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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
처음에 천황(天潢)이라고 부르던 연못으로 황지(潢池)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황지리(黃池里), 황지읍(黃池邑)의 이름이 나오게 한 곳으로 낙동강의 근원이 되는 연못이다.
황지 한 가운데에 자리한 이 연못은 둘레가 100m 정도인 상지와 둘레 50m 정도의 중지와 둘레 30m 정도으 하지로 구분되며 1일 약 5,000톤의 물이 용출되어 상수도 취수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상지는 마당늪이라 하고, 중지는 방깐늪, 하지는 통시늪이라 부르며 그 밖에 굴뚝쏘가 있다. 마당늪속에 바위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밑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그리고 물이 솟아 나오는데 그 수굴속에 용이 살고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척주지 둥에 낙옹강의 발원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옛지도치고 황지를 그려 넣지 않은 지도가 없을정도이니 황지의 의미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지는 옛날부터 신비하고 영험스런 연못으로,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으며 연못속에 돌을 던지면 비, 바람이 크게 일어난다고 하였다. 연못 주위에는 천하의 명당이 생겼었다. 그 무덤 가운데 일부는 민가의 마당 가운데에 남아 있기도 한데 연못 주위에 집이 들어서기 전에는 꽤 많은 무덤들이 있었다. 30여년 전 황지가 한창 개발될 때 상수도가 없던 시절 황지 시민들은 연못물을 길어다 먹었고 연못에서 흘러나가는 도랑물에 빨래를 하였다. 연못 옆에는 밭이었는데 그곳에서 옛날 칼과 창이 수십 개 발견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장자못 전설의 근원지가 되는 황지는 원래 황씨의 집터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이곳에 황동지(黃同知)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매우 인색한 노랭이었다.
어느날 외양간에서 쇠똥을 처내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한 노승이 찾아와 염불을 하며 시주를 청했다. 시주할 양식이 없다는 황부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염불만하고 서 있는 노승을 보자 황부자는 그만 심술이 나서 치우고 있던 쇠똥을 한 가래 퍼서 바릿대에 담아 주었다. 노승이 말없이 돌아 서는데 마침 방앗간에서 아기를 업고 방아를 찧던 며느리 지씨가 이 광경을 보고는 달려와 노승을 붙잡고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내고 시아버지 몰래 찧고 있던 쌀을 한 바가지 시주하였다.
물끄러미 지씨를 바라보던 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날 따라 오시오” 하였다. 지씨는 아이를 업은 채 노승의 뒤를 따라 가는데 노승이 말하기를 “절대로 뒤를 돌아다 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송이재를 넘어 통리로 해서 도계읍 구사리 산등에 이르렀을때 며느리는 자기 집 쪽엣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듯 한 소리가 나기에 놀라서 노승의 당부를 잊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때 황부자 집은 땅 밑으로 꺼져 내려가 큰 연못이 되어 버렸고 황부자는 큰 이무기가 되어 연못 속에 살게 되었다. 뒤돌아 보던 며느리는 돌이 되어 구사리 산등에 서 있는데 미륵바우라고 부르고 있으며 흡사 아이를 등에 업은듯이 보인다. 그 옆에는 개바우라 하여 집에서 며느리 뒤를 따라 가던 개가 함께 돌이 되어 있다.
그 때 집터는 세 개의 연못으로 변했는데 제일 위쪽의 큰 연못이 황부자의 집터이고 중간이 방앗간 터이며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이 변소 자리였다고 한다.
이 지방에 전해오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며느리가 돌이 된 것은 도승의 “뒤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를 잊고 뒤돌아 봐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늙으신 시아버지를 버리고 저만 살자고 달아났기 때문에 벌을 받아 돌이 된 것이라 한다.
황지 연못물이 1년에 한두번 흙탕물이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무기가 되어 연못 속에 사는 황부자가 심술을 부려서 그렇다고 한다. 30여년 전만 해도 연못속에는 큰 나무기둥이 여러 개 잠겨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황부자집의 기둥이고 대들보이며 서까래라고 하였다. 그것을 건져내어 말려 곱게 켜 농짝 같은 가구를 만들어 팔아 먹은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연못 부근의 지반이 무르기에 오래묵은 나무는 넘어지게 되어 있고 나무란 물 속에 잠겨 있으면 썩지 않은 것이리라.
황지라는 지명은 전설에 황부자 집터가 연못이 되었다하여 황부자의 황자를 취하여 황지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황부자의 황자와 며느리 지씨의 지자를 따서 황지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황지라고 부르기 훨씬 전에는 천황(天潢)이라고 불렀으며 옛 문헌에는 황지(潢池)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황지(黃池)는 후대에 이루어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천황(天潢)은 하늘못이란 뜻으로 천지(天池)와 같은 뜻이며 태백산이 백두산의 옛 이름과 같으니 우리 조상들이 신성한 “하늘못”이란 뜻으로 천황(天潢)이라 불렸던 것 같다. 반도이남으로 내려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연못이며 낙동강, 한강과 오십천의 발원지가 되는 국토의 뿌리땅에 자리한 연못이기에 하늘못인 것이다.
또다른 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면, 황지(潢池)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그 뜻은 큰 연못이란 뜻이며 은하수란 뜻이니 역시 하늘못이란 뜻과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황(潢)의 삼수변이 떨어져 나가고 황(黃)자만 남게 되니 황지(黃池)로 표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황씨(黃氏)의 연못이라는 가상에서 황부자의 전설이 대입된 것이 아닌가 한다.
황부자의 이름을 황익(황익)이니 황일(황일)이니 또는 황동지(황동지)라 하는데 황익(황익)보다는 황일(황일)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일(일)자는 물이 넘친다는뜻이니 연못의 물이 넘치는 것과 같아 전설과 근사한 이름이라 생각한다.
일(일)에서 삼수변이 떨어져 나가니 (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두가지 이름도다는 황동지(황동지)가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황익,황일은 실존 인문릐 이름을 연상케 하는데 반하여 황동지는 전설상의 인물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전에 서동지, 섬동지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없는 사람을 있는 듯이 할 때는 확실한 이름 보다는 벼슬 이름이나 별명을 붙이는 것이 상례이다. “허생전”, “주생전” 등고 같이 실존 인물이 아니면 성은 있되 이름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시당국에서 연못을 공원화하면서 연못 속에 있는 절벽과 절벽밑에 있는 수굴을 메워 수심을 얕게 하고 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원형을 무시한 처사로 준설하여야 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삼척도호부 조에 보면 황지에 대해
“부의 서쪽 110리에 황지가 있는데 그 물이 남쪽으로 흘러 30여리를 가서 작은 산을 뚫고 남으로 흐르니 천천이라 한다. 곧 경상도 낙동강의 근원인데 관에서 제전을 두고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척주지에는 황지에 대해
“황지는 태백산 가운데에 있는데 삼척에서 서쪽으로 110리 거리에 있고 위쪽에 연화봉이 있다. 황지에서 솟는 물은 태백산 중의 여러 물과 합쳐져 남으로 흐르니 낙동강의 근원이 된다. 옛날 나라에서 제전을 두고 가물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라고 하였으며,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안동과 삼척에서 각각 황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먼저 삼척의 황지에 대해서는
“서남쪽 110리 태백산의 동쪽 산줄기에 샘이 있으니 그 물이 솟아 올라 큰 연못을 이루었다. 그 물은 남으로 흘러 30여리 가서 산을 뚫고 산 남쪽으로 나오니 천천이라 하는데 곧 안동도호부와 경계가 되며 남쪽으로 흐르니 낙동강의 근원이 된다”
라고 하였으며 같은 책 안동 편의 황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황지는 삼척과의 경계에 있는데 태백산의 북쪽이며 우보산 서쪽 10리 지점이다. 연못물은 산중의 여러 물과 합하여 서남쪽에 있는 백석평을 지나 20여리를 흘러 산을 뚫고 남쪽으로 흐르니 낙동강의 근원이 되며 이름하여 천천이라 한다”
대동지지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잘못된 것을 고쳐 김정호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책인데 어찌하여 삼척과 안동 두 곳에 함께 화지를 기술하였는지 몰를 일이다.
이것은 아마도 황지는 안동 사람들의 생명수라 그것을 중히 여겨 황지 당을 그들의 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삼척 땅이지만 황지에서 솟는 물은 삼척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안동으로 흐르니 그들의 삶의 군원으로 여기고 싶어서일것이다.
‣ 天潢 → 黃池
‣ 潢池 → 黃池
‣ 늪벌
황지연못이 있는 일대를 이르는 말이다. 옛날엔 지금처럼 연못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 인근 일대 수만 평이 물이 질퍽한 늪지대로 되어 있었으며 버드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우거져 있는 곳이었다. 지금의 황지시장과 우체국 부근, 노동부 부근이 모두 늪지대였고 설사 늪이 아닌 곳이라 해도 습기가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연못 부근을 늪이 있는 벌판이라 하여 늪벌이라 불렀다. 40여년 전 늪벌(특히 노동부앞)에서 년대를 알 수 없는 옛날 칼과 창이 다량 발굴되기도 하였다.
‣ 마당늪
상지(상지)를 이르는 말이다.그곳이 황부자의 집터였다고 하며 가장 넓은 연못이므로 마당늪이라 한다. 마당늪 속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굴이 있는데 이 굴 속에는 황부자가 이무기(이슴)가 되어 살고 있다고 하며 가장 수량이 많아 황지연못하면 곧 마당늪을 의미한다. 늪이란 연못 또는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을 의미하는 말로 큰 호수, 바다도 늪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 황지연못에는 수달이 살았다고 한다.
‣ 방깐늪(방앗간늪)
중지(중지)를 이르는 말이다. 중지는 상지의 물이 흘러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인데 그곳에서도 지하수가 올라 온다. 황부자의 방앗간이 함몰하여 생긴 늪이라하여 방깐늪이라 한다.
요즈음 시당국에서 이곳 방깐늪의 개념을 잘못 인식하여 통시늪을 반으로 갈라 하지와 중지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말아서 안타깝다. 빠른 시일 안에 원상회복을 하여야 할 것이다.
‣통시늪
하지(하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곳 늪의 물은 흘러 넘치기 보다는 고여 있는 물이다. 옛날 황부자집의 통시(변소)터가 함몰하여 생긴 늪이라 하여 통시늪이라 한다. 가장 깊어서 명주실 한 꾸리를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은 통시늪을 반으로 갈라 중지와 하지로 만들어 놓았으나 옛날엔 통시늪이 가장 깊은 늪이었다. 이곳의 통시늪도 원상대로 복구하여야 하며 책상머리에 앉아서 탁상공론만으로 전통문화를 무시한 문화재 보수는 시정되어야 한다.
‣ 굴뚝소(소)
마당늪 동쪽에 있었다. 지금의 연못옆 경창초소쪽으로 있었는데 맑은 물이 솟아 나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샘이었다. 30여년 전 황지에 상수도 보급이 안되어 있을때 이곳 굴뚝소의 물을 길어다 먹었다.
황부자집의 굴뚝에 해다아는 곳으로 둥글게 수직으로 내려간 샘인데 그 형상이 원통형의 굴뚝처럼 생겼으며 쉴새없이 맑은 물은 솟아 올라왔다. 지금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묻혀 버렸다.
‣ 버들밭
황지부근의 습지에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버들밭이라고 불렀다. 특히 옛날 소방서 부근과 KBS중계소가 있던 부근에 버드나무가 많아 그 부근을 버들밭이라고 하였다.
‣ 불당골(불당골)
연못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노동부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로 황지여상쪽으로 가는 굴다리가 있는 곳이다. 그 골짜기를 넘으면 절골(번적골)의 번적사의 불당이 있는 곳으로 갈수 있기에 붙은 이름이다. 불당골을 다른 이름으로 면유지골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 골짜기 안쪽의 땅이 옛날 상장면시절의 면유지이기에 면유지골이라고 불렀다.
‣ 면유지골(면유지골) → 불당골
‣ 늪뒤
연못 뒤쪽을 말한다. 지금의 여관골목쪽이다. 늪은 연못을 이르는 말이다.
‣ 늪뒤펀디기
황지여자상업고등학교와 황지중학교가 있는 일대를 늪뒤펀디기라 하고 혹은 늪뒤펀세기, 늪둔지라고 부른다. 늪뒤펀디기는 늪(황지) 뒤에 있는 펀디기(평지)라는 뜻이다. 또한 늪둔지라고 하는 것은 옛날 그곳이 습지대로 물기가 많은 펀펀한 땅(둔지)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황지중학교 뒤쪽에는 물이 질퍽한 곳이었다.
‣ 늪둔지 → 늪뒤펀디기
‣ 늪골
시청과 방송국 사이의 골짜기이다. 골짜기 아래쪽과 골짜기 안쪽에도 늪이 있었고 골짜기 끝의 늪둔지에도 늪이 있기에 늪골이라 한다.
이르석이
늪골 안쪽 속등에 있다. 바위절벽이 벌떡 일어선 것처럼 둘러 있기에 이르석이라 한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음.. 사진이 같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것 같습니다. ^^
황지라는 지명에 대해서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전에....황지 연못이라는...곳에서.....제가 좋아하는 각설이가 품바 공연을 한다고 해서.....한달음에...달려가볼까하다...
추운 날씨때문에.....취소 되서...못갔었는데..아쉽네요~~~
그래도 황지연못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