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3년 <월간 ROTC> 15, 16, 17호에 3부작으로 연재 게재된 글입니다.
동시에 이글은 동아일보사 주최 신동아 '제 1회 넌픽션 공모' 최종 심사작 7편 중에 선정되었던 글임을 참고로 알립니다.
이 글 연재분은 총 5부작입니다.
아울러 이 글에 나오는 주인공 제아(JEEA = 濟我 = 制亞)는 지은이 자신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1993년부터의 글인 4부작 이후는 추가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구리 아들
구리 아들. 1
1-1
천덕꾸러기
제아는 세살 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다.
제아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 강제 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나던 해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상당한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 왔지만, 운수사업에 실패하고 게다가 놀음에까지 손을 대 가산은 엉망이 되었다.
바로 위로 제아의 형이 있었지만, 잦은 병치레를 소홀히 한 탓에 예닐곱이 못 되어 병사하였고, 제아 밑으로 난 갓난 남동생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돌볼 사람이 없어 어머니를 따라 생명을 거두어 제아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봄, 가을이 멀다 않고 빚잔치와 이사를 다니는 바람에 남은 것이라곤 정말 '됫박' 하나만 남은 처량한 떠돌이 신세가 된 처지 제아네 가정이었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아들 하나인 제아를 보았지만, 제아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제아는 남의 집 신세를 면치 못하는 천덕꾸러기로 또 한 번 떠돌이를 당해야 했다.
수저질과 오줌, 똥도 제대로 못 가리는 어린 제아는 모진 운명의 행차에 몸을 내 맡겨지게 되었다.
제아의 모친은 동네에서도 소문난 현모양처였다고 한다.
그러나 찌들린 살림살이가 제아를 홀로 남게 하였다.
제아의 아버지는 여러 기술을 일본에서 노동팔이로 배워 온 듯 했다.
목수일도, 제봉틀을 고치는 일도, 5마력 똑딱방아를 돌리는 일도, 우마차를 만드는 일도, 자전거며 라디오며 시계며 닥치는 대로 고칠 수 있는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온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그날 번 것은 노름으로 다 날리는 판이었으니, 오죽 하였겠으랴.
그나마도 제아를 어렵게 얻고부터 술을 끊고 작심하였다는데, 없이 지내기는 매한가지였다.
제아는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물동이를 쳐다보던 기억을 어렴풋이나마 상상으로라도 해보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화분 옆에 단아하게 검정색 치마에 한복을 차려 입고 언젠가 찍어 남겨 둔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유일한 어머니의 유품일 뿐이었다.
제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자 마을의 유씨댁에 임시로 맡겨졌다가, 네살 되던 해에 달포 또는 수개월 만에 만나던 부자 간의 생이별을 청산하고, 새로 아이가 둘 달린 의붓엄마를 맞이하였다.
제아는 한 분 뿐인 옆동네 이모집을 누이들 손을 잡고 가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 “어무이가 보고 싶으면 이모한테 와라.”라던 이모 말씀이 있기도 하고 이종사촌 누나들이 제아를 데리고 다녀서이기도 했다.
제아의 자작시 '동천'과 '물메기 동네'는 그가 자란 강원도 영월군 남면 연당4리 고향 새터 마을과 인접한 창원리 이모댁의 풍경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동천(東天)‘
갑자기
고향 하늘이 보고 싶다.
앞에 산이고
뒤엔 언덕이 있는 곳
저 멀리로 산들이 겹겹이 둘러쳐진 동리
버들개지가 움트는 개울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계단을 이룬 논두렁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 기다려 주던 곳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숲이 놀이터이던 동네.
산등성이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다보면
초가지붕 굴뚝에 저녁밥 짓는 연기와
여물죽 끓이는 아버지들의 소리가 정겹던 곳.
밤늦도록 공회당에 모여 놀던
벗들은 다 어디로 흩어져
나처럼 오늘
하늘을 물끄러미 그릴까.
아!
안기고 싶은 곳
동촌(東村)에 있는 새터 마을.
작은 산을 두 개 넘어 있는 물메기 동네는 10여 호가 사는 아담한 촌마을이다.
'물메기 동네'
걸어서 간다
시오리 길을 걸어서 간다.
봉
봉이 보인다.
저 봉을 넘고 내리 길을 달려
산모랭이
이모집을 단숨에 간다
누나랑 간다.
산허리 말에 외딴 초가집
매미가 울던 느티나무 숲
숲속의 약수터
가재와 송사리가 친구이던 개울
찰옥수수와 참외가 맛있던 배나무골.
여름방학이 몹시도 짧았던 곳
물메기 동네.
입학
제아가 7살이 되던 해 아버지 구리 아저씨는 어린 제아를 걸려 연당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제아는 5살 때 이미 영월발전소 앞 동네의 흥월국민학교 팔괴분교에 맡겨졌었으나 너무 어려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터라, 꼭 학교에 보낼 것을 작정하였던 것이다.
제아는 너무 어리고 약해 보여(입학 후 신체검사 키 1백9㎝,몸무게 16㎏) 학교로부터 더 커서 오라는 주문을 받았다지만 간곡한 부탁으로 학교에 입학이 되었다.
제아의 담임은 장정근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제아를 내 자식처럼 여기며 어머니 없는 아이라고 극진히 돌보아 주셨다. 가을 운동회 때 런닝구와 검은 반바지 등 당시의 운동복과 모자, 심지어 운동화까지 사 주셨던 걸 기억한다.
제아는 이 후 선생님을 찾았고, 후일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드렸다.
마음의 편지
“장정근 선생님께”
찬바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계절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릴 적 시골마을 공회당 담벼락에 기대서서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던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봄 햇살보다 더 따사롭게 저희들을 비춰주셨던 선생님.
얼마 전 선생님께서 “모두들 살기 힘들다는데 어떻게 지내니? 얘,시간 나면 애들 데리고 놀러와.여기 좋은데 너무 많다.”하며 이 제자보다 먼저 전화를 주셨을 때,저는 35년 전 산촌(山村)인 강원도 영월 연당초등학교의 1학년생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키 1백9㎝,몸무게 16㎏으로 유달리 여위고 조그만 저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각별하셨습니다.세살 때 어머니를 여읜 저였기에 선생님은 저에게 바로 어머니셨습니다.
선생님은 가을 운동회날에 운동모자와 흰색 러닝셔츠,검정 반바지,검정색 운동화를 어머니대신 제게 사 주셨습니다.
제가 그 때 그 운동복과 난생 처음 신어본 검정운동화를 신고 달리기를 해 몇 등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지금까지도 선생님의 따뜻한 보살핌은 선명하게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그후로 20년의 세월이 지난 1984년 여름,휴가를 내어 저는 강원도 횡성으로 선생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아버님께서 “오늘의 네가 이만큼이라도 성장한 것은 바로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이신 장선생님 덕분이다.나중에 꼭 찾아뵈라.”고 당부하시기도 했지만,선생님은 언제나 제 마음의 영원한 어머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 늦가을,선생님은 초등학교 동창회에 오셔서 밤늦게까지 저희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저희 동창생 모두가 엎드려 절을 올릴 때,어느새 예순을 넘기신 선생님의 주름진 눈가에도 재회의 눈물이 고이셨습니다.
선생님! 40여년을 천직으로 여기시던 교단을 교원정년법 개정으로 이달 말 떠나시죠? 저희들도 참스승이신 선생님이 아이들 곁에서 멀어지는 것이 싫습니다.
선생님은 수없이 길러 내신 제자들 가슴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으실 겁니다.
“아쉽지만 이제 그만 해야지.더 좋은 선생님들이 많은데 뭘”이라시는 선생님께 갈채를 보내드립니다.아직은 춥지만 새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지금까지 쌓아두신 하늘의 큰 상복(賞福)을 듬뿍 받으시길 기원드리며 글을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제자 문태성 올림.
(1999. 2. 23 국민일보).
풍금과 피아노
제아는 그 당시 대개의 시골학교가 그랬듯 운동장 가운데 놓였던 풍금을 잊지 못한다.
전교생 조회가 끝나면 교실마다 이 풍금은 옮겨져 음악시간에 사용 된다. 그리고 운동회 대나 학교 행사에서 이 풍금은 보물이었다.
제아가 피아노를 처음 본 것은 읍내에 경필 쓰기 대회를 하러 영월국민학교에 가서 피아노경연대회장에서 나오는 소리를 보고 창문 사이로 본 것이었다. 크고 웅장해 보였고 부러워 보였다.
제아는 음악을 못한다. 혼자서 터득한 하모니카 외에는 악기를 다룰 줄 모른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영월중 1때 처음 받은 음악점수가 29점이었음이 이를 증거해 준다. 중 2로 올라가기 전 송재학 담임선생님(현재 미국 거주)은 같은 대학 친구인 음악선생님께 특별한 부탁을 하시었다. “우리반 1등인 데 음악점수가 너무 안 좋아 2학년에 오를 때 전교 8등 안에 들어야 내 체면이 서고, 얘가 실장(지금의 회장)을 할 것 아니냐? 점수를 올려 달라.”고 요청을 하셔서 받아 낸 점수가 59점, 이 성적에 힘입어 제아는 485명 중 전교 5등으로 2학년에 진학하여 5반 실장이 되었다. 이왕 주려면 80~90점을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촌놈 전교 1등 하는 건데... 후일 음악선생님은 “난 음악점수를 아주 못하는 애가 아니면 60점 이상 다 줬어. 얘” 이러신다. “그게 바로 저”라 그러니 “그랬나?” 이러신다.
제아는 후일 자녀 3명 모두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배우게 하였다. 음악에서 플래시(#)와 샵(b) 붙은 계명도 잘 모르는 제아는 19년 간 교회 찬양대를 했고, 지금은 찬양대장을 하고 있다.
새벽 공부
제아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른 마지막 시기의 학생이었다.
인근 읍내의 중학교에 진학 하려면 대단한 입시경쟁을 치러야 했다. 관내 수십 개 국민학교에서 배출된 학생은 읍내에 하나 밖에 없는 영월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했다. 합격생은 라디오로 관내에 발표되었다.
제아는 6학년 때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곤로불에 한 밥을 먹고 도시락을 가지고 친구들과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서 2킬로여 떨어진 학교까지 가면 6시 정도다. 제아는 반장이어서 촛불을 켜고, 의자 위에 올라가 칠판에다 문제집을 가득하게 한 바닥 베껴 놓으면 친구들이 와서 그걸 다시 노트에 적고 푼다. 최상진 담임선생님(현재 대구 거주)은 8시쯤 와서 채점과 함께 60점 미만자는 혼쭐을 낸다. 다시 하루 종일 문제지 훈련이 끝나고 저녁 7시쯤 체력장 연습을 마지막으로 귀가를 한다. 점심을 먹을 때도, 미국에서 지원받은 옥수수빵을 나눠줄 때도 시험성적이 안 되면 못 먹는다.
이렇게 공부를 한 탓에 중학교 진학률이 좋았고, 지금도 제아는 초등학교 때 제일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할 정도이다.
제아가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춘천에 계시는 고모는 제아에게 추천에 와서 학교를 다니도록 했으나 제아의 아버지는 아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다. 영월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고모 문소동 여사는 춘천에 온 제아의 옷 소매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실로 꿰메어 가지고 가서 입학금에 내도록 하였다. 고모는 춘천에서 강릉여관과 영월여관을 하며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어서 제아를 돌봐 줄 수 있었으나 제아를 춘천으로 진학시키지는 못하였다.
추억의 열차통학
강원도 산골 마을은 늦게 깨이기도 했겠지만, 생활이 넉넉한 집이 드물었으므로 중학교에 진학한 제아의 친구들이 많지 못했다. 40여리 떨어진 읍내의 중학교는 열차통학과 자취를 하였다.
이른 아침 새터 마을에서 거의 한 마장쯤 떨어진 연당역까지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보통 때는 신작로로 다니지만, 시간이 빠듯하면 산모퉁이로 난 철길을 걸어간다.
기차가 온다는 신호기가 내려져 있는 것이 보이면 뛰어야 한다.
통학차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차의 맨 뒤에 객차 하나를 매단 것으로 제천에서 출발하여 송학·입석·쌍용·연당을 거쳐 영월로 간다.
학생들은 객차를 「사람차」라고 부르고, 바로 앞의 빨간차는 「차장칸」이라고 불렀는데, 객차는 고등학생·중3·여학생이 주로 타고, 중1·2년생은 차장칸이나 화물칸에 태워지기가 일쑤였다.
열차는 터널 둘과 청령포, 동강 철교를 지나 영월까지 10여분 걸리지만, 역에서 학교까지는 또 한 참을 걸어야 했다.
읍내까지는 버스가 다니지만 차비가 비싸므로 한 달에 460원 하는 기차를 탄다.
집안이 좀 나은 아이들은 쌀 댓 말 정도에 하숙을 하고, 친척집에 얹혀 신세를 지기도 했다.
자취를 하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럴만한 형편이 안 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차통학을 했었다.
그때의 월세 자취방은 한 달에 1천원, 쌀 한말은 7백 원 정도로 기억된다.
열차를 놓치면 지각은 물론이고, 그냥 결석을 하거나 "땡 까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미 열차가 홈에서 출발했더라도, 역무원의 제지를 무릅쓰고라도 뛰어가 열차에 매달려야 했다.
중학생이 달리는 열차를 타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럴 땐 선배들이 손을 잡아 주거나, 마음씨 좋은 기관사는 기차를 천천히 운전해 도와주는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 시간이 남으면 역앞 마당이나 찐빵집, 만화가게에서 시간을 때운다. 공부를 잘 할 풍토도 까닭도 없었다.
어쩌다 열차를 놓치는 날에는 할 수 없이 하루를 자야 한다. 부랑인들이 많았던 대합실보다는 친구집 신세를 져야 했다.
어떤 때는 역구내에 정차해 있는 석탄차의 차장칸에 숨어 타다 차장에게 들키기도 하지만, 차장은 오히려 내릴 걱정을 해준다.
다행히 연당역에서 교행으로 설 때도 있지만, 통과할 때에는 가파른 고갯길인 돌고개에서 기차가 서행할 때 뛰어 내려야 한다. 물론 다치는 때도 있지만, 차장은 잘 내리라고 도와주는 편이었다.
토요일은 학교가 일찍 파하면 친구들과 철길을 따라서 걸어서 집으로 오는 때가 많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의 긴 철교를 건너 터널까지 빠지면 남면 광천리다. 이어진 각한재의 칠공구 터널은 7백 미터가 넘는데다 S자 형이어서 터널에 들어가면 눈 뜬 장님이었다.
기차가 한 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가지만, 터널 안에서 기차를 만나기도 한다.
대피소를 못 찾은 친구들은 엎드려야 한다. 교복이 까맣게 되고 얼굴이 엉망이지만 그래도 좋았던 때였다.
통학반장은 중3 형들이 맡았는데 열차에서 미리 뛰어내리거나, 먼저 타는 후배들이 있는 날은 모두가 '줄빳다'를 맞아야 했다.
사용기간이 지난 「패스」를 눈감아 주던 개찰원, 학생들을 내 자식처럼 돌봐 주던 기관사와 차장, 하룻밤을 기꺼이 재워 주던 친구의 부모, 차 시간에 맞게 청소하지 말고 가라던 선생님, 손을 내밀어 잡아 주던 선배 이런 분들이 그립다.
그 분들은 모두 마음이 푸근한 인간미 넘치던 분들이었다.
지금 같이 각박한 세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살펴 주고 밀어주고 도움 주는 미덕이 필요하다.
인구가 급감하고 곳곳마다 중학교가 들어선 지금, 한적하기만 한 고향역의 30여 년 전 활기차고 정겹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자취 5년
제아는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연당에서 영월까지 열차 통학을 접고 읍내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하였다.
중 2학년이지만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다리미질도 하였다.
당시에는 책상이 귀하던 때여서 밥상이 곧 책상이었다. 담장 너머에 있는 집안의 뒷켠에 책상 하나가 비를 맞고 있었다. 그 집 주인에게 빌리러 갔더니 기꺼이 빌려주셨다. 나중에 안 일인데 그 책상 주인은 지역에서 총선에도 출마한 적이 있는 중앙대 출신 원성희 씨였다.
겨울에는 불을 안 때고 지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아마 고1말쯤이다. 아버지께서 어렵게 보내준 연탄값을 대학생에게 과외공부를 위해 불을 안 때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과외선생님은 반두한 형(당시 건국대)이었는데 친구들과 새벽 5시에 모여 공부를 배웠다.
추운 겨울을 나는 방법은 비닐을 뒤집어쓰고 공부하고, 잠잘 대는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도 안 와 공부도 잘 되거니와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밥은 곤로불에 해 먹고 학교에 갔다 저녁에 오면 다시 공부하다 자고 새벽에 공부를 갔다.
그 때 배운 친구들은 다 잘 되었다. 주국영(이학박사), 김홍규(증권 지점장), 이기수(한국과학기자협회장), 김성희(한국전자통신연구원), 김양수(공학박사, 건설교통부) 등 학동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공한 친구들이다.
제아는 읍내에서의 자취기간 5년 동안 연탄가스 중독으로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낭구 이야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제아는 줄곧 땔나무를 하러 눈이 내린 산비탈의 양지쪽을 찾아 다녀야 했다.
유달리 춥기도 하고 가파른 산속에서 지게째로 뒹굴기도 하였고, 보리밥의 힘은 이내 꺼지기가 일쑤여서 지겟짐을 두고 집으로 와 밥을 비우고 다시 가서 져 내려와야 했다.
제아에게는 고향에서 처음 마을 뒷산으로 낭구(나무)하러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30년도 더 지난 그때 그 시절의 얘깃거리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시골 어느 집이나 낭구를 해야 굼불(군불)도 때고 소여물도 끓이고 밥도 짓던 터라, 유독 나만의 기억은 아니다.
산은 부모님들과 제아와 동년배, 선배, 형들, 동생들의 이야기이자 산골 촌뜨기들 모두에게 향수의 무대가 된다.
봄에 새 잎이 날 때부터 여름이 지나 가을 낙엽이 질 때까지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지는 않는다.
대신 산나물을 뜯으러, 도라지 더덕 잔데를 캐러, 딸기 머루 깨금 찔레 개살구를 따먹으러 간다. 이 때는 뱀과 옻나무, 땅벌 등을 조심해야 한다.
늦가을부터는 집집마다 나무를 해 둬야 한다.
아침나절과 오후 나절에 한번 씩 하루 두 번 산을 오르내리며 두 짐을 해야 기본이다.
나무 한 짐은 하루치 분이어서 그렇게 미리 해 둬야 비오는 날과 눈 오는 날에도 나무가 떨어지지 않는다.
대문 밖 집 앞에 쌓여진 나뭇단을 보고 그 집 남자 일꾼들의 부지런함을 평하기도 했다.
나무를 하러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동네 제아네집 뒤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언제나 산에 갈 때 꼭 나를 부르러 왔다. 같이 동무하고 가자며 부르러 오면 제아의 아버님은 어여 어서 가라 하셨다. 친구에게 끌려 다니며 나무를 배운 셈이다.
어머니가 가까운 뒷산으로 머릿짐으로 나무를 하시러 다니실 때, 같이 따라 다니며 개나리 봇짐 하듯 걸빵(멜빵)으로 나무 한 단을 등에 메던 때가 시작이었다.
그러다 6학년쯤 되어서부터는 친구와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네는 소위 화전민으로 마을에서도 산 쪽 높은 곳에 집이 있는, 가정 형편이 어렵고 형제들도 많아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친구는 시골에서 하는 일들에 관한 한 나보다 선생이었다.
높은 산에 올라도 무서움도 없고, 심성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반죽도 좋았다.
나무도 잘하고 내 짐도 잘 꾸려 주었다. 체구는 작아도 어른 못지않은 「어른 아이」였다.
겨울 방학 때는 겨우 내내 으레 나무를 하고 난 후 노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가까운 곳도 가고 먼 곳을 갈 때도 있었는데 우마차가 있는 집들은 도시락을 싸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다니는 모습은 마을에 자주 보이는 풍경이었다.
나무의 종류는 비나무, 싸리나무, 갈비, 검부재기, 솔버댕이 등 여럿으로 그 때마다 가는 곳에 따라 종목을 돌아가며 한다.
물론 장작도 있지만 이건 돈을 주고 사는 경우가 많거나, 통나무를 썰고 도끼로 패야 한다.
비나무는 주로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등이 아닌 작은 키의 가지 많은 나무들을 말한다.
이들 나무가 다 베어지고 나면 나중에는 가시나무들도 벨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는 특수 제작한 가죽장갑을 읍내에서 사서 손에 끼고 낫질을 해야 위험하지 않다.
그러므로 가죽장갑과 나이론 끈으로 된 지게꼬리(지게끈)가 부러운 때가 있었다.
비나무를 다하면 단을 3개로 만들어서 짐을 꾸린다. 한 아름씩 벤 나무 묶음을 대여섯 개 정도씩 모으면 한 단이고, 3단이 한 짐이다.
처음에는 한 단씩 등짐으로 지고 다니다, 차차 두 단, 세 단으로 늘려 나갔다.
높은 산 위나 절벽, 경사지가 있는 곳에서는 산 아래로 굴려 보낸다.
이 때 잘 묶어야 흩어지지 않으므로 칠구랭이(칡넝쿨)로 단단하게 묶어야 한다.
싸리나무는 싸리만 모여 있는 곳을 만나기가 어렵고 어른들이 놔두질 않는다.
무겁기도 하지만 싸리가 탈 때 따닥 대는 소리가 듣기 좋고, 화력도 좋아 마디다(오래 탄다)고 해 좋아하는 나무였다. 타고남은 검댕이와 재들은 화롯불에 오르기도 한다.
갈비는 소나무들이 모여선 곳에서 깍지로 떨어진 솔잎들을 긁어모으는 나무다.
깍지로 모은 것을 다시 간추려서 장을 친 다음 옆단에 나무를 대고 잘 얹어야 나뭇짐이 균형이 잡히고 볼품도 생긴다.
갈비는 어머니들에게 불을 때기도 좋고 화력도 좋아 인기지만, 불이 오래가질 못하고 잔불이 없다. 부지깽이로 하나 둘씩 아궁이에 밀어 넣던 소년에게 희망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검부재기는 비나무, 싸리나무가 다 베어지고 난 후 또는 마땅한 나무거리가 없을 때 풀들이 말라 모여 있는 비탈진 곳에서 그 밑 둥을 잘라 모은 풀나무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기가 일쑤다.
이 때는 낫질을 한 번만 하지 않고 빠르고 능숙하게 옆으로 누이여 노려야 한다.
낫을 빠르게 움직이므로 특별히 발을 조심해야 다치지 않는다. 검부재기는 지게에 올릴 때 조심해서 잘 꾸려야 한다.
지겟짐을 일으키기 전 옆단들을 쳐서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지게를 세우고 나서도 균형을 잘 잡혔나 확인해야한다.
솔버댕이는 소나무를 가지 쳐 놓았다 마른 후 가지고 오거나 작은 솔을 아예 밑 둥을 잡는 일로 상깜(산감)이나 산 주인에게 들키면 경을 치므로 조심한다.
눈이 며칠씩 내려 양지가 보이기를 기다려 산에 오를 때는 나무를 찾아 눈밭을 다니기도 하고, 산에 다니는 길에는 토끼 옹노(올무)를 놓아 산토끼 맛을 보기도 한다.
산 중턱이나 비탈진 곳에서 나무를 할 때는 각자 산골짜기를 택해 나무를 하지만 나뭇짐을 꾸릴 때는 서로 도와주기도 한다.
집으로 오는 도중 힘들면 여러 번 쉬기도 하고, 어떤 날은 허기가 지면 짐을 둔 채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지게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뭇일은 중학교 기간은 물론 읍내에서 자취를 하던 고교 때까지 이어졌고, 고 3때에야 전기가 마을로 들어오고 연탄도 때는 집들이 한 둘씩 시작되었다. 그 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던 스물 네 살 때에도 하였다.
이 일은 군 전역 후 직장을 서울에서 가지게 되고, 부모님들도 제재소에서 송판 쭉정이를 사서 나무를 때였으므로 마감되었다.
나무하러 다니던 친구들이 꽤 많았고, 모두들 그 때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성장기 때의 그 흔적으로 거울에 비친 내 등은 지금도 약간 굽어 있다.
요즈음의 아이들, 청소년들에게는 얼핏 들어보거나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일 테지만 산을 오르내리며 배우고 체득한 자연과의 만남과 끈기가, 지금까지 시골 출신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인내심의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촌에서 자란 사람들 누구든 뚝심과 정직이 모이고 쌓아져, 무슨 일이건 헤쳐 나가려는 힘의 원천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노라면 어느 해거름 무렵 저녁밥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때,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게 작대기를 내짚으며 오솔길을 내려 집으로 환향하던, 고달팠지만 정겨운 모습이 잊혀 지지 않고 생생히 떠오르는 건,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가 다가와 여전히 나뭇꾼 소년으로 내 주변에 맴돌기 때문인가 보다.
이 소중한 체험을 어디에서 다시 할 수 있을까?
대장간
제아네 집 마당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구리 아저씨는 우마차를 만든다거나, 낫이며 쟁기, 호미 등을 손수 만들었다. 동네 분들도 구리아저씨의 기술을 알아주는 터여서 대장간은 자주 불을 붙여야했다.
'대장간'
황톳굴 화로(火爐)에
숯을 넣고
아들은 풍구를 돌린다.
쇳덩이를 올려놓고
신이난 풍구질에
시뻘겋게 달구어진 철에서는
열기가 촌각을 다툰다.
내리 친다
아버지도 아들도
땀이 솟는다
불끈 쥔 망치가 열을 낸다
다듬는 소리.
호미, 낫, 보습, 문고리...
빠른 손놀림으로
모양을 잡는다
땀이 솟는다
물에 스치었다 꺼내어랏!
진흙 바닥에 꽂힌
아버지와 아들의 작품
담금질 솜씨가 빚어 낸 정경
녹아진 부정(父情).
구리네
유독, 제아의 아버지는 무학(無學)의 쓰라림을 달래기 위해 제아 만큼은 잘 뒷바라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는지, 이미 다섯 살 때 국민학교에 보내는가하면 국민학교 3학년 때는 먼 이웃에까지 서당을 다니게도 하였다.
그러나 도청 소재지인 춘천으로의 고교 진학은 '애비 옆에서 커야 된다'는 것으로 만류하기도 하였지만, 어떻게든 '자식 출세시키기'가 유일한 희망이자 한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커가는 제아를 보고 사는 것이 큰 낙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제아를 '구리 아들'이라 불렀다.
구리는 고물 중에서 값이 많이 나가는 고철이다.
제아의 아버지는 찌든 가사와 제아의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물상에 손을 댔다.
돈이 될 수 있다는 소, 돼지, 닭을 키워 보았지만, 자본금이 없는 투자는 번번이 실패하고 빛만 더 늘게 되었으므로, 궁리 끝에 새로 벌린 사업이 고물상이었다. 고물상 이래 봐야 지게 하나와 대저울이 전부였다.
제아는 주말에 집에 와도 쉴 틈이 없었다.
지게짐으로 20여리나 떨어진 북쌍리 들골을 지나 사장리까지 가서 페비닐을 가져 오기도 하였고, 냇물가에 버려진 헌 고무신, 빈병, 프라스틱류를 줍기도 하였다.
마을과 외떨어진 골짜기의 담배, 고추밭에 널려진 폐기된 비닐을 모아 등짐으로 큰 길까지 나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제아를 봐서라도 거져 주다시피 하여 마루 밑까지 뒤져, 빈병과 가마솥 깨진 것, 보삽(쟁기에 다는 삽) 망가진 것을 내어 놓았다.
'구리네'라고 불려지는 제아네 식구들은 저녁 늦은 시간까지도 언제나 먼지 나는 고물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구리 아저씨는 한 달 여를 영월읍내에서도 동강을 따라 정선 쪽으로 멀리 떨어진 미탄 진탄과 문산리, 거운리 쪽으로 고물장사를 갔었는데, 그 동네에 살던 어린아이가 셋 딸린 과부 한 사람을 데리고 와, 제아네 집에서 멀지않은 면사무소 동네에다 구멍가게를 내면서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첫 번째 새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물론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제아에게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즈음 제아의 아버지가, 제아의 여동생을 친자식이 아니라 첫 번 째 새어머니가 외도해서 나은 자식이라고 몰아 부친 것은, 의도가 다분히 섞인 '갈라서기'였다.
식구 모두는 밤을 새우며, 기약 없는 헤어지기를 하여야 했다.
구리네 식구들은 모두 12식구지만 씨와 밭은 각기 다르다.
제아, 첫 번째 어머니가 데려온 2명, 첫 번째 어머니가 나은 3명, 두 번째 어머니가 데려온 3명의 부모가 각각 다르니, 아이들 9명을 각각 물으면 씨는 넷이요 밭은 셋이 된다.
두 씨와 한 밭, 한 씨와 두 밭은 말할 필요조차 없이, 단일 혈통도 화목이 어려운 요즘 세상살이에 얼마나 어지러운 인위적 이합집산이었겠는가?
풀 수 없는 숙제의 운명은 제아를 문제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구리아들 문제아 - 그는 스스로 '제아'가 되기로 했다. 껍질을 깨고 나를 맑게 해야 한다며 제아(濟我)로 이름을 지은 것은, 그가 제세(濟世)는 못 하더라도 제아(濟亞)라도 하려 함이리라.
그러나 잘 될 성 싶은 떡잎은 질 좋은 품종과 비옥한 토양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랄 수 있음이 보편진리 아닌가?
첫 번째 어머니가 데려온 두 아들은 서울의 구둣방과 읍내의 유리가게로, 첫 번째 어머니가 낳은 가운데 외도라는 딸아이는 부산으로 국민학교 5학년 때 내 쫒겨 졌고, 두 번째 어머니가 데려온 3자녀 중 젖먹이를 빼고는 여자아이는 남의 집 양녀로, 사내아이는 서울로 각각 보내져 각자는 이산가족으로 홀로서기가 되었다. 기약이 전혀 없는 생이별이었다. 슬픔이자 현실이었다.
1-2
꿈같은 대학 입학
강원도의 눈은 한번 내리면 녹을 줄을 몰랐다.
겨울이 마냥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1976년의 어느날, 제아는 10여리 떨어진 창원리 도랑 개울물에서 자갈을 채취하는 새마을 취로사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렀다 금방 도착한 전보를 받았다.
'합격. 18일까지 등록. 상경요'
서울에서 온 대학시험 합격 소식이었다.
제아는 시골 고등학교의 제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인문계 고교가 영월읍에 생긴 이래로 첫 배출된 졸업생이었다.
서울로 졸업 첫해에 합격된 동기생은 모두 일곱 명, 그 가운데 제아가 끼게 된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에서 서울로 진학하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첫 졸업생들의 노력과 선생님들의 열정이 110여명의 졸업생 중,고교졸업 직후에 30여명은 곧바로 공무원으로, 70여 명은 대학에 진학케 된 것만 보아도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아는 기뻐서 아버님께 소식을 알려 드렸다.
구리 아저씨는 별 신통해 하지 않았다.
구리 아저씨의 바램은, 교대에나 진학하여 2년을 빨리 마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면 하였었는데, 서울로 그것도 4년짜리를 갔으니 그렇기도 하거니와 밭 한 뙈기, 논 한마지기 없는 판에 당장 입학금이 걱정되었다.
입학금 25만원을 마련하는 데는 어림도 없었다. 제아네 동네 호수가 80여 호는 되지만 대학에 가는 것은 논 팔고, 땅 팔아 가는 것이라며 엄두를 못 내는 데다가, 제아네를 뭐를 봐서 빌려 준다는 말인가?
그나마 하던 고물상도 찬바람이 불면서 구리 아저씨가 몸져 눕게 되자, 집어 치웠으므로 더욱 그랬다. 하는 수 없이 제아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친척들을 찾아 갔지만 갑자기 큰 돈은 어렵다고 하였다.
마감일을 이틀 앞두고 고등학교에서 고 3 담임이 부르셨다. 성금전달 이었다.
한순기 교장 선생님은 제아에게 전교생과 선생님들이 모금하여 마련한 5만 8천원을 건네 주시면서, 제아에게 당부하시는 것이었다.
"꼭 졸업을 해야 하네. 졸업 후엔 모교로 다시 와야 해"
제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고교 3년을 학비도 면제시켜 준 모교의 은사님들도 일일이 격려를 해 주었다.
시간은 빨리 지나 갔지만, 돈을 구하려던 노력은 허사였다.
제아는 무작정 청량리행 열차에 몸을 맡기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등록금은 은행에 납입토록 되어 있었지만, 대학의 교무과장과 경리과장을 찾아뵙고 등록 연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후보 순위자들이 대기 중이므로 입학금을 못 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연기는 불가하며, 더구나 입학금도 못내는 처지에 어떻게 4년을 다닐거냐?"는 것이었다.
모교에서 받아 온 '영월고등학교 성금'이라는 봉투를 보고서야, 교무과 오과장은 24시간을 연기해 줄 수 있다 하였다.
성금은 약속 이행을 위한 담보로 두고 가라고 했지만, 등록을 못하면 돌려줘야 할 금액이라며 돌려받았다.
가까스로 왕복 시간 등을 고려해 이틀을 연기 받았다.
그러나 이틀이라는 시간은 제아에게는 2시간도 못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농협에 다니는 동네의 누나가 10만원까지는 출자금을 내고 회원이 되면 대출이 가능할 거라고 귀뜸해 주었다.
김종훈 조합장(현 영월임협조합장, 전 강원도의원)을 만났다.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반가와 하며 자신도 어렵게 공부하였음을 이야기해 주고, 보증인 두 사람을 세우면 담보 없이 20만원까지 특별 대출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보증인 두 사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동네의 젊은 장씨 한 분이 쾌히 인감도장을 내주었지만, 남은 하나를 구해 올 재간이 없었다.
동리의 새마을 부녀회장의 바깥 주인도, 제아가 세 번이나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제아의 아버지와 가까운 이들 역시 강한 보수성으로 빚 보증서기를 거절하였다.
그럴 때마다 제아는 입술을 깨물고 대문을 나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19일 하루가 또 지나고, 20일 약속한 그 날이 밝았다. 서울과의 500여리 원거리를 감안 한다면, 오전 10시 이전 농협에 서류를 넣어도 될지 말지 하였다.
그런데 절망의 20일이 갑자기 희망의 20일로 바뀌었다. 장례식을 치르러 윗마을로 갔던 전씨 아저씨(현 감정평가사 전용수 부친)가 갑자기 쾌히 승락하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농협에서는 약속한 20만원을 지급으로 대출해 주었지만, 출자금인 1만 5천원을 뗀 18만 5천원을 쥐어 주었다. 시간은 낮 12시 40분이었다.
제천에서 갈아 탄 원주행 직행 버스는 예정시간보다 5분 빠른 오후 2시 55분에 원주 터미널로 도착하였다.
마침 중앙고속 3시 00분이 보였고, 그 옆에 동부고속 3시 30분발이 대기하고 있었다.
매표구로 급히 가보았다.
차표는 매진이었다.
다 되지도 않은 밥이지만 가름막이였다.
낭패의 표정으로 넋을 잃고 서 있을 때, 2번 창구의 아가씨가 불렀다.
"왜? 급한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다
"서울에 급히 가야 된다"고 하자 "표가 하나 있다"며 내주었다. 17번이었다.
고속버스의 안내양은 서울 동대문 터미널까지는 2시간 10분이 소요된다고 차내 방송을 하였다. 그러면, 서울 도착 예정 시각은 5시 10분...약속 시간은 5시였다.
고속버스는 원주 톨게이트 진입 직전에, 기름을 넣는다며 또 주유소까지 들르는 것이었다. 애가 탔다.
버스는 다행히 중간 휴게지인 가남휴게소를 거르고, 바로 서울로 달렸다.
버스가 한강을 건너고 장충공원 앞을 지나 동대문 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한 건 감사하게도 오후 4시 54분이었다. 시간을 의심 하였지만 시계탑도 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15분이나 일찍 도착해 준 것이었다.
서둘러 청계천 고가 밑의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택시 한 대가 발 앞에 멈추어 섰다. 55분이었다. 급히 길을 재촉했다.
장충체육관 앞의 정문을 올라 본관 앞에서 택시를 내려 달음박질로 교무과 문을 여는 순간, 괘종시계는 드라마의 시각처럼 오후 5시를 치고 있었다.
교무과장이 혼자 남아 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이 문군! 자네 기다렸네. 총장님께도 보고를 드렸네.”
교무과장은 바로 경리과장에게로 제아를 데리고 갔다.
경리과장(박경호)은 웃으면서 제아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나도 이야길 들었네. 그래 이번에는 얼마를 가져 왔나?"
"그런데... 1만 5천원이 모자랍니다."
"자, 내가 대신 내주지. 입학식 때 갚게."
입학 등록필증을 받고 하향행 야간 보급 열차 안에서야 제아는 평온한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그 동안 은혜를 베풀어 준 모든 이에게 감사하면서...
내일은 모른다.
그러나 새날이 밝으면 새로운 출정을 해야 한다.
정복! 정복을 위하여...
1-3
무작정 상경
강원일보와 지방 방송에서 제아에 대한 모교 선생님과 후배들의 온정의 손길 소식이 나오자, 당시 육성회장이었던 서울한의원 박영훈 원장은 제아를 불러, 5천원의 상경 차비와 서울에 가면 자신의 처남인 김씨를 만나서 거처를 정해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친필 서신을 써주었다.
그해 3월, 제아는 입학식을 앞두고 아버지가 마련해 준 9천원의 상경비를 들고 무작정 상경하여, 중부시장에서 건어물상을 하는 김씨를 만났다.
편지를 읽은 김씨는, 사정은 딱하나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주선치 못하므로 오늘 하루는 여관에서 자고, 내일은 다른 방도를 찾아 가라며 여관비 2천원을 주었다. 제아는 서울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뜬 눈으로 보냈지만 입학식은 참석할 겨를이 없었다. 거처를 찾아 봐야 했다.
중학교 때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와 고교 3년생인 하월곡동의 친구 엄창식의 집을 주소만 들고 물어서 예고도 없이 찾아갔다.
일주일 정도 있으면서 천천히 있을 데를 알아보라며, 누이가 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다시 3일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제아는 거처를 마련치 못하였다.
정릉동의 국민대학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그의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인 김양수(현, 공학박사, 연구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많은 학생들 틈에서 신입생 김군을 찾기는 어려웠다.
본관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내려, 아무런 강의실이나 들어 가 보려고 문을 여는 순간 김군이 나오는 것이었다. 우연이었다.
김군은 제아의 그간 이야길 듣고, 자신이 기거하는 정릉 3동의 자취집으로 제아를 데려갔다. 달동네로 무허가 6만 원 짜리 전세집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시작한 자취는 더욱 어색한 것이었다.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하루는 식량도 돈도 바닥이나 주말이 되었지만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앙대학에 다니던 친구 라병일(현 미국 이민)이 5백 원을 가져다 주길래, 그걸로 누른 쌀 한 봉지와 콩나물로 밥을 지어 간장에 셋이 실컷 먹기도 하였다.
제아에게는 그 때 비벼 먹었던 먹었던 그 콩나물 보리밥의 맛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다.
아르바이트를 해볼 양으로 제아는 정릉동 집 가까운 곳의 전봇대에다 과외 공부를 가르친다는 광고를 붙여 두었다.
두 녀석이 이 판자촌 움막에 공부하겠다고 찾아와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김민수 학생이 몸이 아프다며 공부를 하러 오지 않았다.
제아는 민수의 친구를 따라 민수네 집엘 가보았다.
단칸방에 홀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민수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을 돌려 학비를 벌고, 어머니는 행상을 하신다 하였다.
민수의 어머니가 선생님이 오셨다며, 맥주 한 병을 쟁반에 가지고 오셨다.
제아는 처음으로 이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모른다.
민수는 영화배우 김지미씨 집에 신문을 넣는데, 신문값의 열배 정도를 학비에 보태 쓰라며 주어, 그나마 학교를 잘 다닌다고 어머니가 일러 주었다.
제아도 민수를 동생처럼 도와주어야 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고 열심으로 살아가는 죄 없는 어린것들을 보고 제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느덧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올해 마흔 다섯 살 가량 중년이 되었을 김민수, 청년 시절을 잘 보냈을까?!
민수는 홀로서기를 잘 하였을까?
험한 세상 풍파에 떠밀려 좌초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용기를 잃지 않고 쓰라림을 감내하고 그는 지금 이 땅 어디선가에서, 선택받은 한 의젓한 젊은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제아는 가까스로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지만, 이 달동네가 하나 둘 철거되기 시작하자, 이 집도 비워 주어야 했다.
주인이 방값을 돌려주고 자신들도 다른 집으로 이사 가고 집을 비우자, 친구는 우선 친척집으로 임시 숙소를 옮겼지만, 제아는 친척 하나 없이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상경 3개월도 채 못 되어 보금자리를 잃게 된 셈이었다.
곧 바로 철거 반원이 와서 수 일 내에 집을 비워달라고 하였다.
제아는 혼자 허물어진 집에서 나날을 보냈다.
가정교사를 원한다는 광고를 붙여 두었지만, 동네가 파장 분위기라 그래서인지 통 연락이 없었다.
상경할 때 가져온 돈도 바닥이 난지 오래고, 버스비까지 바닥이 나고 말아 제아는 정릉에서 필동 동국대학까지 걸어 다녀야 했다.
아리랑 고개를 지나거나 성북동 뒷산을 넘어서 다녔다.
걷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스무 살의 한창 나이에 배고픔만은 달랠 수 없어, 신문지에 주먹 도시락을 말아 공터에서 먹어야 했다.
제아는 뛰었다.
가방을 옆구리 옆에 끼고 시가지와 골목길을 지름길을 택해 달렸다.
길을 잘 못 들어가 돌아오기도 했지만 편안한 걸음걸이를 할 수가 없는 30리도 더 되는 먼 길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그렇게 보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루핑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창문과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
천정이 없는 철거집에서 노숙을 마지막으로 하고 하는 수 없이 보따리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우선 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옮겨 먼길을 걸어서 다니는 것을 청산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독서실이 적격이라고 생각되었다.
대학 바로 앞에 있는 중구 묵정동의 중구독서실의 재수생 틈새로 자리를 옮겼다.
값이 저렴하면서도 공부는 물론 잠을 쪼그리고라도 잘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서실! 아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잠은 그렇게 새우잠으로 해결하고 독서실 앞의 중부시장 안에서 수제비는 50원, 밥은 100원이었는데 밥 보다는 수제비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
씁쓸한 낙향
어느새 1학년 1학기는 그렇게 빨리 지나가고 여름 방학이 되었다.
대학에다 아르바이트 신청을 냈더니, 중소기업중앙회의 수출 조사요원으로 알선해 주었다.
무더운 여름 낮에 온 서울 장안을 돌아다녔지만, 2학기 등록금에는 태부족이었다.
결국 그해 9월 미등록으로 대학으로부터 제적을 당해, 무적의 학생이 되어 대학까지 마저 떠나야 했다.
제아는 서울로 상경한지 6개월 여 만에 사람들이 하던 말대로 '서까래도 번듯하지 못한 집, 장도 얻으러 다니는 집에서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 1년도 못가 그만 둘 것'이라던 예견을 증명이라도 하 듯 씁쓸하게 낙향하는 열차에 올라야 했다.
제 1라운드의 도전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을까?
아니면 공이 너무 빨리 울린 것인가?
제 2라운드를 준비하고 기다려야 했다.
제아는 1년간의 재충전 기간에 돌입하였다.
제아의 고교 동창인 주국영(현, 이학박사 춘천 성수고 교사)은 자신의 본가에 연락을 취해 거기서 후배들을 아르바이트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후 공부방은 학생들이 너무 많아지자 학생들이 들락거리고 붐벼도 좋은 시장통 금성여관으로 옮겼다.
물론 여관이 공부하는 처소로 적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빌딩에 세를 들 형편도 아니었다.
주인 김한기 씨는 제아의 중학교 선배로 자수성가 하신 분이어서 흔쾌히 큰 방 하나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하숙비도 절반만 받는 후의를 베풀어 주었다.
제아는 새벽 4시 반 부터 자정에 가까운 시각까지 매일 여섯 팀 이상을 가르쳤다.
낮 시간에는 박국희 은사님(전 영월중, 석정여중고 음악교사, 현 영월자원봉사센터장)의 추천으로 인근 연당중학교의 수학강사 선생님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받은 급여는, 어느 날 납입금을 못내 교무실에 불려 와 꾸지람을 듣던 중 3학년 여학생에게 등록금으로 대신 납부하여 주었다.
이즈음 제아의 막내 동생 태효가 태어났다.
제아와는 20년 차이의 동생인 셈이다.
구리 아저씨는 또 한명의 천덕꾸러기를 대책도 없이 둔 것이었다.
막내 효는 매우 고생이 심하게 자라나 지금은 어였한 청년이 되었다.
중국에서 회사 일을 보고 있다.
그해 겨울, 제아는 배추장사가 되어야 했다.
농사라고는 처음인 구리 아저씨가 아들의 학비라도 벌어 보겠다며 남의 밭을 빌어 지은 배 추 농사가, 엎친 데 덮친 격인 풍작으로 값이 폭락하여 처분을 해야 했다.
풍작에도 울고, 흉작에도 울고 마는 우리나라의 농촌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였다.
제아에게는 3트럭 분량의 배추를 처분하도록 할당되었다.
구리 아저씨는 영월읍내 소방서 옆 공터에다 배추를 부려다 주었다.
난감한 일이었지만 친구 어머니(주국영 모친 배순자 여사)들이 소개해 주시어 다 팔 수 있었다.
대학 재입학
1년여를 영월에서 가르쳤던 과외를 청산하니 그런대로 꽤 많은 돈이 모였다.
구리 아저씨가 진 빚 1백여 만 원을 갚아 드리고도 30여만 원이 남았다.
1977년 8월말, 제아는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에 재입학을 하였다.
학과장님도, 학생생활지도연구소 이영자 교수님도 다시 대학에 돌아 온 제아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매학기 성적이 B학점 이상일 경우 수업료 전액 면제 장학금을 약속해 주었고, 거기다 학교 바로 앞의 의류제조업을 하는 김사장 댁에 가정교사로 보내 주었다.
이렇게 다시 시작해 강의실에 앉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친구들이 한 학년씩 위로 올라갔지만, 선배가 된 동기들도 다시 만난 제아를 격려해 주었다.
마침내 1학년을 마치고 방학기간엔 서울 가정교사 댁의 양해를 구하여 영월로 다시 아르바이트를 갔다.
또 다시 금성여관을 빌어 공부방으로 썼다.
제아는 이때 두 번의 학비 조달 경험을 통하여 '돈'을 '사람'보다 밑에 두기로 하였다. 제아는 이미 마음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겨울 방학을 마치고 보니 40여만 원의 돈이 모였다.
제아는 생각을 곰곰히 해 보았다.
갈림길에 선 것이었다.
이 돈으로 2학년 1학기를 등록해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1년 동안 재수를 단단히 하여 소위 일류대 법정대를 갈 것인가?
제아의 전공은 수학이었다.
고 3 때 진학상담에서 법정대를 가고 싶다는 제아와 그래도 수학과를 가야 학생들이라도 가르쳐 대학을 마칠 가능성이 있다는 담임과의 씨름에서 그 길을 자의 반 타의 반 선택하게 되었지만 못내 법정대에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이즈음 나타났다.
제아는 연당리 시골집에 들러 동생 환에게 형이 공부하러 산으로 입산함을 알려주고, 다른 곳에 계시던 아버지 외에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짐을 챙겨, 영월 봉래산 중턱의 송산사 암자로 1년 기간의 재수를 떠났다.
이 암자는 제아가 고교 3 학년 때,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땡 까고 한 달 동안 있던 곳이었다.
제아는 코피를 쏟아가며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열심으로 공부만 하였다.
한 달 쯤 지났을까?
갑자기 동생 환이 산 중턱 암자까지 길을 물어 찾아 왔다.
서울로 노동팔이를 떠났던 아버지가 기겁을 하고 하향하여, 즉각 하산을 명하였다는 것이었다.
제아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은 터였지만, 아버지를 설득시켜 보리라 생각하고 동생과 집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구리 아저씨 나이가 벌써 환갑줄에 들었고, 어떻게 마친 1학년인데 또 다시 가던 길을 돌아 재수냐는 것이었다.
“설사 대학에 다시 들어가 판검사가 된다고 해도 애비 죽은 담에 무슨 소용이 있냐?” 라시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야간 열차에 몸을 싣고 이끌려 서울로 다시 상경하여 2학년 등록을 하였다.
이미 추가등록 기간도 끝나고, 교련도 벌써 여러 번 수업이 진행되어, 다음 교련을 한 번 만 더 빠지면 ‘학변처리자’로 처리해, 입대 영장을 발부 대상자가 될 예정이었다고 하였다.
강원학사
때마침, 강원도에서 도내 서울 유학생들의 인재육성을 위해 도비로 운영 지원하는 '새강원의숙' (현, 강원학사)에서 입사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지난 2월 초 제아와 단짝인 중앙대 영문과 2학년인 이기수(현 국민일보 기자, 한국과학기자협회장)군이 강원의숙을 일러 주어 입사 신청을 영월군청으로 하였던 터 였다.
이 군은 제아 보다 학교 평점이 높았지만, 영월군에 할당 된 1명을 위해 제아를 접수시켜 주고 자신은 빠져 주었었다.
이 군은 다음해 장학생으로 뒤따라 입사하여 고교에 이어 제아와 같은 방의 룸메이트가 되었으며, 그가 부모님에게서 받은 용돈을 제아에게 나눠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제아는 2학년이 되어 다시 김사장 댁의 4명의 아이들을 맡았고, 틈을 내 달동네인 성동구 응봉동의 아이들도 기르치게 되었다.
김사장 댁의 초등학교 학생이던 아이들은 지금은 모두 대학을 마치고 성인이 되었고 모두 결혼도 하였다.
대학에서의 장학금과 새강원의숙의 월 9천원의 저렴한 기숙사비 부담금은 제아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제아는 2학년을 마칠 즈음 장교로 군에 입대 할 것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