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홍우(1991). 『교육의 개념』. 서울: 문음사. 제4장.
97
제4장 사회화 개념: 뒤르껭
앞 장에서 고찰한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대하여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이 있을 수 있고 또 실지로 있었다. 그 중의 한 가지, 그것이 피터즈 자신의 임의적 개념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 비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피터즈의 개념은 ‘엘리트주의 교육관’을 나타낸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아마 이 비판의 근거는 피터즈가 지식과 이해, 특히 학교교육에 포함된 지식과 이해를 교육의 핵심으로 생각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만약 참으로 이것이 그 비판의 근거라면, 여기에 대하여 피터즈는, 지식과 이해 등 지적 내용을 강조하는 교육이 정의상 ‘엘리트주의’라면 교육은 엘리트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외에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는 분명히 ‘엘리트주의’라는 말에 통상적으로 붙어 다니는 부정적인 의미를 부정할 것이다.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대한 비판 중에서 보다 심각한 것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피터즈는 교육을 성격상 학교교육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점에서 교육의 개념을 부당하게 ‘좁게’ 규정한다는 것이다. 피터즈가 교육을 성격상 학교교육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피터즈가 교육을 ‘학교’라는 특별한 공간에 국한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든지
98
심지어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육이라고 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피터즈의 주장에 의하면, 교육의 전형적인 사태는 학교의 교과수업 사태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교과수업 이외의 사태에서도 교육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도 ‘교육’이라고 불리는 한, 학교의 교과수업과 그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피터즈의 견해를 이와 같이 해석한다면, 피터즈가 교육의 개념을 지나치게 ‘좁게’ 규정한다는 위의 비판은 일단 타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학교 안에서건 밖에서건 간에, ‘교과수업과 성격상 동일한 것’ 이외의 다른 교육은 있을 수 없는가, 수업사태에서 전형적으로 가르쳐지는 내용을 ‘교과’ 또는 피터즈의 용어로 ‘지식의 형식’이라고 하면 이것과는 다른 종류의 교육내용을, 교과수업에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충분히 의미 있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이외의 교육’에서 전달되는 내용을 학교의 교과처럼 명시적으로 지적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또한 그 내용과 교과가 성격상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를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런 내용이 있으리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분명하다. 그리하여 피터즈의 ‘문명된 삶의 형식’이라는 것이 ‘지식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 문명된 삶은 확실히 좁게 설정된 것이 분명하다. 물론, 여기서 ‘좁게 설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피터즈의 규정에서 제외된 교육이 거기서 규정된 교육을 포함한다든지, 후자를 확대하면 전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피터즈의 개념에 의하여 규정된 것과는 성격이 다른 교육, 피터즈의 관점과는 다른 종류의 관점으로 파악되어야 할 교육이 있다는 뜻이다.
만약 위의 비판이 피터즈의 개념이 너무 좁다는 점을 지적하는
99
것이라면, 이것과는 정반대로 그것이 너무 ‘넓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피터즈의 개념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맥락으로서의 특정 사회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터즈의 ‘문명된 삶’은 특정 사회를 떠나서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의 ‘교육받은 사람’ 또한 보편적인 인간이기 이전에 특수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특수적 인간이다. 피터즈의 개념에 의하여 ‘교육받은 사람’은 모든 사회적 조건에 들어맞으며, 마찬가지 이유에서 어느 사회적 조건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피터즈의 개념에 의하면 ‘교육받은 한국 사람이 된다’든가 ‘한국 사람으로 교육받는다’든가 하는 말은, 만약 그것이 ‘교육받은 영국 사람이 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교육받은 한국 사람’은, 비록 ‘교육받은 영국 사람’과 공통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교육받은 영국 사람’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또 아마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피터즈의 개념은 이 면에서의 교육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보면,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이 너무 넓다는 비판은 분명히 타당성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대한 이 둘째 비판은 우리나라에서 십수년 전에 교육계의 주목을 끌었던 ‘국적있는 교육’이라는 슬로건과 관계가 있다. 슬로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그렇다시피, 이 경우에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호소력에 상응하는 정도의 이론적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것을 받치고 있던 정치적 기반이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현재에도 그것은 처음에 대두되었을 당시의 호소력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는 듯하다. ‘국적있는 교육’이라는 슬로건은 ‘한국에서 하는 교육은 한국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풀이될 수 있으며,
100
그 슬로건이 현재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현재의 교육이 한국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별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광범한 의견일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적있는 교육’이라는 슬로건, 그리고 그 슬로건의 이면에 들어 있는 현재 교육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정확하게 교육의 어떤 측면을 겨냥한 것인가? 그것이 피터즈의 개념에서 부각되는 교육의 측면을 겨냥한 것이 아님은 거의 확실하다. 앞에서 시사된 바와 같이, ‘지식의 형식’ 또는 학교의 정규교과는 ‘탈국적적인’ 것이다. ‘한국 사람을 만드는’ 교육적 영향력은 학교의 교과수업이 아닌 그 이외의 사태에 작용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대한 위의 두 가지 비판은 너무 좁다든가 너무 넓다는 식으로 그 방향에 있어서는 정반대이지만, 그 두 가지 비판에 의하여 제안되는 교육의 개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피터즈의 개념에서와 같이, 학교의 수업사태 또는 그와 유사한 사태에서 ‘지식의 형식’을 전수하는 일로 파악되는 것 이외에, 그것에 대안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교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피터즈에 의하여 규정되는 교육과 그것에 대안적인 교육이라는 ‘두 개의 교육’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공학적 개념과 성년식 개념의 관계에 관하여 말한 내용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 우리가 또 하나의 교육의 개념을 고찰하는 것은 피터즈의 개념이 교육의 전체가 아닌, 한 부분만을 나타낸다는 뜻이 아니다. 교육은 하나뿐이며 피터즈의 개념은 이 하나뿐인 교육을 특정한 ‘개념’(또는, 관점 또는 문제의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101
이 장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교육의 개념은 ‘사회화(socialization) 개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화’라는 용어는 거의 ‘교육’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는 정도로 교육적 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화’를 이와 같이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마 틀림없이 피터즈의 개념에 의하여 파악되는 학교의 교과수업을 사회화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킬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와 교육의 관계에 관한 복잡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위와 같이 교과수업을 사회화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사회화 중에서 교과수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성격 문제, 그리고 그것과 교과수업과의 성격상의 차이 문제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사회화를 교육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그 속에 일체의 교육활동을 포함시키는 것은 애당초 교육의 정의가 문제되는 맥락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앞의 1장의 고찰에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교육을 사회화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육이라는 용어를 사회화라는 용어로 바꾸어서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정의하는 것은 ‘사회화’라는 용어의 개념적 특성, 다시 말하여 교육을 사회화로 정의할 때 그 정의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교육의 문제의식을 도외시하며, 결과적으로 그 정의는 정의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물론, 이 점은 사회화라는 개념이 교육을 ‘총체적으로’ 정의한다는 것과 모순 없이 성립한다.
이 장에서 의미하는 대로의 교육의 사회화 개념은 뒤르껭(Emile Durkheim)의 『교육과 사회학』 [각주 1: Emile Durkheim, Education and Sociology(trans. S. D. Fox), Free Press, 1956(original French edition, 1925), 이종각(역), 『교육과 사회학』, 배영사, 1978.] 에 제시되어 있다. 뒤르껭의 개념을 고찰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이 피터즈의
102
개념에 대하여 대안적인 관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확인하는 것은 또한 앞에서 말한 ‘국적있는 교육’이라는 슬로건이 교육의 어떤 측면을 지적하는가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을 고찰하기에 앞서서, 이 장에서 의미하는 대로의 ‘사회화’의 개념을 선명하게 예시하는 한 가지 보기로 번스타인(Basil Bernstein)의 ‘언어사회화 이론’ [각주 2: 여기에 소개되는 Bernstein의 이론은 그의 초기 이론으로서 다음의 문헌에 제시된 것이다. Basil Bernstein, ‘Social Class and Linguistic Development: A Theory of Social Learning’, A. H. Halsey et al.(eds.), Education, Economy and Society, Free Press, 1961, pp. 288-314; ‘Aspects of Language and Learning in the Genesis of the Social Process’, J. of Child Psychology and Psychiatry, 1(1961), pp. 313-24, reprinted in Dell Hymes(ed.), Language in Culture and Society, Harper International, 1966, pp. 251-63. 그 후 Bernstein은 ‘Elaborated and Restricted Codes: Their Social Origins and Some Consequences’, J. J. Gumperz and D. Hymes(eds.), The Ethnograghy of Communication, American Anthropologist 66, 2(1964), pp. 55-69에서 초기의 public language, formal language의 개념을 restricted code, elaborated code로 수정하였고, ‘On the Classification and Framing of Educational Knowledge’, R. Brown(ed.), Knowledge, Education and Cultural Change, Tavistock, 1973, pp. 363-92 이후에는 교육내용으로서의 지식의 조직 문제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 나중의 이론이 초기의 언어사회화 이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는 별도로 연구할 문제이다.] 을 소개하고자 한다. 번스타인의 이론은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을 검증가능한 형태로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뒤르껭의 개념을 고찰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교육의 사회화 개념에 관련되는 이론적, 실제적 노력의 방향을 제안해 보겠다.
1. 사회화의 한 보기: 언어사회화
번스타인의 언어사회화 이론은, 한 마디로 말하여, 언어가 사회구조를 영속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사회구조’라고 하는 것은, 이하의 설명에서 밝혀지는 바와 같이, 번스타인 자신이 속하고 있는 영국의 계층조직 ─ 중류계층과 노동계층이라고 불리는 두 계층의 특이한 생활방식과 문화 ─ 을 일컫는다. [각주 3: 영국 사회에 적용되는 개념으로서의 ‘계층’은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에 적용되는 것과는 근본적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계층은 주로 ‘사회경제적인’ 면에서의 차이에 기초를 두고 있는 반면에, 영국에서의 계층은 사회경제적인 면보다는 ‘문화적인’ 면에서 규정된다. 영국에서의 계층구조가 적어도 Bernstein의 이론이 형성되던 당시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이 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약간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영국에서의 계층은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존재했던 당시의 우리나라의 형편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하에서 설명할 Bernstein의 이론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 한 계층에서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구어양식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감정의 전달방식을 통하여 그 계층의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며, 이 점에서 언어는, 번스타인 자신의 용어로, ‘사회적 유전인자’ [각주 4: B. Bernstein, ‘A Socio-linguistic Approach to Social Learning’, J. Gould(ed.), Penguin Survey of Social Sciences 1965, Penguin, 1965, pp. 145-66, reprinted in P. Worseley(ed.), Modern Sociology: Introductory Readings, Penguin, 1970, pp. 195-204. 인용은 p. 195.] 를 담고 있다.
번스타인 자신이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각주 5: B. Bernstein, ‘Aspects of Language and Learning in the Genesis of the Social Process’, reprinted in Dell Hymes(ed.), Language in Culture and Society, Harper International, 1966, pp. 251-2.] 그의 이론은 사고를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언어의 기능에 관한 어떤 심리학자의
103
견해를 사회학적 맥락에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심리학자는 언어를 그것이 전달하는 사고의 종류 또는 수준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컨대 한편으로, 사람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 하는 인사말이나 라디오 아나운서의 일기예보와 또 한편으로, 우리가 보통 ‘말한다’고 할 때의 말 ─ 다시 말하면, 특정한 문제에 관한 그때그때의 생각이나 느낌을 문장의 구조에 담아 표현하는 말 ─ 은 양자가 모두 의사소통(즉, 사고나 감정을 전달하는 일)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언어에 의하여 전달되는 사고나 감정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으며, 이 점에서 양자는 유형적으로 구분된다. 소개받았을 때의 인사말이나 일기예보의 경우를 보면, 거기서 전달되는 것도 과연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그 말이 보통의 의미에서의 사고 ─ 즉, 개인이 하는 사고 ─ 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사고’, 또는 ‘사회화된 사고’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거기서 오가는 말은 개인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개인 자신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경우에 누구든지 응당 하게 되어 있는 ‘틀에 박힌’ 말이다. 사람들은 그 특정한 경우에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리라는 것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예측가능성’에 입각하여 ‘사회화된’ 의미 ─ 즉, 그 사회 사람들에게 널리 공유되는 의미 ─ 를 주고받는다. 위의 그 심리학자는 이런 종류의 말을 ‘고도로 기호화된 발언’(high-coded utterances)이라고 하여, 그때그때의 개인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당장 기호화하는 발언’(now-coding utterances)과 구분한다. 물론, 이 두 가지 ‘발언’은 그 외부적인 특징에
104
있어서도 차이를 나타낸다. ‘고도로 기호화된 발언’은 문장이 짧고 어휘가 한정되어 있으며 말의 속도가 빠르다. ‘당장 기호화하는 발언’에서는 화자가 적절한 단어나 문장 형식을 찾기 위하여 때로 말을 멈추기도 하고 문장 중간에서 이미 말한 부분을 취소하고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있지만, ‘고도로 기호화된 발언’에서는 그럴 필요가 거의 없다.
번스타인이 영국의 두 계층 ─ 노동계층과 중류계층 ─ 의 습관적, 전형적인 구어양식이라고 본 ‘대중어’와 ‘공식어’(public language: formal language, ‘공식어’라는 말은 ‘공식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라는 뜻이다)는 대체적으로 위의 두 ‘발언’에 각각 상응한다. 이 두 구어양식은 구문의 복잡성 정도, 어휘의 다양성 정도 등 외부적인 특징에 있어서도 차이를 나타내지만, 양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각각이 사고와 감정을 조직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상이한 태도(즉, ‘말은 무엇을 위하여 있는가’에 대한 상이한 견해)를 나타낸다는 점에 있다. 공식어에서는 언어가 인과적, 이론적 관련을 정확한 문법 구조에 맞추어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언어가 다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말의 내용 ─ 말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 의 논리성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여 대중어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흔히 떠돌아다니는 막연한 상투적 표현을 주고받으며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유대(‘우리는 서로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납득한다.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도, 공식어에서는 감정이 문장의 표현방식에 세밀하게 구분되어 표현되며, 사람들은 그 표현방식에서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알아차린다. 이와는 달리, 대중어에서는 단순한 쾌불쾌(快不快), 호악(好惡)의 감정이 미분화된 상태로 표현되며,
105
언어는 감정을 ‘표현’한다기보다는 ‘발산’하는 수단이 된다.
노동계층과 중류계층의 자녀들이 대중어와 공식어라는 구어양식을 통하여 ‘사회적 유전인자’를 물려받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부모 또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으로부터이다. 대중어와 공식어는 각 계층의 부모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구어양식이며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데에도 이 구어양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노동계층의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거의 언제나 간단한 명령이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구체적인’ 언어로 기술하는 말을 하며, 자녀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감정을 충동적으로 표시한다. 자녀는 그 부모로부터 추리나 상상을 표현하는 말을 거의 들어보는 일이 없다. 추리나 상상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표현은 대중어의 표현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동계층의 자녀가 부모의 감정을 헤아릴 경우에 그것은 ‘부모가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는 식의 단순한 양분법에 의해서일 뿐이며, 그 강도에 따라 세밀하게 분간된 ‘미묘한 감정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다.
번스타인 자신의 예를 가지고 이 점을 설명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각주 6: B. Bernstein, ‘Social Class and Linguistic Development: A Theory of Social Learning’, A. H. Halsey et al.(eds.), Education, Economy and Society, Free Press, 1961, pp. 293. (Bernstein 이론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이홍우, 『인지학습의 이론』, 교육출판사, 1973, 7장(pp. 163-94) 참조.] 자녀가 옆에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울 때, 중류계층의 어머니라면 예컨대 ‘얘야, 좀 조용히 해 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그것에 맞는 특이한 어조가 수반된다. 그러나 노동계층의 어머니는 거의 언제나 ‘닥쳐!’라고 말한다. 이것이 ‘좀 조용히 하라’는 말의 대중어적 표현양식인 것이다. 물론, 중류계층의 어머니라고 해서 언제나 위의 말이나 어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그 후에도 계속 소란을 피우면 어머니는 점점 더 강한 표현과 어조를 사용하다가 아마 어느 단계에서는 ‘닥쳐’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노동계층의 어머니와는 달리, 중류계층의 어머니로서는 최초의 표현과 그 이후의 점점 강한 표현이 자신의 상이한
106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 그 점점 강한 표현은 자녀에 대한 징벌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부모에게서 양육을 받는 동안에 자녀도 이것을 알게 된다.
대중어에 의하여 양육된 자녀가 최초로,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불이익’을 경험하는 것은 학교에 들어갔을 때이다. 학교에서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가 익숙해 온 것과는 거의 ‘외국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판이한 공식어이다. (특히 우리와 같은 외국인의 입장에서 대중어와 공식어가 다 같은 영어이면서도 외국어처럼 다르다는 것은 실감하기 어렵지 않다. 같은 런던에 살고 있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 중에는 우리와 같은 외국인이 비교적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하는 아이도 있고 전혀 무슨 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아이도 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우리의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말 ─ 공식어이다.) 학교에서 교사가 쓰는 말에 의하여 표현되는 사고는 대중어에 의하여 전형적으로 매개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며, 노동계층의 아이는 그 교사의 말 중에서 대중어로 ‘번역’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이해를 할 수 없다. 교사는 ‘닥쳐’라고 말하기보다는 ‘얘들아, 좀 조용히 해 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노동계층의 아이에게 이 말은 ‘닥쳐’라는 말로 ‘번역’되어 이해되며, 그것은 ‘공연히 점잖은 티를 부리는’ 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노동계층의 아이가 공격적, 반사회적 성향을 발휘하며 마침내 청소년 범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대중어가 그것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죄악감역’(罪惡感閾, guilt threshold: 남에게 몹쓸 짓을 하여 죄악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최초의 단계)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비추어 쉽게 이해된다. 노동계층의 아이는 말이 감정을 세밀하게 구분하여 표현한다는 것을
107
알지 못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말이 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죄악감은 명백한 신체적 상해가 발생했을 때 비로소 발동한다.
번스타인의 이론은 영국에서 노동계층의 아이가 중류계층의 아이에 비하여 학업성적이나 사회적 적응 면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을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그것이 ‘노동계층 사람’ 또는 ‘중류계층 사람’이 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해 준다는 점에 있다. 간단하게 말하여, 대중어와 공식어가 다같은 영어이면서도 마치 외국어와 같듯이, 그 각각을 습관적 구어양식으로 하는 두 계층의 사람은 다같은 영국 사람이면서도 마치 외국인과 같이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형성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그와 같이 다른 구어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강한 언어결정론적 가설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번스타인의 이론에서 대중어와 공식어는 노동계층과 중류계층의 특이한 세계관과 생활방식(즉, 문화)을 반영하며 그것을 다음 세대로 영속화하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중어와 공식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인지적, 정서적 제약이나 이점을 통하여 두 계층의 생활방식의 기저에 있는 중요한 능력들 ─ 구체적인 사태를 일반적인 용어로 파악하는 능력, 합리적 질서에 지배되는 것으로서 세계를 파악하는 능력,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활을 계획하는 능력, 즉각적인 감정이나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 등 ─ 을 저해하기도 하고 촉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번번이 강화된다.’ [각주 7: B. Bernstein, ‘Social Class and Linguistic Development: A Theory of Social Learning’, A. H. Halsey et al.(eds.), Education, Economy and Society, Free Press, 1961, pp. 309.]
앞의 설명에 시사된 바와 같이, 번스타인의 이론이 다루는 ‘언어사회화’(즉, 언어에 의하여 설명되는 사회화)는 학교교육을 받기
108
훨씬 전부터 시작되며, 학교교육과 무관하게 그 이후에도 여전히 진행된다. 만약 교육의 개념을 피터즈의 그것에 고정시키면 번스타인이 말한 사회화 과정 ─ 한 계층의 습관적인 구어양식을 통하여 그 계층의 특이한 인간형이 형성되는 과정 ─ 은 ‘교육’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된다. 예컨대 ‘얘야, 좀 조용히 해 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아이를 지식의 형식에 입문시킨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공학적 개념에 비추어서도 교육에 속하지 않는다. 예의 그 어머니가 인간 행동의 변화를 위한 계획적 프로그램을 실시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사회화 과정은 하등의 인위적인 조치가 가해지지 않은 순전히 ‘자연적인’ 과정은 아니며, 거기에는 비록 공학적 개념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은 명백한 형태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형성을 위한 모종의 인위적인 노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형성의 작용이 성년식 개념의 그것과 동일한 개념체계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교육에서 제외시키려고 하는 것은 교육에 관한 논의영역을 부당하게 한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교육의 사회화 개념에는 그 나름으로 교육을 보는 특이한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 문제의식의 일단은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번스타인의 이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영국 사회의 계층 구분이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든지, ‘사회화’는 그냥 일어날 뿐이며 그것에 대해서는 하등의 의식적인 노력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번스타인의 이론이 현재 우리 사회에 줄 수 있는 중요한 시사를 부당하게 외면하는 것이다. 계층과의 관련 여부를 떠나서, ‘공식어적인’
109
어법과 ‘대중어적인’ 어법, 또는 더 평이하게 ‘점잖은’ 말씨와 ‘상스러운’ 말씨의 구분은 언제 어느 사회에나 해당된다. 완곡하지만 세밀하게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정확한 문법형식에 맞추어 표현하는 것은 따로 배우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그 능력을 ‘공연히 점잖은 티를 부리는 수작’이라고 하여 업신여기고, 그 대신에 강하고 원색적인 ‘발가벗은’ 언어를 구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이것은 반드시 ‘언어의 사회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부모나 기성세대 전체가 그 능력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히 ‘문화의 붕괴’에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번스타인의 이론을 그 한 부분으로 하는 ‘언어사회학’에 관한 최근의 관심은 이 면에서의 교육학적 관심이 절실하고 유용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은 그가 1902년에서 1911년에 걸쳐서 한 네 개의 교육학 강연을 모아놓은 『교육과 사회학』의 처음 세 장에 제시되어 있다. 교육의 개념에 관한 그의 견해는 그의 사회학 이론의 직접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교육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사회학 일반에 관한 그의 저작들이 참고가 되겠지만, [각주 8: 뒤르껭 이론의 개괄적인 고찰은 김신일, 『Durkheim 교육이론 연구』, 교육과학사, 교육이론 지맥 SA1, 1984 참조.] 현재 우리의 목적으로는 그 세 장에 설명된 내용만으로 충분하다. 거기에는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이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책에는 교육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을 가장 정확하고 간명하게
110
나타내는 것은, ‘어린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 사회화’(p. 72) [각주 9: 본문에 표시된 페이지는 이종각(역), 『교육과 사회학』의 페이지이다. 다만 현재의 번역과 저자 자신의 번역에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저자 자신의 번역을 따랐다.] 라는 정의이다. 여기서 ‘사회화’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로서, 뒤르껭이 그의 다른 책에서 사용하는 ‘집단적 의식’(représentations collectives, collective consciousness) [각주 10: E. Durkheim, The Division of Labor in Society, Free Press, 1964, p. 79를 인용한 Ivor Morrish, Disciplines of Education, George Allen and Unwin, 1967, p. 256. 여기서 ‘집단적 의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동일한 사회의 평균시민에 공통된 신념과 정조의 총체는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진 구체적인 형태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집단적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집단적 의식은 사회 내의 특정한 기구를 빌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의에 암시된 바와 같이, 사회 전체에 걸쳐 작용한다.’ 이하 본문의 설명 참조.] 이라는 개념을 써서 표현하자면, ‘이기적, 반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집단적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 과정은,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조건’(p. 72)을 마련하는 수단이며,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출생할 때 피부조직 속에 갖추고 태어나는 존재와는 조금도 닮은 점이 없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형’ 또는 ‘창조’되는 길이다(p. 74, p. 153).
위의 정의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함의되어 있는 몇 가지 생각을 명백히 드러내어 진술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교육과 사회와의 긴밀한 관련이다. 뒤르껭에 의하면, 교육은 광물학자에게 있어서 암석이나 해부학자에게 있어서 신체에 비유될 수 있는 ‘사회적 사물’(a social thing)이다. 교육은 사회 속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사회가 존재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사회와의 관련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교육을 이해하는 것은 곧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다. ‘교육기관 중에서 사회제도적 성격을 띠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교육기관은 사회제도의 주요 특성을 소규모의 축소된 형태로 복제하고 있다’(p. 159). 교육은 그 목적에 있어서나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에 있어서나 사회적 고려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 교육학은 다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사회학이다.
둘째는 ‘사회’의 성격 문제이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가 아니며
111
일정하게 구획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회에는 개인들이 소속해 있고 사회라는 말이 특정한 지역을 연상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역과 인구가 곧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개인들이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계속되며 지역의 변동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를 가리킨다. ‘한 세대의 유산이 보존되어 다음 세대의 유산에 부가되려면 세대의 소멸을 초월하여 영속하면서 세대와 세대를 결속시켜 주는 도덕적 인격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이다’(pp. 81-2).
이런 의미에서의 사회는 ‘집단적 의식’ 또는 ‘집단 수준의 의식’에 의하여 규정된다. ‘의식’이라는 것은 원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인 만큼, 이 의미를 그대로 집단 수준으로 연장하면 마치 집단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은 의식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집단적 의식과 개인의 의식 사이에는 그 존재 방식에 있어서 하등의 공통성이 없다. 집단적 의식은 사회가 하나의 ‘사회로서’ 기능을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그 내적인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적인 내용이다. 집단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내용의 총체이며(p. 73), 따라서 교육을 통하여 개인이 습득해야 할 정신적 내용의 총체이다. (『교육과 사회학』에서는 이 ‘집단적 의식’이 ‘집단적 관념과 정조’(p. 107)로 표현되어 있다.)
사회가 인구나 지역과 같은 ‘경험적 실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사회가 집단적 의식이라는 정신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사회가 관념적, 추상적인 실체라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집단적 의식 그 자체는 관념이지만, 그것은 관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례, 풍습,
112
행동 양식 등 ‘사회제도’ ─ 즉, 일체의 삶의 현실 ─ 와 관련하여 그것의 정신적 기저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한 사회 안에서의 공통된 삶의 현실 ─ 정확하게는, 한 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정도로 공통된 삶의 현실 ─ 이 ‘사회’라는 용어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셋째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이다. 위의 설명에 비추어 이 문제는 개인과 집단적 의식의 관계로 바꾸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뒤르껭의 견해는 그의 교육관의 가장 중요하고도 두드러진 (또한, 아마도 가장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다고 볼 수 있는) 특징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사회 또는 집단적 의식은 개인을 초월한 그 자체의 실체로서 존재하며 그것은 그 구성원인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개인은 사회의 일방적인 영향력을 거의 수동적으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과 내용]의 기준이 되는 관습과 관념은 개인들이 창조해 낸 것이 아니다. 이 관습과 관념은 공동생활의 산물이며 또한 공동생활의 필요를 표현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대부분 이전 세대가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인류의 과거 전체가 이 격률의 총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여 오늘의 교육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개인이, 그 혼자만의 사적인 생각으로, 개인의 생각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개인은 그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나 쓸 수 있는 ‘백지’를 앞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창조하지도 못하고 파괴도 변형도 할 수 없는 구체적인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 개인이 구체적인 현실에 대하여 무엇인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113
되었을 때, 그 본질과 성립 조건을 알 수 있게 되었을 때이며, 개인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그 현실을 연구함으로써, 마치 물리학자가 물리 현상을, 생물학자가 생물체를 관찰하듯이, 그것을 관찰함으로써이다(pp. 65-6).
우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집단적 관념과 정조의 분위기 속에 묻혀서 살고 있다. 교육의 실체가 근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집단적 관념과 정조이다. 그 관념과 정조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것은 우리와는 구분되는 별개의 현상이며, 그 자체 속에 명백하게 규정된 성질을 가진 구체적인 현실로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며, 그것을 아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이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pp. 107-8).
그러나, 만약 개인이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회’ 또는 집단적 의식을 수동적으로 내면화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면, ‘개인은 견딜 수 없는 폭군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p. 78) 이 의문에 대한 뒤르껭 자신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개인의 그 복종은 개인 자신에게도 이익(interest)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하여 집단적 경향이 우리 각자에게 형성해 주는 새로운 존재는 우리 각자가 될 수 있는 최상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p. 78). 집단적 의식에 복종하는 것이 개인에게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려면 그것을 내면화하기 이전의 개인에게 무엇인가
114
손상되거나 침해될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 이전의 개인에게는 이기적인 충동 또는 아직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은 막연한 성향 이외의 아무 것도 없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은 모두 사회의 영향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 의식은 개인을 획일화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은 집단적 의식의 영향 안에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자유로운 발달을 이룩할 수 있으며, 차라리 그 영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는 진정한 권위에서 태어나는 딸이다’(p. 100).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의 설명에 이미 시사되어 있는 것으로서, 교육(즉, 사회화)의 책임을 맡은 부모와 교사의 권위 문제가 있다. 이기적, 반사회적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변형시키는 데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강요가 불가피하게 요청되며, 이 강요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 일을 담당한 사람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 교육의 효과는 부모와 교사가 아이에게 사회에 대한 복종과 의무를 정정당당하게 강요하는 데서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의 부모나 교사의 권위는 그 개인적 업적이나 자질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업무를 위임한 ‘사회’에 의하여 보장된다. 이 점에서 부모나 교사의 권위는 성격상 성직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성직자의 말에 누구나 그토록 기꺼이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직자가 그의 소명에 대하여 높은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신, 다수의 비신도(非信徒)들보다 자신이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교사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도 자신을 초월하는 위대한 도덕적 인격체(즉, 사회)의 대리자인
115
것이다. 성직자가 신의 해석자이듯이, 교사는 그 시대, 그 국가의 위대한 도덕적 관념의 해석자이다. 교사로 하여금 이 관념에 애착을 가지도록, 그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그 관념에 내재해 있는 권위, 교사가 인식하는 권위는 반드시 교사 자신의 것이 되어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초인간적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권위에는 긍지도, 허영도, 현학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 권위는 순전히 교사가 자신의 하는 일 또는 ‘직능’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존경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존경심은 말과 몸짓을 통하여 교사로부터 아동에게 그대로 전달된다(p. 99).
뒤르껭에 의하면, 한 사회에서의 교육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러 개’라는 이중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p. 67). 한 사회가 존속하려면 그 성원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동질성이 유지되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에는 각각 상이한 행동양식과 정신적 자질을 요구하는 수많은 이질적인 집단들이 있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이 동질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교육의 이 두 측면은 두 가지 별개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동일한 과정의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이며, 따라서 그 중의 어느 하나에 작용하는 기제는 다른 하나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 기제는 학교에서의 교과수업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사회화’에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뒤르껭은 교과수업과 그 밖의 사회화의 구분이나 관련에 관하여 전연 언급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과수업을 통하여 전달되는 ‘기본개념’(p. 79)이나 ‘지식에의 갈증’(p. 77)은
116
사회가 우리 각자에게 형성해 주는 ‘모든 좋은 것’의 한 부분인 만큼 그것의 전수는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화’의 과정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그 기제는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하면, 개인이 집단적 의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뒤르껭은 사회가 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든가, 개인은 그 영향력을 받아들여서 ‘사회적 존재’로 형성된다는 말은 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설명되지 않으면, 예컨대 부모나 교사가 그 권위를 어떤 방식으로 행사해야 하는지, 그것을 행사하는 동안에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일을 잘 하는지 잘못 하는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지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뒤르껭의 교육의 개념이 다소나마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으려면 이 면에서의 보충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만약 뒤르껭 자신이 사회화의 기제를 설명하려고 했더라면 그것은 어떤 방식이었겠는가? 후세대의 입장에서 짐작해 본다면, 그것은 필시 앞 절에서 고찰한 번스타인의 ‘언어사회화 이론’과 유사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번스타인의 설명을 기초로 하여 뒤르껭의 설명을 유추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의 형식을 취할 것이다. 즉, ‘제도화된 행동에는 그것과 일관된 정신적 요소가 내재해 있으며 제도 안에서의 삶은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 정신적 요소를 내면화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선, 이 명제가 번스타인의 이론과 동일한 설명 형식을 나타낸다는 것은 당장 명백하다. 번스타인의 이론은 결국 ‘한 계층의 특이한 구어양식은 그것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 요소를
117
내면화하도록 한다’는 식으로 고쳐 쓸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명제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에 앞서서,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 명제에 함의된 교육의 설명은 피터즈의 ‘공적 언어에 담긴 공적 유산으로서의 지식의 형식을 전수하는 일’이라는 설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번스타인의 설명이 피터즈의 설명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각주 11: 양자의 차이는 장차 좀더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는 인식론적 가정 ─ 지식, 또는 정신적 자질 일반이 획득되는 방식에 관한 가정 ─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하 본문 참조.]
위의 명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선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한 사회 (또는 문화권) 안에서의 삶은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여러 가지 행동은 표면상으로는 각각 따로따로 떨어진 별개의 행동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한, 그 사이에는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 관련이 얼마나 일사불란한가, 얼마나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둘째로,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적어도 그 의의 있는 측면에 있어서는, 일체가 ‘제도화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의 행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오직 행동을 하는 주체 또는 행동의 수행자가 개인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며, 그 행동이 문자 그대로 ‘개인의 것’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 문자 그대로 ‘개인의 것’이라고 볼 수 있으려면 개인이 그 행동을 창시했든가 행동의 수행방식을 개인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행동 중에는 이런 뜻에서의 ‘개인의 행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행동은 모두 우리가 제도 속에서 태어나서 그 속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학습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행동의 ‘원천’은, 그 ‘수행자’가 개인인 것과는 달리, 제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18
이와 같이, 행동의 수행자와 원천이 구분된다는 사실은 행동의 ‘의미’가 두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 행동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면, 그 질문을 개인적 차원(수행자)과 제도적 차원(원천) 중의 어느 차원에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각주 12: F. Allan Hanson, Meaning in Culture, RKP, 1975, p. 4. Hanson은 행동의 의미에 관한 질문으로서 ‘개인적 질문’과 ‘제도적 질문’을 구분하고 각각의 질문에 의하여 규정되는 의미를 ‘의도적 의미’(intentional meaning)와 ‘함의적 의미’(implicational meaning)로 구분하고 있다. 이하 행동의 두 가지 ‘의미’ 및 그것과 ‘문화’와의 관련에 관한 설명은, 용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Hanson의 분석에 의존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행동을 할 때 개인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 그 행동을 통하여 실현하려고 하는 의도, 그 행동을 수단으로 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 등으로 주어진다. 이런 의도나 목적을 통틀어 ‘동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동기는 개인의 심리상태를 기술하는 개념, 즉 ‘심리적 개념’이다. 심리적 개념으로서의 동기는 원칙상 개인에게 의식된다. 물론, ‘무의식적 동기’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 ‘무의식적’이라는 말은 의식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에 깔려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예컨대 정신분석의 기법을 통하여 언제나 의식 수준으로 이끌어 올릴 수 있다. 동기는 원칙상 개인에게 의식된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만약 ‘왜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개인의 동기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다면, 우리는 그 개인이 특별히 거짓말을 한다고 볼 이유가 없는 한, 그의 대답을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의 언어적 진술 이외의 다른 곳에서 그의 동기를 찾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에 부질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동기는 ‘왜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행동의 한 가지 ‘의미’가 될 수 있다. 동기에 의하여 규정되는 의미를 ‘심리적 의미’ 또는 ‘개인적 의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의미는 행동의
119
한 가지 의미일 뿐, 전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행동에 심리적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면 한 사회를 사회로서 성립시키는 ‘동질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행동을 할 때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도나 목적은 개인에 따라 끝없이 다양하므로, 만약 동기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면 여러 개인의 행동이 공통된 의미를 나타낸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동일한 사회, 동일한 제도에 사는 개인들은 한 특정한 행동에 대하여 비교적 공통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곧 행동에는 심리적 의미 이외에 그것과는 구분되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을 위의 심리적, 개인적 의미와 구별하여, ‘논리적 의미’, ‘제도적 의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3: 행동의 이 두 가지 의미의 구분은 개념상의 구분이며, 사실상으로는 양자가 일치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이 제도적 의미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Durkheim의 ‘개인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교육과 사회학』, p. 72 참조.]
제도적 의미는 행동을 할 때 개인이 의식하는 동기와는 달리, 제도에 의하여 주어지는, 제도 그 자체의 의미이다. 심리적 의미는 ‘왜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개인 당사자의 대답(즉, 동기)을 들어서 알 수 있는 반면에, 제도적 의미는 행동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알 수 있다. 행동에는, 그 행동을 하는 개인이 의식하든지 않든지 간에, 개인이 그 행동을 하는 한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이 이유 또한 ‘왜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그런 이유에 비추어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적어도 제도적 차원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심리적 의미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도나 목적(‘나는 이러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 행동을 한다’)을 나타내는 반면에, 논리적 의미는 행동을 할 때 개인이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생각이나 믿음(‘나는 이러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한다’)을 나타낸다.
120
행동과의 관련에서 볼 때, 이 생각이나 믿음은 행동과 논리적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관련은 두 가지 방식으로 맺어질 수 있다. 하나는 행동에 생각이 논리적으로 함의(implication)되어 있는 경우요, 또 하나는 행동에 생각이 논리적으로 가정(presupposition)되어 있는 경우이다. [각주 14: F. Allan Hanson, Meaning in Culture, RKP, 1975, p. 21.] 전자는 한 개인이 특정한 행동을 한다면 그 귀결로서 특정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이며, 후자는 한 개인이 특정한 행동을 한다면 그에 앞서서 특정한 생각을 받아들였어야 하는 경우이다. 앞에서 이미 시사된 바와 같이, 행동에 생각이나 믿음이 논리적 함의 또는 가정으로 들어 있다고 해서 해당 개인이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든지 그 생각을 명문화하여 진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개인의 행동은 그런 생각이나 믿음에 비추어 비로소 의미 있게 설명될 수 있다는 뜻이며, 논리적으로 말하여, 개인이 그 생각이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행동은 의미 ─ 제도적 차원에서의 의미 ─ 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행동에 들어 있는 논리적 함의와 가정이 곧 행동의 제도적 의미를 나타낸다.
한 사회에서의 삶이 총체를 이루는 한, 제도적 의미 또한 총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여,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행동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행동의 제도적 의미 또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 의미 사이의 관련은 수학체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일사불란한 관련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갈등이나 대립을 보여주기도 하는 불완전한 관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과 행동이 그렇듯이 제도적 의미 또한 약간은 변형되기도 한다. 이 제도적 의미의
121
총체를 하나의 공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표면이 매끈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공이며, 가만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꿈틀꿈틀 움직이는 공이다. 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울퉁불퉁한 공은 앞의 명제에 나와 있는 ‘제도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 요소’, 또는 뒤르껭이 사회적 동질성의 근거라고 본 ‘집단적 의식’, 또는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문화’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의 행동은 모두 이 공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 속에서 삶을 살 때, 그리고 삶을 이루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할 때, 개인은, 비록 제도 속에 내재해 있는 의미 또는 정신적 요소를 언어로 명문화하여 진술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정신적 요소를 행동으로 표현하며,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구현하고 있다.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 과정’은 아마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 언어가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어느 정도로 수행하는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이지만, 하여간 언어가 그 과정을 촉진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침묵의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행동을 하면서 그 의미를 언어로 규정하고 표현할 것이며, 그런 언어적 표현은 행동의 의미가 마음속에 붙박히는 데에 틀림없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이 과정에서의 언어의 역할이 성년식 개념에서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식의 형식’은 이미 공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고 공적 언어의 형태로 전수된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교육내용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행동의 제도적 의미 또는 집단적 의식의 내면화 과정에서의 언어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에 그친다고 보는
122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행동에 내재해 있는 제도적 의미를 명백히 드러내는 데는 언어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이것이 그 의미의 내면화를 촉진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내면화가 반드시 언어의 매개를 필수적으로 요청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 면에서의 성년식 개념과 사회화 개념의 차이를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표현과 획득에 관한 인식론적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3. 민족교육의 내용으로서의 민족문화
뒤르껭은, 교육은 특정한 사회를 염두에 두고서야 비로소 의미 있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강조하였다(p. 63). 어느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에 구애되지 않는, 이른바 ‘보편적 인간성’에 의하여 규정되는 교육은, 개인의 임의적인 취향에 의하여 규정되는 교육과 마찬가지로, 관념에 의하여 날조된 허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르껭에 의하면, 교육은 정의상 ‘국적있는 교육’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경우에, 뒤르껭의 이 경고가 일깨워 주는 것은, 교육에 관하여 의미 있는 말을 하려면 우리는 ‘한국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내면화해야 하는 정신적 요소는 어떤 것인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심성은 어떤 것인가’, 또는 더 간단하게, ‘한국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는 문제를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 절의 고찰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시사해 준다. [각주 15: 이하의 내용은 이홍우, ‘국민교육의 내용으로서의 민족문화’, 『교육이론』, 2-1(1987)(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pp. 3-14, 그리고 특히 도덕교육과 관련하여, ‘삶과 도덕교육’, 『삶의 원리와 도덕교육』, 제주도 교육위원회, 1988, pp. 27-45에 1차 발표된 바 있다.] 그 방법론은 ‘사람은 그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간에 모종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면서 산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행동의 기저에 있는 제도적 의미는 ‘나는
123
이러이러한 생각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한다’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이때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믿음(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생각이나 믿음)은 반드시 ‘무엇무엇은 이러이러하다’라는 명제의 형태를 띤다. 명제는 어떤 것이든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제도적 의미는 곧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총체로서의 삶 안에 있는 제도적 의미는, 비록 엉성하게나마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만큼, 행동에 들어 있는 생각이나 믿음 ─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는 생각이나 믿음 ─ 은 서로 관련되어 몇 개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결국, 한 사회 또는 문화권 안에서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전형적 심성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사회 또는 문화권에서의 삶이 어떤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을 구현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로서,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다. ‘결혼’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형식과 절차’라고 부르는, 일련의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대부분은 당사자에게 의미 ─ ‘어째서 그런 형식과 절차가 필요한가’ ─ 가 불분명한 (적어도, 개인의 의도나 목적이라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불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결혼식은 우리의 전통적인 혼례가 국가의 경제와 국민의 정신을 좀먹는 ‘허례허식’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들에 의하여 상당히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식과 절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요새는 그 전통적인 혼례가 ‘미풍양속’이라고 하여 그것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는 것을 보면, 허례허식과 미풍양속은 그 경계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결혼에 포함된 행동이 목적달성의 효율성(즉,
124
개인적 차원에서의 의미실현)에 위배된다는 것과 그것에 하등의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결혼의 형식과 절차는 당사자에게 개인의 의식과는 무관한 결혼 그 자체의 의미 ─ 즉, 제도적 의미 ─ 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형식과 절차는,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오늘날의 일상용어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결혼이라는 것은 ‘한 가문에서 성장한 사람이 양가의 합의에 따라 다른 가문의 일원으로 되는’, 가문과 가문 사이의 집단적 문제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의미는, 번스타인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결혼을 이루는 행동 하나하나에 의하여 번번이 강화된다.’ 결혼의 형식과 절차가 비록 간소화되고 때로는 왜곡된 형태로나마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결혼이라는 행동이 현재에도 다소간 이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결혼은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의 개인적 문제’라는 식의, 진보적인 사상가가 젊은이들의 머리에 무분별하게 불어넣는 관념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늘날 수많은 새댁들이 시댁과의 관계에서 겪고 있는 갈등과 번민은 대부분 이 관념과 삶의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사전에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또는 더 직접적으로는, 새댁들이 아직 ‘결혼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문제’라는, 우리 삶의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문화적 표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행동’은 삶이라는 총체의 한 요소로서 그 밖의 다른 행동들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따라서 결혼 행동에서 내면화되는 생각이나 믿음은 다른 행동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결혼 행동에서 내면화되는 생각이나 믿음은 예컨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한 가지 종류, 즉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만 나타내는
125
것이 아니다. 그 행동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동시에 나타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질문과 대답의 덩어리가 한 사회에서의 삶에 내재해 있는, 그리고 그 사회의 성원이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상과 같은 방법론적 고찰에 입각하여, 최근의 한 연구 [각주 16: 이홍우 등, 『한국적 사고의 원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신문화문고 19, 1988.] 에서는 한국에서 사는 동안에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간에, 대답을 하는 근본적 질문’으로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즉, 1)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인생관), 2) 집단 속에서 개인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사회관), 3) 삶과 죽음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생사관), 그리고 4) 인간과 자연의 기본질서는 무엇인가(우주관)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1) 삶의 행복은 불행을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지혜에 있다(인생관), 2) 개인은 집단에 비추어 그 실체가 규정된다(사회관), 3) 죽음은 삶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이 점에서 삶의 연장이다(생사관), 4) 우주의 질서는 양음(陽陰)의 대립과 조화로 표현되며, 인간의 삶은 이 질서에 합치된다(우주관)는 것이다.
그 연구에서는, 위의 질문과 대답을 꿰뚫는 정신(‘국민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하다’는 단서를 단 뒤에, 그것을 ‘삶의 긍정’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삶의 긍정’은 단순히 삶을 중요시한다든가 삶에 집착하는 것과는 달리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는 점에서, 흔히 우리의 국민 정신으로 지칭되는 현세중심적 사고라든가 강렬한 삶에의 의지 등의 말만으로는 도저히 전달될 수 없는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 … 부정을 통한 삶의 긍정이라는 정신은 그것이 인생관, 사회관, 생사관, 우주관 각각에 공통적으로 들어
126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행복과 불행, 개인과 집단, 삶과 죽음이 각각 긍정과 부정, 혹은 음과 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 대립 중의 한 요소는 각각 다른 요소에] 비추어서 비로소 의미 있게 긍정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개인의 삶에 있어서 불행과 죽음이라는 요소는 삶의 소극적인 지주(음)로서 삶을 받쳐 주는 반면에 집단과 우주의 존재는 삶의 적극적인 지표(양)로서 삶을 이끌어준다는 생각이 ‘삶의 긍정’이라는 정신에 들어 있는 것이다. 불행과 죽음이 음의 쪽에서 삶을 긍정해 주는 요소라면, 집단과 우주는 양의 쪽에서 삶을 긍정해 주는 요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민족은 삶의 플러스(양)과 마이너스(음)를 동시에 의식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 민족은 삶이 곧 파라독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뜻이다. [각주 17: 이홍우 등, 『한국적 사고의 원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신문화문고 19, 1988, pp. 162-3. 위에서 말한 질문과 대답,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생각이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내면화하도록 하는 정신적 요소’를 나타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혹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부당하게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삶이라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질문과 대답,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생각이 우리의 삶, 또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제도적 의미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가 아닌가는 여기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교육의 ‘사회화 개념’을 의미 있게 논의하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이론적, 실제적 노력을 해야 하는가를 예시하는 것으로서 충분하다. 그 제도적 의미가 어떤 것으로 판명되든지 간에 그것은, 뒤르껭의 ‘집단적 의식’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 또는 몇 명의 개인이 임의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시시각각 작용하면서 그 속에 태어나는 개인들을 ‘한국인’이라는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고 있다. 부모나 교사와 같이 사회화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더 중요하게는, 한 나라의 교육을 이끌
127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권위 ─ 뒤르껭에 의하면, 사회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권위 ─ 는 이 일을 원만히 하는 데에 발휘되어야 한다. 당장 자신이 보기에 하등 실용적인 의미가 없다고 하여 아무 제도나 마구잡이로 뜯어고치고 새로 들여오는 것은 그 권위의 진정한 의미를 배반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꿈틀꿈틀 움직이는 공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새로운 요소도 이 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 충격이 ‘흡수 가능한’ 수준의 것일 때, 그 공은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이전의 그 공으로 식별될 수 있도록 그 모양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런 상태에 있는 한, 한국인은 한국인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 개개인이 제도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 각기 편리할 대로 행동해 버린다면 그 공은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그때에는 한국인이라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오직 본능적인 욕망의 덩어리만 남게 될 것이다. ‘풍속을 너무 푸대접하면 그 앙갚음이 우리 자식에게 돌아간다’(p. 64)는 뒤르껭의 말은 이것을 경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뒤르껭의 경우에 그 ‘풍속이 하는 앙갚음’은 자식들이 서로 조화롭게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당하는 앙갚음’ 중에서, 아마 자식이 그들의 풍속을 더욱 푸대접하는 것 이상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