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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 못골기술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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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자료실 스크랩 회재 이언적의 생애와 학문, 정치생활
도깨비(천지인) 추천 0 조회 39 14.10.20 13: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옥산서원

옥산서원.jpg



옥산서원2.jpg

 

출생과 유년기

회재 이언적은 1491년(성종 22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 양좌촌(良佐村)에 있는 외할아버지 손소의 서재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훈련원참군 이수회(李壽會)의 손자로, 아버지는 생원 증 의정부좌찬성 이번(李蕃)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처음 이름은 적(迪)이고 자(字)는 복고(復古)이며 호(號)는 회재(晦齋)였다. 원래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훗날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이라 하였다. 그는 주자를 일생의 사표로 삼아, 아호를 회재라 하였는데, 이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회재라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 이수회는 훈련원참군을 역임하였으나, 아버지 이번은 생원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敦)과 망재 손숙돈(忘齋 孫叔暾)은 경주 지역의 저명한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손중돈은 판서를 지낸 퇴임 재상이기도 했다.

1500년(연산군 6) 2월 10세 때 아버지 이번을 여의고 흥해군 도음산(興海郡 禱陰山)에 장사 지내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暾)의 손에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경주의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므로 경제적으로는 유복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수학과 청년기

. 일찍이 외삼촌인 손중돈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외삼촌 손중돈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종직의 학문은 이색, 정몽주, 길재의 학통이었다. 외삼촌이자 스승인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의 학문을 사사하게 된다. 이언적은 김종직 학파의 학통을 사사했지만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안에는 반대하였다. 오히려 조광조 등의 개혁이 실패할 것이라 예상하고 조광조 일파의 천거나 정책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하였다.

1508년(중종 3)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박씨와 결혼하였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이통(李通)의 아들이자 5촌 조카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기녀에게서 낳은 서자와, 양주석씨로 김포군만호 석귀동의 서녀에게서 낳은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후일 사람들은 이응인을 본가로 돌려보내고 서자인 이전인을 적자로 올릴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고, 가산과 학문은 이응인에게 전수하였다.

1513년(중종 7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1517년 27세 때에 선배 학자 조한보(曺漢輔) 등을 만나 여러 차례에 걸쳐 논쟁한 무극(無極)· 태극설(太極說)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으로 유명하였다.

무극 태극 논쟁 무극태극론, 주리론

1517년(중종 12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3])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기 논쟁에서의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조광조 등이 그를 요직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독서에 치중하였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후일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호를 회재(晦齋)라 하여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의 견해나 사서육경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적 능력은 중종의 귀에도 들어가 중종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된다.

학문 연구, 관료 생활

1517년(중종 12) 7월 부정자를 거쳐 10월 정자가 되었다.1518년(중종 13)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 4편을 쓰다. 이후 성균관전적이 되고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그 뒤 조광조, 김식 등이 등용되자 사헌부지평이 되고 이후 이조정랑,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1518년 12월 할아버지 이수회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하였다. 그러나 1519년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다수가 희생되었으므로 그는 여러 번 사양하거나 외직을 자청하였다.

1521년(중종 16) 4월 3년상을 마쳤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경주에 내려가 삼성암(三聖庵)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해 8월 중종이 그를 홍문관박사 겸 경연사경(弘文館博士兼經筵司經),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중종이 거듭 불러서 상경하다. 이때 왕명으로 이름을 언적(彦迪)으로 개명하였다. 1522년 2월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고, 1524년(중종 19)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그해 인동현감에 임명된다. 1524년 6월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왔다.

인종의 사부가 되다

1526년 7월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외직을 자청하여 외직인 밀양부사로 나갔다. 1527년(중종 22) 7월 중앙으로 복귀, 세자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이 되어 인종을 가르쳤고, 그해 8월 사헌부 장령을 겸하였다. 이후 계속 세자시강원에서 왕세자를 가르치며 겸임으로 1528년(중종 23) 2월에는 봉상시 첨정, 내자시부정에 임명되었다. 1528년(중종 23) 6월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8월 경상도암행어사로 나갔다가 3개월만에 돌아왔다. 그는 모친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했고, 1528년(중종 23) 11월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었다. 밀양부사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백성들은 그가 이임해갈 때 가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인동현감과 밀양부사로 있을 때 그는 근무시간 후 퇴청 이후에는 서실을 열고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는 그의 사조 김종직의 퇴청 후 서실을 열고 문인을 가르치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중종 25)에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학문 연구 낙향과 학문 연구

1530년(중종 25) 11월 사간원 사간이 되다. 1531년 사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김안로와 갈등, 김안로의 아들이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하여 외척으로 실권을 잡으면서 그의 사주를 받은 심언광(沈彦光) 등의 공격을 받아 삭출되어 쫓겨났다.

1531년(중종 26) 1월 김안로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성균관사예로 좌천되었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파직만 당하였다.

이후 한양을 떠나 고향인 경주에 낙향하여 자옥산(紫玉山)에 올라 1532년 자옥산에 서실인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하였다. 그는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 나온 독락 장에서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서재를 독락당이라 하였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는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신조로 삼아 학문에 전념하였다.

낙향과 학문 연구

자옥산의 독락당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그는 엄격한 주자의 해석과 주해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이언적은 독락당에 있을 무렵 주자가 역점을 두었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경일장과 전십장(經一章 ?十章)'으로 주석을 붙였던 내용에 대신해서,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례를 바꾸어 '경일장 전구장 (經一章 ?九章)' 으로 다시 고쳐 썼다.

이때 비판을 우려하는 시각에 대해 그는 "비록 주자가 다시 일어나더라도 나의 해석을 따를 것이다" 라고 말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언적은 주자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의 학문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그 견해를 그대로 본받고 무조건 무오의 진리로 따르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자의 한 마디의 말과 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던 조선 중기, 후기 성리학자들의 학문태도에 비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였다.

또한 그는 맹자의 진심탐구를 탐독했는데, 맹자의 진심탐구 상에는 "막히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열리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窮則獨善其身. 通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이후 5년간 좌절하지 않고 산과 물을 벗삼아 학문을 하고 제자 양성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1537년(중종 32) 장예원첨정(掌樂院僉正),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고 그해 홍문관 교리ㆍ응교가 되었다.

복귀와 시폐 상소

1537년(중종 32)에 김안로가 사사되고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그해 11월 요직에 복귀하였으며, 바로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전임되었다가, 홍문관교리, 응교 등을 역임했다. 이때에 조광조의 사면 복권을 건의하였고, 사림파 인사들의 등용을 건의하였다.

1538년(중종 33) 2월 의정부검상이 된 뒤 그해 3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면서, 특별 가자되어 의정부좌사인(左舍人)이 되고 얼마 후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었다. 그 뒤 그해 5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외직을 자청하여 그해 10월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부임하였다. 전주부윤 재직 중 경내(境內)를 평안케 하였으며, 부임 초에 조정에 수천언(數千言)의 글인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국가대본(國家大本)과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전주부윤 재직 당시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의 내용에 감격한 왕의 찬탄을 받고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뒤이어 자헌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자의 사부

1539년(중종 34) 12월 병조참판이 되고 겸 세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왕세자를 가르쳤다. 1540년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그해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541년(중종 36) 3월 세자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다. 그해 4월 홍문관 부제학을 겸했다가 9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나 다시 1541년(중종 36) 10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1542년(중종 37) 1월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4월 지중추부사가 되고, 1542년 이조판서, 예조, 형조의 판서에 임명되었다. 1542년 8월, 사헌부 대사헌, 9월,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그해 11월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1월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그해 7월 외직을 자청하여 세자좌부빈객 등을 그만두고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정치 활동

사림파의 정치 이론 확립당시사림파에 속한 주자학자로 당시는 대지주였던 훈구세력과 중소지주 출신의 독서인이었던 사림이 대항하던 시기였는데, 그는 사림의 입장에서 중세적 이념체계인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여 봉건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완성을 꾀하는 한편 훈구세력을 배척하기 위한 주자학적 명분론을 철학적으로 강화하였다.

그는 이와 기를 논하고 이는 인간의 이성과 덕성을 말하고, 기는 인간의 행동과 희노애락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당연히 이와 덕으로 희노애락의 감정을 통제하고 부단히 내면의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배 학자인 조한보(曺漢輔)와 주고 받은 서신을 통한 철학적 토론에서 주리적(主理的)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간 내면을 해석하고, 봉건도덕의 절대성ㆍ선천성을 우주론적 차원까지 높이는 관념론 체계[4]를 수립하였다.

지방관 생활과 정치 활동

1542년(중종 37년) 그는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하거나 지방관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로 나갔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에 복귀했으나 외직을 자청하여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경상도관찰사 재직 시 이황, 이해, 조식 등 영남 선비들을 초빙하였으나 이때 조식만이 그의 부름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1544년(인종 1년) 봄, 송인수(宋麟壽)와 백양사(白場寺)에서 만났다. 그해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종 즉위 후, 그는 다시 조광조의 사면 복권을 청하였는데 인종이 동의하여 성사시켰다. 그는 서경덕, 조식 등의 학문적 명성을 전해듣고 이들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병으로 관직을 물러나려 했지만 인종은 세자시절 사부인 이언적을 지극히 신뢰하였고, 다시 한성부우윤으로 불러들인 뒤 지중추부사로 임명하였다. 1545년(인종 2년)에 1월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으로 특진하고, 의정부 우찬성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1545년 여름, 병이 나아지자 비로소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며 올바른 인재를 널리 등용할 것과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여 군덕을 펼칠 것을 진언하였다.

그는 다시 송도 화담의 서경덕을 찾아가 협력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사양하였다. 오히려 서경덕은 그를 보고 인종이 덕망높은 성군의 재질을 지녔지만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면서 크게 통곡하였다 한다.

혼란 수습과 공신 책록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자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정국 수습에 필요하다는 신왕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의정부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의 한사람이 되어 국사를 수습하고 정무를 관장했고, 그해 8월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그는〈정부서계 10조 政府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후 원상으로 국사를 수습하는 한편 수렴(垂簾)의 의론을 정하였으며,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등의 공로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녹공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작되었다.

한편 그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사림파와 달리 명종이 아직 미성년이라는 점과 현명한 신하들이 올바르게 보필하면 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을 비난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 뒤 명종 집권 초반 윤원형(尹元衡), 이기(李?) 일파가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생애 후반 을사사화 전후

그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파를 축출하려 하자 때 추관(推官)이 되어 사림파 및 윤임 일파를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재판 당시 사림파들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윤원형과 이기 등이 이를 문제삼아 그도 관직에서 곧 물러났다.

한때 그는 이기를 구원하였는데, 김종직의 문인이자 생육신 성담수의 외조카인 이기는 장인 김진이 탐관오리라 하여 청요직에 앉지 못했으나, 그가 적극 추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 이기는 윤임, 유관, 유인숙 일파를 적극 공격하였으나 그를 비난하고 죄주는 것만큼은 회피하거나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가 판의금부사로 있으면서 을사사화 관련자들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여 후대의 사림파 중 그를 비난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 당시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를 비판하던 이이는 이기의 재종손이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12월 병으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을사사화의 추관으로 있었던 것에 반발하고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1546년(명종 1) 7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유배와 저술 활동

을사사화 당시 사림파 인사들의 처벌, 공초에 소극적이었던 일로 윤원형 일파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또한 윤임(尹任) 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윤원형, 이기 일파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 뒤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돼서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귀양갔다. 유배 때에도 학문 연구와 유배지에서도 문하생들을 길러 냈고,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저서로는 회재집(晦齋集),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속혹문(續或問), 《구인록(求仁錄)》(1550),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구경연의(九經衍義) 등이 있다. 그는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생활에 좌절하지 않고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럿 남겼다.

후에 이황은 그를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와 함께 동방 4현(東方四賢)으로 추모하였다. 이황은 그를 도통의 정통으로 평가하였고 생애 후반과 만년에는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저서와 저술들을 정리,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이언적의 철학사상은 정통 주자학의 이론을 받아들였는데 태극론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 주자학자였다. 그러나 대학장구 등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개정으로, 후대에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 이언적의 문인들은 후일 이황, 조식, 서경덕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였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의 제자들과 계승자들은 남인의 당원이 되었으며, 일부는 북인으로도 건너갔다.

1548년(명종 3) 6월 배소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다.

최후유배지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많은 저술과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앞장섰으며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처첩 등이 혹 굶주릴 때가 있어도 조상에게 제사 올리는 예는 정성과 공경를 다하였다. 중용구경연의를 집필하던 중 1553년(명종 8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강계군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3세였다.

정실 부인에게서 자녀가 없고, 첩에게서 아들 이전인을 보았다. 주자가례를 직접 실천한 그는 서자 대신 5촌 조카 이응인을 양자로 들였고 가족들에게도 이를 따르게 하였다. 그는 유언을 통해 가산과 제사를 양자인 이응인에게 물려주고 이응인에게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저서로 《대학장구보유》, 《속혹문》, 《군인록》 등이 있다. 시신은 근처에 매장되었다가 1554년(명종 9) 11월 경상북도 흥해군(興海郡) 도음산(禱陰山) 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사망 직후

1556년(명종 12) 8월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진수팔규를 올리고, 이어 복작(復爵)되었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인정하던 훈구파 세력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강계군까지 찾아가서 문상하였고, 서자 이전인이 진수팔규와 함께 이언적이 배소에서 쓴 책을 바치자 이를 탐독하였다. 사후 그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되었고, 1556년에는 명종이 그의 복직과 작위를 복작시킬 때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556년(명종 21) 10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그의 행장(行狀)을 짓다. 이황은 말년에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자료와 저술을 정리, 간행하였다. 1567년 11월 왕이 유문을 수습하도록 명했고, 내탕금이 하사되어 국비로 그의 문집과 저서들이 간행되었다.

사후묘소는 경상북도 영일군 연일읍 달전리(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번지)에 안장되었으며, 묘소 근처에는 1586년(선조 10년) 손엽이 쓴 신도비가 있다. 이언적의 신도비는 2006년 1월 2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2호로 지정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그의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져 1568년(선조 1) 2월 증직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선조 즉위 초 도덕박문왈문 주의행덕왈원(道德博聞曰文 主義行德曰元)이라 하여 문원(文元)의 시호를 받았으며, 1573년 경주 자옥산에 건립된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했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퇴계 이황은 그를 현인이라 불렀다. 이황은 이언적의 학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이언적은 김종직의 적통으로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이언적에 연결시켰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으로 학문적 연원을 삼기도 했다.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지정되어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의 묘소에도 배향되었다.

그 뒤 영남학통의 매개자이자 김종직과 이황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추대되었으나, 북인과 남인이 몰락하면서 그에 대한 조명과 관심도가 사라졌다. 대한민국시대에 와서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고, 경주의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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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옥연정사 안마당에 수백 년 됨직한 향나무가 목백일홍의 화사한 자태와 함께 여름의 한철을 한껏 즐기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와 지붕 용마루의 조화가 그야말로 그림이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신도비 [文元公 晦齋 李彦迪 神道碑]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조선시대 비석이다.
비문의 글씨는 손엽(孫曄)이 썼다. 신도비 인근에 이언적의 신위를 모신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2호 달전재사(達田齋舍)가 자리 잡고 있다.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1577년에 건립된 또 다른 이언적신도비가 있는데 건립 연대나 이언적의 역사적 위상 등을 고려하여 두 신도비를 모두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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