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품앗이
편 영 미
이른 아침, 각별하게 지내는 이웃집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영미야, 김장하자.” “벌써?” 조금 전 김장배추에 무름병이 왔다는 뉴스를 들었단다. 자주 오는 비와 이른 추위가 언니의 마음을 급하게 한 모양이다. 두 주 뒤로 김장 날을 잡았다.
늘 친정과 시댁에서 갖다 먹던 김장김치를 몇 해 전부터 손수 담그고 있다. 서로 도와가며 김장하는 이웃들을 보며 용기를 냈다. 김장을 직접 해 보기로 마음먹고 친정과 시댁에 ‘이제 김장 따로 할게요.’라고 했을 때 양쪽 어머니의 둥그레진 눈동자가 떠오른다. 못 믿겠다는 의심스러운 눈빛이다. 매년 김장하는 날 가서 일을 조금 돕고 일 년 먹을 김치를 챙겨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다. 첫해 김장을 하고 입술이 부풀고 몸살이 났으니 말이다. 밭에서 배추를 뽑아 다듬고 절이고 뒤집고 씻고 건져 물기를 빼는 일들과 양념을 만드는 과정을 건너뛰었으니 그 고됨을 알지 못했다.
요즘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손쉽게 김장하는 법, 맛있는 김장 비법들이 쏟아진다. 몇 해에 걸쳐 이 방법 저 방법을 다해 보며 가족의 입맛에 맞는 김치 맛을 찾아가고 있다. 매년 주문하는 곳에서 절인 배추와 새우젓을 주문했다. 친정에서 마늘과 생강을, 시댁에서는 고춧가루와 무를 가져왔다. 올해는 사골 육수와 황태 육수를 반반 사용해 보려고 한다. 언니와 함께 마늘과 생강을 까서 빻아두었다.
김장 하루 전 황태, 무, 양파, 파, 건표고, 건새우, 다시마 등을 넣어 육수를 낸다. 충분히 우러나면 건더기는 건져내고 그 육수에 불린 찹쌀을 넣고 다시 끓이면 황태 육수 찹쌀풀이 된다. 사골 육수는 단골 식육점에 미리 부탁해 사 두었다. 육수가 끓는 동안 김칫소에 들어갈 무와 고구마, 쪽파와 갓을 다듬고 씻어 물기가 빠지게 채반에 건져 둔다. 양념에 들어갈 무와 배, 생새우, 청각을 갈고, 단맛을 책임질 빨간 홍시의 껍질도 깐다.
식힌 육수에 고춧가루와 젓갈, 갈아둔 것들을 뒤섞어 만든 양념을 하루 숙성시킨다. 언니는 여기서 한 가지 조언을 해준다. 고춧가루를 반만 넣고 다음 날 나머지 반을 넣어 양념하면 빛깔이 더 곱다고 한다. 내년엔 언니 도움 없이 양념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사이 절인 배추가 저녁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김장하는 날 아침이다. 일찍 배추를 건져 물기를 빼고, 무와 고구마를 채 썰고 쪽파와 갓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숙성된 양념과 섞어 김칫소를 완성했다. 김장을 도와줄 일꾼 두 사람이 왔다. 집 안이 들썩거린다. 이때는 손이 많을수록 좋다. 배춧잎 사이사이를 붉게 물들이다 보면 빈 김치통이 금방 채워진다. ‘아이코! 허리야, 다리야.’ 하면서도 언니들의 입가엔 연신 웃음꽃이 피어난다. 김장을 마친 후 뜨끈한 배추 된장국과 김이 술술 나는 삶은 돼지고기와 굴, 김장김치 죽죽 찢어 막걸리 한 잔씩 기울이며 피로를 푼다. 먹거리 앞에 분위기는 더 훈훈해진다.
“김치 냉장고 ‘딤채’가 김치라는 뜻이란다.” 한 언니의 말에 김치의 어원을 찾아보니. 김치를 옛날에는 ‘지(漬)’ 혹은 ‘침채(沈菜)’라고 했다고 한다. ‘침채(沈菜)’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의미로 '팀채', '딤채'로 발음되다가 음운변화로 인해 '짐치'가 되었다가 오늘날의 '김치'로 발음되었다고 한다.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김장 문화’가 2013년 12월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선정되었으며, 2017년 11월 15일에는 김치 담그기가 국가무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될 만큼 우리에게 김치는 하나의 음식이라기보다 생활 문화 그 자체로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김장이 현대 사회에서 가족 공동체뿐 아니라 김장 공동체로 우리 사회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우와! 우리가 진짜 중요한 일을 하네.” 우리는 한참을 김장김치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는다.
김장 문화는 많이 변해가고 있다. 옛날에는 채소가 귀해지는 겨울을 대비해 김치를 담아 땅속에 묻은 김장독에 저장해 두고 겨우내 먹었다. 요즘은 사시사철 쉽게 채소를 구할 수 있고 언제든지 갖가지 김치를 사 먹을 수도 있다. 김장독을 묻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김치냉장고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절인 배추며 맞춤형 양념을 주문해 김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다 사서 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서로 도와 김장을 하며 가족과 이웃 간에 나누는 정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김장하는 법은 지역과 만드는 김치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흩어져 있는 가족이 모이고 이웃 간에 품앗이로 함께 모여서 담소를 즐기며 공동으로 김장을 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옛 전통 방식 그대로 김장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는 김장 문화가 잘 이어나갈 수 있길 바라 본다.
11월, 아직 품앗이 김장 다닐 집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