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명상(話頭冥想)
▶ (공부 중에 한 수련생이 묻기를) 선생님, 화두는 어떤 화두부터 들어야 합니까?
혜봉 : 특별히 어떤 화두부터 들어야한다는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 화두에는 수많은 화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가 제일 수승하다고 들었습니다.
혜봉 : 화두는 무문 선사의 48칙, 벽암 스님의 100칙 등을 위시해서 많게는 1,700공안〔화두는 흔히 공안(公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도 부른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분별망상이 끊어지고 오직 자성에 대한 의심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자신의 본성을 깨칠 수 있다면 화두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안 자체를 놓고 어느 화두는 수승(殊勝)하고 어느 화두는 하열(下劣)하다 하는 것은 다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 만공 스님께서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歸: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로 깨달은 후에 다시 무(無)자 화두로 크게 깨달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혜봉 :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공 스님께서 그렇게 공부하셨다고 해서 ‘무’자 화두가 ‘만법귀일’ 화두보다 높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라는 영운(靈雲) 선사의 화두를 참구하다가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코구멍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홀연히 깨친 경허 스님의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가 ‘무’자 화두보다 수승하다 해야 합니다.
▶ 그러면 어찌하여 그런 일이 생기는지요.
혜봉 : 그것은 각자의 공부 인연이 그러해서 생기는 것이지 화두 자체에는 높낮이가 본래 없습니다.
▶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십시오.
혜봉 : 어떤 스님께서 운문 스님 문하에서 선 수행을 하면서 기회가 생기면 스님에게 불법이 무엇인지 부처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때마다 스님께서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피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밥을 먹고 계실 때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면 스님께서는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서 나가시고, 쉬면서 차를 마실 때 물으면 차 마시다 일어서서 나가시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물어도 대답도 않고 일어나서 나가시고, 마당 쓸다가도 묻기만 하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리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님께서 피하지 않는 상황에서 물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묻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서 나가시거나 피해버리시니 도대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스님께서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누고 있을 때 물으면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스님께서 화장실에 가서 막 똥을 누는 찰나에 냅다 물었습니다. ‘스님 부처가 뭡니까?’ 운문 스님께서는 그때 어떻게 하신 줄 아세요. 똥을 닦지 않고 일어났겠습니까? (대중들 웃음)
▶ 아닙니다.
혜봉 : 그 때 스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고 하면 앞에 놓여 있는 마른 똥 막대기를 턱 하고 내밀었습니다.(죽비를 들어 대중들에게 내밀어 보인다) 이 때 부처가 뭔지 알고 싶어서 간절했던 그 수행자는 즉각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운문 스님의 간시궐(乾屎 ) 화두입니다. 좀더 보충해서 말씀드리면 중국의 옛날 화장실에는 종이 대신 나무막대기를 잘 다듬어 놓아두었다가 똥을 닦았던 모양입니다. 즉 똥을 닦은 후에는 물에 씻어서 다른 사람이 쓸 수 있게 놓아두었다가 다시 쓰곤 했던 막대기가 간시궐입니다.
옛날 우리 농촌에는 휴지 대신 마른 짚을 가지고 똥을 닦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 마른 짚을 잘 말아서 닦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운문 스님께서는 제자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에 앞에 있는 마른 똥 막대기를 이렇게 턱 내밀었고(죽비를 들어서 내 보이면서) 제자는 이 때 크게 깨쳤습니다. 제자는 그 동안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앉아 있는 가운데 부처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 때마다 운문 스님께서 일어나서 나가셨던 것은 대답이 싫어서 피한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스님께서는 제자의 물음에 부처의 진면목을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스승의 뜻을 깨닫고 나서야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운문 스님은 마른 똥 막대기를 내밀어서 제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고 제자는 스승이 내민 마른 똥 막대기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른 똥 막대기를 보고서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으며 스님은 왜 마른 똥 막대기를 내밀었을까요.
깨달은 바가 있거나 느낀 바가 있는 분들이 있으면 일러 보세요.
▶ 마른 똥 막대기가 부처입니다. (대중들 웃음)
혜봉 : 마른 똥 막대기가 어찌하여 부처입니까?
▶ 운문 스님께서 마른 똥 막대기를 보여 주지 않습니까?
혜봉 : 운문 스님께서 ‘마른 똥 막대기가 부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까?
▶ 아닙니다.
혜봉 : 마른 똥 막대기가 스스로 부처라 한 적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혜봉 : 그 때 깨달은 스님이 마른 똥 막대기가 부처라 하셨습니까?
▶ 아닙니다.
혜봉 : 그러면 뭐가 부처입니까?
▶ … (침묵)
혜봉 : 언제인가 누구라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학자 한 분도 똑 같이 운문 스님의 예를 들어 ‘마른 똥 막대기가 부처다.’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부처는 특별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며 차별해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도 틀린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 하셨습니다. 즉 ‘형태나 눈에 보이는 현상을 부처로 보거나 소리나 말을 듣고 부처를 구한다면 삿된 도를 따라가는 것이지 부처를 볼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마른 똥 막대기가 부처다 하면 진주를 똥 속에 처넣는 격입니다.
▶ 무슨 말씀이신지….
혜봉 : 진주를 똥통 속에 처 넣어 버리면 진주가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
▶ 보이지 않습니다.
혜봉 : 이와 같이 마른 똥 막대기를 부처라고 생각하면 진불(眞佛)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이 고기 덩어리(몸을 가리키며)를 부처로 알거나 법당에 있는 등신불을 진짜 부처로 알면 참된 부처는 영영 알기 어려워집니다.
▶ 그러면 마른 똥 막대기나 등신불이 부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혜봉 : 운문 스님께서 마른 똥 막대기는 부처가 아니다 하셨습니까?
▶ 아닙니다.
혜봉 : 마른 똥 막대기가 ‘나는 부처가 아니다’ 하고 말했습니까?
▶ 아닙니다.
혜봉 : 그러면 뭐가 부처입니까?
▶ 모르겠습니다.
혜봉 : 그 모르는 자리에서 참구하고 더 나아가셔야 합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혜봉 : 눈에 보이는 일체 현상이나 귀에 들리는 소리를 부처라 해도 안 되지만 형상과 소리를 등지고서 부처를 구한다 해도 이는 또한 불가합니다. 그러니 ‘마른 똥 막대기가 부처다’라는 생각도 내려놓고 ‘마른 똥 막대기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생각도 내려놓고 ‘스님은 어찌하여 마른 똥 막대기를 내밀었는가’ 하고 참구해 가세요. 아니면 ‘스님은 어찌하여 벌떡 일어나서 나가셨는가’ 하고 참구하셔도 좋습니다.
부지런히 참구하셔서 일체 망념이 끊어지고 의심에 사무쳐서 각자 자신의 본래 면목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