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표등록·체인점 모두 실패너도나도 '원조' '본가' 내세워'40년 원조' 자존심 지키려아예 마을 밖에 새 가게 차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安興面) '찐빵 마을'은 휴가철 내내 북적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이곳에서 몇백 m 떨어진 곳이다. 바로 전국에 한 곳밖에 없는 안흥찐빵의 종가(宗家) '심순녀 안흥찐빵'이다.
'촌부(村婦) 한 사람이 지역경제를 살렸다'는 말을 듣는 찐빵 명인 심순녀(沈順女·72)씨는 그러나 안흥찐빵이 세상에 알려진 지 30년이 다 되도록 '시골 빵집 주인'에 머무르고 있다. 무슨 이유일까.
■장돌뱅이 새댁과 밀가루
이름과 달리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 살배기 순녀를 등에 업고 평창에서 안흥으로 재가(再嫁)해 왔다. 열아홉에 가난한 집으로 시집갔다. 어머니가 "잘 사는 집에 가면 구박받는다"며 일부러 고른 집이었다.
좁은 집 한 채에 시백모와 시아주버니 가족까지 12명이 살았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는 날이 드물었다. 옥시기(옥수수)로 허기를 견디는 일은 호사(豪奢)에 속했다. 비만 오면 방으로 비가 줄줄 새 그릇을 받쳐 놓기 일쑤였다.
스물셋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심순녀는 농사지을 줄 모르는 남편을 대신해 장돌뱅이로 나섰다. 고기, 양말, 비누, 과일…. 안 팔아 본 게 없었지만 팔리지는 않았고 많은 물건을 이고 다녀서 머리에 통증이 생겼다.
"차라리 도망가자." 밤에 애를 안고 나서다가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돌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장사를 하러 원주에 갔는데 역 앞에 호떡 장수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앉아서 팔면 참 편하겠다….'
호떡 만드는 법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사람들은 윽박지르기만 했다. "젊은 새댁이 뭘 이런 걸!"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려 할 때 심순녀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봐 새댁!" 호떡 장수 중에 고향 아저씨 한명이 있었던 것이다.
"잘 봐. 밀가루를 이렇게 반죽해서 이렇게 개서…." 심순녀는 그렇게 밀가루 음식의 비기(秘技)를 전수받았다. 안흥 지서(支署) 앞 시멘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한개 5원씩 호떡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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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순녀씨가 갓 쪄낸 찐빵을 손에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먼 길을 돌아 줄을 선 뒤 찐빵을 산 사 람들은“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궁극의 찐빵 맛”이라고들 말한다.
■안흥찐빵의 탄생
7년간 동상(凍傷)에 걸려도 호떡장사를 쉬지 않았다. 애 낳고 사흘만 지나면 좌판을 폈다. 튀김, 도넛, 핫도그, 김말이, 그리고 찐빵도 같이 팔았다. 근처 식당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는 동안 점점 밀가루 반죽의 '달인'이 돼 갔다.
스물여덟살 때 비로소 면사무소 앞 세 평 남짓한 가게를 얻고 '호떡집'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만 해도 찐빵은 주력상품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걸 만들었냐고요? 그저 먹고살려니 열심히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봤지요. 난 그게 맛있는 줄도 몰랐어요."
물과 막걸리를 부어 밀가루를 반죽하고 양념한 팥을 무쇠솥에서 끓여 그 속에 넣고 찌는 '단순한 과정'이었다. 거기에 수십년 동안의 노하우가 축적돼 갔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전설의 배합비(配合比)가 생겨났다.
1980년대 초 귀부인이 찐빵 100개를 사 갔다. 그래 봐야 5000원어치였다. "다음에는 1만원어치를 사 가는 거예요. 그 다음엔 2만원, 3만원…." 알고 보니 원주에 사는 군인 가족인데 하도 맛있어 사병들에게 다 돌렸다는 것이다.
"세상에, 찐빵이 그렇게 맛있는 줄은 몰랐다!" 과객(過客)들에게 입소문이 퍼지고 밭농사 새참 품목으로 각광받게 될 무렵 그는 생산 품목을 찐빵으로 단일화했다. '안흥찐빵'이 탄생한 것이다.
■브랜드 관리 실패,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안흥찐빵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심순녀는 '신(新) 지식인'으로 뽑혀 청와대에 불려 갔다. 그 무렵 한 손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줌마, 상표 등록하셔야 할 텐데요"라고 권했다. 그는 "이까짓 찐빵 가지고 무슨 상표예요?"라며 웃어넘겼다.
그런데 마을에 '안흥찐빵'이란 간판을 내건 집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 아저씨 말이 맞았구나!" 그제야 무릎을 치고 서울에 가서 상표 출원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안흥왕찐빵'이란 상표를 등록해 지루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안흥에는 찐빵집이 40개 가까이 생겼다. 심씨는 "내가 벌써 죽었다는 소문까지 생겨났다"고 말했다.
심순녀를 모르고 안흥을 찾는 사람들은 혼란을 겪는다. 숱한 찐빵가게들이 간판에 '원조' '시조' '본가' '할머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새말IC 쪽에는 '심 할머니 찐빵'이라는 간판도 있다. 찐빵은 이제 안흥의 대표상품으로 정착했고 업자들은 품질 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는 동안 심씨는 아예 마을에서 벗어난 곳에 새 점포를 열고 상호를 그냥 '심순녀 안흥찐빵'이라고만 했다. 안흥찐빵축제에서도 탈퇴했다. 그런 그에게 횡성군은 최근 군민대상(郡民大賞)을 줬다.
안흥찐빵이란 이름은 이미 전국 도처에 널린 흔한 이름이 됐다. 고속도로 휴게소와 국도변에서도 곧잘 눈에 띄고 미국 한인타운에선 중국산 짝퉁까지 출현했다. 심씨는 "타지 손님들이 엉뚱한 찐빵을 먹고 실망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너무 속상하다"고 털어놨다.
아직도 매일같이 직접 빵을 찌는 심씨는 한 가마에 30만원씩 하는 국산 팥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10여년 전쯤 서울과 일산·산본 등에 체인점을 내기도 했지만 재료비에 부담을 느껴 다 떨어져 나갔다.
"500원짜리 빵 팔아봐야 얼마나 남겠어요? 내가 내 인건비 뜯어먹고 사는데…." 하지만 그 덕분에 시골까지 발품을 파는 사람들은 여전히 '원조'를 맛볼 수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