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겐
1. 저자
오리겐은 클리멘트의 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자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내용은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의 6장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겐의 100여편의 서신들을 수집했다.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기독교 부모에게서 185년 또는 186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 갈루스(251-253) 시대에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이다. 그는 부친 레오니다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부친은 로마제국의 황제 세베루스(193-211) 10년, 즉 202년 또는 203년 순교하고 말았다. 부친이 감옥에 검거되자 그도 역시 부친과 함께 순교할 마음을 먹었지만 모친이 그의 옷을 숨겨 발각되지 못하도록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부친에게 서신을 보내어 가족을 걱정말고 자신이 잘 돌보겠다고 했다. 그 후 그는 판타에누스와 클리멘트의 제자가 되었다. 17세 때에 그는 문법을 배움에 있어 자신의 탁월함을 나타내었다. 가족을 책임지는 오리겐은 반은 경건하고 부유한 부인의 도움과 반은 자신이 가르치는 일로 벌은 재정으로 가족을 돌보았다. 하지만 더욱 더 배워야한다는 마음을 먹고 마침내 18세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 들어갔고 후에 그 학교의 교장직에 클리멘트를 이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가르치는 삶은 두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204-230년이고, 두 번째는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23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간이다.
처음 시기 동안 그는 가르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와서 강의를 들었다. 더욱이 그의 단순한 삶이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복음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 그래서 맨발로 또 하나의 두루마기로만 살았다. 바닥에서 자고 잠과 음식은 심각할 정도로 적었다. 또 문학 활동에 쉬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구약성경의 헬라역본과 70인역을 비교했고, 헬라본문과 비교했다. 로마감독 제피리누스 시대에 212년 가장 오래된 교회를 견학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했다. 그리고 비기독교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그는 25세의 나이에 철학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신플라톤주의자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학교도 다녔다. 성경에 대해 묵상하기 위해 히브리어를 배웠다. 이단자들과 이방인들도 그의 강의를 배웠다.
215-216년 로마제국의 황제 카라칼라의 핍박으로 인해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가이사랴의 감독 데오크티스투스와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는 그에게 자신들의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라고 했다. 데메트리우스는 218-219년에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불렀기에 교사로서의 직책을 다시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가르치는 삶에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작품들을 특별히 성경 강해서를 이 시기에 쓰게 되었던 것이다. 230년에 그는 아카이야로 여행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도착했다. 이전의 친구였던 데오크티스투스와 알렉산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에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에게 알리지 않고 사제로 수임시켰다. 이것은 교회법을 어기는 처사였다. 그래서 데메트리우스는 이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래서 오리겐은 231년 또는 232년 알렉산드리아 학교장직에서 파직 당했고, 사제직도 파직을 당했다.
그래서 오리겐은 더 이상 이집트에 거할 수 없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을 당해 가이사랴로 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두 번째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일로 인해 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미누스(235-237)의 핍박을 피할 수 있었다. 241년 그는 아텐으로 여행하고, 보스트라의 감독 베릴루스를 정통신앙으로 되돌리기 위해 244년 아라비아로 여행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황제 데시우스(250-251)의 핍박 동안 그는 감옥에 검거되어 많은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죽을 정도로 고문시켰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석방된 직후 얼마 되지 않아 254년 도는 255년 69세의 나이로 두로에서 세상을 떠났다.
2. 작품
초기부터 오리겐은 ‘아다만티우스’(철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를 이렇게 부르면서 그의 이성적 능력을 표한 바 있다. 제롬은 그의 작품들을 극찬했다. 오리겐은 쉬지 않는 호기심과 비범한 지식을 가진 자였다. 깊은 지식보다는 넓은 지식을 소유했다. 그는 당대에 철학적,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모든 지식을 소유했다. 오리겐은 특별히 성경적 신학자였다. 성경에 대한 자신의 주석들을 쓸 때 자신의 신학 개념을 잘 나타냈다. 오리겐은 교회가 지금까지 있었던 저자들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에피파니우스는 그가 6,000권의 책을 썼다고 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제롬은 800권의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가 가장 관심 가진 책들은 성경적 작품들, 변증적 작품들, 그리고 논쟁적 작품들이었다. 또 신학적 작품들과 금욕적 작품들이다.
가. 성경적 작품
오리겐이 쓴 성경적 작품들 중 첫 번째는 「6겹의 성경」(Hexapla)이다. 6권으로 된 구약성경이다. 6권이란 1) 히브리어 본문; 2) 헬라어로된 히브리 본문; 3) 아퀼라의 헬라어역; 4) 심마쿠스의 헬라어역; 5) 70인역의 헬라어역; 6) 테오도티온의 헬라어역 등이다. 시편은 두 가지 역본이 있기 때문에 8줄로 쓰였다. 본문들의 이러한 배열은 다른 역들과 원본들을 비교하고 구절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오리겐은 성경의 본문비평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히브리 원어보다도 70인역이 더 중요함을 나타내 보이려는데 있었다. 동시에 유대인들에 반대하여 썼고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소했던 논쟁자들에게 제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6겹의 성경」의 구성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어 약 245년 가이사랴에서 완성되었다.
이 외에도 성경적 작품으로는 「스콜리아」(Scholia), 「설교집」(Homilies), 그리고 「주석집」(Commentaries) 등이 있다. 「스콜리아」는 성경에 나타난 어려운 구절들에 대한 문법적 해석과 간략한 강해이다. 특별히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이사야, 시편(1-15편), 전도서, 마태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갈라디아서 등에 대한 것이다. 「설교집」은 여러 관점에서 본문의 뜻을 마치 교수처럼 논한다. 어떤 때는 본문에서 교훈들을 끄집어내어 설교자와 도덕가가 된다. 이따금 그는 교의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신구약 성경에서 약 500가지 설교를 수록하고 있다. 실제는 더 많은 설교집을 썼다고 여겨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루피누스와 제롬에 의해 그들 중 약 200편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주석집」은 독자들이 성경을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쓰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리겐의 해석은 매우 알레고리칼 하다. 그의 주석은 항상 불완성적이다. 244년 이전에 오리겐은 창세기 1-4장, 시편, 잠언, 아가, 이사야 1-30장,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소선지서,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244년 이후 마태복음, 고린도전후서와 디모데전후서를 제외한 바울서신을 주석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석집들의 완성품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인용들과 헬라어 또는 라틴어 번역들에서 나온 글들이 전부이다. 제롬은 자신의 아가서 주석을 쓰면서 오리겐의 주석을 극찬하기도 했다.
나. 변증적 작품과 논쟁적 작품
8권으로 된 「셀수스에 반대하여」(Contra Celsum)에서 우리는 오리겐의 변증적 성격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다. 셀수스는 박식한 플라톤주의자였다. 그는 약 177-178년 기독교에 반대하는 글, 「진리의 표현」(Demonstration of Truth)을 썼다. 오리겐 덕분에 셀수스가 쓴 작품의 거의 다를 읽을 수 있다. 셀수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기독교의 지식은 이방인들 가운데 특이한 것이지만 그 기원과 깊이를 잘 알 수 없다고 밝힐 정도로 기독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성경을 사용하여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표시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여러 분파들이 있으며, 서로들 다른 교리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마치 근세시대에 볼테르처럼 그는 신랄한 비판자이고 경멸자이다. 오리겐은 이 작품에 대하여 약 244-249년 친구 암브로스의 요청으로 쓰게 되었다. 4권으로 된 셀수스의 책들은 오리겐은 8가지로 비판하고 있다. 셀수스의 글들을 직접 인용하면서 반문에 답하고 논박하는 형태를 취한다. 독자는 오리겐의 탁월하고 차분한 변증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셀수스에 반대하여」는 오리겐의 변증적 작품들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완전한 작품이 아니라 파편적으로만 대할 수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만 아니라 이단자들과 수많은 논쟁을 감행하는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단적 이론들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실제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다. 신학적 작품
오리겐의 신학적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원리들에 대해」(De Principiis)이다. 헬라어로 쓰인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지만 인용문들을 우리는 접할 수 있다. 루피누스에 의해 라틴어역본이 우리에게 전체 내용이 전해지지만 신뢰할 수 없다. 루피누스는 오리겐의 작품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제롬의 글에서 우리는 27개의 부분들을 접할 수 있다.
「원리들에 대해」은 23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인 것이다. 그의 목적은 서론에 잘 밝혀져 있다. 사도들과 교회의 설교로 시작하여 그는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와 가르침을 조직적으로 다루고 있다. 마치 조직신학과 같다. 이 작품을 오리겐은 4권으로 나눴다. 1권은 하나님, 그분의 단일성과 신성, 로고스, 성령과 천사들을 다룬다. 2권은 세상과 창조, 인간과 그 기원, 성육신으로 인한 구속, 그리고 종말에 관한 것이다. 3권은 인간자유, 선과 악의 갈등, 그리고 선의 최종적 승리에 관한 것이다. 4권은 성경적 해석과 주석에 관한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 모든 교리를 완전히 구성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많은 잘못들이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제롬은 그의 작품을 가리켜 선보다 악이 더 많다고 평했다.
라. 금욕적 작품과 서신
오리겐은 두 권의 금욕적 작품을 썼다. 하나는 「기도에 관하여」와 「순교자에 바치는 글」이다. 첫 번째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17장은 일반적인 기도의 필요성과 효력에 관해 다루고 있다. 18-30장은 주기도문의 주석이다. 정말 탁월한 그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231년에 쓰였다. 두 번째 책은 235년에 쓰였고 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미누스 핍박 시작에 오리겐은 암브로스와 가이사랴의 감독 프로토크테투스에게 쓴 글이다. 이 책에서 오리겐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그들의 죽음의 고귀성을 알린다.
오리겐에게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서신들이다. 유세비우스는 100편 이상의 서신을 수집했다고 한다. 이것들 중 겨우 두 편만 현존하고 있다. 하나는 238년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에게 보내는 서신이고, 다른 하나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3. ‘기도에 대하여’
아래의 글은 2장—기도할 때 성경 사용에 관한 글이다 :
내가 발견한 기도에 관한 첫 번째 예는 야곱이 형에게서 떠나 이삭과 리브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메소포타미아로 갈 때이다.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면, 또 내가 가는 길에 나를 인도한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베푸신다면,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안전하게 나를 이끌어 오게 한다면,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이 돌은 하나님을 위한 기둥이 될 것이고, 십일조를 드릴 것입니다.
기도란 말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것과 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기도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들을 얻기 위해 교환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기도 말투는 초기 문서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개구리 재앙이 있은 후 두 번째 재앙부터 10번째 재앙에 이르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바로가 기도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우리가 의미하는 기도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계속하여 본문을 봅시다 :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이까 내게 보이소서.” 세 번째 재앙인 이의 경우를 볼 때 바로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재앙인 파리의 경우를 볼 때 바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런 후 모세는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 “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하고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재앙에도 바로는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일곱 번째 재앙에서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말했습니다 :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직후 모세는 바로에게서 나와서 도시 밖으로 갔습니다. 주님에게 자신의 손들을 내밀어 천둥이 그치도록 했습니다.
모세는 기도하며 손을 주님께 내밀었습니다. 8번째 재앙에서 바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 그래서 모세는 바로에게서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기도라는 말이 드디어 나타납니다. 또 레위기의 경우를 봅시다.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세로 육십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또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민 6:2-3).
이 말씀 직후,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4-5). 민수기 끝부분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민 30:2).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민 30:3-4). 잠언을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을 다시금 볼 수 있다 : “나는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나의 맹세를 갚았습니다. 어리석은 아들은 부친에게 부끄러움을 줍니다. 간음한 여인의 맹세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맹세는 사람에게 올가미가 될 뿐입니다. 맹세한 후에 회개하게 됩니다.”
전도서를 보면, 기도와 맹세가 함께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네 명의 사람이 맹세를 지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기도의 의미를 대체적으로 두 가지 의미, 기도와 맹세를 나타내고 있다고 여깁니다. 맹세는 사무엘의 모친 한나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주님의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통 가운데 있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슬퍼했습니다. 그녀는 맹세하였습니다 :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그녀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서원했습니다. 여기를 보면,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맹세라는 말은 기도라는 말씀과 다릅니다. 이런 의미로 레위기와 신명기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씀은 기도가 압니다. 여호사밧이 맹세했던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여호사밧은 주님께 맹세하여 말하기를 암몬 자손을 나의 손에 붙이시면 나의 집에서 나와 암몬 자손과의 평화를 맺고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자는 주님께 드릴 것이고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4. 평가
비록 그가 교회적 고대성을 지닌 자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누구보다도 특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모했다. 그의 학문과 경건은 학문과 일치했지만, 그는 553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이단자로 선포되었다. 그 이유는 중요한 교리들을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 클리멘트보다 훨씬 절충주의자였고 신플라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물질의 영원성을 믿었고, 인간 영혼의 선재설을 믿었고, 죄가 인간의 육체에만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고, 모든 인간들만 아니라 심지어 마귀까지도 마침내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이것은 니케아 정통 신앙인들에게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에게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위격적 결합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속적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 자체를 부인하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이상에서 말하는 오리겐의 위험성보다 더욱 더한 것은 그의 사상이 후기에 나타나는 펠라기안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래서 펠라기안의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선행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사상은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펠라기안적 신앙형태가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