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영화 <살인 번호>를 지나 <위기일발>을 시작으로 첫 번째 대작으로 기록될 만한 <썬더볼>을 기점으로 007 시리즈는 화려한 신무기와 테크닉의 경연장이었다.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질투와 모방의 대상이 돼온 007 시리즈의 역사적 신무기와 테크닉들을 요약해본다.
<위기일발>
<살인 번호>에서는 아직 무기발명가 Q의 존재가 등장하기 이전이라, 본드가 앞으로 그의 분신이 될 월터 PPK 권총으로 바꾸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신무기들이 없었다. 반면 두 번째 영화 <위기일발>에 이르러 1편에서 부스로이드 소령으로 출연했던 피터 버튼의 뒤를 이어 데스몬드 르웰린이 Q로 첫 등장했다. 이때부터 르웰린은 8편 <죽느냐 사느냐> 단 한 편만을 제외하고 <언리미티드>까지 계속 Q 역할을 맡게 된다. <위기일발>에서는 이른바 그 유명한 007 가방이 처음 그 모습을 보였다. 겉보기엔 보통 서류가방과 다를 바 없지만, 비밀버튼을 누르면 측면에서 사냥용 칼, 금화, 탄약, 접을 수 있는 저격용 라이플, 적외선 투시경 등이 들어 있고 가방 상단에는 누군가 가방을 몰래 열려 할 때를 대비해 소형 최루가스탱크가 장착돼 있다.
<골드핑거>
<골드핑거>에서는 소위 007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이른바 ‘본드카’의 첫 번째 모델이 공개됐다. 애스턴 마틴 DB5는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자동차라 할 것이다. 특수효과를 맡은 존 스티어스와 프로덕션 디자이너 켄 애덤의 합작으로 기발한 장치들이 부착됐다. 회전식 번호판은 3개국 번호판으로 바꿀 수 있으며, 바퀴 너트에 나사 모양 칼을 부착한 바퀴 드릴은 다른 자동차의 타이어를 찢는 데 쓰인다. 본드는 이를 이용해 여자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길에 기름을 분사해 쫓는 적들을 따돌릴 수도 있으며, 헤드라이트 기관총은 총이 발사되는 효과를 내기 위해 아세틸렌가스를 분사했다. 방탄유리 역시 기본이며, 특히 본드의 유머를 보여주는 듯 옆자리 사람을 공중으로 튀어나가게 만드는 사출장치가 인상적이다. 드라마 <전격Z작전>의 원조가 여기 있다. 더불어 악당 골드핑거의 오른팔로 등장하는 오드잡은 한국인으로 설정돼 있어 눈길을 끄는데, 이후 악당 ‘죠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장 인상적인 악당 캐릭터였다 할 것이다. 그의 무기는 중절모로 모자챙이 날카로운 강철로 돼 있어서 부메랑처럼 날아가 무엇이든 쓰러뜨린다. 호머라고 불리는 추적 송신기도 있다. 오드잡은 해롤드 사카타가 연기했는데, 일본계 미국인 사카타는 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 은메달리스트 출신이며, 토시 토고라는 예명으로 프로레슬링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썬더볼>
007 시리즈의 스케일 확장에 기여한 영화답게 개인용 로켓, 껌 크기 정도의 작은 산소호흡기, 카메라 겸용 방사능 탐지기 등 신기한 볼거리가 풍성하다. 당시로서는 환율 대비 시리즈 최대 흥행작이었다. 뛰어난 수중 촬영 장비와 혁신적인 카메라 기법, 화려한 수상 액션 연출은 이후 다른 수상 테마 영화들의 모범이 됐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라르고의 다목적 요트 디스코 볼란테, 본드의 수중 분사 추진 장치가 장착된 배낭 등 켄 애덤의 첨단기술 장치는 수중 액션감독 리코 브라우닝의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다양하게 활용됐다. 특히 디스코 볼란테는 007 시리즈 사상 가장 호화로운 제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두 번 산다>
<썬더볼>의 개인용 로켓에 이어 ‘무기의 소형화’ 경향을 보여주는 ‘리틀 넬리’라는 이름의 1인승 전투 헬리콥터가 등장했다. 가방 4개에 담겨진 장비들만으로 뚝딱 조립됐지만 자동 유도 미사일, 투척 폭탄 등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Q 부서에서 만든 가장 놀라운 무기라 할 수 있다. 본드는 복잡한 일본 산악지대에서 리틀 넬리를 타고 화려한(지금에 와서 보자면 다소 조악한) 공중전을 펼친다. 이것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켄 월리스 영국 공군 중령이 제작, 비행한 실제 장비였다. 월리스는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85번에 걸쳐 리틀 넬리를 조종했다. 그 외에도 <두 번 산다>에는 쫓아오는 적들의 차를 헬리콥터가 거대한 자석을 이용해 들어 올려 바다에 빠뜨려버리는 인상적인 장면도 등장한다. 007의 냉소적 액션 신의 대표적인 예다. 총으로 쓰이는 담배도 등장했으며, 일본에서 촬영된 만큼 본드의 최첨단 스포츠카 도요타 2000GT가 제공됐다.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오히려 007보다 악당인 스카라망가(크리스토퍼 리)에게 더 근사한 장비들이 많다. 평소에는 액세서리처럼 보이는 펜, 담배 케이스, 라이터 등을 조립하면 황금총이 완성된다. 더불어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제트엔진과 날개가 장착돼 있어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자동차 위에 커다란 날개를 얹혀놓은 것 같은 단순한 형태지만 그 활약만큼은 뛰어나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애스턴 마틴 DB5 이후 로터스 이스프리라는 새로운 본드카가 등장했다. Q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로 물속에서는 잠수함으로 변신하고 미사일, 레이더, 먹물분사기 등이 장착돼 있다. 바다로 가라앉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바퀴가 차체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잠수함이 된다. 이제 본드카는 그 무대를 바다로까지 넓힌 것이다. 이밖에도 텔렉스가 되는 손목시계가 등장하는데 여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던 본드는 전화도 아닌 시계로 도착하는 짧은 팩스로 그만 자리를 일어나게 된다.
<리빙 데이라이트>
역시 다시 한 번 새로운 본드카 애스턴 마틴 볼란테가 등장했다. 방탄유리와 방화차체는 기본이고 유도 미사일과 로켓 제트엔진, 빙판용 특수 타이어, 스키, 레이저 총, 자폭장치 등으로 무장했다. 레이저를 옆으로 발사해 상대편 차를 두 동강 내는 장면이 압권이다. 홀로그램으로 차 앞 유리에 메시지가 뜨는 것 역시 인상적. 그 외 미니 로켓을 장착한 휴대용 라디오, 전파 수신기를 이용해 다른 펜이 쓰는 것을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펜도 등장하지만 사실 가장 압권인 것은 본드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동작하는 열쇠고리다. 본드가 휘파람을 불면 5피트 내에서 마취가스를 분사하거나 강력한 폭발을 일으킨다. 또한 체코 탈출 시에 본드걸의 첼로 케이스가 썰매로 사용되기도 한다.
<네버 다이>
새로운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은 다시 BMW 750iAL로 본드카를 바꿨다. 본드카가 이제는 원격조정 운전 기능을 갖게 됐다. 적들의 공세 속에 뒷좌석에 앉은 본드는 소형 리모컨으로 차를 이리저리 운전, 미사일을 발사하고 쫓아오는 차를 따돌리려 타이어를 펑크 내는 쇳조각들을 흘리면서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펑크 난 타이어가 빠른 속도로 원상태로 회복되는 재충전 장치도 빼놓을 수 없다. 이 BMW는 다음 작품 <언리미티드>에 이르러서는 타이타늄 몸체, 헤드라이트 뒤 미사일, 추적장치, 고감도 도청장치 등이 추가되며 그 다음 작품 <어나더데이>에서는 다시 애스턴 마틴 V16뱅퀴시로 바뀌며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를 시도한다. 본드카는 이후 계속 변화를 거듭한 반면 <네버 다이>에서는 본드카 외에는 정작 수류탄 라이터, 손목시계 폭탄 등 평범해진 무기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액션 블록버스터영화의 유행을 선도하던 007 시리즈가 그 선두의 자리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징조였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