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우리나라에선 동방박사라 부르지만, 독일에서는 세 명의 왕이라 부른다. 그들은 아마 이란 땅이나 인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이 페르시아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의 후손들일지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이 중국까지 왔고, 일본에서도 그들의 유적이 발견될 정도니, 인도나 페르시아 정도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갔을 것이고, 거기서 그들은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웠을 것이다. 유럽에선 그 세 왕의 이름들도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발타자르라 알고 있다. 베들레헴의 아기탄생교회에는 그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것을 기념하여 그들의 그림을 벽에 그려 놓았다. 나중에 아랍세계가 이스라엘을 점령하면서 모든 교회를 다 부수었는데, 베들레헴의 그 교회만은 부수지 않았다. 그 벽에 자기들의 전통의상을 입은 조상이 동방박사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방박사가 귀한 것은 여러가지다. 첫째 먼 곳에서 이방인이면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요, 둘째는 지성인이고 부자이고 지위가 높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사모했다는 점이다. 요즈음에 보면 중고등학교 선생만 되어도 얼마나 교만한 지 모른다. 고작 대학교 졸업한 것밖에 없는데, 뭘 그리 많이 안다고 그리 뽐내는 지, 하나님과 천하 앞에서 겸손한 경우를 별로 보지 못 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 아닌가? 하나님도 모르면서, 뭘 그리 자랑을 하는가? 세상을 비웃고, 학생들에게 좌익사상이나 불어넣는 전교조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생들이 그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대학의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뭘 안다고 온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듯이 학생들을 선동하고, 어쭙잖은 지식으로 인생을 농단하는가? 진정한 지성인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회과학의 글줄 좀 읽었다고 앞서 나가는 것처럼 깝죽대다가 죽은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는가? 이문열의 변경을 읽어보라! 서울대 농대의 학장을 지내던 지식인이 붉은 사상에 물들어 깝죽대다가 몰락해간 인물, 이문열의 아버지 이야기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1920-30년대엔 우리나라 문학이 온통 좌파였다. 그때의 문학을 가지고 프로문학이라 한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말이다. 그러다 그들이 무엇을 남겼던가? 자기들만 망한 게 아니라, 민족 전체에 불행을 가져 온 것 아닌가?
모든 지식은 위험하다. 그것은 다 바벨탑을 쌓는 일이다. 지식이 바벨탑이 안 되려면 십자가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정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푹 담그지 않은 지식은 그것이 유익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위험하다. 칼 막스의 이론은 인민을 위한다는 휴머니즘을 표방하고 있다.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사이비,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에서 각각 이천만 이상이 죽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수십만이 죽었다. 지금도 막시즘은 사회주의라는 포장, 진보세력이라는 포장을 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보수주의 집단과 정부 때문이라 공격한다. 동방박사들은 그러지 않았다. 대중에 영합하고 선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계시를 찾았고, 세계의 왕을 찾아와 경배했다. 이것이 그들의 위대성이다. 학문을 하되 학문에 빠지지 않았고, 학문 너머에 있는 계시를 찾았다. 진정한 지성인은 이성과 지식 너머를 볼 줄 알아야 하고 그 참 지식에 굴복하고 충성해야 한다.
위험한 지성인은 성경에도 나온다.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인데, 다윗은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과 같이 여겼다 한다. 그런데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였다. 이히도벨은 자기의 손녀를 부당하게 취한 다윗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래서 그는 압살롬의 난에 가담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와 맨 먼저 다윗의 후궁 열 명을 강간하게 한다. 다윗 너도 한 번 당해 봐라는 식이었다. 그러고 난 후에 아히도벨은 자기에게 군사 만 이천 명만 주면 이 밤에 다른 사람은 놔두고 오직 다윗의 목만 잘라오겠다고 한다. 그리고 압살롬이 그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자,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자살한다. 그 밤을 놓치면 다윗을 이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손주사위의 원수를 갚고, 권력자의 횡포를 응징하려는 정의감에서 압살롬의 편에 섰다가 여의치 않자 자살하였다. 전형적인 정의파 지식인이었다.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사랑도 은총도 용서도 없었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는데 가룟 유다였다. 가룟이란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로마에 대항해서 무력으로 봉기를 하자는 사람이었고, 가나안인 시몬도 같은 부류였다. 유다는 예수님의 평화주의를 깨기 위하여 예수님을 로마에 넘겼는데, 예수님이 그대로 정죄되는 것을 보고 후회하였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어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다. 유다는 지성인은 이니었지만, 자신의 머리로 예수님조차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 두뇌를 믿는 자였다. 그러나 그의 두뇌는 사랑도 은총도 용서도 몰랐으므로 괴물과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머리는 잘못 쓰면 안 된다. 손이나 발을 잘못 쓴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장 7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한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식은 쌓이면 쌓일수록 폭탄처럼 해롭다. 세상의 선생들은 부디 제자 길러내기를 두려워하길 바란다. 독사의 새끼들을 길러내면 하나님 앞에서 뭐라 할 것인가?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지식인들이 겸손히 아버지의 뜻을 받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기도합니다. 아멘! (201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