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학과과정을 수료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나는 중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거쳤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너무 좋아서 검정고시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돈이 들지 않아서 검정고시를 한다고 한다
가끔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검정고시를 택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는 정상적인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가 건강이 안좋으셔서 둘째 아들인 내가 중학교에 가는 것 조차도 조금은
무관심하셨다
고향 가까이에 있는 대구나 왜관으로 6학년때 전학을 가는 방법도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마저도 신청하는 기간이 지나가 버렸다
신동에는 성일중학교라고 조그만 중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옆에 붙은 우리 밭이 있었다
학생들이 체육시간이면 수십 번 공이 밭으로 들어왔다
채소씨를 뿌려 놓은 뒤 새순이 올라올 시점에 가보면 학생들이 공을 가지러
드나들어 대부분의 채소가 밟혀서 찢어지거나 문드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하루종일 누워만 계셨다
병원에도 가끔 가시지만 간이 많이 상하셔서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만큼 힘이 없으셨다
얼굴에는 황달이 너무 심해서 누렇게 부어 있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 하셨다
식사도 제대로 하시질 못했고, 걸음도 겨우 걸으셨다
그러고 보니 내가 대신하여 한 번씩 중학교 근처에 가서 밭을 보면 쓸만한 채소는 하나도 없이
모조리 짓밟혀 있었다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려 드리자 한 번은 아버지께서 작정을 하고 나와 함께 가셔서
학생들 공이 넘어오자 그 공을 바닥에 놓고서 소시랭이로 찍어 터뜨려 버리셨다
체육선생도 오고, 나중에는 육성회 간부들이 와서 이런저런 싫은 소리를 하고 가기도 했다
그러던지 말던지 아버지는 다음에 공이 다시 넘어오면 그때도 어김없이 터뜨릴테니
조심하라며 윽박지르셨다
아버지가 와 계시는 동안에는 학생들도 조심을 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내가 한 번 가보면 우리 밭은 중학생들의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고의로 더 그러는 것 같았다
한 가정에 가장이 몸져 누워계시니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다른 학생들은 모두 우리 마을에 있는 이곳 중학교에 다들 입학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이 중학교와 관계도 좋지 않은데다 자식을 큰 도시에서 공부시켰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셨다
그래서 택한 곳이 중학교 설립인가가 나지 않은 기술학교였다
말이 중학교일 뿐 취업을 전문으로 하여 졸업과 동시에 직장으로 내보내는 것이 이 학교의
주 임무였고, 교육청에서 지원도 다소 받는 것 같았다
1, 2학년때는 같이 배우다가 3학년이 되면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뉘어 지고
취업반을 택한 학생들은 비좁은 실습실에서 옹기종기 실습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는 진학반으로 가서 공부를 했는데, 일반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준을 학교에서
따라 가지를 못했다
그러다보니 매 년 검정고시를 보게 되면, 진학반에서 겨우 10여 명 정도가 합격을 하는데
합격을 하고 나서도 일반 고등학교에 가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시험을 합격하고 난 뒤, 일부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바로 하겠다며, 그 다음달 부터 학원에 등록을 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욕심이 나서
부모님께 졸라서, 나도 난생 처음으로 사설 학원에 등록을 하였는데,
기초가 워낙 안되어 있고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도 자체도 워낙 빨랐지만. 검정고시에 초점을 맞추어 공부한 학생과 일반중학교를 정상적으로 마친
학생과는 실력차가 컸다
아버지는 늘 편찮으셨고, 자연스레 하시던 사업도 접으시고, 우리 가족은 철길 건너편에 구입해 둔
조그만 포도원이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나의 농사일은 시작되었다
학원은 시험이 다가오는 시점을 중심으로 몇 달 앞두고 반짝 공부를 하는 식이었다
하루종일 밭에서 흙을 만지면서 일을 하고 나면 오후가 되면 녹초가 되는데,
학원 단과반 시간이 되어 하루에 4번씩 오는 3등 열차를 타고 학원 가서 기다리다가
1시간 수업을 듣고는 마지막 기차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고
복습을 조금 하다가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때는 힘들어도 아버지가 일을 못하시니까 내가 도와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정을 일으켜야 된다는 욕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점에 나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고 점수가 나오도록 힘들게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험에 합격할 정도 까지만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더 이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오후 늦게 잠시 학원 갔다가 밤늦게 집에 오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러 가고 하는 식이 반복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힘이 부쳤던 것 같다
내가 천재였으면 그 방식이 좋았을 지 모른다. 그러나 나도 아주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이것이 나의 어린시절의 공부 스타일이었다
학교에서 서로가 경쟁이 되어야 하고, 하루 종일 공부만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집에서 할 일 다 하고 남은 시간에 공부를 하니, 천재라도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회가 되어 다시 한 번 학창시절이 주어진다면, 수학여행도 가고 싶고, 친구들과 좋은 우정도
쌓고 싶고, 멋진 장래 설계를 하여 마음에 드는 직장에 다니면서 폼도 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