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차
서사, 인물과 사건을 쓰자
1. 임화의 단편서사시
서사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사시는 행위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가 있는 시입니다. 이런 이야기시는 서술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서사가 단편적이거나 사건의 정황과 이야기 전개가 미진하고 인과의 순서나 논리성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야기는 서사가 강화된 서정시라고 보면 됩니다.
서사시는 김소월부터 시작되는 전통적 서정시와 함께 우리 현대시 전통의 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시적 양식입니다. 서정양식에서 이탈하여 서사양식의 미적구조를 수용하거나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양식의 미적구조를 담은 일련의 시들을 말하는데, 이러한 시를 서사 지향성의 시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김동환에서 임화, 이용악, 백석, 신동엽, 신경림 등으로 맥이 이어집니다.
임화(1908~1953)는 시에 이야기를 담는 우리시의 전통을 열었습니다. 그는 서울 중산계급 출신으로 본명은 임인식입니다. 1908년 가회동에서 태어나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1929년 동경에 유학하여 공부하다가 1931년 귀국하였습니다. 1931년 카프(KAPF) 중앙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하였고, 월북하여 1953년 미제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비평가, 시인, 영화배우를 하였으며, 카프와 조선문학가동맹의 실질적인 조직책임자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시문학사에서 김소월과 한용운으로 대표되는 여성적 서정과 김기림과 정지용으로 대표되는 현대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남성적인 목소리로 서사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조류를 개척하였습니다. 김기진은 임화의 시 「우리 오빠와 화로」(1929. 2)를 단편서사시로 명명하고 구성적 특징이 소설적 사건을 전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설적 구성은 이야기 구성을 말하는 것으로 서사적 특성을 지닌 시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¹³⁹⁾
김기진은 임화의 단편서사시를 언급하면서, 첫째 그 소재는 사건적이고 소설적이어야 하며, 둘째 소재 중 시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추려 적당하게 함축해야 하고, 셋째 사건의 내용과 사건을 중심으로 한 분위기는 인상적으로 선명하고 간결하게 만들어야 하며, 넷째 소설적 묘사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행과 행 사이의 정서적 비약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래의 시는 일제 강점하에서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지를 다룬 것으로, 편지글 형식을 빌린 대화체 시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누이동생이며, 누이동생이 편지글을 통해 오빠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입니다. 1929년 문학평단에서는 이런 시 형태를 가리켜 단편서사시로 일컬었으며, 장편서사시와 같이 전개되는 플롯은 없지만 화자의 진술을 통해독자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를 연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 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 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날’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날’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 임화, 「우리 오빠와 화로」 전문
당시 문학이론가였던 김기진은 위 시를 생생한 소설적 사건이 담긴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1연의 1행 첫머리는 시적화자가 누이동생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질화로가 깨어졌다는 것은 남매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행은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이야기하고, 4행은 일제 강점기의 아동노동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연 1행의 ‘화젓가락’은 1연 ‘화로’와 일체감을 상징하며 직접 비유하고 있고, 2행도 마찬가지로 화로와 어울리는 화젓가락을 형제 자매애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3연의 반복되는 “저는요 잘 알았어요”는 감옥에 간 오빠를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궐련을 피우는 모습은 고민하던 오빠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4연은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오빠의 다정한 모습과 오빠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문지 냄새”는 인쇄소에 다니거나, 공장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선전활동을 하다 들어온 것을 암시합니다. “누에똥 냄새”는 화자인 누이동생이 제사공장에 다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요. 마지막 행에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알았어요”는 오빠에 대한 신뢰입니다. 5연은 결단을 고민하고 있는 오빠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버선을 기우는 동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가버렸다는 것은 경찰을 암시합니다.
위 6연은 오빠의 노동운동 때문에 두 동생도 해고가 되어 봉투 붙이는 일로 생계를 연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이동생이 제사공장에 다녔다는 것이 '제사기'로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이동생은 제사공장에서, 남동생인 영남이는 담배공장에서 쫓겨나서 백장에 일 전짜리 봉투를 붙이고 있습니다.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처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7연은 두 동생이 오빠의 정신을 본받아 투쟁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8연에서는 남아 있는 남매의 주변에는 많은 동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이 두 동생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9연은 현재의 여건을 안고 다음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것입니다”라고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0연은 밤새 봉투 2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에 솜옷을 사서 감옥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오빠에게 넣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11연은 많은 누이동생 아우들이 싸움 속에서 보낸다는 말입니다. “세상의”는 가족사가 아닌 사회, 집단의 문제로 사건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노동계급의 삶과 정서를 다룬 위 시는 투쟁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 선동적인 시입니다. 긴 호흡과 자유분방한 감정 표출이 읽기에도 편합니다. 임화가 시도한 이러한 형태는 당시 식민치하에서 문학을 통해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민족 해방의 실천적 투쟁을 선동할 목적으로 쓴 시 양식인 것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투쟁하는 조직노동운동가가 아니라 어린 여성인 누이동생과 아우입니다. 이러한 의도는 대중의 정서를 동화시키는데 유리합니다. 임화의 다른 시 「네거리의 순이」 등 단편서사시들을 찾아 읽어보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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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현대시학회 편, 『한국 서술시의 시학』, 태학사, 1998, 49쪽 참조.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2024. 5. 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