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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숙희의 나의 수필 쓰기
미적효과 이상의 세계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한 작법이라는, 논문 비슷한 것을 쓰기 위해
나는 꽤 오래 고민했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쓰는 수필이란 어떤 규칙적인 법칙이나 테두리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남에게
공개하고 발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쓰는 수필이 아무렇게나 규범 없이 즉흥적으로 써
던지는 무책임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때로는 일주일도, 또 한달도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명작을
쓰는 것도 아닌데 쓴다는 일의 과정은 다른 어떤 장르의 문학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머리 속에 떠올리고, 가슴으로 덮은
다음 적절한 언어를 골라 창조해 내기까지 무한한 고뇌와 망설임과 노력을 기울이듯 수필 쓰는 이들의 과정 또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나의 수필 작법을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몇 마디
부언해야만 할 것 같다.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나는 점점 더, 얼마나 마음 속에 주제를 안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때로는 길을 걸으면서, 또
차를 타고 달리면서, 더욱 선명하게는 새벽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주로 무엇을 어떻게 쓸까 생각한다. 오래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테마가
떠오르면 나는 주로 아침 시간을 택해 써 내려간다. 내 수필의 길이는 대개 200자 원고지 10매에서 15매 내지 20매가 고작이다. 하루에 다
쓰지 못하고 이틀, 사흘 걸릴 때가 있다. 이것은 분망한 내 생활 탓도 있겠지만 대수롭지 않은 원고도 나는 한두 번은 꼭 다시 퇴고하고 고쳐
나가기 때문이다. 한 번 써 놓은 원고를 고친다는 것은 밤새워 지어 놓은 저고리나 두루마기를 뜯어 다시 바느질하는 이상의 고난이 따른다.
그러기에 똑바른 판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이 써진 다음에는 필자에게서 떠나 독자들의 것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한 편에 담긴 사상과 철학과 인생을 보는 눈, 그리고 재치 있는 표현력 등을 엄밀하게 재검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청탁 일자에 몰려 바쁘게 써 보낸 원고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몇 달 후에 누군가 읽었다는 인사를 받을 때는 순간 부끄러워지고
독자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명에 대한 엄숙함과 책임감을 다시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수필 작법에 있어서의 하나의 규범을 들라면 그것은
성실한 사고와 성실한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그 성실의 온상에서 신선하고 맛 좋은 포도주가 익어 나오리라고 믿는다.
오늘날 한국 독서계 인구 중 시나 소설을 전공하는 사람 이외의
독자로서는 수필 독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수필의 대중성을 말해 주는 동시에 그 중요함을 또한 쓰는 이들이 생각해야 되리라고
믿는다. 대중성이 있으니 만큼 수필의 문학성이 약해지기 쉬운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수필 작가들은 노력해 문학성이 높으면서 대중에게 읽혀지는
글을 써야한다는 데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수필이란 제재의 다양성과 형식의
자유로 이루어지는 글인 동시에 작가의 개성이나 사고가 직선적으로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개인 주변의 잡문이나 넋두리로 문학성을 잃기
쉬운 것이다.
몽테뉴도 그의 「수상록」에서 내 자신이 바로 내 책자의 재료이다
라고 말했다. 즉 수필은 인간자조(人間自照)의 가장 순수한 문학 형식이라며, 동시에 문학으로서의 심미감을 잃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들어 문단에 수많은 수필가들이 등단하고 있다. 또 출판
불황에도 불구하고 수필집만은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수필가들은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즉 그 수가 질을 격하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수필 작품의 질을 높여, 현재 독서계에 일고 있는 수필 붐과 동시에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서 확고한 위치를 정립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폴 발레리는 그의 시화(詩話)에서 산문과 시를 보행과 춤으로
비유했다. 나 역시 항상 그런 생각으로 내 시상과 사색을 다듬어 수필이라는 산문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요즈음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 착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안일에서 벗어나 좀더 깊이 생각하고 섬세하게
느끼고 또 철저히 자료를 조사한 다음 완전한 자신을 가지고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임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또 한편, 쓰는 사람은 남보다 많은 것을 느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즉 폭넓은 지식이다. 이것은 독서에서만이 얻어지는 것이다. 많이 읽고, 깊이 사색하고, 넓게 통찰한 다음 성실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전숙희 대표작 (삶의 슬기 외 2편)
삶의 슬기
밤새 훈훈히 김 오른 방문을 열고 청마루로 나서면 코끝이 짜릿하도록
부딪쳐 오는 싸늘한 아침의 감촉. 불기 없는 목욕탕에 받아 놓은 물 위엔 살얼음이 지고 뜰 앞에 서 있는 나무에 매달렸던 마지막 잎마저 떨어져
버리고 가지만이 생명 없는 표본인 양 처량해 보이는 초겨울의 아침, 마치 새치름하게 청초한 여인의 모습 같은, 그러한 초겨울 아침을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부엌에서 보글보글 밥 끓는 소리와 뽀오얗게 서린 김의
훈훈함이 더욱 정다운 아침, 또 어쩌면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난, 그 마음속에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이끼처럼 깔려 있는 초로의 모습, 그러나
어딘지 범치 못할 단정함과 의연한 여인의 얼굴과도 같은 그 모습을 나는 사랑하고 싶다. 쌀 뒤주에는 햇곡이 가득하고 곳간에는 차곡차곡 담은
김장독과 겨우내 방들을 덥혀 줄 연탄이 쌓이고 담가 놓은 포도주는 향기롭게 익어, 어쨌든 한시름을 놓고 이제 휴식의 아침을 맞을 만하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까워 오는 설날의 꿈을 익히고, 젊은이들은 성탄절에 주고받을 선물과 카드로 마음이 설레는 아침, 나는 폭신한 털옷으로 몸을 싸고 싸늘한 고요 속에 그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일만이 즐겁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나뭇가지의 흰 눈송이가 쏟아진다. 마치 어려서 내가 좋아하던 어떤 크리스마스카드의 그림 풍경처럼. 얼마 후, 흰 눈은 걷히고 나뭇가지에는 새파란 움이 트이더니 푸른 나뭇잎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오래잖아 나무에는 눈부신 붉은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만발한다. 태양은 밝고 우주는 온통 밝은 풍경이다.
그러나, 바라다보고 있는 동안 어느샌가 그 꽃들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 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거기 그렇게 서 있지 않은가. 이제 앞으로 열 번을 더 져 나뭇가지에 잎이 피고 또 떨어진다고
하자. 그리고 열 번 다시 그 붉은 꽃이 만발하고 또 흰 눈송이가 덮일 때, 내 머리는 이미 희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리라. 초조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으리라.
나는 어려서 곧잘 책상 앞 벽에다 그 시절의 어린 여학생의 버릇대로
?시간은 황금이다?라고 문구를 써 붙이고 날마다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던 나는 내 시간이 너무나 모자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 자신을 채찍질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도 결국은 나에게 별다른 성과를 주지는 못했다.
즉 지나간 그 많은 시간들도 나에게 기적을 낳아 주진 않았다. 나 자신의 의욕과 협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에게 넉넉히
주어졌던 노다지 황금과도 같은 그 시간에 노다지 덩어리를 마구 함부로 낭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 비록 오늘날 그 시간을 통해
별것이 되지는 못했을망정 나는 쓰고 단 생활을 맛보고 또 배웠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사랑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고 망각의 슬기로움과
평화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은 나를 황금처럼 빛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으나, 그 시간은 나에게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히애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푸른 꿈을 가득 지녔던 20대에 나는 지망했던 문학에서 철학으로
옮기려고 했다. 문학조차 시시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회의에 가득 찼던 20대의 나는 모든 것을 동경하면서 또 동시에 경멸하려 드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30대 40대의 나는 변해 있었다. 정열을 다해 생활을 사랑하는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열심으로 이성을 사랑하고 친구를
따르고, 아이들에게 정을 쏟고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금 때때로 철인이 되려는 나 자신을 보며
혼자 미소 짓는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부귀영화도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도다.? 나는 성경의 이 구절을 즐겨 되씹어 본다.
그러노라면 뭔가 가슴속이 허전해 온다. 인생 전체가 연기처럼 모호한 느낌이다.
그러면 왜 나는, 또 많은 사람들은 그처럼 헛되고 헛된 생을
영위하기 위해 그처럼 악착스럽도록 열심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생각하는 나는 외롭지 않다. 철학 서적을 뒤질 필요는 없다. 인생의 해답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뜰 앞에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김 서린 부엌에도, 골목 밖에서 떠들어 대는 아이들의 음성에도, 내 인생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나는 때때로 실망이란 아픔을 맛보았고 움직이지 않는 차바퀴를 억지로 밟고 나가려는 어리석은 욕심조차 부려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그마한 내 생활의 창을 통해 생명의 존엄과 삶의 보람을 배워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인생과 더불어 밝아 오는 이 초겨울 아침에도 나는 가슴속에 훈훈한 애정을 품어 보는 것이다.
설
설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새 옷을 준비하고 정초 음식
차리기를 서두르셨다. 가으내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매만진 명주(明紬)로 안을 받쳐 아버님의 옷을 지으시고, 색깔 고운 인조견(人造絹)을 떠다가는
우리들의 설빔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옆에서, 마름질하다 남은 헝겊 조각을 얻어 가지는 것이 큰 기쁨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살림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밤늦게까지 가는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새 옷을 지으셨다. 우리는 눈을 비벼 가며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홀로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잠든 아기는 어머니가 꿰매 주신 바지를 입고 산줄기를 타며 고함도
지를 것이다. 우리는 설빔을 입고 널뛰는 꿈도 꾸었다. 설빔이 끝나면 음식으로 접어든다. 역시 즐거운 광경들이었다. 어머니는 미리 장만해 둔
엿기름 가루로 엿을 고고 식혜(食醯)를 만드셨다. 아궁이에서는 통장작불이 활활 타고, 쇠솥에선 커피 색 엿물이 설설 끓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
설이구나 하는 실감(實感)으로 내 마음은 온통 아궁이의 불처럼 행복하게 타올랐다. 오래오래 달여 엿을 식혀서는 강정을 만들었다. 검은콩은 볶고
호콩은 까고 깨도 볶아 놓았다가, 둥글둥글하게 콩강정도 만들고 깨강정도 만들었다. 소쿠리에 강정이 수북이 쌓이면서 굳으면, 어머니는 독 안에다
차곡차곡 담으셨다.
수정과(水正果)를 담그는 일도 쉽진 않다. 우선 감을 깎아 가으내
말려서 곶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알맞게 건조(乾燥)한 곶감은 바알갛게 투명(透明)하기까지도 하고, 혀끝에 녹는 듯한 감칠맛이 있다. 이것을
향기로운 새앙물에 띄우고, 한약방에서 구해 온 계피(桂皮)를 빻아 뿌리는 것이다.
빈대떡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우선 녹두(綠豆)를 맷돌로 타서
물에 불려 거피를 내고 다시 맷돌에 곱게 갈아, 돼지고기와 배추김치도 알맞게 썰어 넣은 다음, 넉넉하게 기름을 두르고 부쳐 내는 것이다. 며칠씩
소쿠리에 담아 놓고 손님 상에 내놓기도 좋거니와, 솥뚜껑에 푸짐히 부쳐 가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것도 별미(別味)였다.
그러나 정초 음식의 주제(主題)는 역시 흰떡이다. 흰쌀을 물에
담갔다가 잘 씻고 일어선 차례로 쪄내고, 앞뜰에 떡판을 놓고는 장정 두어 사람이 철컥철컥 쳤다. 장정들이 떡판을 쳐내면 어머니는 밤을 새워
떡가래를 뽑고, 알맞게 굳으면 이것을 써셨다. 그리고, 세배꾼이 오는 대로 맛있는 떡국을 끓이고, 부침개며 나물이며 강정이며 수정과며 한 상씩
차려 내셨다. 나는 지금도 설날이 되면, 어머니 옆에서 설빔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 초조(焦燥)한 기쁨, 엿을 고고 강정을 만들고 수정과를 담그고
흰떡을 치던 모습, 빈대떡 부치던 냄새, 이런 흐뭇한 기억(記憶)이 되살아나 향수(鄕愁)에 잠긴다. 우리 어머니들은 설빔 하나 만드는 데도,
설상 하나 차리는 데도 이처럼 수많은 절차(節次)를 거치고, 알뜰과 정성과 사랑을 쏟아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접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기성복상(旣成服商)에는 항상, 맞춘
것 이상으로 척척 들어맞는 옷들이 가득 차 있으니, 언제든지 돈만 들고 나가면 당장에 몇 벌이라도 골라 입을 수 있다. 설이 돌아와도 여자가
그의 남편이나 아이들을 위해서 밤새워 옷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식료품상(食料品商)에는 다 만든 강정이 쌓여 있고, 다 갈아 놓은 녹두도
있다. 아니, 빈대떡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흰떡도 치거나 뽑을 필요 없이, 쌀만 일어 가지고 가면 금방 떡가래를 찾아올 수 있다. 세상이
모두 기계화(機械化)되었으니, 필요한 것은 돈과 시간뿐이요, 솜씨나 노력이나 정성이나 사랑이 아니다. 참으로 편리(便利)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편리 속에 짙은 향수가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정작 귀한 것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여성들의 그 정성과 사랑을 우리는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옷 한
가지 짓는 데도, 남편의 밥 한 그릇 마련하는 데도, 조상의 제사상(祭祀床) 하나 차리는 데도, 이웃에 부침개 한 접시 보내는 데도, 우리
여성들은 말할 수 없는 정성과 사랑을 다 바쳤다. 옛날의 우리 의생활(衣生活)과 식생활(食生活)은 여성들의 무한한 노고(勞苦)와 인내(忍耐)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여성들은 오로지 정성과 사랑으로, 노고를 노고로, 인내를 인내로 알지 않았다.
밤새도록 시어머니의 버선볼을 박던 며느리, 손 시린 한겨울에도
찬물을 길어다 흰 빨래를 하고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고,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던 아내와 어머니, 한국 여인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를 누가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다. 마음을 잃어 가고 있으므로 생활도 잃어 간다. 아침이면
뿔뿔이 헤어지고, 저녁에 모여선 빵과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對話) 없는 몇 시간을 지나다간 또 뿔뿔이 헤어져 잠자리에
드는 사람도 많다. 편리하지만 참생활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孤獨)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려서 우리 어머니들에게서 느끼던 그
?어머니?를 오늘의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하지를 못한다. 사서 입히고 사서 먹이는 동안에 우리는 정성과 사랑이 식어 간 것이다. 뼈저린
고생이 없는 대신, 그 뒤에 오는 샘물 같은 기쁨도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고독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편리?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뜨겁게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여성들이 보여 준 그 정성과 사랑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의 마음만은 이어받자는 것이다. 아무리 기계화된 생활이라 할지라도 정성과 사랑은 쏟을 데가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삭막(索漠)해져 가는 우리의 생활을 인간다운 것으로 되돌리며, 현대인의 고독을 치유(治癒)하는 길이리라.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까지도 없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로 하여금, 고독을 모르는 기쁜 생활을, 행복을 누리게 하는 길이라고 믿자. 명절이 돌아오면 나의 고독한 눈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탕자(蕩子)의 변
며칠 전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 이야기를 하던 끝에 우연히 막내 동생
성결이 말했다. 이제 우리 엄마도 내년이 환갑이셔! 했다. 나는 이 말에
소스라치듯 깜짝 놀랐다. 우리 어머니가 벌써 환갑이 되시다니. 나는 이 거짓말
같은 사실을 입으로 중얼거려 봤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벌써 오래 전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 환갑 잔치를 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땐 어린 내 마음에 환갑 되신 할머니가 태고적 사람처럼 무척 늙어 보였다. 그리고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할머닌 어쩌면
환갑이 되도록 그렇게 오래 사셨을까!?하고. 그러던 아득한 길이 내 어머니 당신 앞에 벌써 닥쳐 오다니…….
나는 당신을 내 어머니인 동시에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 칠처럼 곱고 윤나는 머리, 빚어놓은 듯 오뚝한 코와 부드러운 눈매, 희고 맑은 살결, 거기에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살뜰한 고운
마음씨는 어디를 가나 안과 밖이 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표본처럼 흠모를 받으셨다.
당신은 칠남매나 되는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맏딸인 나를 가장
사랑하시었다. 대개 맏자식은 미워하고 막내를 사랑한다는 말이 있지만 당신은 이상하게도 맏딸인 나를 그렇게 몹시 사랑하셨다. 그것은 아마 여러
아이들 중에도 맏딸인 내가 성격상 어떤 이지러진 불행의 온상을 지니고 있다 생각해 당신 앞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마음껏 사랑해 주신 것만 같다.
나는 잔뼈가 굵어지도록 당신이 나타내어 화를 내시거나 큰 소리로
누구를 꾸짖으시는 일을 보지 못했다. 혹 가다 내가 무엇을 잘못 하거나 하지 말라는 일을 할 때는 당신은 입을 꼭 다문 채 가만히 나를
쳐다보신다. 그 쳐다보시는 눈초리는 참말로 어찌 그리도 두렵고 또 슬픈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에 유혹을 받을 때
그 두렵고 또 눈물이 가득 고인 듯 슬픈 눈초리가 번개처럼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당신의 그 눈초리에 부딪칠 때면 나는 꼼짝 못하고 당신의 뜻을
받게 되고야 만다.
나는 당신께서 큰 소리 치시는 것을 보지 못한 것과 같이 또 한
번도 노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당신은 종일 무엇이든 일을 하고 계셨다. 식전에 눈을 떠 보면 당신은 벌써 자리에 안 계시다. 부엌으로 쫓아
나가면 거기엔 언제나 활활 붙은 아궁이 앞에 도마를 똑닥거리시며 우리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고 계셨다. 밤에도 나는 언제나 바느질감을 붙드신 당신
옆에서 잠들곤 했다. 이렇게 늘 가사에 바쁘시면서도 당신은 또 낮이면 틈틈이 성경과 성인전 같은 것을 부지런히 읽으시고 동화책도 읽어 바느질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옛이야기도 도란도란 들려 주셨다.
진실한 성직자의 아내로서 한평생을 지내오신 당신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곤란이 계셨을 것이나 한번도 그러한 불평을 하시기는커녕 인내라면 그 표본이나 되는 듯이 모든 어려움을 소리 없이 잘 참아 오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교회의 모든 회합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즐겁게 접대해 보내셨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빤한 목사의 딸이면서 동무들 사이에선 가장
부잣집 딸로 인정을 받았다. 그건 순전히 당신의 피땀 맺힌 얌전하신 손끝과 노력의 결과로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에 궁색하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나 비단에 색색이로 곱게 물을 들여 정성스럽게 다듬고
매만져 옷을 해 입혀 놓으시곤 맵시가 난다고 다신의 수고도 잊으시고 기뻐하시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며칠 밤을 주무시지 못해가며 해 주시는 옷도
나는 단 며칠이면 휘말아 버리곤 하는 딸이었다. 내가 이화(梨花)기숙사에 있을 땐 당신은 일주일 내내 기다리다 토요일이 되어 내가 집으로 외출만
하면 어디서 굶주리다 온 것처럼 손수 온갖 좋은 음식을 다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러나 그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당신 자신은 며칠을 좋은
음식이라곤 입에 대지도 못하셨을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어머니도 좀 같이 잡수시자는 말이 어색해 혼자만 퍼먹고 기숙사로 와 버리곤 했다. 당신은
또 가끔 내가 기숙사에서 찬 없는 밥을 먹을 것이 애처로워 볶은 고추장, 장조림 같은 것을 해 드시고 아현동 고개 그 먼 산길을 오곤 하셨다.
그러나 당신께서 두고두고 맛있게 먹으라고 며칠을 두고 장만해다 주신 음식도 기숙사 식당에서 한두끼면 다같이 먹어버리곤 했다. 그뿐인가. 나는 또 그러한 당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나이들과 곧잘 어울려 다니는 딸이었다. 내가 결혼으로 당신 곁을 떠나던 날! 당신은 맏딸인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다.
뉘우칠 일을 하지 마라.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늘이나 사람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되라.
바로 지난 가을의 일이다. 안양에서 포도농원을 하시는 당시은 농사철이 끝나자 바로 나를 만나러 대구까지 오셨다. 그때 당신은 커다란 보따리에 고구마 강냉이 포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오셨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오시느라 너무 고생을 해 병환까지 나셨다. 빈 몸도 타기 어렵도록 복잡한 찻간에 보따리를 어떻게 가져 오셨을까 생각하니 나는 화가 치밀어 당신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어머니두, 촌 마누라들처럼 이런 건 왜 가지구 다니세요. 장에만 나가면 포도구, 고구마구, 강냉이구 지천으로 있는데 누가 그런 거 먹겠대요.
그러나 당신은 조용히 대답하셨다. 물론 돈만 들고 나가면 무어든 맘대로 사다 먹을 수도 있을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내 손으로 피땀
흘려 지어 먹는 것도 별미라는 것을 너에게 맛보이기 위해 가져온 것이니 그러지 말고 하나 먹어 봐라. 내 고생한 건 다 지나 갔으니
괜찮다.
나는 할 수 없이 당신이 집어 주시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강냉이 한
이삭을 받아 들었으나 가슴이 복받쳐와 먹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가실 때
거기는 병아리를 살 수가 없으니 여기서 금방 깨운 병아리와 또 앞 내(川)가 좋으니 오리 새끼를 몇 십 마리 사가지고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펄쩍 뛰고 말렸다. 사람도 가기 어려운데 그걸 어떻게 가지고 가시느냐고 야단을 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정거장에 나가면서 커다란 상자
속에 털이 보구루루한 병아리들이 소복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고생만 하고 가다가 다 죽어버린다고 그렇게 말렸으나 당신은
기어코 그것을 가지고 가셨다.
얼마 후 나는 당신을 뵈오려 서울까지 갔다가 안양을 통과한 채
서울서 차를 부탁해 놓았다. 그러나 서울 와서 실컷 놀다 차를 타고 당신을 휘입 뵙고 온다는 일이 어쩐지 온당치 않은 생각이 들어 나는 당신도
늘 걷는다는 그 길을 걸어 나섰다. 서울서 안양까지 버스를 타고 안양서도 시오리를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식전에 서울을 떠나 저녁 때야 그 험한
남태령 고개를 넘고 안양 산길을 걸으며 그래도 나는 당신이 걷던 그 길이기에 피로한 줄도 모르고 자꾸 걸었다. 낯선 산도 나무도 당신의 모습을
기억할 것만 같아 무척 정다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산 속에서 외로이 사시는 당신을 생각하고 자꾸 가슴이 아팠다. 이런 머나먼 길을 당신도
걸으시거늘 나는 다시는 차를 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집에 닿자 당신은 내가 걸어온 것을 깜짝 놀라시면
애처롭게 생각하시었다.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왔니. 차가 없으면 그냥 대구로
가지. 안 보면 어때서 이렇게 먼 델.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당신에게 다정한
대답을 해 봤다. 어머니가 걸으시는 길을 제가 왜 못
걸어요.
나는 오랜만에 와 보는 당신의 농토를 휘이 한바퀴 돌아보았다. 만여
평이나 되는 넓은 땅은 그냥 구경만 하기에도 한참 걸렸다. 날이 추워오니
포도는 벌써 덩굴을 땅에 묻었다. 농사철이 지나 다 거둬들였다는 땅엔 푸른 김장거리와 붉은 고추들이 매달려 있고 넓은 밭에는 벌써 밀과 보리씨가
뿌려져 있었다. 배나무 복숭아나무는 열매 없이 서 있고 밭 언저리로 수십 주(株)의 커다란 밤나무가 꿋꿋하게 서 있었다. 집 앞엔 이른 봄 제일
먼저 손가락처럼 굵고 붉은 딸기가 열린다는 조그만 밭이 있었다. 작년 가을에 포도 팔아 사놓으셨다는 송아지는 벌써 중소가 되어 그 넓은 벌판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낯선 듯이 나를 쳐다본다.
돼지우리에선 새까맣게 기름이 흐르는 돼지가 꿀꿀거리며 뜨물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영양 좋은 돼지보다 그 울이 더욱 볼만했다. 하얗고 반듯반듯한 돌만 골라 높이 쌓고 위엔 새 짚으로 지붕을 이었다. 보통 돼지우리처럼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안이 몹시 깨끗하다. 이건 흡사 사람이 살고 있는 돌집 같은 풍경이다. 이 돌집은 아버님께서 교회 일을 보시는 여가에 앞 내에서 하나씩 골라다 쌓으신 것인데 매일 쉬지 않고 한 것도 석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내가 놀란 것은 가다가 죽어버리고 고생만 하신다고 한사코 말리던 그 병아리와 오리새끼들이 커서 이젠 큰 닭과 큰 오리가 되어 떼를 지어 햇빛에서 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것을 가져 오시느라 무척 고생은 하시었으나 삼십 마리 중 열 마리는 실패하고 이십 마리가 고이 자라나 오리는 벌써 주먹 같은 알을 낳아 주고 닭도 얼마 후에는 알을 낳아주리라 하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게 사는 것이로군. 이게 즉 생활이로군.
그날 밤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노란 차기장에 햇양대와 햇밤을 두어 오곡밥을 짓고 닭을 잡고 새로 털어 말린 참깨를 볶아 갖은 신선한 야채로 성찬을 준비해 주셨다. 이 한 상을 차리기 위해 돈과 바구니를 들고 나가 몇 시간만에 차려진 것이 아니라 콩을 심고 타작해 메주를 쑤어 담은 간장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땀과 눈물이 맺혀진 것이었다. 당신은 또 포도즙을 주셨다. 추수를 마치고 난 당신의 집엔 과연 오곡백과 없는 것이 없었다. 당신은 이것들을 무역이나 장사를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땀과 노력과 인내와 성실로써 얻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집에 있는 것은 또한 오곡과 백과만은 아니었다. 평화와 안정과 사랑,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집엔 가득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이 평화로운 조그만 낙원이었다. 그 옛날 우리 죄 많은 조상들이 쫓겨난 그 영토를 당신이 다시 창조하신 것만 같았다.
나는 어려서 사랑하는 당신이 남과 같이 물질적으로 풍성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 아팠다. 그래서 내가 커지면 우리 어머닐 호강을 시켜 드려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해마다 4월 4일, 당신
생신이 가까워 오면 나는 언제나 새로운 계획을 가져본다. 이번 생신 땐 우리 어머니가 깜짝 놀라시게 제일 좋은 옷을 한 벌 해다 드려야지.
그리고 또 어머님 말씀대로 이번 1년은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봐야지. 그러나 난 정작 그 4월 4일이 되면 당신에게 좋은 옷을 해다 드리기는커녕
그 날조차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 딸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이 딸에게 야속하다거나 섭섭하다는 말씀은커녕 내색조차 한 일이 없었다. 이렇게
맘속으로만 계획도 하고 효성도 다 한 채 어려서 맘 먹었던 대로 호강도 못 시켜드리고 옷 한 벌 못해 드린 채 당신에겐 벌써 환갑이
닥쳐오다니…….
당신이 걸어오신 육십 평생의 발자국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때
거기에는 진정 가시밭 투성이었거늘 이제 당신의 성실과 인내로써 쌓아 올린 뚜렷한 답을 나는 보았다. 온 세상이 가마솥에 물 끓듯 설렁거려도
당신만은 흔들리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의 분에 맞는 사명만을 완수해 가는 그 매몰찬 인생관 그것은
수양이라기보다 거의 천부의 성품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인색할 수 있는 당신이 이 딸에게는 어찌도 그리 관대할 수 있을까.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내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또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 실망을 하지 않는 당신.
숙희야! 너는 꼭 좋은 사람이 될 줄 믿는다.
당신의 이런 신념과 희망은 나에게 오히려 무거운 부채를 짊어지워 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종일을 불러 봐도 그리운 이름. 세상엔 제각기 수많은
어머니가 있으되 나에겐 다시없을 단 하나의 어머니.
어버이의 품을 떠나 헛되이 헤매던 탕자(蕩子)가 다시금 그 따뜻한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오듯 나는 지금 내 어머니 당신의 품을 새삼스러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과 한을 삼키고 슬픔과 괴로움도 침묵 속에 묻어버린 채 오로지 신념과 인내와 극기로써 가난도 외로움도 이겨내신 당신을 나는 이제야 밝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침묵의 채찍 속에 조건 없는 사랑 속에 뒤늦게 돌아온 이 어리석은 탕자는 모성의 위대함에, 한 인간의 집념의 승리에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숙인다.
탕자의 변 창작노트
수필은 산책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 글이야말로 내 마음의 행로를 따라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다.
시작과 끝, 그리고 내용마저도 기획한 바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보고 느끼고 감동한 바를 그저 담담히 써 내려간 내 마음의 수상(隨想)이라고나 할까.
나는 사람에게 반하기를 잘한다. 열 권의 책을 읽는 깨달음이나 기쁨도 크지만 한 사람에게서 얻고 배우는 감격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다.
내 어머니야말로 내가 반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여성이시다. 그는 외면적으로도 단정한 미인이었고, 내면적으로는 더할 수 없이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여성이었다.
그의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와 남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의 정신은 뛰어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태어났고 그의 품에서 자랐다. 내가 비록 결혼을 해 집을 떠난 다음에도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솜씨는 늘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 언제나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한 내 어머니도 어느새 나이든 여인이 되어 환갑을 맞이하시다니, 정말 내 어머니만은 영원히 젊은 여인, 손과 발이 닳도록 우리를 위해 일하며 섬기는 여인으로만 믿고 있었다.
그러한 내 어머니의 회갑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생의 허무함을 나에게 다시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발자취가 갑자기 떠올랐다. 고난 중에서도 병아리를 길러 큰 닭에서 아침이면 알을 낳게 하는 생명에의 사랑, 포도나무를 심어 거두고 온갖 야채를 손수 가꾸고 거두어 우리들에게 푸른 생명을 먹여 주시던 사랑의 손, 그의 생명 애호와 자연의 사랑 - 흙에서의 정직한 생산, 입은 언제나 침묵하고 땀 흘리는 정성과 사랑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르치심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부끄러움과 회한의 충격 속에 ?당신 앞에 나는 탕자로소이다. 그리고 늦게나마 당신의 탕자가 돌아왔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이 글은 나의 진실, 어리석은 현대인, 나의 참회,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