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소설 같은 거 안 봐요.”
베스트셀러인 그녀도 이런 식으로 캔슬당하기도 한다. 당대 최고의 작가임에도 타박당하는 이유는 당사자의 지난(至難)한 사연을 도덕적으로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지성인들의 결벽성 때문이다. ‘자신과의 동일시’도 아닌 기껏 ‘타자적 인정’조차 거부하는 이유는 ‘다성(多姓)가족’에 대한 확신에 찬 편견에서 시작된다.
위령의 엄마가 딸과 함께 들은 신부의 강론처럼 (161쪽)
‘여자들이 참을성이 없어 이혼을 하고 그래서 결손가정이 생기며 그것이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 된다’
이게 작품 속 종교인이 설법하는 담론 수준이다. 온실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규정된 잣대의 도덕적 굴레’를 벗어나길 두려워한다. 그 ‘당대의 계급적 도덕성’은 이미 견고한 화석이 되어 ‘도덕도 변한다’는 진리를 설법할 공간이 없다. 그게 ‘엄마와 뿔났다’의 ’장미희류(類)이다.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의 구성원들은 사회적 편견의 소수자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서 문학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문학작품은 각각의 개성적 의미와 고유영역 안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우주의 중심을 한 가지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무한대로 산재하는 코스모스적 중심의미를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다. 존재의 다양성을 배척하는 중심주의의 특징은 자신의 카타고리가 타자의 중심보다 우월하다는 이분법적 사유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단순한 사람일수록 그 견고한 틀을 깨기가 불가능하다. 단호한 만큼 소통이 막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빠의 결혼식장에서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했던 기억을 지닌 고3 ‘위녕’이다.
첫번째 남편 위녕의 아버지는 ‘논리’ 시리즈의 저자이자 작가이다. 첫 남편. 금테 안경 속의 맑은 눈빛 혁명가.
완고하고 철저한 첫 남자는 아내의 리버럴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문예일꾼’이자 ‘가정의 지킴이’ 몫까지 동시에 감당하는 슈퍼우먼이기를 바란다. 초점이 진지하고 흔들림이 없지만 그만큼 소통의 벽이 두텁다. 인생의 낭만성을 포기한 상태다. 그래서 그는 오랜만에 만난 딸이 ‘행복할 때는?’ 하고 묻자 ‘삶은 견디는 것이다’라고 ‘공격적 방어’로 대답한다. 이혼한 여자와 절대로 친구 사이로 정리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긋는 게 당연하다. .
두 번째 남자인 영화감독. 전형적인 마초 근성이요 터프가이 소유자다. 당연히 여자들이 줄줄이 붙었으며 그 와중에 ‘애 딸린 이혼녀이자 베스트 셀러 작가’인 위녕의 엄마를 선택한다. 외모와 능력 그리고 낭만성까지 갖춘 매력덩어리 사내의 수렁에 빠지면서 사랑했고, 곧바로 질곡에 빠진다. 물리적인 매를 겪으면서 그제서야 ‘터프의 폭력성’을 리얼하게 체득한다.
폐쇄된 영역에서 힘이 센 사람이 물리력을 행사하면 약자는 당하기 마련이다. 타인들이 볼 수 없는 장막 안에서는 돌출구가 없다. 그녀들이 남자들의 물리력을 고스란히 감수했던 이유는 가해자가 바로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명망가 공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브라운관의 ‘김미화’와 ‘이경실’이 그랬고 망자 ‘최진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작가도 자신을 추스리는 에너지로 틈새를 뚫는다. 모스크바 여관방에서 멍든 얼굴을 아이 새도우로 지우고 푸시킨 박물관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는 돌파형이다. 그러면서 가정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한다. 매 맞은 다음날 이튿날 강단에서 페미니즘은 강의하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둘째 둥빈을 떠올리며 이혼을 미루었던 여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전업작가다. 식민지 시대의 채만식처럼 글을 써야 돈을 버는 글쟁이 노동자다. 따라서 공인은 대중 앞에서 슬픈 얼굴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된다. 팅팅 부은 얼굴을 감추고 또 대중 앞에서 미소를 보이며 인터뷰에 응해야 한다. 밥그릇 구성원의 틀을 유지하기란 그만큼 비탈길이다.
가부장제와 맞서는 여성의 길은 여전히 힘들다. 21세기에도 ‘여자의 일생’을 강요하면서 그 모범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수히 일어서고 또 무수히 깨지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나혜석이나 김일엽 김명순(김동인의 김연실전의 주인공)은 차치하고라도 자금의 여성 저명인사가 모두 이혼이나 사별 혹은 독신의 상태에서나 가능해진다. 홀로 남은 여자가 세상을 쥐는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나 박완서 최명희가 그랬고 정치가 박근혜 한명숙 강금실이 그렇고 또 소설가 공지영이 그렇다
그러나 그 깊은 상처는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녀는 위녕이건 어린 둥빈이나 제제건 어느 누구에게도 이혼의 사유를 적나라하게 실토하지 못한다. 초록 세계에 안간힘으로 발돋음하는 단풍나무 핏줄 사연을 홀로 감당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규정이 두려워 그저 삭히지만 문제는 핏줄에 대한 죄의식이다.
염라대왕 앞에서 “음 …너는 아무래도 지옥으로 가야 하겠지? 물으면 아니예요, 이건 이래서 그랬고, 저건 걔가 그래서 그랬고, 걔가 먼저 그랬다구요! 하다가 그럼 위녕은? 하면 엄마는 넵! 하고 지옥으로 내려갈 것 같다고”
그게 모성이라면 너무 신파조인가?
아무튼 위녕과 동빈 그리고 성이 다른 동생 둥빈과 제제는 한 지붕에서 살다가 휴일이 되면 각자의 아버지를 만나러 떠났다가 밝게 돌아오기도 한다. 그 밝음 뒤의 우울함을 문장으로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엄살이나 과장’이 아닌 실재의 현상만 포착할 뿐이다.
그녀 역시 평범한 여성처럼 싸우는 자식들을 기계적으로 대비시키며 설득시기도 한다. 성(姓)이 다른 형제와 살았던 클린턴 대통령이나 독일의 슈렌더 총리 채플린, 헤밍웨이, 브레이트 등 결손가정 출신을 장황하게 대입시키다가 홀로 눈물을 삼키는 여성 세포 특유의 감성도 보인다. 그렇게 자기 변론에 젖다가 전 남편의 집을 벗어나 자기에게 돌아온 딸을 보며 가슴 설렌다.
그 ‘새로운 의미의 가족’은 너그럽고 넉넉한 화해의 세계를 꿈꾸지만 여전히 가없는 비탈길이다. 세상 사람들의 궁금증이나 동정, 그리고 따뜻한 배려까지 표창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그 비탈길에서도 중장년 여인들은 끊임없이 신데렐라 사랑의 꿈을 꾼다. 위녕의 엄마는 세 번째 이혼의 파란 속에서 또 한 남자를 낭만적으로 짝사랑하기도 한다. 기자 출신의 서점 남자 다니엘씨가 중ㆍ장년의 세월을 보내는 탄력이 된다. 막딸아줌마도 남자 친구가 생기면서 외기러기 산악회의 등반날짜를 기다리며 가슴을 설렌다. 그 가슴들을 열었다가 재빨리 감추면서 자신만의 독방을 만드는 것이다.
“엄마가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거야. 그 사람만 빼고 나머지 세상이 남김없이 지워져버리는 거야.”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한 평생 함께 사는 것이다. 또한 그 설렘의 욕구가 가족의 품으로 안주될 때 ‘즐거운 나의 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9.11테러 참사의 탑승객들도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결별하지 않았던가. 그게 사랑하는 가족들이 어긋나면 오랏줄로 변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들은 끝까지 소녀적 사랑의 감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주워온 고양이 ‘코코’와 ‘라떼’ 역시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사랑의 통로가 된다. ‘코코’를 잃어버리고 슬퍼하면서 남은 식구끼리 끌어안는다.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은 인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대상과의 사랑의 소유욕은 순수하며 헌신적이다. 이별과 사랑은 수시로 삶의 순환에 던져지면서 쳇바퀴에 탄력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옥의 티.
작가는 현행 대학입시의 판도를 모르는 것 같다. 위녕은 마침내 서울 소재대학이 아닌 지방교대를 선택한다. 위녕의 가장 소박한 결단인 것처럼 비춰지지만 작금의 지방교대 합격선은 ‘인 서울(In seoul)’을 훨씬 웃돈다.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는 아이들이 간신히 입문할 수 있는 학교다. 가정과 세사에 참견하면서 때때로 술잔도 부딪치며 즈이 엄마와 회포를 푸는 고3 수험생이 정착할 수 있다는 설정은 조금 무리다. 명망가 작가의 ‘에코(echo) 결핍성’이 보인다.
어차피 삶의 신산고초(辛酸苦楚)는 미리 재단하지 못한 채 감당해야 한다. 공들여 쌓은 행복이 단칼에 날아가기도 하지만 작가의 힘은 불행의 ‘음미(吟味)’에 있다. 찢긴 상처도 간극을 두고 바르게 음미하면 작가의 자양분이 생산된다. 그래서 작가의 슬픔은 부은 발등 적셔주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이다.
교무실 창 밖, 배추뿌리 뽑아낸 그 자리로 억새꽃만 새하얗다. 기숙사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딸에게 문득 옆서 한 장 보내고 싶은 초겨울이다.
첫댓글실제로 작가의 딸이 지방교대를 갔다 해도 무리한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야 간신히 서울 소재 대학이나 지방교대 갈 수 있는 건 평범한 애들이고요, 공작가의 아이들은 부계 모계 공히 엘리트이니 지방교대 합격이 뭐 대단할 거 없지요. 하기야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만서도... 자전적 소설이라 해도 사실 그대로 그려졌을 리는 없죠. 부부 쌍방이 아닌 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진 측면도 있을 거구요. 어쨌든 두번 째 남자인 오병철감독 말이예요, 작가의 출세작이자 페미니즘소설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무소의 뿔처럼~'을 감독했던 사람인데, 마초에 터프가이? 충격이네요.
아무튼 이혼 후, 공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나가는 와중에 쓸쓸히 병사했는데 그 사람 잘 생기기도 했지만 참 순하고 맑아 보이고, 잘 나가는 감독은 아니었지만 의식있는 작품만 추구하는... 암튼 소위 최고의 지성(?)이라는 여자가 성이 다른 애 셋이 웬말? 하면서 공작가 비난하는 글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지만, '즐거운~' 읽고 남모르는 아픔 위로받았다는 독자들 많으니, 고마운 일이죠. 그러니 작가란 위대하면서도 껄끄럽고 슬픈 존재네요. 자신의 아픔과 결핍을 승화시켜 독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자니,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발가벗겨야만 하는-
교육청에서 교직원 독후감대회를 한다고 학교별로 한 명씩 제출하라는 거예요. 마이크 잡고 공지했지만 끄떡도 안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뚝딱뚝딱 만들었지요. 나중에 책을 엮게 되면 고쳐서 붙여볼까 생각했던 거구요. 이문복 선배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출품하면서 '혹시 2등을 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결과는 60명 중 25등, 내 아내 박명순은 23등...각자 도서상품권 3만원씩 받음......교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분개하셔서 민망했음...
ㅋ ㅋ ㅋ... 한겨레신문에서 학창시절 추억 공모했었는데, 일반인이 금상 공선옥작가가 은상이었어요. 내가 읽어봐도 일반인이 쓴게 더 웃기고 재밌었어요. 공모의 취지상 문장보다는 경험의 엽기성이 더 중요했거든요. 그렇다고 작가의 명성에 흠이 될 것도 없고 기성작가가 거기 응모한 게 신선하게 느껴져서 무척 유쾌하더군요. 근데, 이 경우는 좀 다른 거 같네요. 강샘과 박샘은 그냥 마음 가는대로 순수하게 썼을 것이고, 어떻게 쓰면 감동적일지 심사를 염두에 두고 쓴 글들에 밀린 거일 수도... 교육청 심사 뭐, 뻔하죠. 근데, 허걱! 정말 등수를 먹였나요? 다신 이런 데 글 내지 마세요. 개발에 편자 아닌감.
첫댓글 실제로 작가의 딸이 지방교대를 갔다 해도 무리한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야 간신히 서울 소재 대학이나 지방교대 갈 수 있는 건 평범한 애들이고요, 공작가의 아이들은 부계 모계 공히 엘리트이니 지방교대 합격이 뭐 대단할 거 없지요. 하기야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만서도... 자전적 소설이라 해도 사실 그대로 그려졌을 리는 없죠. 부부 쌍방이 아닌 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진 측면도 있을 거구요. 어쨌든 두번 째 남자인 오병철감독 말이예요, 작가의 출세작이자 페미니즘소설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무소의 뿔처럼~'을 감독했던 사람인데, 마초에 터프가이? 충격이네요.
아무튼 이혼 후, 공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나가는 와중에 쓸쓸히 병사했는데 그 사람 잘 생기기도 했지만 참 순하고 맑아 보이고, 잘 나가는 감독은 아니었지만 의식있는 작품만 추구하는... 암튼 소위 최고의 지성(?)이라는 여자가 성이 다른 애 셋이 웬말? 하면서 공작가 비난하는 글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지만, '즐거운~' 읽고 남모르는 아픔 위로받았다는 독자들 많으니, 고마운 일이죠. 그러니 작가란 위대하면서도 껄끄럽고 슬픈 존재네요. 자신의 아픔과 결핍을 승화시켜 독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자니,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발가벗겨야만 하는-
교육청에서 교직원 독후감대회를 한다고 학교별로 한 명씩 제출하라는 거예요. 마이크 잡고 공지했지만 끄떡도 안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뚝딱뚝딱 만들었지요. 나중에 책을 엮게 되면 고쳐서 붙여볼까 생각했던 거구요. 이문복 선배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출품하면서 '혹시 2등을 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결과는 60명 중 25등, 내 아내 박명순은 23등...각자 도서상품권 3만원씩 받음......교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분개하셔서 민망했음...
ㅋ ㅋ ㅋ... 한겨레신문에서 학창시절 추억 공모했었는데, 일반인이 금상 공선옥작가가 은상이었어요. 내가 읽어봐도 일반인이 쓴게 더 웃기고 재밌었어요. 공모의 취지상 문장보다는 경험의 엽기성이 더 중요했거든요. 그렇다고 작가의 명성에 흠이 될 것도 없고 기성작가가 거기 응모한 게 신선하게 느껴져서 무척 유쾌하더군요. 근데, 이 경우는 좀 다른 거 같네요. 강샘과 박샘은 그냥 마음 가는대로 순수하게 썼을 것이고, 어떻게 쓰면 감동적일지 심사를 염두에 두고 쓴 글들에 밀린 거일 수도... 교육청 심사 뭐, 뻔하죠. 근데, 허걱! 정말 등수를 먹였나요? 다신 이런 데 글 내지 마세요. 개발에 편자 아닌감.
나보다 '감동적인 심사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 60명 중 24명이나 된다구요?......제가 투자한 시간이 그 사람들보더 훨씬 길었을 걸요. 남들이 단 칼에 써나갈 때 저는 평균 스무 번 이상 고친답니다....그냥 이런 상황이 재미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