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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11-77. (P. 467)
- 박홍규(朴洪奎, 1919-1994), 1988년 6월 19일 강의,
** 있음을 분석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세 가지, 하나는 일상의 경험적으로 이것, 구별된 것으로 있는 이것, 아토몬(atomon), 개체, 물체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경험의 극한으로서 대상에서 더 이상 잘라지지 않는 것 아토마(atoma), 잘라지지 않는 것, 잘라지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마지막으로 실험에서도 잘라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으로도 잘라지지 않은 것이면서 불가분의 것,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아서 그 대상으로서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것, 이데아(idea)가 있다. 경험이 먼저라는 입장에서 잘라지지 않고 같은 성질로 된 아톰이 먼저일 것이고(데모크리토스) 그다음에 생각으로 대상화된 잘라지지 않은 것은 사유의 대상일 것이다(플라톤). 경험의 극한이든 생각의 극한이든 순수한 대상(아톰 또는 이데아)는 실제 생활에서 대상으로서 잘라서 안되는 것이 있다고 느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며, 일상의 삶, 표면 위에서, 또는 지상에서 삶에서 대상은 생명체로서 개체(atomon, individuum)일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경험의 과정을 거쳐서 일반화 그리고 추상화로 간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경험에서 자연의 대상을 깊이 생각해본 데모크리토스에서, 머릿속에서 그려본 대상으로 추상화를 걸어간 것이 플라톤이라면, 그런 머릿속의 대상은 언어 또는 논리적 측면이고 자연에서 생명체 또는 개체는, 일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상을 더 이상 쪼개지 않고 <아토몬>으로 다루어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이다. 먼저와 나중에 대한 견해는 인류의 사유와 삶의 연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리라. /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동물(말과 큰 사슴, 수퇘지)의 그림은 실재하는 동물의 모습이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는 벽화는 그림이라기보다 돌에 새긴 기호 표시와 닮았다는 점이다. 동굴에서 나와 벽에다 그릴 정도로 인간이 대지의 터전에서 자신감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산악이든 물가이든 터전에 대한 지배권의 형성은 동굴 벽화와 다른 신호의 표시들을 창안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 동굴 영토에서 대지로 탈영토화는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동굴벽화와 달리 바위벽화들에서 표시는 지워지지 않게 바위에 암각화를 필요로 했을 것이고 암각화에는 작업의 어려움만큼이나 간략한 기호의 창안이 필요했으리라. 이제 눈의 감각과 다른 소리의 감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인데, 이 소리감각은 남아있을 수 없다. 녹음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와 더불어 인류 역사의 사유의 확장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기호의 표시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지에 대한 자신감과 더불어 다른 동물에 대한 지식이 확장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물의 가축화와 식물의 재배에로 인식의 확장에서 남아있지 않은 언어에 대한 공상과 추측을 해야만 할 것이다. 언어가 이집트 기록상으로 5천년전의 것이라고 하지만, 구석기의 기호 표시에도 상응하는 언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53LMC)
* “있다”는 시간적으로 심층으로부터, 있다, 있을(권능), 있을(능력 재량), 있는(현재, pragma) 있었음(추상, 상징, 기호), 영원히 있음 여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간의 계열 상으로 심층으로부터 상층으로,
6) 있음(영원히) - 여기에 대립은 무(無, le neant)
5) 있었음(추상, 상징, 기호) - 추상화 또는 추론에서
4) 있는(현재, pragma) ων - 철학사에서 현존이다. - 스피노자의 (능동 수동)
3) 있을(능력 역량) pouvoir competence - 스피노자의 양태(능동)
2) 있을(권능) potentia(puissance) - 스피노자의 속성
1) 있다(운동). 무엇인가가 데이터로 있다.
위의 두 차원은 이루어 진 것(fait)
셋째 차원은 뭔가 행해지고 있다(se faisant)
넷째 차원은 뭔가 행해질 수 있다(pouvoir se faire).
아래 두 차원은 스스로 이루어지다(se faire)
1)에서 6)으로 가는 차원들을 연결(발생)으로 본다면 주역의 괘(掛)와 효(爻) 닮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방식은 땅에서 하늘로 이지, 하늘에서 땅으로가 아니다. 게다가 플라톤식의 이데아 중심의 사고는 소위 말하는 슬기인(homo sapiens, 호모사피엔스)과 달리 공작인(homo faber 호모 파버)으로서 작업을 하는 경우일 것이다. 영원한 있음(idea)을 기준으로 데미우르고스가 있을 것이라는 대상을 작업(포이융 poioun)한다. (53LMA)
** 언어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플라톤에서는 일자(l’un)와 다자(le pluriel) 사이에 고유명사라는 의미에서 각자의 특이성이 있는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자(l’un)와 타자들(les autres) 사이에 일반명사라는 의미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일자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에서는 다자의 공존의 의미에서 조화를 생각하며 온일자(l’Un)가 존재론적으로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일자(l’un)은 개체인데, 존재론적으로 하나로서 온일자(l’Un)가 존재론적으로 성립하는 지위를 다시 취해야 하기에, <ousia>의 이중적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즉 존재로서 <ousia>가 있고 언어(논리)에서 범주로서 <ousia>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중성은 한편으로는 자연학을 다른 한편으로 논리학을 성립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논리적 추론의 극한으로 무에 대한 존재의 성립은 – 헤겔의 변증법의 과정에서 성립은 - 최고 유적 존재로서 하나이며 불변의 <ousia>가 있어야 한다. 이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로서 온일자(l’Un)가 존재론의 기저 또는 논리적 공간의 ‘하나’일 수 있다. 벩송에서는 실재론으로 출발하고, 운동과 권능으로 출발하기에 존재는 다발이다. 다발이외에 무라는 것은 실재론에서 있지 않다. 다발(다자)의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만이 생각할 뿐이다. 이 다발에서 나온 개별자들이 고유명사인 것은 특이성으로 질적 반복을 하는 경우이고(달리 표현하면 자기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일반명사인 것은 개체로서 반복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벩송의 창조적 진화 4장에서 언어에 관한 논의에서 실사의 3종류(명사, 형용사, 동사)는 각각이 다발이기도 하고, 실재론에서 셋이 모두 다발이다. 말하자면 셋이 하나의 다발일 때, 벩송의 존재론이고 각각의 다발일 경우에 각각의 위상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위상은, 기억의 발현처럼, 순서(질서)없는 선택(자발성)의 조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질서 없는 조합이 아니듯이, 인격에서 추억의 조합은 나름대로 질서있는 선택의 조합인데 비해, 위상의 창안과 발생은 순서없는 자발성의 조합이라 점이다. 그런데 인격성은 신체를 지니고 있어서 운동하는 신체는 겉으로는(표현상) 일정한(순서있는) 발현처럼 보이지만, 내용은(실재성 차원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발현을, 니체가 말하는, 시간의 문이 열리고 공중에 떠 있는 주사위와 같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갈림길의 우연(contingence)과 달리, 어떤 것들과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아자르(hasard)이다. 새로운 삶, 새로운 행동, 새로운 생성은 이런 생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리라. (53L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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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1998)」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11-77.
박홍규: 지난 학기에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 1987」에 대해 얘기 했지? 그것의 연속이야. 이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個體)이론에 대해 얘기하려고 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개체에 대한 이론이거든.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충분히 설명했느냐, 꽤나 어려운 것 같아.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라는 것이 문장 자체가 간단 간단하고, 범주론(Categoria)이나 형이상학(Metaphysica)을 읽어봐도 자기 사상의 결과만을 얘기하지,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하고 풍부한 설명이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얘기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이야. (11)
(카세트를 가리키며) 이것은 물리적 개체(individuum)야. 이것을 우리는 개체(個體)라고 번역했는데, 그건 한문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이것[개체]을 <atomon>, 즉 쪼갤 수 없는 것이고, <hen anithmô>, 즉 수에 있어 하나이며, 다른 개체들과 <chôris>, 즉 떨어져 있다고 해. 이 테이프는 독립된 존재자야. (11)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개체를 또 <tode ti(여기 이것)>이라고 해, .. <atomon>은 라틴어로 <individuum>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도 쪼갤 수 없다는 뜻이야. ... 그리고 또 <hekaston(각각)>이란 표현도 있지. <ta kath’ hekasta>, 즉 개별자라는 말도 써. (12)
그런데 여기에 있는 이 통일된 것[<tode ti(여기 이것)>]을 <ousia(존재, 실체)>라고 해. 통일된 전체인 이것을 범주론에서는 <prôtê ousia>라고 해. 제1존재(first being). 가장 으뜸된(kuriotata)의미에서의 존재란 뜻이야. 여기에서의 통일의 계기를 <eidos(형상)>, <toi ti ên einai(본질)>라고 해. 그리고 유(類)개념을 <deutera ousia(제2존재)>라 불러.(12) [유개념이 아니라 종개념이 제2존재 아닐까?]
그런데 형이상학편에서는 형상(eidos)이나 본질(toi ti ên einai)을 제1존재라고 해. 따라서 왜 제1존재가 두 개 있느냐는 문제가 생겨. .. 어째서 한편에서는 전체인 개체를 <ousia>라 하고, 또 형상을 제1존재라고 하느냐? (12)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제1존재가 둘인 경우, 언어논리에서, 자연의 배경에서, 전자의 논리는 추상인데, 후자의 자연 뒤에는 원인 또는 원리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ousia>란 것이 무엇이냐 부터 설명해야 돼. <ousia>라는 것은 라틴어로 <substantia(실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내용에 근거해서 번역한 것이지. <ousia>가 <substantia>로 즉시 번역이 되는 것이 아니야 <ousia>에 맞는 번역은 라틴어에도 근대어도 없어. // <essntia>도 아냐, <ousia>의 일부분일 뿐이지. (13)
<substantia>에 해당하는 말을 찾는다면 희랍어로는 <hypostasis>야. 그건 나중에 신플라톤학파에서 나오지. 아리스토텔레스에는 잘 나오지 않는 말이야. (13)
유승국(柳承國, 1923-) 교수한테 존재와 유(有)라는 말의 한문 어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어. <유(有)> 밑의 달 월(月)은 살이래. 고기 육(肉)자하고 같대. 그래서 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有)>래. <존재(存在)>의 <재(在)>는 흙이래. <존(存)> 자도 뭐라고 들었는데, 좌우간 중국어의 어원상 <存在>하고 <ousia>하고 전혀 달라. (13)
박: ..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난문(aporia)들이 나오는 Β(베타)편에서 존재는 유개념도 종개념도 아니라는 거야. .. 그래서 존재란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해지는 것(pollachôs legomena)이라고 하지. 플라톤은 소피스트편에서 <ousia>가 최고류(megista genē)로 나누어진다고 하지. 그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유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또 정의(define)된 것만을 존재라고 하느냐, 정의 되지 않은 것은 존재가 아니야 하는 문제가 나와. 그래서 스콜라 철학에서는 존재를 초월적(transcendental) [transcendance]인 개념이라고 해. (14)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Β(베타)편은 난문(aporia)들의 나열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해명 또는 설명은 제타편(Zeta, Ζ: 제7권, VII)에서 이라 한다. / 아래 참조1, 참조1-1을 보시오.]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뭔가 학문적으로 보여줘야 할 것 아냐? 거기서 증명(apodeixis)이 나와. 증명이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보여주어야 하는데, 증명 하려면 벌써 증명하는 사람이 존재[현존]하고 있어야 해. 내가 지금 저 사람한테 무엇을 증명하려고 할 때에는, 저 사람이나 나나 이미 <있다> 그 말이야. 그렇지? 그러니까 존재 자체는 증명이 되지 않아. 도대체 무엇에 대한 증명이야? 허허(14)
그러면 우리가 존재를 학문적으로 어떻게 취급해야 하느냐? 그 방법이 무엇이냐? .. 학문은 무엇이든 나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pragma(사상)>, 데이터에서부터 출발해. 존재뿐만 아니라, 시간이건 공간이건 마찬가지야. 추상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야? 데이터에서 출발해서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을 어떤 요소들을 추상(abstract)해 내는 것이지. 그 추상의 출발은 데이터야. 우리 학문의 출발점은 항상 데이터야. 데이터 없이 존재가 무엇이냐를 논하면 곤란해. (14-15) [벩송은 의식에게 주어진 것들(데이터)를 다루면서, 사물로서 주어진 것도 다룬다. 프랑스 철학은 당시에 전자를 la donnée로, 후자를 le donné로 구별한 것으로 보인다. 나로서는 전자를 영혼(의식)의 자료(상태들, les états)로 후자를 신체(또는 사물)의 자료(사실들, les faits)로 읽고자 한다. 전자를 운동(시간)으로 후자를 정지(공간)로 대비시킬 수 있다. (53LMD)]
[이태수 등장으로 박선생님 다시 요약 설명]
박: .. 내가 지금까지 <ousia>, 개체에 대해 얘기 했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이 자연적인[물리적인] 세계의 개체거든.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tode ti(여기 이것)>이라고 했고, 또 <atomon>, 즉 <individuum>, 쪼갤 수 없는 것이라 했어, 그리고 <hen anithmô>, 수에 있어 하나라고 했어. <tode ti> 라는 것은 (테이프를 가리키며) 이렇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야. 그래서 고유명사하고 관계가 돼. 그래서 고유명사가 뭐냐 하는 걸 설명해야 돼. 그리고 또 개체에 대해 <hekaston(각각)>, <ta kath’ hekasta(각각의 것)>[개별자]라는 말도 썼어. 그리고 [범주론에서는] 그 개체를 <prôtê ousia(제1존재)>, 가장 으뜸된(kuriotata, malista) 의미에서의 <ousia>라 했어. 그래 놓고는 형이상학편에 가면 형상(eidos)을 <prôtê ousia>라고 해. <prôtê ousia>가 두 개 나오느냐, <prôtê>라는 말을 쓰냐는 문제가 나와. <deutera ousia(제2존재)>를 가정하니까 그것에 대해 <prôtê(제1)>이라는 말을 쓸 텐데 말이야. 그래서 먼저 <ousia>를 알아야 돼. 그것을 <substantia(실체)>로 번역했지만, 라틴어에도 현대어에도 정확한 번역은 없어. <substantia>는 <hypostasis(기층)>에 해당하는 말이니까. 그건 나중에 신플라톤 학파에서 나오는 말이야. / .. 보에티우스(Boèce, Boethius, 480-524) 당시부터 스콜라 철학으로 넘어오거든. (17) [여기서 신플라톤학파는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후자에서는 기층[기저]가 아니라 넘치는 샘(la source)이며 발산하는 빛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를 신플라톤주의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희랍어 <증명(apodeixis)>의 <apo->는 무엇으로부터(from, away)라는 의미이고, <deixis>는 보여준다는 얘기야. 사전에 찾아보면 <apo->에는 <어떤 근거에서>라는 의미가 없어. 학문이란 데이터가 있고, 그 데이터에 관해서 존재가 어떠한 규정을 가지느냐부터 출발하는 것이야. 그래서 그 가장 추상적인 것에서 다시 돌아와. 추상적인 존재에서 출발할 때 잘못하면 빗나가. .. 먼저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존재를 무엇이라고 규정해? 이해란 말도 그 말 자체가 우스워! 허허. (18) [추상의 방향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데아 방향 다른 하나는 아페이론 방향이다. 그리고 존재의 이해(또는 해석)은 자의적이거나, 명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53LMD)
박: 존재와 언어(Sein Und Sprache)라는 책도 있지. (19) [왜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까?]
박: 독일어도 그렇고, 한국어도 그렇고, 다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의 학문, <epistêmê(인식, 학문)>에서는 내 개인의 성격 같은 것은 다 버려야 된다는 이야기야. 본성(physis)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어떤 사상(pragma), 즉 데이터가 주어지고, 이 데이터에 대해서 <이다 ist>니 <아니다 nicht>니,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모든 것을 논할 수 있다는 얘기야. 데이터가 주어지지 않을 때 그런 것들이 과연 무엇이냔 말이야. (22) [학문은 데이터로부터 출발한다. 자연에서 생명이든 물체이든 간에.]
박: ... 물리학적 시간은 물체에 대한 시간이고, 생물학적 시간은 생물학적 데이터에서 나타나는 시간이야. 우리 의식 구조에 있어서의 시간은 우리의 의식이라는 데이터에서 나타나고, 역사적 시간이란 역사 현상이라는 데이터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거기에서 추상화한 시간이야. (23-24)
박 .. 데이터에서 따로 떨어진 시간? 그런 것은 완전히 난센스야. 존재는 더구나 무의미한 것이야. 그런데 초월적이란 것은 그것 자체의 의미가 요컨대 데이터에서 떨어졌다는 애기야. .. // 그것 자체만 갖고서는 대상적 인식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그런데 학문의 입장에서 그것을 학문으로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변화[전환]되느냐 하면, 그 초월자(Transzendenz)가 어느 데이터에서도 규정되어질 수가 있다는 뜻으로 의미가 전환돼.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의 데이터에서는 존재가 규정되고, 어떤 데이터에서는 규정이 안되고 하는 것과 같은 차별이 없다는 이야기야. .. 데이터와 관계없는 것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앙의 대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견해(Meinug, [croyence, cogito])의 대상 밖에 안 돼. (26) [앞에서 초월(transcendental)과 대조해야..]
박: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것부터 출발한다고 해.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똑 같다. // 그래 그것은 우리의 학문적 출발점에서부터 데이터를 분석해서 점점 직접 우리의 데이터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즉 원리(archē)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야. (27) [추상하여 들어간 것에서 원질을 찾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리 또는 원인으로 번역하셨다. 그래서 원인학(aitiologie)라고 하셨다.]
박: 희랍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구별되어서 나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맨 먼저 존재에 대한 파악은 동사로서 파악돼. (테이프를 가리키며) 이것이 있다 없다를 동사로 생각하는 것이지. 파르메니데스 단편에 <hopôs estin te kai hōs ouk esti mê einai(있다는 것, 그리고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이라고 나와. 그런데 이 단편에 대한 해석은 많아. 딜스(Hermann Diels, 1848–1922)는 <daß IST ist(이다가 있다는 것)라고 번역해. <IST>라는 주어를 하나 더 놓았지. 그런데 여기 <hopôs esti>, <있다는 것>에서 주어를 뺐다는 해석도 있는데, 왜 주어를 뺐다는 거야.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당시에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estin>을 썼다고 해. 그럼 <on(있는 것)>도 있고, <ousia(존재)>도 있는데 왜 하필 <estin>을 썼느냐 이거야. 문제는 거기에 있어. 주어를 뺐으면 왜 주어를 뺐냐? .. (28)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 부정법 <einai>와 [단수 삼인칭] <esti>가 달라. <Seiendes(존재자)는 <on>[현재분사]에 해당해. 희랍어에서는 그렇게 분화되어 있어. (29)
그러면 <ousia>는 무엇이냐? 복잡해. 이것은 <einai> 동사의 분사인 <ousa>에다가 어미 <-ia>를 붙인 것이야. 사전을 찾아보면, 이오니아 방언에서는 <ousiê>라 하고, 도리아 방언에서는 <essia>라고 했어. <-ia>라는 접미사는 동사 어간(verbal stem)에 붙이면 동작과 더불어 추상적인 명사가 되게 해. 또 현재분사나 형용사에 붙이면 질(quality)을 표시하는 추상명사가 돼. (29)
유제기: 선생님. 그런데 <ousia>가 일상적으로 집이라든지, 부동산이란 뜻이 또 있다고 하던데요. / 박 그렇지 재산이란 의미도 있고, 또 다른 의미도 있어. (29)
박: .. 라틴어 <essentia>나 <essia>, <esmi>가 어근이 같은 <es->야 그렇다면 <ousia>하고 의미가 달라져. 스미스(Herbert Weir Smyth, 1857–1937) 문법책에 나왔듯이, 동사 어간에 <-ia>를 붙이면, 있다는 동작과 더불어 추상적인 명사가 돼. / 이태수: 그런데 <ousia>는 분사에 붙인 거죠. / 박: 분사(participle)에 붙이면 질을 표현하는 추상명사가 돼. (30)
박: ... 그런데 맨스필드(Mansfield 1932-)는 <ousia>가 정적인 질을 표시한다고 해. 그러니까 이것 봐. 사전에 <자신의 소유인 것(that which is one’s own)>, <자신의 실체(one’s substance)>을 뜻한다고 되어 있는데, 철학적으로 생각해 봐, 가장 일차적(primary)인 의미에서 <자신의 소유인 것>이 뭐야? // 박: 철학적으로 보면 <존재한다는 것>, <존재한다는 질>,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이 가장 일차적 질(primary qualiity)이야. (30-31) [신체, 영혼, 즉 자아는 모두 총체적으로 ‘하나’이다. 신체의 움직임과 함께 퍼져나가는 영혼이 지속하는 하나(동일성, 자아)이다. 즉 어제와 이제와 아제가 연속하는 기억일 때, 그 기억은 있다. .]
박: 감정에 와 닿는 것은 내 존재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31) [신체의 감화, 영혼의 감동은 자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감화와 감동이 있다는 것은 신체와 영혼(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31)
박: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내가 한 해석이 들어가지. 그 때쯤 되면 들어가. 그러니까 <ousia>라는 것은 가장 추상적인 존재에 대한 설명이야. (32) [가장 추상적인 것에서 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구체적인 개체로 되었을까? 인류의 생성-발전 방향은 자연의 필연성을 따를 것이다. (53LME)]
<ousia>가 변화하는 것에 대립해서 사용해. 플라톤에서 <ousia>와 생성(genesis)이 대립되거든. ..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에서는 존재가 맨 처음 무(無)에 대해 딱 구별되어 드러나지. 그러니까 지금 <ousia>를 논할 적에 우리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32) [왜 이오니아 지방과 달리 이탈리아 엘레아에서 다른 생각이 나올까? 그럼에도 엘레아는 이오니아 지방의 포카이아(Phocée, Φώκαια)의 식민지이니 유사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크세노파네스(전580경-485)가 이오니아 지방이 멸망하고 엘레아로 옮긴다는 것이다. - 또 하나 587년에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 점령되었다. - 자연의 생성의 사유가 사변으로 바뀌는 시점이 587년으로 가정해 본 들뢰즈/가타리의 장점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나의 해석이야. .. 희랍철학을 보면, 초기 단계에서는 동적(dynamic)인 세계관이야. 그 후에 추상적인 것이 발달하면서, 정적인 세계관 – 운동이 빠지고 요소적(elementary)인 것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 이 나오게 되지. .. 존재도 처음에는 동적인 <esti>에서 출발해서 추상적인 <on>으로 나아가. (33) [구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추상성은 위계의 상층을 만들고, 게다가 지배체계와 명령체계를 만드는 것 같다. 초기 그리스(이오니아) 지식인의 역동적인 사유가 식민지 지역에서 총독으로 지내면서 사변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지. 우리나라 재벌을 보면 초대 회장은 구체성이 있는데, 3대째 오면 추상성에 빠진다. 일부이지만 이들은 마약과 밀수에 젖는다. 생동성보다 환상과 망상에 빠진다. 정치도 그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환상과 망상의 시대였다. 구체성을 위치하는 것은 환상에서 공상(상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영혼의 이마쥬로 사유하는 것이다.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시대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평화통일영세중립코리아의 문에 지도리를 뺄 것이다. (53LME) ]
이태수: 그렇죠. 그런데 히브리어의 “있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역적인 뉘앙스를 갖는대요. 그래서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서양학생들이 그걸 이해하기 그렇게 어렵대요. // 이태: 그러니까 “있다”를 가령 “불이난다”, “물이 떨어진다[흐른다]”와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존재니, 계사(copula)니 하는 의미는 빼버려야 된다는 거야. (33)
박홍규: <existence[현존]>이란 말은 의미가 또 달라. 그냥 무에 대한 <is>하고 달라. 그것의 함축(implication)이 다르지. 복잡한 말이야. 희랍어의 <eksistêmi>, 라틴어의 <existere>라는 것은 <나타난다 appear>, <싹이 튼다>는 뜻이야. <eksistêmi>가 존재와 같은 말이냐? 좀 곤란해. <existence>라는 것은 다른 말이야. (34)
김남두: 찰스 칸(Charles Kahn, 1945-)의 견해에 따르면, 서양철학에서 존재라는 의미에서 <is>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희랍철학과 접합되면서라는 것이거든요. <신이 있느냐>는 물음을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가 주제적인 개념으로 등장했다고 하지요. /이태수: 그건 바로 <exist>의 의미가 그렇다는 거지. / 김남두: 아니, <to on>이 그렇다는 거지요. (35)
박윤호: 저는 희랍인들이 애당초부터 왜 그렇게 <esti> 또는 <on>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어요. / 박홍규: 바로 그거야. 그것은 희랍 철학의 생존(existence) 문제와 바로 연관이 돼. 요컨대 존재를 논하는 것은 존재가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난문(aporia)에 빠져있기 때문이지. 자기 자신을 위주로 하는 존재의 세계가, 살고 있는 세계가, 파국(catastrophe)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즉 비존재(mē on)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때문에, 존재가 거기서 구별되어 딱 분리되어 나와. 파국에 빠지지 않고, 그저 영속적인(permanent) 세계가 있으면, 도대체 존재 문제가 나오지 않아. (37-38) [생존 문제의 극한이 존재 문제인데, 생존으로서 단위는 분리되어 있는데, 그 속에 분리되지 않은 사회(공동체)와 비유컨대 생존은 독립적이지 못하다. 그러면 생존보다 근원적인 것이 있다, 자연이다. 자연이 존재이며, 자연은 자기 생성인데, 존재의 불변과 다르다. 생존은 자연 안에서이지 존재 안에서 아니다. 존재 안에서는 불변은 나중일 것이다.]
박: ... 따라서 희랍 철학은 그 시대의 문명 속에서 철학자가 어떤 파국에 빠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해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존재론은 설명이 안 되지. 플라톤도 그렇고, 희랍철학은 전부 다 문제학(Aporetik)이거든. (39)
박: 그렇지. 물론 그렇게 보면, 보편개념은 어디서든지 나올 수 있지. 그런데 그것이 유난히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무(無)에 대해서 특별히 분리되어 나오는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성벽이 없어졌다>든지 <도시가 멸망했다>든지 하는 파국으로부터 나오지. 가령 불교에서는 무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Werden)과 유전(流轉), 희랍철학 적으로 말하자면 생성(genesis)과 대립되지. 반면에 희랍 철학이 존재와 무를 대립시킨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역사가, 그 사람들의 생존이 존재와 무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entweder-order, [fr. Ou bien… ou bien]) 속에서 항상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존재론이 나오지. (38-39) [전587년에 솔로몬 성전 파괴. 이오니아 지방의 멸망, 파국에 대한 대처로서 사유는 허무주의 극복일 것이다.]
박:... 거기에서는 창조신이라는 종교로 나타나. 반면에 희랍에서는 지적으로 나타나고. (40) [박선생님은 이 강의(1988) 다음의 「플라톤과 허무주의(1989, 12.)」(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135-167.)에서 허무주의 극복의 두 가지, 하나는 종교, 하나는 플라톤의 철학이라고 한다.]
*
박: 존재와 무는 양자택일이야. 제삼자는 없어. 어떤 한계가 나와야 돼. ..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우리는 연속성이라고 해. 연속성은 항상 생성 속에서만 성립하고 한 번에 다 주저지지 않는 것이 연속성의 특징이야 (41) [플라톤에서는 정지와 운동 사이에 제3자가 나온다.]
박: 한편 연속성에 어떤 것이 들어가느냐 하면, A에서 B로 가기 직전까지 그 무엇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들어가야 돼. 그래야 연속성이라고 하지. ... 그 변하지 않는 측면을 잘라서 볼 때, 무수히 많은 잘라진 부분들이 동시에 공존(共存)할 수 있어, 그것을 공간이라고 해. (41) [공존할 수 있는 공간: 이데아가 아니겠는가. 이데아들은 연속성을 만들 수 있는 자료들일까?]
그러면 공간이란 무엇이냐? 아리스토텔레스는 <topos(장소)>, <poū(어디에)>니 하는 말을 쓰지만, 플라톤은 <chôra(장소)>라는 말을 쓰는데, 티마이오스편에는 그것에 대한 규정이 나오지. 플라톤에서 <chōra>는 <형상(idea)의 흔적(ichnê)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을 의미해. 그것은 무슨 뜻이냐?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측면이 <chōra>라는 것이야. 그리고 변화[플라노네메 아이티아] 속에 들어가 버리면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려. 자꾸 사라진다고 했지? 말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려. (41-42) [흔적이 추억이라면 사라지면서도 총체를 압축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기억인 셈이다.]
그러면 왜 그대로 남아 있느냐? 그것을 설명해야 돼. 그것은 무한정자(apeiron)에서 존재가 드러날 때, 그 무한정자의 성격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가. <apeiron>의 <a->는 결여(privation)이야. 그러면 그 결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해야 돼. .. / 정도의 차가 들어가. .. 그러니까 무(無)는 무인데, 정도(degree)를 인정하는 경우에는 연속성에서 드러나는 무가 결여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야. 그러면 무(無)는 무엇이냐. ..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야. (42)
무는 나에게 아무 영향도 안 줘. 준다면 벌써 무엇인가 있어. / 주는 한에서 [무언가] 있어. 그러면 무규정자(apeiron)는 무엇이냐? 무규정자는 그것이 무니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사실 아냐. 그런데 거기에는 정도가 있어. 영향을 주는 정도가 있더라. 다시 말해 그 뒤에 연속성이 있더라는 거야. 그것이 바로 공간의 특성이야. (43) [무규정자들이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현존하게 하는 것이 공간인 셈인데, 무규정자는 규정자(이데아)와 달리(차이로서) 모자라는 것이다. 이 무규정자는 흐름이 아니고 운동도 아니다. 그런데 무규정자 자차로서 0에 가까운 것은 거의 모든 것이 모자라는 흐름 즉 운동일 수 있다. 0를 비운동 또는 비흐름으로 보면 움직임 없는 또한 이데아 없는 무(無)일 것이다. - 플라톤이나 (종교가 아닌)철학에서는 무가 없다. - 아페이론을 결여의 정도차(차이)로 보게 되면, ‘0와 1 사이’의 윤구병 논문으로 들어간다.]
플라톤에서 형상(Idée)으로부터 죽 나오는 여러 가지 공간의 위계질서(hierarchy)가 있잖아? 그것이 바로 영향이 미치지 않는 위계질서야. 제일 위에 있는 형상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고, 논리적 사유(logizomai)의 대상은 그 자신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물과 결합(koinōnia)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거기에 대응하는 물리적 세계에서는 지,수,화,풍이 입체(sōma)로서 요소(stoicheion)로서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 있으면서 비례에 따라 조화(harmony)를 이루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십면체 삼십면체 같은 입체들은 물체이긴 하지만 영향을 받아서 십면체 십이면체 등으로 변해. 그 다음 단계에는 어느 정도 흔적만 남아. 여기서 더 들어가면 완전히 순간순간 변해 버려. [선분의 비유(네 단계)를 다시 우주형성에 비추어서 설명한 것: 형상, 논리대상, 요소들의 조화, 다면체, 흔적, 순간 변화. - 내가 위에서 말한 “있음의 여섯 단계”와 비교될 수 있다. 총체에 대한 사유는 비슷하다. (53LME)]
그러니까 형상이란 것은 무한정자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측면의 극한치야. 공간에서는 사물이 무수히 쪼개져서 다 분리돼. 서로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 논리적 공간에서는 분석(analysis)이란 말을 쓰고, 물리적 공간에서는 해체란 말을 쓰지. 대상 세계는 실제로는 완전히 엉켜있는데, 엉켜있다는 것은 무한정자의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야. 운동은 두 사물이 엉켜야 되는 데 엉키는 것, 즉 과정이[운동이] 빠져버렸으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존재자, 질들이 모두 해체되어 버려. 해체된 것들이 전부 형상(idea)의 세계에 들어가면 죽 일렬로 나란히 서[수로 되어]. 일렬로 섰다 해서 어떤 것이 앞에 있고, 어떤 것은 뒤에 있고 하는 것도 없어[모든 수는 하나이다]. 그래 갖고 그것들이 연속이 되어 있어. (45) [운동이 완전히 빠진 아페이론의 정도의 차이들은 하나의 수처럼 있고, 각각은 수이다. 그래서 나열되어 있지만 독립적이고 각각은 자존으로 존재자이다. 이데아는 완전 존재자가 되고 다른 많은 정도차들은 현존자가 된다. 그러면 0로서 운동은 흐름이며 형상이 없고 1과 정도차가 아니라 질적 차히이다.] - [이 차히는 데미우르고스와 무관하다. 스스로 존속하며 영속한다. 이데아의 평행론도 상응성도 아니다. 이 차히로서 흐름은 자연주의이며 진솔한 유물론인 셈이다.]
..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파르메니데스는 무엇을 의미 했느냐? 하나[l‘Un]가 된다는 것이야. 존재의 특성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야. 플라톤은 다의 다성(多性)[(les Autres)]을 봤어. 다가 여러 가지로 분화되는 것을 봤어[(hierarchy) 그런데 각각은 자족성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분화된 다[(le pluriel), 개체들]가 존재[현존]한다고 하는 데, 그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 말이야. 하나가 되어야 존재한다는 거야. (45) [파르메니데스는 일자(l‘Un)을 사유하고, 플라톤은 사고에서 논리적으로 이데아들의 다(les Autres)를 인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에서 구체적 대상들이 여럿(le pluriel)인데 각각은 불가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자연물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53LME)]
박: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이상적(ideal)인 우주가 있고 그것을 모방한다고 하거든? 그러면 그 이상적 우주란 무엇이냔 말이야. 분석된 단일 형상(mia idea)이 아니고 서로 모두 엉켜서 완전한(perfect) 하나의 우주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냔 말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복제물(duplicata)이 아니냐는 거야. 티마이오스편의 우주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가령 형이상학에서 운동의 형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복제물 이외의 무엇이냐는 거야. .. 그러니까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 나오는 그런 이론은 의미가 없다는 얘기야. (46)
박: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모든 것의 형상이 동일한 차원에 있을 수 없다는 거야. 플라톤에서는 모든 형상이 똑같이 분석되어서 같은 차원에 서버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본성상(physei)다 달라. 가령 티마이오스편을 읽어보면 곧 알 수 있어. 불이, 형상으로서 불이 있고, 추론(logizomai) 대상으로서의 불이 있고, 원소로서 불이 있고, 십이면체로서 불이 있고, 흔적으로서 불이 있고, 나중에 가서는 불의 성격을 지닌 무한정자가 있다고 해. 전혀 달라. 그런데 플라톤은 불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 내용으로서의 형상이 무한정자와 관계를 맺을 때에 그 위계질서에 따라서 존재의 성격이 각각 달라진다는 거야. (47) [위에서도, 여섯 단계(정도의 차)] [내용상, 플라톤이 불하나지만 불의 정도차로서 연속성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위계질서라고 할 때는 정도차가 불연속인가?]
이것을 언어로 표시해 보면, .. 소피스트편에 나오듯이 플라톤의 명제(logos)는 명사와 동사만으로 간단하게 이루어져.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그렇지 않아.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다 들어가면서 복잡하거든. 왜 그런 이론이 나오는가 하면, 존재가 분할될 때, 플라톤에서는 다 형상으로 나아가니까 모두 똑 같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각각이 각 층을 다 메워준다는 거야. 다시 말하면 위계질서에 따라서 삭 사물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거야. (47-48) [플라톤은 형상의 독립성으로 각각이 평등구조인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위계적으로 층위를 갖는 것이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이론상 국가체계나 종교체계(18등급의 천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가 계급 체계라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지식체계의 등급과 같다. 지금 검찰의 위계는 계급체계인 것과 같다. 이는 군사문화의 국가화이다. 로마에 복속한 크리스트교도 마찬가지이다. 사기꾼이 다단계를 만드는 것과 같아서 사이비 종교가 넘쳐나는 것이고, 정치판도 그러하다.]
박: 응 그런데 그 형상이 변하지 않아야 하거든 그러려면 어떤 조건이 들어가느냐 하면, 그 연속된 것이 딱 끊어져야 한다는 거야. 왜 끊어져야만 하느냐? 만약에 끊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방황하는(phanōmenê) 흐름(flux), 변화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야. 결국 끊어진다는 것은 변화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얘기야. 문제는 거기에 있어. .. 떨어져 있다(chōris)라는 말은 외부 생성의 세계에서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딱 끊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야. (48) [위와 비교해보면 플라톤의 형상은 흐름에 들어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위계에 따라 형상이 변질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벩송이 언어적 측면에서 실사(substantif)를 세 가지, 명사, 형용사, 동사라고 하고, 각각이 ‘움직임의 표현’이라고 한다. 각각이 고유한 상태가 있다는 의미에서 벩송은 플라톤에 더 가깝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이 사물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딱 구별되어야 해. .. 그 말은 외부 생성 속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하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곳[idea]에서만, 본래 명사로서 성립할 수 있는 자기 동일적(identical)인 형상이 드러날 수 있고, 나머지는 그러한 개체에 달라붙어(symbebêkos) 있어. 달라붙어 있는 것[색깔]은 변할 수 있어. .. 그걸[색깔] <symbebêkota(우연적 속성)>이라고 해. <symbebêkota>란 무엇이냐? 복잡해. <같이 발을 묶고 함께 걸어간다>는 뜻이야. (49) [함께가는 그 함께가 무엇이냐가 문제거리이다. (박:)형상일까? (마:)흐름으로서 영혼일까? - 형상이 관여 또는 분유한다는 쪽은 플라톤, 형상이 처음부터 함께 한다는 쪽은 아리스토텔레스, 흐름의 자기 방식의 축적과 압축으로 자기 생성이라는 쪽은 벩송이 될 것이다. 자기 생성은 토지 위에서 이다. 토지의 주장이 유물론이다. (53LMF)]
그런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고, 통일된 측면을 보려고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공간들이 그것을 연결시켜주느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數) 같은 것을 추상(exaireta)이라 그러지. 가령 우리가 선을 그으려면 제2성질(secondary quality)이 있어야 돼. 논리적 공간에서는 선을 그을 수 없어. 논리적 공간에서는 수를 하나 둘 써봤자 성립하지 않아. 아무런 형태도 없어. 그러니까 만약에 유클리드 기하학적 직선을 긋는다고 하면, 우선 제2성질이 있고 또 거기에 자기 동일성을 보존해 주는 유클리드 공간 또는 논리적 공간[유클리드적 논리공간]이 나와서, 그 두 개가 합쳐진 한계선에서 선이 그어져. 적어도 자연적으로[측량적으로, 종이에 그려진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49) [여기서 수는 추상이고 선도 추상인데, 피타고라스의 수도 경험위에 선 것이고, 유클리드 기하학도 측지술 위에 선 것이다. 발생과정에는 경험이 우선하고 그 다음 추상인데, 왜 하필이면 기원전 300년대(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시기에 인류에게 추상화의 극단이 연출되었을까? 구석기를 거쳐서 신석기의 기호화가 목소리의 전승에서 눈의 전승으로 옮기는 과정이었을까? 박선생님 말씀대로 플라톤의 문자 데이터에 대한 학문 연구가 학문 연구의 시작일까?]
수는 항상 감각적 수와 더불어 있어. 형상도 질료(matter), [또는] 무한정자와 함께 더불어 있어. 그것을 <synholon(결합된 전체)>이라 불러. 플라톤에서는 <metechein(분유)>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synholon>이야. 더불어 있어. 그래서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개체야. (50) [하이데거가 벩송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류로 읽은 것은 그가 (non-dit로서) 카톨릭에 기반한 사고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벩송의 영혼 또는 기억은 형상과 더불어가 아니고 경험의 총체와 더불어 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가 희브리 사유라고 하기도 하고, 불교의 화엄 사유와도 유사하다. 파르메니데스의 두 길(하나는 ‘있다’라는,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라는,) 중에서 분화하여 전자에도 두 길(있다의 길)이 있는데, 사유의 길(자연의 길)과 사고의 길(추상의 길)이 두 가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다(多)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야. 파르메니데스에서처럼 일자로서 존재해. 파르메니데스는 비유적으로 구(球)와 같다고 하거든. 그것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 아리스토텔레스도 우주는 비록 개체가 아니지만, 우주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해. 그 말은 우주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우주는 영원하다고 해. (50).
박:..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간은 영원해. 시간이 영원한 것은 우주가 영원하니까 그런 거야. 그러나 우주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 한정되어 있으니까 공간상에서 모든 사물은 <tode ti(여기 이것)로서 이렇게 딱 지시할 수 있고, 따라서 고유명사로 딱 나와. 여기에서 완전한 고유명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와. 공간에서 일회적인 것, 시간에서 일회적인 것, 그 내용에서 일회적인 것이 나와야만 완전한 고유명사가 나올 거야. (51)
이태수: .. 말하자면 한정된 체계(closed system)를 전제로 해야 좌표가 가능하죠. / 박: 공간에서 그렇지. 시간에게는 그것이 삼차원이 아니고 일차원이니까 시초가 딱 나와야 돼. / 이태수: .. 사실상 중요한 것은 통합(coordinate)이라는 생각이 나오면 통합이라는 말이 전제하고 있는 바의 그 세계관을 규명해 내는 일인데, 원인적 지시(causal reference)니 하면서 정작 원인이라는 게 어떻게 성립하는가는 생각지 않죠. (52) [세계관(nont-dit)을 묻지 않아서 차히를 규명하지 않고, 차이들만 보았다. (53LMF)]
박: ... 다(多)와 운동의 세계에서만 고유명사냐 일반명사냐, 일회적인 것이냐 되풀이 되냐 하는 문제가 생겨. ..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같은 것은 고유명사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또 무한정자는 그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에서 고유명사가 나올 수 없어. 한정된(begrenzt) 어떤 것에서만 고유명사는 성립하고, 그 점에서만 고유명사야. (52)
박: 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재론에 서지 않으면? 그렇다면 시간에서는 시간의 시초를 인정해돼. 시간에서는 시초를 인정해야 되고, 생물학에서는 베르그송의 기억이론을 집어넣어야 돼. 거의 모든 기억은 우리에게 들어가 저장이 되고, 그 기억 내용은 사람마다 다 달라. 베르그송 이론은 인격적(personal)이야. 인격적인 것은 비인격적(impersonal)인 것에 대립돼. 개인적인 것은 일회적(enimalig)[univocité]이고, 비개인적인 것은 수(數)처럼 되풀이돼. (53)
박: <tode ti!>[(여기 이것)]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확정될 수 있는 것은 우선 공간에서야. (54)
박: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싸는 것(container)의 내적 한계(inner limit)를 공간이라고 불러. 그것은 그의 개체이론과 우주론에 입각해 있어. 플라톤의 공간, <chōra>하고는 달라. 아리스토텔레스는 <poū(어디에)>나 <topos(장소)>란 말을 사용해. (55)
박: .. 운동하는 한에 있어서 사물을 볼 적에는 자연학에 들어가고,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사물을 볼 적에는 자연학에 들어가지 않아. 여기서는 지금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ousia)를 보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존재란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가 되어야 돼. (56)
플라톤도 티마이오스편 앞부분의 우주론에서 가장 완전한 우주는 생물과 같다고 해. 하나 밖에 없어. 외부에 아무것도 없어. 하나. 파르메니데스적 일자가 거기 들어가 있어! (56)
박: 요건대 존재하는 것은 하나로서 존재해. 그리고 이 개체가 있고 나서 운동도 있고 다른것도 있게 돼. 플라톤은 운동의 세계, 존재의 세계가 이렇게 딱딱 떨어져서 정연하게 정돈해 놓은 철학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입장에서 전부 질서정연하게 정돈해 놓은 철학이야. 플라톤은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죽였지, 소피스트편에서. 그래서 <비존재도 존재한다>고 하고, 허위도 존재와 똑 같이, 진리와 똑 같이 동일한 수준(level)에서 존재해. 선과 악이 동시에 동일한 수준에서 존재해. 무질거한 운동과 질서있는 세계가 동시에 존재해. .. 양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말이야. ..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로 되는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다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로 돌아가. 그런데 그 일자가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무(無)에 관해서 일자인데, 여기에서는 다와 운동의 세계에 있어서 그 일자가 어떻게 성립할 것인가가 문제지. 그러니까 이것이 딱 떨어져서(chōris) 통일되어 있으면, 다른 타자로부터 영향을 안받는다는 이야기야. (57) [헤겔의 통일(절대자)의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로 되는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 일자로 가는 길인데, 모든 목적성을 하나로 만들면 크리스트교 신앙이 되는 것이다. ]
그 다음에 또 하나 목적론이란 무엇이냐? 다와 운동이 있으면 그것에서 상반된 결과가 나와서 서로 모순되더라 하는 것이 제논 아냐?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꾸로 가. 조화사상이거든. 여러 가지 것이 동시에 하나로 향하더라, 조화롭게 되더다. . 목적론은 그 두사람(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이론과 반대야. (57-58)
*
그러면 이제 왜 <ousia>는 두 개가 있냐? ..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존재가 두 개나와. 하나는 무에 대해서 존재이고 하나는 생성에 대해서 존재야. .. 존재냐 무냐의 의미에서 볼 때는 개체만이 제1존재(prōtê ousia)야. .. 생성에 대비될 때는 형상이 제1존재야. .. 단 이 이야기는 내 해석이야. 아리스토텔레스에는 그런 말이 없어. (58)
*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이렇게 개체로서 딱 오려내 주느냐> 하는 것이지. .. <무엇이 이렇게 입체(sōme, body)로서 딱 독립시켜 오려내 주느냐>, 이것이 문제야. 어떤 운동이 들어가야 될 것 아냐?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운동이 속에 들어가 버렸어. 목적론으로 들어가 있어. (59) [어떤 운동이 들어가야 될 것 아냐 – 포이융(poioun, 능동자)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67쪽). 능동자(작용인)로서. 그렇다면 데미우르고스가 포이융과 같지 않는가? 나로서는 이해가 안돼.]
박: 형상은 정적이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고‥… // 박: 아, 형상은 공간에 있다니까, 공간에. (61)
강상진: 생명체에 있어서는 영혼이 모은 것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기능을 해주는 것 아닙니까? / 박: 생명체에서? 영혼(psychē)이 형상(form)인데, 형상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어서 정적인 것이고, 조건이 주어질 때에만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그런 것을 목적론이라고 해, 형상은 절대로 능동자가 될 수 없어. 아까도 말한 것처럼 형상은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서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운동에서 벗어나는 극한치야. (61) [영혼을 고정된 것으로 읽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라며, 벩송은 고정되지 않은 운동이며 축적하고 압축하는 것인데 말이야.]
박: .. 생명체는 영혼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베르그송 이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전부 베르그송 이론인 것은 아냐. (63)
박: 그렇지, 사람이 잘라줬어!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말대로,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잘 들어맞는다는 거야. 그러나 사람을 떠난 자연물(natural thing)에 대해서는 잘 안 들어맞는다는 거지. (63) [상층이론이 부동의 원동자와 개체이론에서 .. 국가와 신칸트학파의 통일과학, 그리고 자본과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존재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토미즘, 신칸트주의, 0와1의 논리에 복속되는 것이다.]
박: 「범주론」에서 중심이 되는 <tode ti(바로 이것)>라는 것은 합성된 것(syntheton)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합성된 것과 합성되지 않은 것(asyntheton)을 구별해. 합성되지 않은 것을 순수 현실태(energeia haplê)라 하고, 나머지 것은 모두 합성된 것이라고 해. (63)
박: 글쎄 내말 들어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보면, 자연물의 일부분으로서 맨 처음에 무생물의 세계가 나오고, 그 다음에 생명체가 나와. 그 중간에 다른 것들이 모두 나오고 그래. (64)
양문흠: 일정한 운동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형상이 아닙니까?
박: 여기 봐. 거기에 대해서 싸움이 있다고, 로스(David Ross 1877–1971) 같은 사람은 제1운동자(prōton kinon)가 갈망(aspiration)에 의해서 물체를 움직인다고 하고 .. /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같은 사람은 제1운동자가 작용하는(agent) 능력도 갖고 있다고 해. 그런데 자연학을 읽어보면 <akinêton(부동자)>이야. 안 움직인다고 해. / 양문흠: 형이상학에서는 활동성(energeia)이죠. / 박: 그것은 가능성(dynamis)이 존재로 간다는 그 과정에서 보니 활동성이야. (65)
박: 허허허.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제일 처음에 제1질료(prōtê hylê)가 있고, 그 다음에 제1대립자(prōta enantia)가 있어. 건(乾), 습(濕)과 같은 거야. 그 다음에 두 대립쌍이 합쳐져서 4원소가 나와 그 때에 그 반대되는 성격은 어디까지나 질이지, 입체(sōma)는 아니야. (66) [질료는 내용물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면, 태극 다음 음양 그리고 사상과 유사하다. 이것을 담고 있는 형식(그릇, 형상)은 다른 것이다. 또는 내용과 표현의 구별에서 내용으로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
박홍규: ... 플라톤에서는 공간에서 형상이 나오니까 운동이 들어가지 않더라, 그런데 운동은 변화하는 것이니까 운동의 자기 동일성(identity)을 따로 놓아야 되겠더라. 그래서 능동자(poioun)이 따로 나와. (67)
박: ..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최초에 제1질료(prōtê hylê)가 있고, 또 대립자들이 있고. 그 다음에 4원소가 있고, 4원소가 모여서 동질소(homoiomere)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유기체의 일부분을 만들어내고, 그 유기체가 모여서 생물체가 돼. 이 중에서 입체[소마]는 물, 불, 흙 등에서 시작해. 그것이 자연적 입체(natural body)야. 그러면 자연적 입체의 <입체(body)>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그것이 문제야. (67-68) [65쪽 다시 설명인데 입체를 문제 삼는다.]
요컨대 제일 밑의 단계들 중에 입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돼. (68)
박: ... 운동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질이 각각 독립해서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 자기 동일성을 갖게 돼. 그것의 극한치가 형상[질로서 형상]이란 말이야. 그것은 어떤 작용주도 될 수 없고, 운동도 될 수 없고, 무엇도 될 수 없고, 말하자면 자체적인 것(kath’hauto)에 접하게 돼. 그 자체적이라는 것은 절대로 작용주가 안 된다는 뜻이야. 그런데 이런 구체적 사물[소마]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입체가 있어야지. .../ 형상은 플라톤에서 절대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니까 가만히 정지해 있지. 따라서 이것을 결합시키거나 뭐 다른 것을 하려면 따로 운동이 나와야 돼. 그러니까 운동인(poioun)을 따로 넣은 거야. (앞의 테이프) 이것을 자른다면 자르는 운동이 들어가야 될 것 아냐?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과연 무슨 운동이냐, 내 말이 그 말이야. (69) [물체의 제작에서는 성립하는 데 생명체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씀.(70쪽)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도구론이라는 것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무생물의 물체(sōma)를 조립 또는 제작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립하는 학문이 인간(생명체)에까지 적용하려 하니, (생명조차 불어넣는) 새로운 제작자 또는 절대적 신을 선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가 중세에 주지주의 사고에 지배적이었고, 근세에도 국가에서도 그리고 20세기 자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지주의가 창궐하였다. (53LMF) ]
박: .../ 그리고 내가 전에도 설명했듯이, 형상(form)은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형상은 밖에서 질료에 주어지기 때문이야! 그런데 생명체에 있어서 형질이라는 것은 유전자 속에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자기 내부에서[dedans] 자기 힘으로 펼쳐 나가지. 그것을 성장이라고 해. 인간이나 생명체의 형태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 속에 잠재적으로 들어 있는 형질이 점점 그 생명력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지. .. 형상은 생명체에 대해서 난센스야. .. 베르그송은 목적론(teleology)이 의미가 없다는 거야. 생명체에 목적(telos)을 놓는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똑 같대. ... 생명체는 영원히 살려고 한다는 거야. 자기 자신을 영원히 연속시키는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가지려고 하다는 거야. 따라서 형상 가지고는 생명체가 설명이 되지 않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큰 난점은 무생물에 대해서는 그럴듯하지만, 생명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야. (70)
손동현: 무기무의 세계에 대한 물리학적 탐구의 근거를 놓아주는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고, 생명을 가진 생명체에 대한 학문인 생물학의 근거를 정초해 주는 형이상학은 베르그송이 제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71-72)
박: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물론 생물학적이야. 그러나 <ousia>와 같은 기본적인 것을 깊이 보면, 파르메니데스나 제논 그리고 플라톤을 거쳐서 그 사람(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학문적 기초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73)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형상과 작용자를 적당히 버물렸다고 한다(72쪽).]
박: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De Anima)를 읽어봐도 그것[형상]이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구별이 안 돼. 그것이 특징이야. 개체이론은 감각적 사물에서 출발해. (73)
박: 형상은 각각 떨어져 있고, 그 자체는 언제든지 <하나의 형상(mia idea)>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직관의 대상이고, 법칙은 두 사물의 관계 즉, 그 양자가 연속되어 맺어지는 데서 성립해. 그것을 무한정자에 환원시켜야만 관계가 나와. 그러니까 베르그송은 근세 학문은 사물의 관계(rapport)를 취급한다고 해. 그 점을 명백히 한 사람은 오귀스트 꽁뜨(Auguste Comte, 1798-1857)야. 꽁뜨에 따르면 학문은 현상(phénomène)의 법칙(loi)을 취급하는 것이지, 원인(cause)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을 취급해. 결국 근세에 와서는 관계 법칙을 취급하기 때문에, 인과법칙이든 무엇이든 법칙이라고 그러지, 형상이라고 하지 않아! (75)
박:... 무한정자에 환원시키면 관계 법칙만 나와. 내가 요전에 결정론이냐, 비결정론이냐 하는 문제를 이야기했지? 관계는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두 개로 나누어져. 그런데 고전 물리학은 필연적 관계를 보려는 것 아냐? 따라서 고전 물리학은 인과율 같은 것을 가정(hypostasis)으로 놓고 나가지. 반면에 현대 물리학에서는 그렇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확률(probability)을 이야기해. 필연적인 것을 보면 결정론이 나오는데 우연적인 것이면서도 그 사물의 자기 동일성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 그러한 극단적 우연성이 잘 드러난 곳이 생명체야.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에 나오는 영혼[생명]의 자기운동(autokinêton)에서도 그것이 드러나지. 생명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드러나[생성, 창조].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이 유전이야. 생명체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근세 물리학의 인과론이 생명체에 오면 흐리멍덩하게 되잖아. 그러나 철학은 생물체와 무생물체를 동시에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을 봐야지.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이론은 다 무너져 버려. .. 결국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에 기초한 물리학은 궁극적으로 발전하지 않아. 무한정자에 환원시켜 봐야지. 물질을 무제한하게 쪼겔 수도 있고, 무제한하게 많은 관계를 맺어볼 수도 있고, 무제한하게 큰 우주를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이 물체를 무한정자에 환원시켜볼 때의 특징이야. [프랑스 물리학자인 프랑수아즈 발리바르(Françoise Balibar, 1941-)는 철학에서 질료라는 개념 또는 물질의 무한정자라는 개념이 있었기에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76)
양문흠: 선생님, 여기서 끝내시고‥…
이태수: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구, 또 ‥…
박홍규: 자네들 가게. (77, 마지막 세 문단) - 1988년 6월 19일)
(19:01, 53LMF)
# 인명록 ***
469-39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 450-386)가 소씨를 아테네의 “등에”라고 불렀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세 이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3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50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300경 알렉산드리아 유클리드(Euclide Εὐκλείδης) 기하학 집성.
287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기원전 287-212, 시실리섬의 과학자) 원리 발견 - 유레가(Eureka!, j'ai trouvé!, 알았다! 찾았다!)
O
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탄생.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hypostases»)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L'Âme, ψυχη) [이 말로 보면 중간에 점으로서 일자, 상층의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일자는 자연자체가 된다.]
480 보에티우스(Boèce 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480-524) 로마 최후의 저술가, 철학자. 특히 논리학자. l’Organon d'Aristote와 l’Isagogè de Porphyre.번역.
1798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 대혁명과 그리고 18세기 혁명의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체험하고,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며 역동적인 조직의 변화를 설명하는 사회학을 창설하였다. 그런데 한 여인에 사랑에 빠져 이 사회학을 종교화하려 했다.
1838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독일 철학자,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도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였다. 1862년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의 다양한 의의에 대하여»로 튀빙겐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라츠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뮌헨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신학을 연구한 후, 1864년 사제에 서품되었다. 브렌타노는 심리학에 의해 철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으며, 발생적(發生的) 심리학과 기술적(記述的) 심리학을 구별하고 후자에 역점을 두었다.
1848 헤르만 딜스(Hermann Alexander Diels, 1848–1922) 독일 그리스 고전학자. 그리스 학설사(Doxographi Graeci, 1879(재 1929),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대한 심플리키우스(Simplicii In Aristotelis Physicorum libros quattuor priores commentaria (2 vol. 1882–1895)(재판 1962), 소크라테스 이전시대의 단편들(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Berlin, 1903)
1857 스미스(Herbert Weir Smyth, 1857–1937) 미국 언어학자, 고전 문헌학자. 대학교수 고전연구학회 회장.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 그리스 문법(A Greek Grammar for Schools and Colleges, 1916)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1877 로스(William David Ross 1877–1971), 스코틀랜드 철학자. 도덕론자. 아리스토텔레스 전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Aristotle's Metaphysics, 1924),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이론(Plato's Theory of Ideas, 1951
1919 박홍규(1919-1994) 우리나라 철학자, 플라톤과 벩송 전문가.
1923 유승국(柳承國, 1923-) 도원(道原), 충북 청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수학, 동 대학 문리대 교수. 성균관대 박물관장, 도서관장, 한국철학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연구실장, 동방문화연구원장을 역임. 저서: <동양철학논고>, <한국의 유교>, <한국의 종교>.
1932 하비 맨스필드(Harvey Claflin Mansfield 1932-) 미국의 정치철학 교수. 하버드 대학교 정책학 교수직.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홉스 등의 정치철학을 연구했다. 그는 레오 스트라우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1943 윤구병(尹九炳, 1943-) 전남 함평, 있음과 없음: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보리, 2003, P. 244),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윤구병 글, 보리, 2013, P. 416.)
1944 양문흠(梁文欽, 1944), [前]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ㅡ'과 "他者"를 중심으로 한 파르메니데스 편 연구, 서울대, 1984, 박홍규.>
1944 이태수(李泰秀, 1944-) 인천, 괴팅겐 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 대학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45 찰스 칸(Charles Kahn, 1945-), 몬트리얼 태생, 콜럼비아 대학 박사, 고대철학 전공, 그는 플라톤을 신플라톤주의로 해석한다. 「Drama and Dialectic in Plato's Gorgias. 1983」(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1:75-121.), Plato and the Socratic Dialogue: The Philosophical Use of a Literary Form. 1996, 윤리학(Ethics, 1998) Plato and the Post-Socratic Dialogue: The Return to the Philosophy of Nature, 2014)
1947 김남두(金南斗, 1947-)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 석사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 철학 박사.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
1947 손동현(1947-) 대전대학교 석좌교수, <Die Seinsweise des objektivierten Geistes, 1985, Johannes Gutenberg Univ. Mainz, Stallmach.>
1948 코부쉬(Theo Kobusch, 1948-) 독일 철학자. 철학사가. / Theo Kobusch. Sein Und Sprache: Historische Grundlegung Einer Ontologie Der Sprache (1987)
1956 박윤호(1956-2003) 경남대 교수, 희랍 고전 철학,
1965 강상진(姜相溱, 1965-) 서울대 철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서양고중세철학, 서울대 교수.
* 유제기(s.d.) 박홍규 강의 수강자(1988년도).
(20:36, 53LMF)
# 참조1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타편(Zeta, Ζ), 제7권(VII).
[제타편(Zeta, Ζ), 제7권(VII): 이렇게 한 개념을 실체로 정립하는 사실은 플라톤주의로 회귀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둘러서 두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강조할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는, 플라톤의 인간의 이데아가 소크라테스와 칼리아스의 밖에 현존하는 것처럼, 개별자들 밖에 현존하지 않는다. 2)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로서 정립한 개념은 종의 개념이지, 류의 실체도 한 층 높은 보다 일반적인 개념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를 보편자에 대립시킨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주의의 가장 큰 잘못은 감각적 실재성에 직접적인 닻을 내재 않은 개념들을, 즉 류(le genre), 온존재(l'Etre), 온일자(l'Un)와 같은 개념들을 실체화하였다고 평가한다(이 개념들은 그 자체들이 감각적인 것과 멀어지는 만큼이나 더욱더 풍부하다고 생각하였다). 가지적인 실재성을 침전물 없는 것으로 구해내려는 고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감각적 사물들을 형상들이라고 부르듯이(예를 들어 말의 영혼, 참나무의 영혼과 같이) 비물질적 실재성들을 제일 실체들이라고 불렀다. - 이것은 뒤물랑(Bertrand Dumoulin, s.d.)의 해제에서 따온 것이다. ]
# 참조 1-1 :
1922 오웬(Gwilym Ellis Lane Owen, 1922-1982) 영국 철학자, 고대철학사가. 예거(Werner Jaeger)와 로스(David Ross)를 본 따서, 그는 철학사를 발생적 방법으로 고찰하였다. - 박홍규 선생님은 “고별강연(1984)”에서 오웬을 언급하고 있다.
뒤물랑(Bertrand Dumoulin, s.d.) 카나다?, Recherches sur le premier Aristote((Eudème, De la philosophie, Protreptique), 1981)(2000, Vrin), Analyse génétique de la Métaphysique d'Aristote(Paris, Belles Lettres, 1986. Montrea, Bellarmin, 1987), - 철학지(The Philosophical Review)(Vol. 100, No. 3 (Jul., 1991), pp. 519-521)의 보고서(Daniel T. Devereux, s.d.)[미국 버지니아 대학 은퇴교수]에는 뒤물랑이 발생적 방법(the genetic methode)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발전(the development)을 설명하려 한다고 한다. - 뒤그레(François Dugré)는 1989년 논평에서, 뒤물랑은 그 자신의 1981년 논문에서 오웬(Owen, 1922-1982)의 진술들을 모른 척(ignore) 했다고 한다.
#참조 2: “이다(현존,기호)”보다 먼저 “있다(존재, 이미지)”는 것에 대한 기원적 의미.
-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제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몇 가지 기호체계들에 관하여, 217-283 (§05. 587 av. J.-C. - 70 ap. Sur quelques régimes de signes, 140-184)
<용어를 구분하기 위하여 기호[신호] 체제(un régime de signes) 속에서 여러 신호에 관한 학문이 있는데, 기호학(une sémiologie)은 언어와 연관해서 다루고, 기호론(une sémiotique)은 말씀의 의미와 기의 대상과의 관계를 다룬다고 해보자. 그러면 화행론(une pragmatique)은 말씀과 행동에 관한 것일 것이다. - 중세 유명론에서는 물체(감각, 비감각)에서 와는 달리 사유에서 의미(semo)와 음성(vox)으로 나누어진다. 의미는 두뇌에서 음성은 입(혀)에서 둘 사이의 배치문제 인데, 소리와 관련하여 두뇌의 배치에서는 두 가지(말하기 쓰기) 계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몸으로 행하기에는 두뇌가 귀(소리)와 연관도 있지만 눈으로 보기(이미지)에 더 많은 연관이 있다. 소리에 관한한 행동과 연관은 눈보다 속도와 범위가 넓다. 발 없는 말[言, 언]이 천리를 간다는 것은 매끄러운 면을 흐른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글은 패이고 줄쳐진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50MLE)>
<다시 정리해 보면, 전587년경에 동아시아(중국)든 서아시아(중동)든 간에, 셈계 중동이든 그리스 이오니아든, 음성(vox) 대 기호(semo) 체계 사이의 반전이 일어난 것 같다. 이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 시기를 문제 삼은 것은 흥미롭다(이전에 시경(공자)도 있을 것이고, 일리아드(호머)도 있을 것인데). 물론 이전에도 기호체계(문자 표기)가 있었겠지만, 역사시대로 전승은 이 시기쯤이라는 것이다. 귀(소리) 대 눈(기호), 환청(幻聽) 대 환시(幻視), 이어서 혀(langue) 대 손(symbole)로 전개되면서 있음은 목소리(voix) 대신에 그림(image)이 중요 지위를 차지 할 것이다. 이오니아 지방은 그래도 목소리로서 전승이 이어졌을 것인데, 아테네에서도 소크라테스에서 ‘다이모니아’와 대화를 치면 목소리의 전승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플라톤에서는 목소리보다 이미지로 전환하여, 이데아가 손과 그림보다(선분의 비유에서) 우월성이 확보되는 시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세에서는 하늘(신)의 전달로서, 소리의 전승이 계속되었으리라. 하늘의 기표를 지상으로 내려놓은 갈릴레이 덕분으로 다시 기호(표기, 대수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리라. .. 이상하게도 스피노자와 벩송은 기호로서의 신체를 이미지로 간주하면서 이미지를 눈(형태, 도형)의 전달이라기보다 신체(운동 이미지, 영혼)의 전달로 바꾸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53LME)>
# 참조 (φ): 유(有)-존재(存在)
실증적이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의미의 첨가가 이루어지는지, 중동이든 인도이든 페르샤이든 그 전설들도 그 만큼 많은 이야기를 지닐 수 있다. ... 얼마나 많은 의미를 생산하겠는가! 의미론의 약점이다.
有(유)란 글자는 우(又 = 또 우의 변형)자 아래에 월(月(肉 = 고기 육의 변형)자를 덧붙여 만든 것이다. 又란 글자는 다섯 손가락 중에서 셋을 펴든 모양을 본뜬 것이라고 풀이된다. 또한 又란 글자는 오른손을 뜻하는 것이며, 오른손은 자주 쓰인다 하여 '또' '다시' 의 뜻이 됐다는 이야기다. 又가 오른손을 나타내는데 반해 왼손을 나타내는 것은 우(又의 변형)라고 일컬어진다. 肉이란 글자는 고기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 有는 손 ()으로 고기(肉 = 月)를 잡고 있다는 뜻의 글자다. 月(肉 = 고기 육)은 또한 月(달 월) 자의 글자꼴과 같다고 해 有는 손()에 잡힐 듯 하는 달(月)에 빛깔이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출처: 중앙일보, [중국한자] 315. 有 있을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