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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1일 소래문학회에서
능산리 고분군- 부여국립박물관- 정림사지- 신동엽 생가-신동엽 시비- 궁남지-
무량사까지 다녀오는 '충남 부여로 떠나는 문학여행'을 다녀왔다.
오전 6시에 흙과 사람들에서 만났다.
8 명의 회원이 출발했다.
집행부에서 세심한 준비를 해주셨다.
출발하기에 앞서 '충남 부여로 떠나는 문학여행'이라는 안내문을
임경묵부회장님이 나눠주었다.
답사할 곳과 그곳의 안내, 오늘 시평할 회원의
시와 수필까지 들어있었다.
출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행담도 휴계소에서 아침을 들었다.
김밥과 조철형회장님 사모님이 보내주신
삶은 계란과 과일까지 풍성했다.
사모님과 세세하게 준비해주신 집행부가 고마웠다.
능산리 고분군으로 갔다.
황선생님이 사진을 담았다.
황선생님이 작게 보였다.
능산리 고분군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가묘가 있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하였던가?
의자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지육림에 빠져있던 왕이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의 왕이었고
계백장군과 백제의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황산벌 전투를 했다는 것,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은
의자왕이 폭군이 아니었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상
폭군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장군과 군사, 궁녀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
능산리 고분군을 떠났다.
능산리고분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단체사진을 담았다.
한 번 뛰어 보세요 했다.
와, 우리의 코알라 임경묵 선생님 또는 경묵 대사가 몸을 날렸다.
회원들도 함께 뛰었다.
능산리 고분군을 내려왔다.
인동초 향기가 은은하게 전해왔다.
"인동초는 겨울이 되어도 잎이 그대로 붙어 있다." 고 최분임 선생님이 말했다.
'인동초'가 주는 이미지와 맞다는 생각을 했다.
부여국립박물관으로 왔다.
황옥순선생님과 임경묵선생님이
무왕과 선화공주가 되었다.
두 손을 단정하게 모은 모형을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림사지로 왔다.
박길목선생님은 정림사지의 5층 석탑이 세계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비율이라고 했다.
소래사람들과 있으면
귀만 열어 놓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신동엽 생가로 왔다.
임경묵선생님이 학생 때 이곳에 왔을 때에는
지금도 변하지 않은 얕은 담장이었고
담장너머로 고 신동엽시인 가족들의
웃음소리들이 들리곤 했다고 했다.
신동엽 생가 툇마루에 앉았다.
회장님은 방 안에서 포즈를 취했다.
신동엽 기념관을 짓고 있었다.
생가 옆에 짓고 있는 기념관이 지어지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 담장길은 운치가 있었다.
천상병 시인이 신동엽시인을 위해 쓴 시가
벽에 걸려 있었다.
생가 툇마루 위에는 신동엽 시인의 부인이
인병선 님 글이 신영복님의 글씨로 써 있었다.
생가
-인병선-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아내의 마음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단체 사진을 담았다.
회장님은 점심을 들고 올라가셔야 했다.
점심을 들었다.
연잎밥이 독특하고 음식이 간결했다.
음식을 들어서면 "나는 백제인 이다."는 글이 있었고
음식점 안도 독특했다.
거실 안에 우물이 있었다.
여인숙을 하던 이곳의 우물을 그대로 두고 건물을 지은 것이었다.
연잎밥을 막고 연꽃차를 마셨다.
피곤이 사라지는 듯했다.
신동엽의 시비로 왔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 서울에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직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4.19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쓸 수 있었다.
시집으로 '아사녀'와 '금강'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7일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예전에는 흘렀을 금강은 보이지 않고 공원과
덤프트럭만이 보였다.
강물들을 다 어디로 감춰놓았는가?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옛날 백제시대의 백성들과 불과 50년, 아니 3 년전까지만 해도
바라보았던
그 유장한 강줄기를
지금의 우리는, 후대들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공적인 공원이 있었다.
인간이 무엇이건데
강줄기까지 바꾼단 말인가 하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만약 신동엽 시인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금강이
"껍데기만 남았다."고
후대의 시인들이라고 하는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고
일갈 할 듯했다.
오랜 시간 금강을 보고 자랐던
이곳이 고향인 임경묵 시인의 마음은 더 어쩌지 못하는 듯했다.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시비를 떠났다.
궁남지로 왔다.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버드나무 가지 하나 잡았다.
수양버들이 흐드러졌다.
사진을 담았다.
수련 잎을 따는 분들을 만났다.
마지막 일정으로 무량사로 왔다.
최분임 선생님이 김시습 시비에 적힌 시를 읆었다.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가장 먼저 울리네.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회원들은 가만히 들었다.
선화공주와 무왕은 무량사에서 다시 만났다.
매월당 김시습 시비 옆에서
시담론을 하고 시시한 한담을 나누고,
오수를 즐기고
500년 후의 시인 나부랑이(?)들이
하루를 500년처럼 즐겼다.
사진을 담았다.
무량사의 극락전이 저녁 햇살에 아름답게 물들었다.
무량사 안에 있는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에서 인사를 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3살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 때 수찬 이계전 문하에서 글재주가
더욱 무르익었다. 세종대왕 앞에서 글을 지어 올리니
칭찬하고 비단을 선물로 내렸다.
어린 김시습은 비단 한 필을 끝을 잡고 끌고 갔다.
세종은 그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고
하고 방랑길에 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또한 이곳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량사를 떠났다.
김시습 부도탑을 찾아 나섰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은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김시습은 (1435~1493)의 부도탑이 무량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있었다.
燈下(등잔아래서)-金時習
燈下茶聲咽(등하다성인) : 등 아래 차 닳이는 소리
惺惺坐似株(성성좌사주) : 말갛게 앉으니 나무 그루터기 같아
是身如幻沫(시신여환말) : 이 몸은 물거품 같고
此影竟塗糊(차영경도호) : 이 그림자는 끝내 멍청하구나
夜雪敲窓冷(야설고창랭) : 밤눈이 차갑게 창문을 두드리고山
雲羃地無(산운멱지무) : 산구름은 땅을 덮어 없어지는구나
花明餘燼落(화명여신낙) : 불꽃 밝더니 남은 재 떨어지고
堗暖卷氍毹(돌난권구유) : 구둘 따뜻하여 담요를 걷어부친다
燈下,2(등잔 아래서,2)-金時習
南寺僧來後(남사승래후) : 남쪽 절에서 스님 온 뒤로
東山月上初(동산월상초) : 동산의 달이 떠오르기 처럼이라
閑心多放曠(한심다방광) : 한가한 마음 자주 방탕 허술하여
靜意似籧篨(정의사거저) : 고요한 생각, 천상바라기 같아라
積雪明林薄(적설명림박) : 쌓인 눈은 나무숲 엷게 밝히고
寒風入帳疏(한풍입장소) : 차가운 바람 성글게 휘장에 분다
可庭霜桂影(가정상계영) : 뜰에 서리 맞은 계수나무 그림자
分與爾爲居(분여이위거) : 그대에게 나누어 주어 살게 하리라
김시습 부도탑을 마지막으로
'충남 부여로 떠나는 문학여행'을 모두 마쳤다.
백제를 생각하면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몇 년전에 처음으로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고
왈칵 솟아나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었다.
봉황과 여의주, 악사, 인면수신상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세계의 짐승들까지 그 세세한 조각에 감탄을 했던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임경묵선생님이 실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했다.
"그럼, 뭐야, 가짜만 보고도 울었던 말야." 했다.
"안내에도 모조품이라는 말은 없고
국보라고 적혀 있는데" 했다.
임선생님이 저쪽에 있을 때 관계자에게 슬쩍 물었다.
"이거 진품이에요?"
"진짜를 이곳에 두겠어요." 애둘러 모조품이라고 말했다.
순간 화가 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대수냐?
백제의 최고 진수는 이곳 부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간사한 마음은
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진품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조품을 보고도 가슴이 메어져 오도록 감동이 대단했는데
진품은 오죽 더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여여행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것,
그냥 귀만 열어 놓으면
소래회원들이 하는 말들만 들어도
또 다른 생각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운 날씨에도 서로 챙겨주던 회원들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었던 회원들,
다음에는 더욱 많은 회원들이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귀한 시간들이었다.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첫댓글 와, 하루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녀왔네요. 운전에 피곤하셨을 텐데 사진까지...거기다 좋은 글까지...감사드립니다.
선화공주가 되어봤던 하루... 행복한 문학기행이었습니다. 함게 했던 모든 분들께 감사!
즐거운, 의미깊은 시간들을 함께하셨군요.^^ 능산리 고분군크기를 보니 정말 놀라워요.^^ 황선생님이 동화속의 요정으로 보이네요.^^ 나름대로 아쉬움을 사진과 글로 대신할수있게끔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백제의 역사를 다 훑는듯 합니다.수고많으셨습니다.
무왕과 선화공주님도 만나고 소래 특유의 각자 다른 포즈들을 취하는 모습도 만나고, 4.19혁명을 시로 쓴 신동엽 시인과 세조의 왕위 찬탈로 생육신의 길을 걸었던 김시습의 시비와 그의 부도탑까지 천 년을 훨씬 넘는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합니다. 모든 분들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억속의 사진! 뭉클합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그래서 우리 소래문우님들께서 눈이 즐겁고 마음이 더욱 즐거워지게 되니 선생님의 노고에 감읍합니다. 그리고 최분임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그럴줄 알았습니다. 4월 시부분 최우수 수상 감사드려요. 소래문학의 자랑입니다. *^^*
최분임선생님이 시부분 우수 수상을 알리는 것 부담스럽다고 하셔서 지웠습니다. 위로가 되는 시를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더욱 좋은 시 만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기쁘게 수고해 주시는 최선생님 덕분에~*
저는 매번 앉아서 눈의 호사를 누립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쁨으로 소래문학회의 역사를 위해 일하시는 최선생님~*
향긋한 꽃바람처럼 늘 최선생님의 향기가 소래문학회의 발길 닿는 곳곳마다 진동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여름을 푸르게 장식해 주는 저 잎새들의 수많큼이나 많이~* -회장님 사진 쪽에 썼던 글 복사해 왔습니다~*^^
모두들 정말 행복해 보이십니데이~*
아~* 글구~* 최선생님~* 축하드려요~* 눈치 없이 또 거듭니다~*^^
그래두~* 알고서야 어떻게 모른 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