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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7세는 혼인 관계를 통해 강대국 스페인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장남 웨일스공 아서와 스페인 공주 캐서린의 결혼을 추진했다. 1501년 둘은 결혼을 했지만, 한 해도 지나기 전에 여행 중 심한 병에 걸렸고, 캐서린은 가까스로 회복했지만 아서 왕자는 죽고 만다.
아라곤의 캐서린(1485. 12. 16. - 1536. 1. 7.)은 스페인의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아 여왕 이사벨 1세의 넷째 딸로, 후일 메리 1세 여왕의 어머니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특별한 배려로 훌륭한 교육을 받아 역사, 법률, 정치, 고전 이외에도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을 익혔다. 키는 좀 작았으나 붉은 빛이 도는 금발에 희고 홍조가 도는 피부를 지닌, 통통한 체형의 복스러운 미인이었다 한다. 신앙심이 깊고 겸손하며 기품 있는 여인으로 여겨졌다.
아서 왕자가 죽자 헨리 7세는 1502년 차남(후의 헨리 8세)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다시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추진한다. 캐서린이 이전에 아서 왕자와 결혼을 하였으나 그와는 동침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처녀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캐서린도 그렇게 주장했고, 아서가 병약하여 둘 사이의 합방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아서가 그럴 정도로 병약하지는 않았고 젊은 부부가 결혼한 지 몇 달 동안 합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실은 오직 캐서린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헨리 8세(1491. 6. 28. - 1547. 1. 28.)는 부왕 헨리 7세의 차남으로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형이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므로 교회의 직분을 맡을 준비를 했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캐서린이 아직 처녀임을 인정해 이전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캐서린은 헨리 7세의 차남(후일 헨리 8세)과 약혼했으나, 헨리 7세와 페르난도 2세 사이에 지참금과 관련된 분쟁이 일어나 헨리 7세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입지가 곤란해진 그녀는 헨리 7세와 부왕 페르난도 2세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지만, 그녀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거의 8년이 지나 1509년 헨리 7세가 갑자기 병사하자 당시 18세의 헨리 8세와 결혼을 했다. 처음에 둘 사이의 금슬은 좋았다. 캐서린이 1516년 메리 공주를 낳고 나서 유산을 거듭하자 헨리 8세는 왕위 후계자, 즉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면서 점점 부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캐서린의 시녀 앤 블린(영화 '천 일의 앤'의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헨리 8세는 결국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결혼을 무효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캐서린이 자신의 형인 아서와 혼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근친상간으로서 잘못된 결혼이었다는 것이 표면상 이유였다. 또 말을 바꾸어서 캐서린이 자기와 결혼할 때 이미 처녀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던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 결혼이 무효였음을 인정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조용히 살 것을 종용했지만, 캐서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최강대국인 스페인의 왕녀 출신으로 어려서 잉글랜드의 왕세자비로 내정되었던 그녀는 왕비 이외의 삶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531년 왕은 캐서린과 별거에 들어갔고, 캐서린은 딸 메리와 헤어져 변경으로 내쫓기고, 메리는 공주 신분이 박탈되어 사생아로 전락했다. 캐서린은 153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방적인 이혼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편지나 문서에 일관되게 왕비 캐서린이라 서명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며 위엄 있는 왕비로 백성들의 존경과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교황과의 첨예한 대립 끝에 헨리 8세는 스스로가 교회의 수장이 되는 종교 개혁을 감행하여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를 창시하였다.
앤 블린의 아버지는 외교관 토머스 블린 백작, 어머니는 명문 하워드 가문의 엘리자베스였다. 앤 블린은 총명하고 재치있는 성격으로 어려서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수업을 받아 예법을 익히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했으며, 세련된 기품이 배어있고 화술도 뛰어났다. 그녀는 프랑스 식의 옷차림과 문학, 음악, 종교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몬드 공작과의 혼담으로 잉글랜드에 돌아와 캐서린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지참금 문제로 오몬드 공작과의 혼담이 무산되고, 다시 노섬부리아 공작의 후계자 헨리 퍼시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 또한 무산되었다.
이미 그녀의 언니 메리 블린을 정부로 두었던 전력이 있는 헨리 8세는 앤마저 정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앤은 왕의 유혹을 완강히 거절하며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 젊고 생기발랄한 앤에게 반하고 그녀가 왕자를 낳아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헨리 8세는 캐서린의 거센 저항과 로마 교황청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자 종교 개혁을 일으켜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면서까지 앤과의 결혼을 서두른다.
1529년부터 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잉글랜드 궁정에서 출세 가도를 걷는다. 그러나 국민들로부터는 신실한 캐서린 왕비를 쫓아낸 여자라고 반감을 샀다.
1532년 크랜머 대주교가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리고, 1533년 1월 헨리 8세는 앤 블린과 결혼했다. 둘을 열렬히 사랑했고 짧은 시간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9월 7일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헨리는 실망했으나 곧 아들도 생길 것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유산을 거듭하자 부부 사이의 다툼이 잦아지고, 왕은 그녀의 시녀인 제인 시무어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헨리 8세가 그토록 아들에 집착했던 이유는 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위를 놓고 큰 내전을 겪은 전례(장미전쟁)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충복 크롬웰이 제인 시무어를 지지하면서 왕비와 블린 가의 추락을 획책했다. 마침내 앤 블린은 왕자를 열망한 헨리에게 버림받고, 남동생 로시포드 공작 조지 블린과 몇 명의 귀족 청년들과 함께 간통과 근친상간의 누명을 쓰고 1536년 5월 19일 런던탑에서 처형되었다.
그 사이 헨리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 많았고, 1535년 전직 대법관 토머스 모어,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가 수장령에 대해 서약하는 것을 거부한 일로 참수당한 것을 포함해 많은 카톨릭교도가 고문받고 참수되었다.
존 피셔가 처형되자 잉글랜드 북부에서 ‘은총의 순례’라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헨리 8세는 봉기의 지도자 로버트 애스크에게 평화적으로 해산하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속이고, 이들을 진압한 후 봉기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해 처형했다. 이후 많은 카톨릭 수도원이 의회의 승인 아래 강제 해산되었다.
그후 헨리 8세는 앤 블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무어와 결혼했다. 제인은 1537년에 난산 끝에 왕자(후일 에드워드 6세)를 낳았고, 출산 후유증으로 10월 사망한다. 헨리 8세는 제인만을 자신의 참된 아내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녀만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헨리 8세는 다시 한번 결혼하기로 하였다. 에식스 백작으로 승진한 크롬웰은 로마 교황청이 잉글랜드를 공격해 올 경우 중요한 동맹자가 되어줄 개신교도인 클레페 백작의 누이 앤을 권했다. 궁정화가 한스 홀베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를 본 헨리는 만족해하며 앤과의 결혼에 동의했다.
그러나 실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헨리는 ‘플랑드르 산 암말’이라고 부르며 그녀를 멀리했다. 다시 결혼을 무효화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결혼 후 성생활에 대한 물음에 대해 그녀는 단 한번도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혼은 종료되었고, 앤은 ‘왕의 누이’란 칭호를 받고 메리 블린의 가족들이 이전에 살던 히비 성에 들어가 살았다. 동시에 헨리의 총애를 잃은 크롬웰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1540년 7월 28일 참수되었다.
이후 헨리는 앤 블린의 외사촌이자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조카인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에 프란시스 더햄과 비공식적으로 약혼해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 하였고, 왕비가 된 후에도 왕의 시종 토머스 켈페퍼를 총애하였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던 하워드 가를 좋지 않게 생각한 토머스 크렌머가 캐서린의 부정을 왕에게 밀고하였다.
앤 블린과 마찬가지로 혼인이 무효화되고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1542년 2월 13일 처형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18세였다.
헨리는 1543년 유복한 미망인 캐서린 파와 마지막 여섯 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종교적으로 개혁파였고, 보수적인 헨리와 논쟁이 있었으나 그녀가 순종을 표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녀는 메리, 엘리자베스 공주와 헨리 8세 사이의 화해에도 앞장섰다. 그리하여 두 공주는 1544년 의회법에 따라 에드워드 다음으로 왕위 계승자에 포함되었다.
헨리 8세는 말년에 매우 비대해져 스스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그의 몸은 곪은 종기로 뒤덮였고.(매독 증상이었다고도 한다) 통풍까지 앓았다. 병에 시달리다가 1547년 1월 28일 화이트 홀 궁전에서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자녀 세 명이 연달아 왕위에 올랐으나 셋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헨리 8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한다. 그는 인간적인 면에서는 지나치고 비정상적인 여성 편력과 함께 야심이 많고 변덕스러우며, 비열하고 폭압적인 정치를 했다는 면에서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그는 정식 왕비만 여섯 명을 두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는데, 그 중 둘을 처형하고 둘은 이혼했다. 자신의 여성 편력을 위해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창시하면서 많은 종교인들을 박해했다. 앤 블린의 언니 메리 블린,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를 낳은 엘리자베스 블런트 등의 정부들도 있었다. 또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등 시종과 공신들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등 폭압 정치를 했다.
그러나 왕권을 확립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후일 영국의 전성기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는 점에서는 공도 크다.
그는 르네상스적 인물로 그 궁전은 지나치게 화려하면서도 학구적이고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다. 그는 뛰어난 작가, 음악가였으며 욕심 많은 노름꾼이고 주사위 선수였다. 무예와 마상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도 뛰어났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반대하여 신성동맹을 결성하였고, 여기에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가 포함되었다. 헨리 8세는 프랑스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1513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공격, 스퍼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헨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플로든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왕도 전사하고 만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 웨일스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지배와 방비를 강화하고 성곽의 재보수 및 병력 확충에 힘썼다. 또 1531년 빈민 구제를 위한 법령 ‘헨리 8세 칙령’을 발표하여 빈민을 위한 공적 책임을 강조하고, 노동력이 있는 자에게는 취업을 지원하는 등 내치에도 일정 부분 공이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주철제 대포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여 군사력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청동제 대포가 사용되었는데, 청동은 잉글랜드에서 나지 않았고 값도 비쌌다. 주철은 녹는 점이 청동보다 높고, 발포 후 쉽게 파열되어 대포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청동제에 비해 1/3 내지 1/4의 적은 돈으로 많은 주철제 대포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후일 스페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