로울 게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욥도 친구들을 향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다.
사실 이 말은 형용모순입니다. 위로자는 상대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마음을 보듬어 안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친구들은 자신들을 욥의 상황을 이해하고 유익한 충고를 건네는 위로자로 여기면서, 실제론 욥을 죄인이라고 단정 짓고 상처 부위에 소금을 뿌리고 있습니다. 욥은 이 점을 콕 집어 친구들이 잘못됐다고 꼬집습니다. 친구들을 향한 욥의 말은 더 이어집니다.
(4-5)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사실 욥은 친구들이 내세운 원리에 동의했습니다. 욥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혜자입니다. 당연히 그도 ‘죄인에게 벌이 있고 의인에게 상이 있다’라는 인과응보 신학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도 친구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욥과 같이 고통 중인 상대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자신이라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위로의 말까지 했을 것이라며 지금 핵심을 놓친 친구들을 한 번 더 꼬집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쏟아낸 욥은 이렇게 혼자 되뇝니다.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지금 욥의 심정이 어떤지가 이 대목에 잘 나타납니다. 입을 열어 속사포처럼 쏘아붙여도 답답한데.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아픔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답을 모르겠을 때,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활로를 찾지 못할 때, 그때 교우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욥처럼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심지어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 교역자나 구역원들로부터 억울하게 참소당할 때, 교우님은 어떻게 해오셨습니까. 이런 상황을 두고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소개했던 시편 55편의 화자 다윗은 이렇게 했습니다.
(시편 55:16)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다윗은 친구들마저 자신을 공격해 믿을 이가 하나도 없을 때, 그렇게 숨이 턱 밑까지 조여 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구원하시리로다’로 번역된 부분을 새번역은 ‘건져 주실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건지는 행동은 위에서 아래로 향합니다. 양옆, 앞뒤, 아래서는 할 수 없습니다. 즉 지금 다윗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고갤 들고 입을 연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런 다윗의 행동이, 욥에게서도 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호소(7-17절)
(7-8)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친구들을 향해 말을 마친 욥이 그다음으로 부른 대상은 다름 아닌 욥의 ‘주님’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이제 시선을 위로 향하고 긴 호흡으로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이런 욥의 행동은 그가 실낱같은 희망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걸 알려줍니다. 실제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고 끝없는 내면의 심연에 잠수해 버리려 합니다. 그 무엇도 자신을 건져낼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늘을 보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위에 계신 분이 듣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분이 듣기 좋을 감언이설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인식의 경계를 최대치로 확장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있는 그대로 쏟아냅니다. 지금 자신의 상황이 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를 시들게 해 몰골을 흉측하게 하셨는데, 이 내 모습조차 나를 돕지 않고 사람들이 내 죄를 입증하는 근거로 삼는다고 절규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부르짖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9-10)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계속해서 욥은 하나님을 자신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이를 갈고 끝내는 찢는 맹수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먹잇감이 된 자신 주위에는 마치 동물의 사체를 먹는 짐승 같은 친구들이 몰려와 모욕하고 뺨을 친다고 한탄합니다. 욥의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2-15)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이번에 욥은 하나님을 자신을 대항해 전투하는 용사로 묘사합니다. 아무 문제 없이 살던 자신에게 하나님이 들이닥쳐 모든 걸 산산이 부쉈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자신을 과녁으로 세운 뒤 사정없이 화살을 쏘아, 꿰뚫린 온몸이 쓰리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공격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기에 상처가 아물 틈이 없어 슬픔의 상징인 베 옷을 피부에 덧대 꿰매야 할 정도라고 흐느낍니다. 자연히 그의 얼굴은 몹시 붉게 상기됐으며 눈꺼풀은 죽음을 앞둔 자처럼 반쯤 감겨 있습니다(16절). 그런데, 아직 욥의 숨은 붙어 있고, 눈과 입은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렇게 또 한 번 되뇝니다.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여전히 욥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욥의 부르짖음을 듣자니, 어떤 면에선 욥의 절개가 놀랍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민주화 시절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무고한 사람들이 극악한 고문을 받다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실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욥은 하나님을 고문관으로 여기고 자신이 고문을 당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도 끝끝내 결백을 주장합니다.
혹 욥이 실제로는 죄인이라면 그는 위선자로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를 포함해 욥기의 독자들은 욥이 의인인 걸 압니다. 그래서 욥의 이런 자세가 짐짓 놀라우면서도, 내게는 이런 지조가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누가 떳떳할 수 있겠냐만, 그 떳떳함을 바라며 추구하는 일은 우리네 신앙에 큰 자산이 되리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도 정진한다면 다음과 같은 욥의 고함 속 절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욥의 희망과 간구(18-19절)
(18-19)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은 마지막 힘을 짜내 자신의 결백 주장을 도울 이로 땅을 호출합니다. 그리고 땅에게 자신이 이제껏 흘린 피를 감추지 말고 그간의 외침들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전하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이런 욥의 요청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 첫 죽음의 무고함을 증언했던 것도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람의 첫 죽음은 무죄한 자의 몫이었습니다. 가인에 의한 아벨의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때 아벨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한 게 바로 ‘땅’이었고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이 일로부터 무고한 사람의 피가 덮이지 않는 한 그 피는 하나님께 소리치며 복수를 요구한다는 사상이 고대사회에 편만했습니다.
욥은 이런 배경을 근거 삼아 땅을 호출했습니다. 그리고, 땅의 증언을 듣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증인이 실로 하늘에 계신다며 위를 향한 시선을 꺼뜨리지 않았습니다. 즉, 욥은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지만, 자신을 치신 하나님만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갖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친구들이 끝까지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업신여길 때,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 눈물 흘리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해 못 할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원인을 돌리면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래 ‘믿음’이란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까지 대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믿는단 말입니까. 그 누가 끝 사람이 되어야 첫째가 된다고 믿는단 말입니까. 그 누가, 나무에 달려 높이 들린 채 죽은 이를 구원자로 믿는단 말입니까. 애초에 믿음이란 것 자체가 이처럼 세상에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가해한 믿음을 욥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 그는 고통 중에 인내했고 끝내 다시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참 의인이라는 영광의 신분을 공인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독자인 우리를 이렇게 초청합니다. 하늘에 계신 욥의 증인이 우리 증인이 되시며 우리 고함을 듣고 계시니, 어떤 고난 중이라도 하나님께 소리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문제가 일으키는 거센 폭풍 중에 있을지라도, 그 한가운데서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고히 우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고, 우릴 건져내실 그분을 향해 창문을 활짝 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혹 교우님 중 이미 수없이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바뀌는 게 없다고, 언제까지 소리쳐야 하냐고 반문하는 분을 위해 한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본문의 욥은 마침내 하늘의 계신 증인이 자신이 피고로 서서 난도질당하는 법정에 찾아와 자신을 위해 증언해주심을 경험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욥의 질문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그가 잃은 자녀들이 살아 돌아온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욥은 긴 시간을 더 살면서도 하나님께 시시때때로 소리치며 답을 구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직접 나타나진 않지만, 욥의 질문이 비로소 사라진 때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언제까지 소리쳐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습니다.
욥이 나이가 차서 죽고 난 뒤 오랜 시간이 흘러 하나님 곁에서 한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그의 증인이 사람이 되시는 걸 말입니다. 자신이 저주했던 태어남을 스스로 선택하시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욥은 계속 봤을 것입니다. 욥보다 더 의로운 그 증인,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기처럼 억울하게 참소당하고 고통받는 것을 말입니다. 가족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당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선 저주를 받습니다. 군대는 그의 뺨을 치며 학대하고, 연합한 사람들이 날카롭게 쏘아보며 조롱하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화살보다 더 두껍고 날카로운 창에 찔리는 걸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증언했던 욥의 온전함을 지키고, 당신 이후 태어날 우리 속죄를 위해선 그 고통을 다 끌어안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원 없이 소리칠 수 있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 막힌 담을 없애려고 그분은 우리 모든 고통을 체휼하실 뿐만 아니라 더 고통받고도 침묵 하셨습니다.
이 모두를 봤을 그때, 비로소 욥의 모든 고함과 질문은 사라지고 고통은 싸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예수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고함을 잠재울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대할 때 이 위대한 이야기를 기억합시다. 그때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본문 속 욥보다 더 근사하게 그 고난을 통과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욥이 바라본 하늘의 증인이 곧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토로했던 욥은 끝내 하나님의 증언을 끌어냈습니다. 다만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던 그의 질문이 사라진 건 그 증인이 사람 되어 오셔서 그의 모두를 체휼하신 걸 봤을 때임을 믿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밝혀주신 우리 마음의 눈도 항상 그리스도 예수께 향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주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를 얻어 문제는 작아지고 고난이 소망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욥이 말을 하거나 침묵한다해도 고통이 경감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다고 믿는 욥의 토로에서 발견하는 우리 지혜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4. 욥처럼 억울하게 고통받는 우리를 위해 증인이 되어주시고 위로해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