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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문화제에 수필, 《아동문학평론》에 동시,
육영수여사상에 시, 이태원문학상에 단편소설로 작품 활동 시작
•단편집 『환상의 창』
•대구평화방송사장상, 대구대교구장상, 사임당문학상,
윤동주별문학상 등 수상
‘여자의 지옥은 늙은 날이다’
장 콕토였던가. 자신 있게 한마디의 혹언을 남긴 그 외국인은 실로 인생의 단면을 적절히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진리 안에 내존하는 예외처럼 그가 말한 여자라는 동류항으로 묶을 수 없는 어떤 이질의 원형을 알리고 싶다. 그 하나 독특한 공간에서 호흡하는 강인한 생명의 호소를 엿듣고만 나는 화신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서서히 침식해 갔던 날들.
1970년 2월 고모와 함께 걸어 본 평행의 기록을 담아 본다.
‘순수의 한계를 어디에 두느냐고?’ 대선배 D의 물음이다. ‘한마디로 그 개념을 정의할 수가 있을까요. 결혼을 하고 한 사람을 위해
전부를 생각하기까지 결코 마음을 담아 이성의 눈을 정시해 본 적이 없어야 한다면 차라리 큰 소리로 웃었을 거예요. 그러나 내 방황의 진짜 이유를 듣고 싶다구요?’
그렇게 근엄한 얼굴로 힐문만 않았더라도 차근차근히 내가 선배에게 취한 냉담과 회피에 대해서 조금은 그럴싸한 변명을 했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네 생애에서 가장 공허한 시간 속엔 반드시 남녀의 사랑이란 게 관여돼 있다던 선배 주장에도 일말의 수긍을 해 드렸지요. 사람에겐 이성과 본능뿐이라던 선배의 궤변에도 상당 부분 공감한 바 있어요. 얼마 후 선배 내면에도 감정이란 게 있을 것 같다기에 진정 다행한 마음으로 박수 보냈어요.
그러더니 확실히 감정이란 있어야 하는 것을 잠시 착각했노라며 내게 손을 내미셨을 때, 사전 같은 무한한 지식을 보유한 선배를 존경하면서도 내가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지극히 에고적인 가치관으로 나를 세뇌시키던 평소 선배의 논리대로 이제 답할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면 나의 이성이 뜨거워진 것이지 결코 달리 감정이란 게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요.
비 온 뒤의 명절을 보낸 이 무렵의 잠자는 듯한 거리와 가을이면 바스락거리는 여운을 즐기며 가로수 잎을 밟던 대학 병원가를 몹시도 나는 좋아했다. 학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임에도 이곳을 돌아 이십 분이나 더 걸리는 등교를 곧잘 해온 것이다. 집에서 나와 작은 골목을 거쳐 이 길로 꺾어드는 마지막 지점에 교회당이 있고 그 반대편에 붉은 빛깔의 돌집이 있었다. 그 집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통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동화스런 분위기가 내 마음에 들었을 따름이고, 그 밖의 아무것도 달리 궁금한 적은 없었다. 내가 어설프게나마 대학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유독 그 집의 돌담 위엔 찔레의 아치가 가득 올려져 있었고 은색의 작은 대문은 나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돌담집의 내부와 그 안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상상해 보는 시간이 S대에 한번 낙방하고 H대에 들어온 내가 황량함을 이기도록 좋은 몫을 해준 것 같다.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던 그 집의 고요함이 묘하게도 내게 엄청 생기를 부어 주고 있었으니까.
“아유, 언니가 이렇게 일찍 웬일이유?”
“애두, 참, 나라고 꼭 늦게 다니란 법이 어딨니!”
반색을 하며 안나는 빗장을 땄다. 해가 중천에 있으니! 그러네. 안나의 말이 무리가 아니다. 결강하는 날 이외라면 해 지기 전에 돌아온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집안에 들어서면서 편지함부터 살피는 오랜 습관을 나는 갖고 있다.
“안나, 토스트 좀 먹을 수 있니?”
“여태 식사 전인가 봐! 언니. 시장해서 어쩌나…….”
동동거리며 주방으로 달려가는 안나 외의 네 식구가 모두 나가 버린 저택? 그 서북향의 묵직한 구조가 내 맘에 늘 이상한 부담을 주었다. 일제 때 고관이 썼다는 엄청난 대형 저택이다. 넓은 정원 속에 둘러싸인 이곳을 할아버지가 불하를 받으셨다고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아직 한 번도 이사란 걸 모르고 살았기에 우리 가족들은 다른 집들이 자주 환경을 바꾸어 옮기는 것을 꽤 부러워하는 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줄곧 대학까지 졸업한 아빠는 민족적인 감정 문제는 별개로 일본식 가옥 자체에 어떤 향수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일 때가 있었다. 안나는 오래 전에 우리와 한가족이 되었다. 붙임성과 유머 감각이 있어 조석의 식사 때마다 식구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어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니다. 우리 식구들의 특징은 일단 자기 방에 들어가면 각자의 세계로 문을 닫는다. 서로 부대끼고 다투고 보듬는 다른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식구에 비해 워낙 규모가 큰 주택을 으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서늘한 집안 분위기 탓에 고모가 서른이 넘도록 노처녀로 있는 사실을 별스레 입에 올리지 않아 어떤 쪽으로는 외려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 중에서 제일 다감하시던 아빠의 과묵한 변화는 아무래도 고모로부터 기인하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고모는 어쩔 생각이우?”
“너, 또 무슨 소릴 할 작정이냐!”
“궁금하잖수, 고모 생각이……. 적령기를 다 보내고 그냥 사는 거며, 현 박사를 그렇게 버려두는 이유 하며…….”
“그만두지 못하겠니!”
병적일 만큼 하얀 얼굴이 파리하게 떨린다. 양면에 천장까지 붙박이로 낸 서가엔 전공의 생물학 서적들로 가득하고 쉽사리 시집 따윈 발견하기 어렵다. 같은 지붕 아래 살아도 내가 이 방에 들어와 본 횟수는 많지 않았다. 장식이라곤 목화를 수놓은 액자와 자개꽃병에 항상 조촐하게 꽃꽂이가 돼 있어 고모는 통 알 수 없는 여자라고 단정해 버릴 때가 더러 있었다. 늘 내가 존경하면서도 낮은 학점을 받았던 수학 여교수와 흡사한 면이 있어 고모 앞에 서면 엷은 위축을 느끼곤 한다.
소설 331
“서린아! 제발 부탁이다. 앞으로도 현 선생 얘길랑은 삼가다오. 네가 그 사람과 나에 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안단 말이냐!”
“……문제는, 고모 자신이 수녀처럼 일생을 보내진 않겠다고 확언했잖수?”
“…….”
“고모가 화를 낸대두, 이 말은 해야겠수, 고모처럼 머리로 사랑하고 관념 안에서 이성을 경험하는 여자는 절대로 원만한 결혼은 어려울 것 같아요.”
“뭐라구!”
“제 말은 아마 옳을 거예요. 아예 혼자 살든지, 무서운 그 자의식을 버려야 할 거라는 것을…….”
고모의 얼굴은 마침내 흙빛이 된 것도 아랑곳 않고 분연히 일어서 내 방으로 건너와 버렸다.
어떤 충동으로 이 저녁에 고모 방을 찾아가 그런 건방진 말을 쏟아내고 흥분했는지 나 스스로도 놀랍고 납득하기 어려웠다. 잠시 이불에 머리를 묻고 있다가 대청으로 나갔다. 난로 위에선 쇳소리를 내며 주전자 물이 끓고 있었다. 마루 안에 가득 찬 화분 중 유독 수선화의 노란 의미, 그 아래 고모의 것으로 보이는 약탕을 봉한 흰 종이가 마구 엉켜서 빙글거린다. 홍차를 넣어둔 채 맑은 물이 차차 붉은색으로 변하는 상태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소파에 등을 눕혔다. 건넌방에선 안나가 열심히 듣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거실에서 종종 불러 주던 연속극의 주제가가 숨을 죽이며 흘러나왔다.
나는 갑자기 고모의 결혼식을 상상했다. 흰 드레스를 입은 고모 옆엔 어떤 이가 어울릴까. 현 박사? 안경을 낀 후리한 멋의 그 사나이? 그보다 고모의 대학 동기라던 예쁜 남자 교수? 또 한 사람, 아 그 얘긴 그만두자. 정말 고모의 애원대로 이상 더 고모에 관한 일은 생각 말기로 하자. 나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수상록, 소설과 번역서적, 음악가들의 전기가 가득한 서장과 아빠 덕분에 각국 마스코트가 무겁도록 진열되어 있다. 풍경 유화와 샤갈의 액자가 걸린 벽도 고모 방과 판이하다. 고모의 무채색이 내게선 원색이고, 자로 잰 것 이상으로 정확한 고모에 비해 나라면 빈 꽃병도 무심하게 버려두는 둔한 신경도 지녔다. 그럼에도 고모가 독일에서 돌아온 그해 고모에게 구혼했던 모 재벌 2세가 한마디에 거절당한 걸 듣고 아빤,
“허허, 기애나 서린이나 다루기 어려운 점은 꼭 같군.”
“아빠, 무슨 뜻이죠?” 반문하던 나에게
“고모보다 더 지독한 고집이 네겐 있어.”
지금껏 숙제의 말을 아빤, 퍽이나 암담한 눈빛으로 던지셨다.
전축에 모차르트를 넣으려다 낮에 온 고모 앞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여태 전하지 않았다니, 좀 날린 듯하면서도 또박스런 글씨는 주소 불명의 발신이었다. 전에 없이 개봉하고 싶은 충동에 대해 나는 양심에 흐린 일을 망설인다기보다, 개봉해야 할 하등의 이유도 권리도 없는 자신을 돌아다봤다. 열 살 이상이나 훨씬 연상인 고모를 훈육하는 입장은 더욱이나 아닌 주제에……. 이처럼 작은 호기심에 나의 지성이 무릎을 꿇는다면 이후 사소한 실수의 실마리로 습관적인 본능의 노예가 돼 버릴지도 모른다. 기우 같은, 암담한
결과를 두려워하면서도 마침내 편지의 겉봉을 뜯고 말았다.
- 전략 -
“기애 씨. 인간이 기계가 아닌 이상 직업의식 안에 자신을 가두고 채찍을 가할 수 만은 없었나이다. 저의 이런 글이 혹시도 기애 씨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킬까……. 몇 날을 불면으로 밝히다 결심했습니다…….”
나는 도둑같이 떨리는 손으로 이 색다른 고백을 읽어 내렸다. 어쩜, 나 자신이 받은 사연 이상으로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 중략 -
“기애 씨. 막연히 구애로 인해 이런 고백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가벼운 마음일 수 있겠나이다.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언만 불가사의한 경우에 처할 땐 항상 신의 안배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묵상하곤 합니다. 하필 그곳에서 기애 씨가 졸도를 하신 것도 그리고 제가 의사라는 직분 탓에 그렇게 고고한 기애 씨의 순결한 가슴을 봐야 했던 그날만 해도 사태는 궤도 밖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저는 자신에의 힐책과, 뉘우침과… 그것만을 반복할 따름입니다. 왜 제가 기애 씨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순간 그렇게 손이 떨리고 시야가 흐렸던가를……. 의사로서, 더구나 환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껴 보긴 지금까지 저의 상식으론 언어도단입니다. 후배지만 다만 존경해 왔을 뿐 기애 씨에게 그처럼 감정의 비약이 올 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진단하던 그 순간이 괴로운 환상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기애 씨! 불치의, 신경과민으로 생각하기엔 제 심장이 너무 뜨겁습니다. 조소하시겠지만, 부디 저에게 그날의 전부를 책임지게 해 주십시오. 기애 씨가 깨어나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한 저를 이해해 주시고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이같이 소심한 남자라니! 더구나 의사로서 여인의 가슴을 한 번 봤다는 이유로 이토록 죄책감에 사로잡힌단 말인가. 그는 자의도 타의도 아니게 숙명처럼 자기 앞에 누웠던 문기애란 여환자를 본 것뿐이었다. 다만 억지로 죄를 찾는다면 고모가 자신이 사모해 온 처녀였다는 점. 만일 고모가 노령의 여인이었대도 이런 상황의 심정 변화가 있었을까. 그의 말대로 의사도 인간인 이상 연모하던 처녀와 노령의 여인을 대할 때 그 감정에 경중이 없었다면 비정상일 것이다. 때문에 더욱 이 사람이 평범한 양심의 소유자는 아닌 게 확실해 보인다. 고모에겐 실로 미안한 일이지만 이 편지는 선뜻 전해 줄 수가 없다. 정기 진단을 받는 주치의 김 박사 이외엔 누구도 고모의 몸에 손을 대본 적이 없지 않은가! 저 매서운 고모가 이 편지를 봤다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할까.
이런 특이한 연문으로 고모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하는 의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고모의 실신! 외부에서 생겨난 이처럼 큰 사실도 서로 모르고 있었으니, 가족이라기엔 좀 심한 모순이 아닐까. 나는 생경한 발신인의 편지 한 통에 너무도 멀리 있던 고모의 세계로 깊숙이 뛰어들고 있는 나 자신에 놀랐다. 몹시도 비열한 방법이었지만.
“언니, 늦대두! 빨리 나와.”
“그래 다 됐어!”
어떻게든 나를 가톨릭에 입교시키려고 안나가 애를 쓰는 것이 딱해 몇 번인가 성당엘 같이 나갔었다.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난 안나는 이번 부활절엔 나를 꼭 영세(세례) 받게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다. 5년 전. 당시 중학생이던 안나는 우리 집으로 입양되었다. 안나의 부모님이셨던 아버지의 직장 수하 직원 내외분이 등반 사고로 갑자기 별세하셨다. 그 후 할머니와 둘이 살던 안나는 할머니의 별세로 혈혈단신이 되었다. 부모님은 우리 가족들의 동의와 안나의 동의를 얻어 양녀로 입양하신 것이다. 안나는 우리 집에 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야간 대학에 진학했다. 성실하고 우수한 성적의 안나는 공부하면서 틈날 때마다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식물원과 집안 가사를 거들었다. 원예학, 유전공학을 동시 전공하는 안나에게 어머니는 장차 식물원을 물려줄 계획을 하시는 듯했다.
막상 신자가 된다 해도 그 교리나 계명 중엔 회의스런 게 많음을, 그로 인해 내 고집스런 주관에 변화가 쉬이 올 리도 만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종교 안에 나의 전부를 귀의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허나 고모처럼 가톨릭 재단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또 그곳에서 교수직에 있으면서도 신神은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독선에는 단연코 내가 고개를 젓는 입장이다. 때로 상당히 확고한 내세관을 피력하는 내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모양인지 안나는 아예 고모는 건너뛰고 나만 열심히 성당으로 이끌었다.
“아하! 서린이가 착실한 신자가 돼 가는데, 역시 천당이 좋은가 보구나!”
“놀리지 마세요. 아빤 뭐, 천당 같은 걸 생각하고 제가 나가는 줄 아세요?”
“아무렴 어떠니? 그게 곧 그 말 아니냐. 좋은 현상이다. 이렇게 흔들리는 세상에 믿음을 갖는다는 일은……!”
“아이, 그러시지 말고 아버지도 같이 나가세요.”
안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아버지에게도 선교 공세를 편다.
“글쎄에, 안나의 열성이 보통 아닌 줄이야, 앞으론 모르겠다만. 내가 벌써 그런 델 찾아가 무릎을 꿇을 만큼 늙진 않았어.”
아빤 어딘가 종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희끗희끗 은발이 보이기 시작하는 아빠에게서 네오로맨티스트의 회한과 연민이 끓어올랐다. 갑자기 내가 너무 자라 버린 생각에 멍해진다.
“순 엉터리예요! 아빤, 종교란 것이 꼭 가난하고, 늙고 병약한 이들만의 귀의처로 착각하시는 거, 그보다 현실의 도피처로 생각하신다는 것, 아이 아빠 너무 구식이에요!”
“허허, 서린아, 사실 지금 그 말도 너를 포장하는 게야. 아니라고 부정한대두 할 수 없지, 네 고집일 따름이니까.”
“전, 모순 같은 거 잘 몰라요. 두고 보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해지는가를요.”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안나는 신나는 얼굴을 했다. 막상 입 밖에 나온 뒤라 나 스스로도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속으로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휴일 아침에 정원을 손질하던 아빠께 꼭 몰래 먹다 들킨 심정이다. 아빤 오늘 같은 농담을 얼마 만에 다시 찾으셨나! 아빠를 보다 갑자기 또 고모 생각으로 비약하는 내 마음이 당혹스럽다. 옆에서 무릎을 꿇은 안나는 눈을 감고 손을 꼭 모아 쥐고 있었다. 무엇을 빌고 있을까. 몇 번이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것이 좀 지루하다.거의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문득 며칠 전에 훔쳐본 고모에게 온 편지 구절과 아빠의 말씀이 겹쳐 떠올랐다.
‘신의 안배, 인간의 자유의지’
‘좋은 현상이다. 이렇게 흔들리는 세상에 믿음을 갖는다는 일은.’
두 사람의 말은 이상한 연관성을 갖고 심오한 느낌으로 부각돼 온다. 동시에 내가 성당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어떤 막연한 가치가 느껴지고 있었다. 정말 그 편지의 주인공이 궁금했다. 외국인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 중에 깡마르고 철인 타입의 우리나라 신부가 강론講論을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교우들의 신앙이 약화되고 수도자의 성소聖召가 부쩍 줄어들고 있으니 신자들의 기도와 협조가 필요하다고 열띤 음성으로 말했는데 마지막 한마디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세 가지 고독은, 버려야 할 고독과 참아야 할 고독, 또 찾아 나서야 할 고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모 같은 노처녀가 느끼는 고독과 수도자의 그것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방금 그 세 가지 고독 중에 각각 어디에 해당할까. 상당히 뜻 깊은 강론으로 인하여 내가 성당에 와 있다는 사실이 예사로 생각되지 않았다.
조용한 집안에도 월요일 아침이면 좀 수선스러움이 감돌더니 오늘은 달랐다. 아빠 한 분만 출근을 하신 덕분에 안나의 이름이 이 방 저 방에서 불리지 않은 것이다. 아빠가 나가시는 중부우체국과 고모의 학교는 같은 방향이다. 고모는 아무리 바빠도 아빠의 차에 편승하는 일 없이 대학의 통근 버스를 이용했다. 나는 고모처럼 철두철미한 사람들과 선을 그으며 살 수는 없음에도 아빤 언젠가 고
모보다 나를 더 다루기 어렵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안나, 고모가 어디 불편하신 거니? 전에 없이 결근을 다 하시게…….”
나와 같이 어머니도 고모라고 불렀다.
“모르겠어요, 저두. 어제부터 식사도 건성으로 드시고 오늘은 그냥 쉬겠다고……. 부르기 전에 들어오지 말라시던걸요.”
“그럼 시중 잘 들어 드려. 일이 있음 전화하고, 나 다녀올게.”
종로에 꽃가게 겸 식물원을 내고 있는 어머니는 진심과 위선을 간파할 수 없을 정도로 고모에겐 극진하다. 아마 이모의 잘못(?)을 대신 속죄(?)라도 하려는 마음이실까.
“서린아, 너도 어정대지 말고 학교엘 가야지.”
“염려 마세요. 강의는 오후니까요.”
현관 쪽으로 어머니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전축에 음악을 넣었다.
‘어느 개인 날 아침 갑자기’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청각 안에 가득히 들어찬다. 특이한 범죄 영화의 주제곡인데도 이상하게 이 곡은 마음에 묘한 평화를 안겨 준다. 나는 기대앉았던 벽을 미끄럼 타서 그대로 누워 버렸다. 약간 현기가 난다. 엄마는 고모의 방은 물론이고, 내 방에도 안까지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결같이 용의주도하고, 손님 같은 식구들이 가끔 부담스럽고, 그들과 너무도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에 잡힐 때가 있다. 왜 좀 무관하지 못할까.
“언니, 전화야!”
누굴까 지금 이 시각에. 갑자기 정면 벽에 걸린 풍경 유화를 내게
소설 339
선물하신 여고 때 미술 담당의 고수영 화백 생각이 났다. 끔찍이도 나를 아껴 주셨건만, 졸업 후 상처하셨을 때 한번 찾아뵙고 여태 이러고 있으니 참 무심한(?) 제자다. 그동안 많이 연로하셨을 거야. 참으로 스승다운 존경으로 내가 모신 분들께 너무 격조했었구나. 그림을 마주 대하기가 죄스럽다.
“서린인데요.”
“아, 반갑군. 잘 있었어?”
“어쩜, 인범 씨가 웬일이시죠? 아침부터 전화를 주시고…….”
“요런 깍쟁이! 소식 한마디 없고.”
“후후, 죄송합니다. 항상 바쁜 일정에 제가 전화 드려도 허탕일 텐데요.”
“변명과 핑계의 선이 애매하군, 오늘은 강의가 없나?”
“오후에 전공이 있습니다.”
“끝나는 시각은?”
“네 시경쯤.”
“그 후의 스케줄은?”
“별로 없지만서두…….”
“없지만서두?”
“왜 말꼬리를 잡으세요?”
“워낙 서린인 나한테 미꾸라지 같아서 말야, 그럼 삼십분 후에 미로에 있겠어.”
극히 일방적인 약속 후에 인범은 전화를 끊었다. 오늘따라 수화기 앞에선 쾌활했었지만 젊은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근엄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동료나 후배들에겐 위압적인 대상이기도 했다. 현재 D일보사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는 수재였고 그를 두고 사람들은 성실한 청년이라고 평했다.
미로는 다실과 카바레를 겸하고 있어 오후 5시 이후면 일절 차 종류는 취급 않는다. 다방마다 대개 특성이 있듯이 이곳은 주로 저널리스트와 가끔씩은 명성 높은 교수님들의 면면도 뵐 수 있었다. 인범과 몇 번 올 때마다 나는 조바심했다. 그분들 나름의 판단으로 첫눈에 인범과의 사이가 쉽게 오해되는 것이 불편해서였다.
미로의 유리문을 민 것은 약속보다 훨씬 지나 있었다. 구태여 시간을 내 달라고 따라나서던 남학생 과우科友를 간신히 돌려보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건물의 지하 계단을 내려섰다. 컴컴한 내부 장식이나 조명 탓으로 인범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어항 앞에서 손을 들며 웃는 사람은 뜻밖에도 현 박사였다. 오늘 강의가 바로 현 박사의 소설론이었는데 설마 그가 강의 후에 곧장 이리로 달려오리라곤 상상 밖이었다.
“야아! 서린이가 웬일이지?”
“선생님도 급히 오신가 본데 기다리시는 분은, 피앙세?”
“내게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고마운 동정인데, 아무튼 내가 저녁이나 살까?”
현 박사는 소금을 문 얼굴로 웃었다. 나와 고모 사이를 알 턱이 없는 30대 후반의 독신. 문학박사 현기성. 늦가을의 멋을 지닌 그의 심연을 많은 층의 여인들이 기웃거리다 갔다. 꼭 한 번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나의 작품을 들고 갔던 날. 전혀 기름기 없이 빗어 넘긴 머리칼에서 이상히도 슬픔이 느껴져 그의 머리를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른 적이 있었다. 숙명적으로 표랑하는 그의 종착역이 고모임을 알았을 때 나는 고모에게 적극 그와의 결혼을 권했었다.
“한 사람의 방황에서 근원과 정착의 어느 쪽이든 하등 나의 책임은 아니야. 남자는 여자의 첫사랑을, 그리고 여자는 남성의 마지막 연애를 원한다지. 내겐 그분이 처음일 수도 또한, 그의 마지막 여인이 될 수도 없음을 잘 안단다.”
현 박사의 유랑벽을 말릴 자신이 없으므로 그의 독신과 자기를 결부시켜선 안 된다던 빙하의 심장. 기이하게도 고모의 그런 피는 나의 혈관도 달리고 있었다.
“다시 뵙겠습니다. 교수님.”
눈은 그동안에 찾아낸 인범의 자리로 돌아서며 가볍게 목례했다.
“늦은 거, 죄송합니다.”
인범은 좀 부신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재떨이엔 네 개째의 필터가 구른다.
“이렇게 바쁘신 숙녀를……. 오히려 미안한데.”
웃으면서 무서운 꾸중을 그는 잘했다.
“방금 그분, 현 박산가?”
“보셨군요.”
“뒤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알아냈지, 요즘도 저분 강의 있어?”
“바로 오늘요.”
“귀한 시간이군! 경청해야지.”
새 담배에 불을 대며 그는 묘한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가스라이터의 불길이 순간 강렬하게 솟구쳤다. 나는 가끔씩 인범 씨가 현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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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 대해 갖는 이유 없는 감정에 혀를 찼다.
“차는 노우 헤브일 테고 맥주 한잔할까? 서린인?”
‘마티니!’ 하려다 말고 그냥 그의 주문에 고개를 끄덕대고 있었다. 오늘 따라 나의 존재를 더욱 착각하는 그가 두려워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상당한 연령차가 있어 많은 조심을 해 온 터이나 아직 그에게 구속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건배! 서린인 맥주의 쓴맛을 조금 알 텐데.”
담배를 비벼 끈 후 인범은 컵에 병을 기울였다. 담배 한 개비가 타는 시간이 꼭 10분.
“서린인, 독립의 의미를 아나?”
“어렵군요.”
“날 골릴 셈인가?”
‘아. 인범 씨. 골리다뇨? 제가 말입니까? 천만에요. 지난날 어린 저를 처음으로 안아 주셨을 때나 지금이나 저는 신선한 그 감동만으로 당신께 있고 싶습니다. 굳이 제게 진한 감정을 원하신다면 저는 당신을 오직 긴 역사의 의리 때문에 만나고 있다고 지금 말해 버리겠습니다. 이런 경우 당신에의 존경과, 사랑은 구별하고 싶군요.’
뜻밖에도 정리된 자신에 놀라며 사실 오늘 이곳에 나온 것도 이 말을 하기 위해서임을 깨단했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결혼만은 서로가 상대적인 절대가 될 때 해야겠죠.”
“물론이지, 때문에 서린이가 나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를 듣고 싶어, 하하.”
차라리 웃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살얼음을 딛는 표정을 누르며 내 입에서 떨어질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가 딱해졌다.
“지나치군요. 남을 그렇게 강제로 속단하시는 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기를 느끼자 나의 오른손은 가만있질 못한다. 더 이상 인범의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서린이, 회피는 죄악이야. 난 분명한 말을 듣고 싶어. 그러나 유행처럼 방황하고 있다면 용서가 잘 안될 것 같아. 진실하게 살고 싶다면 왜 방황해야 하지……?”
‘필요해서 방황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반문하려다 나는 참았다.
“구름같이 서린인 두려운 여자야. 태양을 가려 버리거든.”
빈속에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켠 그의 갈등 가득한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리자 현 박사의 옆자리엔 어떤 남자의 뒷모습이 앉고 있었다. 역시 고모는 아니었구나. 정말 현 박사와 고모는 끝난 것일까.
“현 박사의 독신이 마음 아픈가?”
어느새 인범 씨도 나의 시선을 좇고 있었다.
“인범 씬 앞지르기 전공이세요?”
“성격 탓이겠지.”
“유감스러운 병이에요.”
“유감은 마찬가지야. 내가 조금만 서린일 거칠게 대우할 수 있었더라면, 서린인 아예 도망할 생각을 않았겠지.”
“그런 난폭한 말씀을!”
나는 진심으로 화를 내었다.
“한 심리학자가 발표하기를, 여성은 자기가 처음으로 체온을 느낀 이성을 잊지 못한다더군.”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자꾸만 비꼬인 감정을 표출하는 인범 씨를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남자가 자작自酌할 때의 심정이란, 헛! 자 마셔 봐! 왜 그리 구경만 하나?”
“취하셨나요? 최근에 무슨 일이라도…….”
“기자에겐 날마다의 움직임이 모두 사건인걸!”
분명히 인범 씬 또 상부 압력 때문에 양심에 없는 기사를 쓴 모양이다. 얼마 전, 크게 물의가 된 C기관의 부정 보도가 잠잠해진 걸 보면.
“서린이가 서인범이의 가치를 필요로 할 때까지 난 끈기를 버리지 않겠어. 내가 터득한 상牀의 철학은 위대해.”
“……?”
“네 개의 상다리에 조금의 차이도 없고 방바닥이 완전한 평면은 세상에 없어. 완전이란 게 존재할 수 없으니까.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은 삐걱거리다가 바닥의 굴곡에 와서 얌전히 놓이게 되지. 나의 결혼관도 마찬가지. 두 불완전한 개체가 서로 완벽을 지향하는 과정이라고 말야.”
대화가 끊긴 두 사람 사이에 이태리 가수의 「리베라이」가 파고든다.
“돌아갈까?”
침착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인범 씬 혼잣말처럼 했다. 입춘이 지났건만 밤공기가 찼다. 목을 움츠리고 인범 씨의 뒤를 따르던 나는 왜 이처럼 인간은 서로를 알 수 없어 안간힘을 쓰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범 씨는 네거리 건너 불빛이 휘황한 한식가
로 접어들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회식이 있을 때 몇 번 왔었지. 괜찮은 집이야.”
용설란의 화분이 놓인 이층으로 안내받으면서 인범 씬 뒤늦은 양해를 구했다.
“내가 너무 무례했나 보군, 서린이가 사뭇 얼빠진 표정인데 그래. 때로 남에게 바보스러움도 보여 주는 것이 매력이야.”
너무도 조용한 어조로 바뀌었으므로 미로의 일은 꿈이려니 하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전, 도사리고 있어요. 표범같이.”
“그런 자신自信이야말로 실족의 근원이야. 흔히들 그런 과신 때문에 진창에 뛰어든단 말야. 사람들이란 절대로 서린일 착하게만 지켜주지 않아.”
전혀 취한 기색 없이 내 앞에만 고깃점을 놓아 주는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림을 보고 몇 번이나 나는 자리를 고쳐 앉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간 나면 전화하지, 부디 그 도사림이 풀리지 않기를.”
인범 씬 손을 내밀었다. 연극스런 기분으로 맞잡은 내 손에 따뜻한 감각이 전해 온다. 나를 대문 앞에 내려준 뒤 택시는 점차 멀어져 갔다. 이제 그도 마지막을 선언하고 갔다는 이율배반의 슬픔에 울고 싶은 자신이 자꾸 미워지고 있었다. 누군가 쌍수로 다가오면 무한히 달아나고 보낸 후엔 연민하는 이 야릇한 심상은 어떤 심리일까. 어찌하여 인범을 거부한 걸까. 단 하나의 이유며 나의 휴머니즘. 인범 씨의 아내로는 도저히 나처럼 예민해서는 안 되겠다는 확신과 그의 아내는 좀 더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는! 그의 체취가 떠나지 않은 손으로 버저를 눌렀다.
바로 잠을 청하려다 고모 생각이 났다. 외출 시의 기분을 집안까지 연장하는 일이 없는 내게도 역시 인범 씨의 일은 좀 짙게 남아 있었다. 고모와 담소를 하면 이 두통이 다소 가실지도 모른다. 새삼스럽게도 사랑 따위로 마음을 앓을 수 없다는 아집과 에고를 느낀다.
“고모, 뭘 하우?”
“늦은데 웬일이냐? 들어오너라.”
“고모가 결근하긴 처음이잖수?”
방문을 닫으며 억지로 주워댄 이유가 구차하다.
“앉거라.”
고모는 묵화를 즐기고 있었다. 가보로 내려오던 벼루와 먹이 이 방안에서 더욱 제격을 찾아 고아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고모다운 품격 있는 취미였다. 시간에 공백을 두지 않고 무엇을 하든 자칫하면 동정 사기 쉬운 자신의 입장을 잘도 다듬어 나간다. 방안을 둘러보던 내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야광 묵주와 성聖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못 박혔다. 종잡을 수 없는 의혹이 뇌리를 스쳐갔다. 고모의 방에서 저런 책이 발견되다니!
“서린이가 무슨 좋은 일 있니?”
“아니 고모두, 고모가 시집가기 전에 내게 그런 일이 어딨수?”
거짓말도 아닌데 오른손은 또 가만있질 못한다.
“언제는 나 때문에 못한 일 있었구나!”
그제야 고모는 얼굴을 들었다.
“고모! 오늘 현 박사를 만났어, 그 우울한 분위긴 정말…….”
“동정이냐?”
순간 나는 고모가 동물 해부를 하는 서늘한 눈빛을 상상했다. 미로의 얘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요. 무엇 때문에 그분은 한 여자의 냉담을 그토록 감수하느냐 말예요!”
“또 그 얘기라면 건너가거라.”
나는 인범 씨를 생각하고 실소했다.
자신의 일을 털어 버리고자 타인의 문제에 짐짓 심각하게 뛰어드는 가증스런 친절.
“사람이 어떻게 기분과 감상만으로 살 수 있니? 얄팍한 동정 속에 자기를 투신하고 다음에 올 불행을 합리화하려든다면 배움의 가치란 사멸되는 거야.”
고모의 싸늘한 의지를 존경하다가도 지나친 위장 같아 오히려 혐오스럽기조차 하다.
지금 춘천 이모와 고모는 대학까지 줄곧 동기로서 절친한 사이였다. 행동과 용모까지 비슷해서 사람들은 두 사돈아가씨를 쌍둥이로 착각할 때가 많았다 한다. 비교적 쾌활하던 이모는 사회과를, 고모는 미생물과를 택했고 졸업할 무렵 고모는 독일로 유학할 의향으로 독일어 회화를 배우게 됐다. 아버지의 소개로 모 기관장의 통역이자 S대 출신의 미혼 선생이었으므로 고모는 억지로 이모를 권해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날 동안 그는 고모에게 많은 뜻을 두었지만(이모의 술회) 워낙 냉정한 고모는 책만 대하고 있었다. 그의 빗나간 관심이
이모 쪽에 역현상으로 나타나자 결과는 간단해졌다. 솔직한 성격의 이모는 그의 따뜻함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고모가 실험으로 늦게 돌아온 어느 날 이층 베란다에서 이모가 그에게 안긴 것을 보고 ‘더러워’를 연발하며 달려 내려와 밤새 울었다는 얘기를 후일에 들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마 그 광경이 영 고모를 저토록 남자에 대해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여자로 바꾼 것 같다고들 했다.
고모는 달리 아무와도 얘기를 나누지 않고 침울하게 지내다가 이듬해에 독일로 떠났고 이모는 그와 결혼한 것이다. 고모가 출국하던 날 공항에 나온 두 사람과 끝내 눈을 정시 않았다던 고모. 아무리 자존심이 세다 해도 그처럼 편협한 모습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모부와 어떤 구체적인 언약도 없었지 않은가. 고모의 유학 중에 두 번인가 그 말이 나왔을 때도,
“확실히 동서는 처제가 먼저 흔든 거지 뭐.”
아빤 고모에게 약간 편견을 두며 이모를 놀렸다.
“글쎄, 남이 뭐래도 미선이는 현명하게 행운을 붙들은 거죠.”
아무래도 어머니는 이모를 감싼다. 이론과 실력에서 고모를 추종하기 어렵지만 실제 인생에선 분명히 고모가 패배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귀국했을 때의 고모는 화도 풀어지고 좀 쾌활해진 편이라 이모부와의 합석에서 몇 마디 농담도 나누었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이 정면에서 마주치면 이모부가 먼저 피하는 눈치였다. 2남 1녀를 둔 이모 내외는 굳이 죄의식은 아니나 여태 고모의 독신을 마음 아파했다. 이모부에게 한없는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지만, 고모 성격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한 사람을 쉬이 망각할 수 없으리란 건 주위의 억측일까. 내가 고모에게 감탄하는 것은 일체의 번민을 모두 안으로만 삭여 자신의 낙오?된 비참함을 감추는 것이다. 바로 그 점만으로도 고모가 나의 관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다.
가끔 중매 잘하는 인교동 아주머니가 와서 어디에서 뭣 하는 유명인인데 전처의 자식은 없고 후처라도 그 이상 좋은 자리일 수 없다고 떠들고 간 후면, 고모의 표정은 형언할 수 없도록 일그러짐을 본다. 나는 고모란 혈연을 떠나서 문기애란 노처녀를 임상적으로 관찰하고 있은 듯한 잔인스러움에 후딱 놀라곤 한다. 많은 이들의 진실을 소설이란 명목으로 유린한다고 혹평을 받은 적이 있으나, 내 앞에 나타나는 강한 개성들을 소설 안에서만이라도 붙들어 두고 싶은 욕망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아빠의 암담한 한마디의 의미를 조금씩 알 듯하다.
거리엔 많은 불쌍한 이들로 붐볐다. 꿈을 잃은 아낙, 때묻은 손으로 껌통을 떠맡기는 어린이, 나약한 소녀를 망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치우는 이리떼, 번쩍거리는 보석에 상품이 되는 여인. 쇼팽과 모차르트를 잊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어지러운 세상을 느끼며 몸서리쳐질 때가 있다. 이 같은 황량함이 몰려오면 가장 먼 코스를 도는 좌석버스 구석자리에 나는 가끔 오른다. 결혼을 않고 오직 학문을 위해 젊음을 보낸 고모도, 또 젊은 나이에 학위를 받은 현 박사도, 인생의 전부를 학문에 담은 자신들이 어리석다고 허망하게 웃고 있는데. 궁극에서 가장 우위에 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물섬, 칸트, 베토벤, 크리스트……!
9인 음악제는 성황이었다. 심연에 세찬 바람이 부는 이런 저녁엔 바리톤의 음감이 묻히고 싶도록 좋았다. 깊은 밤, 잠들기 전에 테너나 소프라노의 정열에 감동하던 시간과는 다르다. 카네이션 두 송이를 들고 스페인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게 주려고 했는데 엷은 기대는 무너지고 음악회는 끝났다. 시내 중진 음악가로 구성된 이 발표회는 매년 봄에 있는 것으로 예년까진 ‘대학생을 위한 음악회’란 명칭이었다. 축제 뒤의 이상한 허탈감으로 천천히 입구의 계단을 내려서려는데 눈앞에서 현 박사가 웃고 있었다.
“역시 서린이도 와 주었군.”
내가 완전히 계단을 내려서자 그는 자기 옆의 두 사람을 함께 이끌며 기분 좋은 음성으로 말했다.
“좀 늦었지만, 차 한 잔 들고 갈까.”
현 박사는 앞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스프링코트의 깃을 세우며 나는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일행이 들어간 곳은 가운데 조그만 분수가 돼 있는 지하 다실이었다.
“서린이, 인사드려. 이분이 오늘 절찬을 받은 바리톤 김지명 군.”
아, 그때 미로에서 현 박사와 동석했던 그 사람. 아까부터 짙은 눈썹의 안면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이분은 내과의 권위자이신 안우경 씨.”
나는 인사도 잊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고모의 연서 끝에 밝힌 그의 사인, 뜻밖에도 대면한 편지의 주인공! ‘안우경’ 비 오는 날의 경사? 내 머릿속엔 흔치 않은 그 이름 석 자가 생일보다 확실히 메모돼 있었다.
“문 군은, 소설 전공이며, 과科의 호프지.”
나는 소개 같은 건 건성으로 넘기고 우연의 사태를 생각하느라 본의 아니게 얌전해 있었다.
“우리는 한결같이 결혼 지각생이군.”
현 박사는 큰소리로 웃었다.
“오늘 김 군의 연모, 굉장한 반향이었었지?”
“작사는 바로…….”
“선생님의 시가 아닌가요?”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나는 들고 있던 꽃의 사유를 간단히 설명한 뒤 지명 앞에 내밀었다.
“이건 참 엉뚱한 행운이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런데 현 박사님은 그분이 오시지 않아서…….”
“아, 문 교수 말인가!”
나는 뜨끔했다.
마침 차가 날라졌으므로 우경 씨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일어설 때까지 그의 시선은 시종 찻잔에 머물고 있었다. 우경 씨의 속을 모르는 현 박사와 나와 고모의 관계를 예측도 못하는 세 사람이 우스워져서 속으로 킥킥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지독한 희극의 극본을 쓰고 있구나.
“선생님이 그토록 한 여인을 사랑하신 적도 있었군요.”
내 말에 우경 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당신의 편지를 수신했노라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후후.
“그분은 이런 말을 했지. 설혹 자기가 한 사람을 받아들인 뒤에 온 비애의 대가는 죽음으로밖에 감수할 자신이 없노라고……. 기맥히는 말이야!”
현 박사가 담배를 권하자 지명은 재빨리 불을 그어댔다.
“그런 개인적인 대화를 공개하신다는 건, 그분에 대한 모욕이에요.”
나는 처음으로 깊이 고모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우경 씨의 인상은 인범과 조금 흡사했고, 어딘가 거역할 수 없는 강한 주관이 담겨 있었다. 나의 상상과 거의 일치되는 얼굴이었다. 강인한 지성을 풍기는 이 사람이라면 능히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을 것도 같다.
꽉 메운 좌석에서 쉴 새 없는 끽연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팝송 메들리가 센티멘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밤의 지하 다실. 이 좁은 공간 속에서 저들은 남이 모르는 진실에 번민하면서도 저런 유머로 위장하고 있구나.
“미스 문,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지명이 입을 열었다.
“베토벤과 칸트, 그리고 보물섬과 양귀비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어요?”
세 사람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어째서 종교를 무시하십니까?”
시종 침묵 모드였던 우경 씨가 거들었다. 정말 우경 씨는 독실한 교인일지도 모른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 속의 찬란하고 은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의 슬픔이 지금의 것과도 같음 직하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일행의 호의를 굳이 뿌리치고 나는 또각거리며 그 돌담집을 돌아서 집에 당도했다. 어느 집에선가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끊일 듯이 이어진다. 안나의 신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좀 어지러워져서 담에 기대서 있었다.
식사 때만 겨우 볼 수 있는 고모는 근자에 와서 더욱 초췌한 모습에 수심이 가득했다. 성격이 워낙 그런 터라 누구도 묻진 않고 애를 태웠다.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지 않으리라던 고모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탓인지 눈자위로 고운 잔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그런 시누이의 변화를 보면서 어머니는 올케로서의 어떤 책임보다 인간적인 동정이 앞서는 듯했다. 아직도 어머니에겐 고모의 우울이 이모부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상흔으로 읽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모의 상심이 그런 옛날 때문 같진 않았다. 혹, 안우경 씨의 편지가 중간에 없어진 사실과 나의 수취 소행을 알아버린 것이 아닐까. 그 사건(?) 뒤로 고모가 나를 보던 착잡한 눈빛의 의미가 그것 때문이라면!
자의도 타의도 아닌 비밀(?)을 조카에게 들킨 수치심과 그 후로 몇 번인가 받은 연서 내용을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고모 성격에 죽을 듯한 고통일지도 모른다. 나는 실로 거의 반생을 고결하게 살아온 고모에게 한없이 죄스럽고 미안함이 아릿한 연민의 정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닥터 안의 말대로 그 당시에 고모가 의식을 잃었었다니 더욱 그 진단에 견딜 수 없는 치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고모 같은 사람이 이런 일로 조카인 나와 상의하려고는 아예 생각조차 않을 것이다. 권위와 체면과 자제의 압박 속에 자신을 가두는 그녀로선 혼자 냉가슴에 고추장을 담는 것이다. 그런 고모를 위하는 길은 안우경 씨를 만나서 고모의 마음을 설득시키도록 해야겠다고 용기를 내며 교문을 나서는데 별관 쪽에서 나오던 지명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반가움을 담는 커다랗고 선량한 동공은 변함없다.
“현 박사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저도 약간은 들었지만…….”
“기악과에는 티오가 있긴 하지만……. 당분간 성악과 쪽은 어려울 듯합니다.”
현 박사의 고독이 많이 사치하다면 지명의 선량한 우수는 선천적이랄까. 음악회가 있던 며칠 뒤 그가 말해 주던 자신의 집의 위치가 바로 돌담집에 머물었을 때 나는 울 듯이 소리를 질렀다.
“동화는 사라졌군요!”
“동화의 집이라뇨?”
어처구니없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내면의 소년은 그 집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리고 있었다. 돌담과 찔레의 아치. 바리톤의 음감. 그런 것은 지명이 부모에게 배태되는 순간부터 상속 받은 축복의 유산인지도 모른다. 내 앞에 자주 일어나는 소설적인 기연奇緣들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을까. 역사에 남는 인간은 평범하거나 원만해선 무가치하다는 뜻일까. 인범 씨완 달리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의 지명의 어필이 두려웠다. 불투명하면서도 나의 심연을 덮은 유리에 조금씩 금이 감을 의식하고 나는 바보스런 핑계로 그와 헤어졌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지명도 역시 삼인칭으로 저만치 서 있는 걸 본다. 아마도 내겐 이성理性이 뜨거워지는 기묘한 인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게 확실한 듯하다. 고모의 침체가 도를 더해 가고 도저히 그 원인을 규명할 수도 없게 되자 나는 우경 씨에 대한 기대도 자연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모의 얼굴이며, 식사량이 꼭 생사의 기로에 선 시한부 환자처럼 깨진 모습을, 이젠 대하는 것마저 애틋하고 섬뜩하다. 고모가 가장 꺼리는 것은 자신의 잠든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스스로 독신을 자초했더라도 그 나이에 쓸쓸한 잠자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비참한 동정을 사게 됨을 너무도 잘 아는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회색 우수가 덮인 상태로 몇 달이 흘러가는 동안 집안에서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고모가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고, 오히려 내가 미지수로 남은 사실이다. 고모가 그런 결심을 한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우경 씨의 영향이라고 생각해 봤으나 석연찮았다.
“언니, 고모가 며칠 동안 그 묵주를 들고 울고 있는 걸 봤어.”
“그냥 울고만 계셔?”
“응, 그것을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했어.”
안나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더욱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모만큼 알 수 없는 여성을, 여자인 내 힘으로 그 베일을 벗겨 보자니, 고모의 분신처럼 모든 장소에 침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모와 나 자신을 분간할 수 없는 넌센스를 빚는 중에 마지막 친절로 고모를 위해 안우경 씨에게 전화를 했다. 세례를 받겠다는 고모에게서 많은 가능성을 읽은 덕분이었고, 고모의 예측 불가능한 사고의 향방 때문이기도 했다. 새로이 겨울이 시작될 듯한 추위와 꽃샘바람이 창문을 때리던날. 고모는 해맑으면서도 예의 그 이지理知를 되찾고 작은 음성으로 미소까지 띠며 말을 이어갔다.
“서린아. 진리를 찾으려고 헤맬 땐 무수한 진통이 수반된단다. 그 아픔이 다하기 전에 쓰러지면 산모와 태아는 모두 죽는 법이야. 나는 네가 안 의사의 편지를 뜯은 것쯤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런 것은 먼 항해에서 미풍을 받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덕분에 평소에 고모로서 네게 주지 못했던 교훈을 생생히 체득케 한 것을 참으로 다행하게 생각했단다. 안 선생님은 훌륭하면서도 그런 심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분이었지.”
고모의 말은 아득한 세계에서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신이 내 안에 존재한다고 오만했을 땐 모습을 지닌 뚜렷한 형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는 무형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서른이 넘도록 나의 전부를 내맡길 인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고통을 감내하며 내린 확답은 외람스럽게도 나는 신을 사랑하고 있었단다. 내가 수도자가 돼야만 하는 뚜렷한 이유를 찾고 나니 어느 정도 후련하지만 앞으로 신이 내릴 사명을 감지하면 가슴이 뛴다.”
고모는 일어서서 커튼을 젖히고 창 너머 정원수가 바람에 이리저리 시달리는 것을 뜻 깊게 바라보았다. 고모가 묵주를 들고 울던 장면을 그려보며 나는 속으로 찬탄하고 있었다. 우경 씨가 종교를 제일 우위에 두고 싶다고 하던 말도 오늘을 예견한 것일까.
“서린아, 매사를 조급히 느끼지 말고 침착하게 서둘러라.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속된 관념이나 선입견에 수도자를 인생의 낙오자로 판단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긴 세월을 참아야 할 고독을 딛고 일어서서 이제 새로이 위대한 고독을 찾아 나서려는 고모가 존경스럽다. 고모는 한 단계 더 강력한 원의로 봉쇄수도원인 갈멜을 택한 것이다.
어머니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고모가 수녀원으로 출발하는 아침이다. 집안의 어른들은 고모의 소식을 듣고 대부분 다녀갔고, 그중에도 할머니들은 우시는 분이 많았다. 정말 고모가 시집가듯 술렁대며 가족들이 가벼운 짐을 챙겼다. 안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고모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가시는 길로 곧 편지하세요.”
어머니는 목멘 음성이었다.
“뭐, 빠뜨린 것 없니?”
마침내 아빠도 돌아서서 손수건을 적셨다. 끝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가족들과 작별한 뒤 고모는 집을 나섰다. 결국 평범한 주부가 될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거취를 결정한 고모의 처사에 경탄하면서도 그 하얀 드레스가 검은 수도복으로 바뀌는 상상은 역시 좀 슬픈 것이었다. 급히 내 방으로 달려온 나는 음반을 넣고 볼륨을 거의 최대로 높였다. 온 집안에 그 예릿한 휘파람이 가득히 울렸다.
—어느 개인 날 아침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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