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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宗敎)란 무엇인가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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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2(2011)년 7월 1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양해사항; 고어 아래 ㅏ 가 다운되지 않는 점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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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박이문의< 종교란 무엇인가? 一潮閣>를 요약 정리한 자료로, 종교는 어떤 것이며 그 기능은 무엇인가의 물음에 대한 개략적인 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속을 어떤 이는 종교 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비 종교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도교도 종교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상 또는 철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종교'라는 정의를 내리기 전에 우선 어떤 종교가 종교적인 현상이 있는가? 없는가(비 종교 현상)를 파악하여 그 대상 자체를 결정해야 하는데 합의를 갖기가 매우 힘들고 '종교'라는 말을 정확한 어떤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합의가 된 종교라 생각되는 5 대 종교라 할 수 있는 흰두교, 불교, 기독교, 회교, 유태교 등을 전통적인 종교라고 볼 때, 이들은 두 가지 측면의 요소를 내용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식적 내용과 실천적 내용이 그것이다. 인식적 내용으로서의 종교는 사물 현상 특히 궁극적. 초월적 사물 현상에 대한 진리의 주장이며, 실천적 내용으로서의 종교는 삶의 근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처방이다.
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는 도덕률이나 요가와 같은 정신 수도와 다르고 그런 행위 이상의 것이며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는 과학이나 형이상학과도 다르며 그러한 주장 이상의 구체적 삶의 형성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인식적 측면에서 과학이나 형이상학과 유사하고, 실천적 측면에서 도덕적 실행과 비슷하다. 그리고 5 대 종교는 다 같이 삶과 죽음을 포함한 궁극적 존재에 대한 진리를 주장하며 동시에 그 진리에 비추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 규범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노장 사상이나 공자 사상도 종교에 속해야 하며 플라톤의 철학, 스피노자의 철학, 헤겔의 철학 등 수많은 철학들도 종교라 불러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왜냐 하면 그러한 철학들도 다 같이 궁극적 존재에 대한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반드시 사물 현상에 대한 이론도 아니며, 실재의 문제와는 직접 관계도 없이 개념을 정리하는 작업이라는 주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예로 들은 철 학들을 종교라고 부를 사람은 없으며, 도교나 유교를 종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기준의 혼란으로 인하여, 무속을 어떤 이는 종교 현상으로 보기도 하고 비 종교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도교도 종교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상 또는 철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종교가 인식과 실천의 이중의 체계라고 간단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수많은 철학들이나 도교와 유교가 기독교, 회교, 불교와 같은 전형적 종교와 어딘가 좀 다르다는 것을 막연하나마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종교적 인식이 어떤 종류의 존재,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한 것이며 종교적 실천이 어떤 성질에 대한 실천인가를 밝혀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그런 특성은 우선 종교적 인식은 타계라는 말로 적절히 표현 될 수 있는 세계 혹은 존재 현상에 대한 인식이며 종교적 실천은 그러한 타계와의 관계에서만 이해 될 수 있는 의식적 의미를 띠고 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종교는
첫째, 초자연적 타계와 그곳에서의 인격적 어떤 존재 혹은 존재들에 대한 믿음. 즉 인식이며
둘째, 그러한 존재들의 힘을 빌려 이상적인 새로운 삶에 대한 소원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혹은 절차로서의 의식, 의례행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에의 믿음이며 신에 의한 구복의 추구 행위'이다. 5대 종교와 미신은, 5대 종교가 이론화, 체계화, 체제화 되고 보편화 되어 세력을 갖게 되고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점 밖에는 찾을 수가 없다.
누구나 보다 잘 살려고 애쓴다. 보다 잘 살기 위해서 보다 많은 사물 현상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과학적 지식, 철학적 앎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삶에 있어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앞에서 궁극적 삶의 의미를 찾고 궁극적 앎을 찾는다. 궁극적 의미는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의 의미를 볼 수밖에 없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으로 초월적 즉 일상 경험으로나 과학, 철학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가 필요하고 모든 종교는 한결 같이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되고자 하며 동시에 삶의 절대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과 답을 제시하는 것이, 삶에 대한 종교의 기능이다. 라고 박이문은 그의 저서인 “종교란 무엇인가?” 에서 말하고 있다.
종합적 진술의 가장 간편하면서 명료한 표현은, 독일 태생의 개신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이다.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고 하였다. 문화는 삶의 종합적 실체이고 종교는 문화현상의 실체이므로 종교를 문화로 집약되는 삶의 모든 현상들을 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 틸리히의 말은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진술이다. 라고 말한 종교의 의미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로 지향해야 할 종교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종교학자들 중에는 종교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고 종교라고 불리어지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종교 사회학자들은 종교를 "정의"하기보다는 종교의 기능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박영식; 종교 간의 공존과 상생을 위한 기독신앙의 정립. 에서 / 2005.12.20. 종교신학 자유게시판.
일부 인류학자들은 종교에 대한 기능주의적 정의를 선호하여 종교가 무엇을 하느냐라는 견지에서 정의를 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종교적 믿음과 종교적 행위의 사회학적 기능에 대한 뒤르켐(Durkheim, Emile)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종교학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종교적 신앙이란,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참다운 신앙이 된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적, 또는 서구적인 사고에서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신념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종교적인 신앙이라 할 수 없지만, 동양적 사고와 천도교의 종교 사상에서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기독적인 것, 또는 서구문명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 또는 비서구문명적인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고,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도 차이가 있다. 이는 각각의 문명의 시작과 그 문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선택된 지배적인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고 사물과 인간을 판별하는 논리와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필자의 글인 ‘동학사상 전개의 제 문제’ 중에서 종교와 관련된 부분과 서양과 동양의 사상적 기초의 차이점에 관련된 부분(PP. 23-29.)의 요약입니다.
‘외래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의 공통된 점은, 지금 현재에 나타난 현상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고, 당면한 문제들을 시급히 해결하기 위하여,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해결을 피하고 선진국에서 발생한 유사한 문제들의 해결방법을 수용하여 임시방편적인 해결방식에 너무 익숙해져가고 있다. 본래 서양과 동양은 근원적으로 서로 다른 사상에서 출발하고 오랫동안 서로 다른 가치와 사고방식에서 긴 역사가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같거나 유사하더라도 문제의 출발이 다른 것을, 드러난 현상만을 치유함으로써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하기 쉬운 일이 될 수 있다.
‘서양은 이 우주가 어떤 원소로 이루어 졌는가? 가 문제이지만 동양은 삼라만상의 만유가 어떤 유기적 관계를 같고 상생 상극하여 조화와 부조화를 이루어 영원히 지속되고 있는가? 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그러므로 서양은 자연은 개발과 정복의 대상이지만 동양은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하며 존재할 수 있는가? 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그러므로 서구사상의 중심이 된 성서적 사고의 핵심은 신과 인간과 자연이란 수직적 관계로 파악하고 모든 사고의 기준이 되고 해결의 키가 된다. 그러나 동양사상은 동양사상형성의 기초가 된 노장과 유교의 사상적 중심은, 하늘인 천과 인간과 자연은 평등적 관계이고 상호 포함하고 생생하는 유기체로 보고 하늘과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생할 수 있는가? 가 사상의 핵심이고 문제해결의 가치기준이 된다. 이런 동양의 사고와 문제해결방식은 당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먼 미래에 인간과 자연의 생존을 위협할지 모르는 모든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인 해결방식이 된다. 이러한 서양과 동양의 사상적 기초와 성장과정이 다르므로 서양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자연은 신의 피조물로 보고,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 자연을 파악하고 통제하여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의 삶에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약화되거나 속박되고 인간답기 위한 활동에 제약을 줌으로써 인간이 주체적으로 활동하며 살아갈 수 없는 반 인간주의가 형성되고 있는 반면에, 동양은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문명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도록 자각케 하여 삶의 주체가 되게 하는 인간주의 사상을 형성했다.
서양과 다른 사상적 기초위에서 출발한 동양사상의 하나인 수운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전개된다면 어떤 방향이 가장 바람직할 것인가가 매우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천도로서의 도(道), 동학으로서의 학(學)으로 평가받고 있는 수운과 해월의 동학이, 1905년 의암에 의해 천도교란 종교로 전개되었을 때 교단과 의암을 중심으로 한 최고의 교역자들이 동학을 어떤 종교라고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다음 두 개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1907년에 간행된 <대종정의> 첫 머리에 있는 종교의 발전이란 글과 그 무렵의 글로 추정되는 <천도교와 신종교>에서 그 당시의 천도교의 종교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견해와 입장을 현재의 위기에 놓여있는 천도교에서 수용하려면, 많은 것을 고려해야하고 미래에 대한 지향점을 설정할 때 유의해야할 것이다.
大宗正義(대종정의)에서 설명하고 있는 宗敎의 發展편에서는
宗敎(敎) 天의 大精神이니 人이 此精神範圍內에 生成 者ㅣ니라. 人은 大朴中出來 者라. 其思想力(思想)이 能히 宗敎界에 交通기 不可思議로다. 其思想이 宗敎界에 徘徊다가 各히 思想의 耿光으로 天地內無情物을 邀다가 敎門準的地에 位니 日月水火木石이 其大槪라. 此에 衆心歸着點을 作야 仍히 小部分(小分)一團을 成니 是 多神時代의 最古(最高)面目이니라.
종교란 한울의 대 정신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대 정신의 생멸법칙의 범위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이다. 사람은 대 정신의 근원적인 이치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 생각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쉽게 종교계에 통하기는 불가사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생각이 종교계에 머뭇거리다가 각기 생각의 반짝이는 빛으로 천지 속에 무정물을 만나 교문의 표준이 되는 곳에 위치하니 해와 달, 물과 불, 나무와 돌이 종교의 대상이 된 것이,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된다. 여기에 세상 사람들이 돌아갈 마음의 귀착점을 만들어, 마침내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그마한 무리의 집단을 이루었다. 이것이 다신 시대의 가장 오래된 모습이다.
二十世紀(後天大氣轉輪)以來로 思想이 一層進明야 一神崇拜 敎門을 立니 天이 其抽象的大範圍라. 是로 由야 舊時斑斑的小部分이 總히 其下風에 趨(趣)니라. 水雲大神師(大神師) 天道(吾)敎元祖라. 其思想이 博으로 從야 約히 倫理的要點에 臻(至니) 其要旨 人乃天이라. 人乃天으로 敎의 客體 成며 人乃天으로 認 心이 其主體의 位를 占야 自心自拜 敎體로 天의 眞素的極岸에 立니 此 人界上初發明(人界初創) 大宗正義라 謂이 足도다.
20세기에 이르러 종교사상이 한층 진보되고 투명해져서, 일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교문을 열어 한울은 그 추상적인 큰 범위가 됐다. 일신을 믿는 종교들이 교문을 열게 되자, 구시대의 다양한 생각의 작은 부분들이 다 그 아래로 들어가는 추세가 됐다.
수운 대신사는 우리 교의 원조이다. 수운의 사상이 넓은 데로부터 간략하게 윤리적 요점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요지는 인내천이다. 인내천으로 천도교의 객체를 이루고, 인내천을 인정하는 마음이 그 사람의 주체가 되여 자신의 마음을 자기가 우러러 받드는 생각과 마음을 천도교의 주체로 삼아, 한울의 가장 진실되고 근원적인 바탕에서 정립됐다. 이것은 인간계에서 최초로 발명된 대 종교의 정의라 말하는 것은 충분하고 만족할만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중략-
天道敎와 新宗敎(천도교와 신종교)에서는
天道敎는 天道敎人의 私有物이 아니요 世界人類의 公有物이니라. 天道敎는 門戶的宗敎가 아니요 開放的宗敎니라. 天道敎는 階級的宗敎가 아니요 平等的宗敎이며, 區域的宗敎가 아니요 世界的宗敎이며, 偏頗的宗敎가 아니요 廣博的宗敎이며, 人爲的宗敎가 아니요 天然的宗敎인 今不聞古不聞 今不比古不比之新宗敎也니라. ㅡ포덕 133년 개정판 705-706페이지.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고 세계 인류의 공유물이다. 천도교는 문호를 닫고 교인들에게만 개방되는 폐쇄적인 종교가 아니고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개방적 종교이다. 천도교는 특정 계층만이 신앙하는 계급적 종교가 아니고 누구나 신앙할 수 있는 평등적 종교이며, 일개 지역이나 국가에 국한되는 지역적 종교가 아니고 세계 어느 곳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신앙할 수 있는 세계적 종교이다, 자기들만의 종교교리가 진리라고 주장하고 타교의 종교교리를 부정하는 편파적 종교가 아니고 교리의 범위가 넓고 교리의 의미가 깊은 종교이며, 인간이 그들만의 어떤 목적을 인위적으로 얻으려는 종교가 아니고 우주의 자연적 이법과 질서를 근원으로 하는 천연적 종교로서, 오늘날에도 들어본 적이 없고 먼 옛날에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현대에도 비교할 종교가 없고 고대에도 비교할 종교가 없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종교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세계화가 크게 강조되고 있는 21세기 초인 지금, 동학이 민족종교란 폐쇄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진정한 세계화란 민족의 사상적 기초 위에서 보다 더 민족적이어야 하고, 민족종교로서의 틀을 완벽하게 하고 우수한 민족이 창조한 민족종교란 자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글과 깊은 관련이 되어 있는 글이 “東學思想 展開의 諸 問題” 중에서 ‘敎理史를 위한 試論’ 1, 2.’의 PP.47-48.과 PP.56-70. 제 1장 인간과 종교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천도교를 유사종교라든가 비종교단체로서의 사상적 집단으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는 올바른 견해가 못된다. 천도교를 비종교적 사회운동집단으로 인정하려는 의도의 뒤편에는 천도교가 갖는 특수성이 숨었다고 본다. 천도교는 내적으로는 그 교리가 다른 종교와 같이 내세적이 아니고 현세적인 이상을 파지하였고 외적으로는 그 활동의 역사가 순수한 도덕적 분야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변혁을 주도해온 역사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서 종교란 인간생활의 전체를 의미하고 있지 않고 다만 인간생활의 일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분리하여 지극히 부분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곧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들을 현실적이라 보고 종교는 이것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태도를 정교분리(政敎分離 또는 敎政分離)라 한다. 그러나 종교가 현실을 떠나 있어야 한다는 사고는 본래 잘못된 것으로 종교의 원시형태를 살펴볼 때 더욱 명확하여진다고 하겠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시대의 생명력을 갖고 일어서는 진정한 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인내천사상을 뒷받침해 주어, 종교적 정의의 새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특히 천도교는 오늘날에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거나 직면하게 될 비인간 적인 수많은 요소들을 내재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사명감을 이해할 때 신앙심이 일어나게 되고 새로운 역사 창조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으며 반드시 되어야 한다.
천도교가 가지고 있는 인간과 한울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서 새로운 종교로 역사앞에 등장하게 된 것은 교조인 수운의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운은 역사의 흐름을 매우 남다른 시각으로 이해했으며 교도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수용해야 할 주체들을 위하여 한글체인 용담유사와 한문체인 동경대전을 지어 수운 자신의 사상을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신중하게 공을 들였다. 그러나 시대가 급변하게 변해가고 있던 조섲 조 말의 역사적 현실은 수운의 도와 학으로 대처하기에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극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3세 교조인 의암은 새로운 길의 모색으로 천도교라는 종교로 새롭게 역사 앞에 등장하려 했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신앙의 의미나 역할을 제시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천도교가 새로이 창도된 1905년부터 역사의 흐름을 뒤집어 논 기미독립운동을 거쳐 의암이 순교하고 신구파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한 1925년 까지 약 20년간은 새로운 종교로서의 주체의 장을 확립하는 데 전력을 다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전기는 지강 양한묵이, 후기는 야뢰 이돈화라는 걸출한 두 인물이 등장하여, 경전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해석하고 새로운 종교로서의 면모와 이론의 체계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줌으로써 천도교가 근세사의 주역을 담당할 수 있는 종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수많은 일들의 빛나는 발자국을 역사에 남겼다.
천도교단이 1920년 전 후로부터 6.25사변이 일어났던 1950년 까지 약 30년간을 실질적으로 천도교의 교리해석을 주도하여 300여 만 교도들의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독보적인 존재였던 이돈화는, 천도교가 보는 종교란 어떤 것인가를 그의 저서 신인철학과 인내천요의에서 정의를 내려 보여주고 있다. 이돈화의 종교에 대한 시각은, 과거의 종교는 현대인들의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맞이해야 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는 현실 신비주의로서 신비를 현실에 돌려야 하며,
둘째는 인간에게 무궁의 관념이 없어지지 않는 한 종교적 소질은 이에 생길 수 있으며,
셋째는 대개 종교가 의타적 신앙이었으나 자타(自他)전체의 자력적 신앙이라야 될 것이며,
넷째는 종교는 옛날의 위안적 방법에 그치지 말고 현실개척에 흥미를 둔 신앙이라야 하며,
다섯째 이상과 현실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을 들고 아울러 종교가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변경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종교의 기원은 생활혁명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으며, 천도교에 대한 종교시비에 대해서는 4세기경 로마 마탁누트가 말한 종교적 의미의 입장에선 천도교는 비종교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현재 남아있는 종교들이 갖고 있는 사후관, 비현실적인 위안 등의 입장에서 볼 때 천도교는 종교가 아니라 장래(將來)한 시대의 종교로서 모든 문화를 통일하여 조화하며 지도하고 그리하여 그를 인간격 중심주의에 귀납케 할 일대 신생활 혁신운동으로서의 종교라 못을 박았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의 정신은 새로운 사회의 생활요소와 결합되는 신인간 창조의 위력을 가져야 하고 신인간 창조의 종교적 요소는 사람성 모색의 이상이 아니요, 사람성 이상의 직접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다. 즉 사람성이 과거에서 사람성 자체의 무궁으로부터 선택하였던 그 이상을 다시 무궁성의 위력을 빌려 건설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고 보았다.
한편 백세명은 그의 초기 저술인 “동학사상과 천도교”에서 천도교는 신종교운동이라고 단정하고 신종교운동은 단순히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보다 더 참되고 착하고 이름다운 행복한 생활로 향상하겠다는 적극적인 원망(願望)이 그 내용이며 목적이라 했다. 계속해서 백세명은 시천주의 새 신앙, 제인질병과 인간개량, 장생의 방법과 천도사상, 만사지와 만사여의, 화복문제와 내세관 등을 절을 달리하여 규명하려 했다.
이돈화와 백세명은 근대적인 종교적 입장에서 천도교를 한 마디로 결론지운다면,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 생활운동이라고 요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새 생활운동의 요소와 방법은 과거의 종교가 가졌던 요소와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새로 모색되는 새로운 종교란 무엇인가?
인류가 1, 2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참상(慘狀)을 보고 나서야, 인류의 재앙은, 인간 스스로의 오만(傲慢)과 타민족(他 民族)을 전쟁이란 가장 잔혹(殘酷)한 방법으로 굴복시켜, 자 민족(自 民族)의 우수성을 주장하려는 자학적(自虐的)행위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인간의 삶의 터전과 인간성 상실(喪失)이 극(極)에 달하게 되자 종교학자, 사회학자, 미래학자들을 중심으로 지난 역사의 반성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견(豫見)과 인류가 잘 살기 위한 대안(代案)이 만들어 졌습니다. 비참한 전쟁으로 무력(無力)해진 인류가 직면하게 될 여러 문제와 해결해야 할 대안을 제시한 것 중 최고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일반적인 문제였고, 종교란 특수영역에 대한 우려(憂慮)는 따로 있었습니다. 모든 학자들의 개별적인 문제제기를 생략하고 개괄적(槪括的)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비참한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것은 절대자인, 신이 인간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로 개인의 기복(祈福)에 의존하고 있던 종교들의 소망과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존재와 권능(權能)마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신들이, 그들이 가진 권능을 다해주는 따뜻한 신이 있었다면 수많은 종교인들의 무참한 죽음과 재산의 파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사라진 시대. <신이 인간을 위하여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능(無能)과 인간사(人間事)엔 관심이 없다>는 인식은, 반 종교화(反宗敎化), 무 종교화(無宗敎化)에 박차(拍車)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미래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어 종교가 제 구실을 하려면 개인 구령(救靈)이나 기복에서 과감히 벗어나 사회와 연대감(連帶感)을 갖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게 하는 사회의 여러 비인간적(非人間的)인 문제와 구조의 해결과, 다가올 인간이 한울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의 재앙을 막는 데 앞장 서야한다는 것이 제시됐습니다.
이런 예견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여러 종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은 청소년은 물론 장년들까지의 신앙이 무너져 모든 교단에서 청소년과 장년의 교인 수(數)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종교화로 인하여 교단운영이 어려워지고,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현명한 생활인이 되어버린 그들의 욕구와 질문에, 닥쳐올 불확실한 삶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주지 못하여, 종교는 조금씩 외면(外面)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지나치게 개인 구령(救靈)과 기복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무속에 기대는 것과 같이 요행과 기복을 종교가 답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왕성(旺盛)한 것처럼 보이나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이런 현상은 선진국과 같이 무 종교화와 반 종교화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 역사적 추세(趨勢)입니다.
이런 반 종교, 무 종교화의 추세에서 벗어나는 방안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성 상실에서 회복(回復)되어 모든 사람이 한울의 품성을 지니고 타고 난 위대한 존재로 인식케 하여, 신성하고 놀라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자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게 하도록 인도하는 것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인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을 인류 스스로가 건설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신념은 천도교만이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140여 년 역사 속에서 실천으로 옮겨 증명해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순도자(殉道者)를 냈음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도교는 반드시 중흥을 하여 나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지상천국에서 인간답게 살게 할 책무(責務)가 있습니다. / 동학, 천도교 중흥을 위한 대안-(1)
영성주의가 등장하게 된 첫 번째 견해로, 19 C를 전후로 산업화가 급속도를 발전하게 되자. 종교 윤리가 산업화에 장애가 된다고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개신교 윤리의 바탕이 된 칼뱅주의에서 주장하고 있는 속세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는 금욕주의가 띠고 있는 경건주의에서 영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고 보고 있다. 개신교의 신앙자가 예정론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고정된 소명의 금욕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일상생활에서 금욕주의의 생활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필수적이었다. ‘개별적 신앙자의 종교적 신앙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영성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종교적 장애를 제거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견해로, 종교가 사회변동에 장애물이며 신앙자가 산업화에 휩쓸려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 되거나 비종교화가 가속화 되자 개신교는 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특징은, 빠르게 변동하고 있는 산업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집단 사회복음을 버리고 개인 구원의 복음운동으로 전환하게 됐다. 이는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영혼이 강조되고 영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급변하는 산업화에 따라 같은 속도로 종교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비종교화가 되자 종교의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그럼으로써 서구사회에 있어서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신앙자의 생활의 중심이었던 종교적 사고, 수행 그리고 제도들이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산업사회에 적응하고 있는 신앙자는 종교적 의무와 삶에 대한 종교집단과 교리의 전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했다.
서구사회에 있어서 종교적인 사고방식, 특별한 수행의 실천 그리고 사고와 행위형태의 제도화와 조직이 영향력을 잃고 붕괴되어 간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미래사회에 적응하며,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 복음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영적종교로의 회귀에 있다고 판단하고 영성훈련을 통하여 새로운 종교집단으로 성장하려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도덕성과 영성의 회복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울러 미래종교에 대한 모색을 예측한 바, 미래에 우리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종교는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역할, 공간, 시간, 그리고 역사 안에서의 그의 사회적 위치를 궁극적 존재와 의미의 상황들에 관계시키는 일련의 믿음, 의식, 그리고 상징을 지닌 시민종교(civil religion)이라고 보고 대체종교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사회를 통합시키는 기능을 전통적인 종교가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위한 기초로서 그리고 국가적 활동의 의미성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아지는 시민종교의 대두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이는 ’신이 없는 종교‘에로의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급변하는 사회변동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살아남기 위하여 다가올 미래사회를 철저히 분석하여 그 사회와 그 다음에 이어질 사회에 대한 적응과 인도를 위한 선구자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될 당면과제 중 최우선의 과제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 2008. 3. 14. 性靈과 靈性은 무엇이 다른가?
/ 종교(宗敎)란 무엇인가 (下). 全文 完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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