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위는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년)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의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성 남종삼은 한국 교회사 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인물이다.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 부사를 지낸 부친 남상교(南尙敎)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2세 때인 1838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 때에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보필했다. 고종 때에는 그의 학덕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바 있다.
그는 러시아의 남침이 강화됨에 따라 야기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당시 집권자인 흥선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프랑스, 영국 등과 조선이 동맹을 맺어 이를 제어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국내에서 전교 활동을 하던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흥선 대원군의 회동을 주선키로 했으나 때마침 두 주교의 지방 사목 여행으로 공교롭게도 이들에게 연락이 되기까지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그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대원군은 오히려 천주교 박해로 급변하게 되어 1866년,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억되는 병인박해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서울 인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된 남종삼 성인은 홍봉주, 이선이, 성 최형 베드로, 성 정의배 마르코, 성 전장운 요한 및 성 베르뇌 주교, 성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그 해 3월 7일(음력 1월 21일) 홍봉주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어서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규희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가 공주와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고, 처 이조이(李召史)와 차남 남명희 그리고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이조이 역시 창녕에서 순교하고, 당시 14세의 어린 나이에 붙잡혀 갔던 명희는 전주 감옥에 수감한 뒤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1867년 가을 이곳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것이다.
바로 이 때 남종삼과 함께 러시아의 남침을 물리치는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조약을 맺는 길뿐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했던 홍봉주의 아들도 남명희와 함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홍봉주 토마스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낙민(洪樂民, 1751-1801년) 루카의 손자이며, 부친인 복자 홍재영(洪梓榮, 1780-1840년) 프로타시오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한 바 있다. 모친 정조이(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로 기해박해 때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전주교구에서는 삼대와 사대에 걸친 두 소년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1월 9일)]
고종실록에 나타난 남종삼 가족의 처벌 요청과 과정
고종실록 3권, 3년 1월 24일(갑신) 의정부에서 제의하였다. ‘대사헌 임긍수(林肯洙)가 올린 글을 보니 남종삼(南鐘三)의 아비 남상교(南尙敎)에 대하여 의금부를 시켜 잡아다가 신문하여 진상을 밝혀낸 다음 사형에 처하도록 할 것을 제의하였으며, 남종삼과 홍봉주의 자식들이 나이는 비록 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흉악한 종자(種子)들을 자라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상교를 하루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처단케 하고, 두 역적의 처자들을 처단하는 문제는 대간들의 제의가 많이 제기 되고 있으므로 아직은 처리 할 수 없습니다.
고종실록 3권 3년 2월 6일(병신) 제천 현감 유남규(柳南珪)가 올린 보고를 받아보니 죄인 남종삼의 처 이씨(李氏)는 창녕현(昌寧懸)으로, 9살짜리 딸은 산청현(山淸懸)에, 7살짜리 딸은 영산현(靈山懸)에 보내어 여종으로 삼고, 4살짜리 아들은 의령현(宜寧懸)에 보내어 종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해당 현의 옥에 가두어 놓고 있으므로 형조로 하여금 각기 해당 귀양지에 압송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 남상교(南尙敎)는 공주 진영(公州 鎭營)에 엄하게 가두어 놓고 있으며, 그의 아들 남명숙(南明淑, 남명희의 오기인 듯)은 전주(全州) 진영에 엄하게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 편,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