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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 시대의 신화예술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맨 처음 뜨기 시작할 때부터
준비했던 여행길을
매번 달이 차오를 때마다
포기했던 그 다짐을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말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지 몰라
지레 겁먹고 벙어리가 된 소년은
모두 잠든 새벽 네 시 반 홀로 일어나
창밖에 떠 있는 달을 보았네
하루밖에 남질 않았어
달은 내일이면 다 차올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걸 놓치면 영영 못 가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가자
오늘도 여태껏처럼 그냥 잠들어 버려서
못 갈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기엔 소년의 눈에는
저기 뜬 달이 너무나 떨리더라
아 아 아
달은 내일이면 다 차올라
아 아 아
그걸 놓치면 절대로 못 가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가자
장기하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의 노랫말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컴퓨터 영상에서 찾아 듣고 보면서 밤 깊은 시간을 홀로 재밌게 놀았습니다. 못 먹는 술도 혼자 홀짝거리며 왜 이 노래가 그리도 반갑고 마음 짠하게 다가오는지 나는 한참을 ‘장기하와 얼굴들’과 놀았습니다. 노래에 그토록 빠져보기는 참 오랜만입니다.
왜 나는 오늘‘장기하와 얼굴들’에 취해버렸나. 여러 가지가 묘하게 뒤섞인 노래의 분위기가 나를 취하게 했습니다. 올드락 분위기, 우리 말가락이 살가운 랩송, 흩어져버리고 정지된 리듬 사이로 중얼거리는 일상의 말들, 차갑고도 담담한 소시민적 일상서사가 나를 슬프게 웃깁니다. 내가 좋아하게 된 두 노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달이 차오른다~ 가자.’가 제 마음을 울려주고 웃겨주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장기하를 페러디한 놀이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짠한 감동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천재적 예술가를 만나서 반갑고 기쁩니다.
이제 나는 김민기 노래와 또 다른 새 시대의 ‘유쾌한 비애의 노래’를 만납니다. 질리지 않는 중독성, 별 볼일 없는 일상의 승화를 30년 만에 그의 노래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의 표정과 음악은 차갑고, 소외 깊은 현대 도시의 소시민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느낌을 줍니다. 뒤에서 백댄싱을 하는 두 무희‘미미’는 꼭 나의 화가 친구 안창홍의 슬픈 키치 그림처럼 도시의 묘한 슬픔의 알레고리, 차가운 침묵의 유희가 있습니다. 지성이 바보처럼 어리숙해보이고, 바보같은 무표정에서 지성이 내재적으로 번뜩이며, 소격의 웃음과 슬픔이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오면 관중은 여기저기서 쿡쿡거리며 유쾌한 공감에 빠져듭니다. 서로 파편화된 조각들은 그물망이 되어 거대한 공감대를 이룹니다.
컴퓨터에서 검색되는 장기하 노래를 패러디한 노래영상물들을 보면 피겨스케이팅 영상과도 어울리고, 애니메이션과도 어울리고, 코미디나 일반 시민들의 가사 바꿔 부르기 등등 통섭예술로 바로바로 증강되는 현상을 봅니다. 이 노랫말, 음악, 이미지, 춤, 영상미, 그리고 장기하의 표정 없이 웃기는 몸짓이 한데 어울려 통섭의 새 예술을 만듭니다. 비로소 이제 유비쿼터스시대 예술의 한 전형을 한국형으로 만난 것 같습니다.
소시민의 일상에서부터 스포츠 영웅 김연아, 장미란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만나며‘증강현실’이 됩니다. 하나의 노래가 애니메이션과 스포츠 영상과 노랫말과 표정 없는 무희의 춤과 꾀재재한 골방과 거리의 무표정하게 출근하는 소시민 모두가‘장기하와 얼굴들’이 깔아놓은 의미망과 통섭하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달이 차오른다~ 가자.’가 보여주듯이 도시의 깊은 그늘에서 차오르는 달빛 속 초월의 몸짓은 미래를 향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사회화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한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바타’라는 영화입니다. 유비쿼터스시대 신화적 영상예술입니다. 신화에서 영화의 기본 텍스트를 가져오고 영상그래픽 디자인, 첨단과학기술의 상상력 등 인문, 예술,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영화입니다. 영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지구의 자본가와 군인은 지구의 에너지 고갈을 타개한다는 일념으로 새로운 행성 판도라에 에너지 자원을 구하러갑니다.
이 프로그램에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는 하반신 마비의 불구를 고칠 수 있는 수술비 마련을 위해 자원하고 판도라의 지구인 기지로 떠납니다. 자본가와 권력자는 판도라의 독성이 강한 대기로 인해 인간이 직접 침투하기 어려운 것을 극복하려고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창조합니다. 아바타는 판도라 외계인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한 새로운 생명체로 영화 주인공 제이크의 의식이 들어간 제이크 아바타도 만들어 냅니다. 한편 행성 판도라에는 지모신을 섬기며 살고 있는 나비(Na'vi)종족이 있는데 야생의 숲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마시고 느끼며 생활하는 종족입니다. 지구인들은 이들을 숲에서 몰아내고 지하에서 에너지자원을 채굴하려고 합니다. 제이크 의식이 들어간 아바타는 이 임무를 수행할 첩보임무를 부여받고 침투하는데 거기서 만난 나비부족의 여전사 네이티리를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비들과 같은 편이 됩니다. 이를 눈치 챈 지구인 지휘부는 판도라의 숲을 없애고 대규모 공격을 시작합니다.
나비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하자 영적인 판도라 종족들에 감동한 아바타들이 그들 편이 되어서 지구인들의 침략에 맞서고, 여기에 동조하는 지구인 부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면서 외계인과 지구인의 일대 전쟁이 펼쳐진다. 지구에너지 개발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아바타의 동조자와 판도라 원주민족들이 연대한 싸움에 결국 지구인 침략 계획은 무산되고, 나비는 판도라의 삶의 방식대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결론에는 지구는 비록 망가졌어도 또 다른 행성마저 지구처럼 파괴할 수 없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구인에게도 판도라 횡성에 사는 외계인처럼 영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신화적 인간이 있음을 말하려 합니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는 자본과 권력의 욕망을 반대하며,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따르려는 메세지가 있습니다.
미국영화가 종전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9.11테러와 부시정부의 중동전 이후 미국지성계의 성찰이 엿보이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미국영화가 이상한 것은 과학기술문명의 위기를 시사하면서 위기의 해결책을 지구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밖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스타워즈나 같습니다. 아바타는 지구 안에서 희망의 대안을 찾지도 못하고 지구 밖에서도 실패한 전쟁이라는 것을 실토합니다. 신화의 파괴로 사랑마저 잃고 고독하고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행성이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여전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대지에서 긍정적 삶과 신성한 생존의 존엄을 느끼게 하는 영화가 못 되고 영광과 환희는 타자의 신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술정신이 얼마나 피폐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상기술에서는 최고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신화콘텐츠와 기술과 예술미의 결합이 유비쿼터스시대 예술이 발휘할 수 있는 막강한 힘임을 보여줍니다. 이 정도 영상기술이라면 전 지구적 메시지로 활용할 충분한 힘인데 영화감독의 세계관과 미국 헐리우드 영화시장의 한계일 것입니다. 어쨌든 영화에서도 신화적 상상력은 계속 진화중입니다. 판도라 나비족 삶의 구현에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나 원시부족 신화 등의 비교적 때묻지 않은 신화들이 참고가 된 것 같습니다. 신화적 사유가 영화예술계에 깊이 파고들고 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예술과 신화 그리고 예술교육
한국에서 예술은 장르별 분과교육으로 재생산됩니다. 분과적 전문화가 지나치게 세분화 되고 분립된 것은 20세기 서양예술교육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한 나머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쳐 왔습니다. 이미 서양에서 조차 폐기한 장르주의 커리큘럼을 카피해서 적용하는 경향이 한세대 넘게 있어 왔습니다. 이미 예술의 세속화와 세기말적 한계를 들어 낸 서양예술교육시스템을 기계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통적 예술과 서구장르예술의 이질화, 장르주의와 통섭적 예술의 장벽, 자기 정체성 있는 삶의 가치에 부적격 등의 폐단을 가져왔습니다. 예술교육으로 예술에서 잃어버린 것은 신성한 영혼의 힘이고 얻은 것은 다양한 카피 예술입니다. 영혼 없는 예술, 예술 없는 예술산업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근본적 원인은 두가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고 신화적 신성성의 예술관 폐기에 있습니다. 전자는 한국적 특징이고 후자는 세계적 특징입니다. 특히 한국의 예술 상황은 그리 밝지 못합니다. ‘영혼 없는 예술’의 결과입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나는 누누이 동아시아정체성의 근원으로서 동아시아신화의 원리와 특징을 이 책 곳곳에서 언급하여왔습니다.
“예술과 신화는 인류의 최초의 상상력이며 마지막 희망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가, 영혼의 화두를 붙들고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에 투항하지 않는 마지막 대중지성이라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신화를 인정하고 미래에는 신화의 시대(영성의 시대) 도래를 기대하며 인류의 창조적 영혼이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화와 예술입니다. 신화는 예술의 마음이며 예술은 신화의 몸 같습니다. 둘 사이는 본디 혼일한 하나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는 문학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고 음악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의례가 신화보다 앞서는 전통이다.’라고 말하는 신화학자도 있습니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몸의 신화가 본래 예술입니다. 예술은 내안에 신성한 신화의 리듬을 찾아서 유희하며 스스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과학기술의 통제를 마지막까지 거부하는 유일한 분야가 예술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술은 본래 유연하고 자유로운 속성 때문에 과학기술과 학문과 통섭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술의 융합성과 통섭성은 신화의 몸체이기에 본래적인 속성입니다.
예술의 융합성融合性, 통섭성通攝性은 계속 현실 예술교육과 문화정책에 제기해온 온 문제였습니다. 인류문화예술사의 시원부터가 예술은 분과적 예술장르로 생성된 것이 아니기에 예술전통을 무조건 세분화할 수만은 없습니다. 흡사 인간의 몸을 다양한 분과목별로 치료하려는 서양의학이 몸 전체를 유기체로 하나의 유기체로 보려는 노력을 놓쳐버린 경우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뒤늦게 대체의학이니 자연의학적 요법을 배합하지만 절충주의입니다. 몸은 과목으로 분립된 서랍창고가 아닙니다. 삶과 예술은 본래 삶의 신체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가무악歌舞樂, 시서화詩書畵, 문학과 음악, 신화와 의례와 상징, 인문과 예술이 본래 융합된 채로 전해온 것입니다. 예술교육의 융합은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최근 학제간 통섭, 통섭학문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통섭(Consilience)은 ‘서로 끌어 당겨서 함께 도약’하는 것으로 원래 최근 생물학의 개념인데 예술과 타예술, 예술과 과학, 예술과 인문학, 예술과 기술, 예술과 산업, 예술과 사회 등이 서로 끌어당기며 함께 도약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술과 학문과 지식과 사회의 수평적 소통을 촉진하는 예술의 사회화가 통섭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학교 밖의 대중은 점점 정보통신 컴퓨터의 발달이 자극하면서 스스로 유비쿼터스 시대로 가고 있는 데, 예술교육은 20세기 초반의 장르분과교육에 아직도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 변화의 조짐은 있으나 생존위기에서 오는 자구책으로 당장의 경제적 효과만을 찾아보려고 문화산업에 바로 쓰일 수 있는 산업적 기능에만 급급하여 예술의 통섭력이 주는 공공성과 영성회복을 갈망하는 미래 대안적 문화가치를 방기하는 경향입니다. 신화는 문학의 고유한 장르과목이 아니라 인문학과 예술의 통섭을 매개하는 메타인문화입니다.
신화를 매개로 한 융합화와 통섭화와 함께 적극 고려할 것은 예술 고전, 특히 신화가 살아 있는 예술형식을 선별한 충실한 학습의 강화입니다. 고전예술 실기학습은 창작이라기보다 모방입니다. 예술의 모방은 과거의 산 영혼노동으로 들어가는 비밀회로입니다. 반면에 예술창작은 모방을 반대하며 창조적 포태로 나아갑니다. 서로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학습으로 과거의 영혼과 대화하는 것이고 후자는 미래의 영혼을 포태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현재적 만남으로 예술은 닫힌 인간의 마음을 열게 하며 몸을 치유케 합니다. 영혼들의 유쾌한 관계 갖기의 유희가 숙명적인 인간의 비애를 초월하게 합니다. 어째든 살아있는 영혼노동의 교육인 모든 예술의 장인학적 체계화는 더 늦기 전에 필요합니다. 여기서도 신화는 장인과 예술 사이에서 합목적성이 성립할 근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신화가 죽은 정체성 없는 예술교육, 사회에 필요한 대안의 부재 예술, 시민적 감성욕구와 정서형식에 부적합한 예술, 품격 높은 문화예술의 자원화 등을 준비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온 예술인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예술 대학생이 사회로 나오면 심각해집니다. 흡사 온실의 비닐이 벗겨진 화초처럼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각개약진을 합니다. 예술대학 언저리에서 재생산구조를 가진 예술인들은 그나마 좀 낳을 것입니다. 아닌가, 교원자격도 부여받지 못하고 4대보험도 없고 최저임금도 안 되는 교원직위도 없는 비정규직 시간강사일 뿐입니다. 예술의 유통은 늘 불안한 소형 여가시장이고, 레슨형 교육시장이고, 향락산업에서 소위 딴다라 역할을 하는 짜투리 시장입니다. 세속시대 국가체제에 지원받지 못한 모든 예술은 실용화해야 하고 시장에 유통되지 않으면 도태되어야 하는, 예술 없는 예술시대입니다. 악순환입니다. 나쁜 교육 → 예술의 사회 수용부재 → 실업자 → 예술천시로 직업전환. 이렇게 이어져온 것이 한국 예술인의 생존과 소멸의 법칙입니다. “예술이 밥 먹여주나?” 이 한마디가 한국예술의 현주소를 말해줍니다. 모든 것이 1차적인 인간의 욕구에 급급한 현실입니다. 이사회는 매우 이중적이어서 스타가 된 예술가의 상품성은 산업경제에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일반 예술인은 무관심한 사회입니다. 이런 압축형 산업사회, 소비자본주의는 임금노동만을 가치로 환산할 뿐 가사노동, 돌봄노동, 미적노동, 공공노동 등을 가치로 환산할 줄 모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공공성은 공무원과 학교가 모두 떠맡으면 다 되는 사회입니다. 미적 가치의 부재 사회에서 예술인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합니다.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예술지원 예산, 사회문화적 간접자원은 헛교육으로 낭비되고 예술가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에 비정규직조차도 못되는 실업자로 거리를 방황합니다.
예술가의 생존은 스스로가 알아서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찾을 라고 해야 찾을 수 없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공프로젝트 사업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예술유통도 아니고 좀비 그 자체입니다. 예술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기보다 국가예산을 낭비시키고 공공문화기관들의 행정기구만 커져갑니다. 예술가는 없는 예술행정기획만능입니다. 결국 시민은 세금 내고도 자기가 원하는 예술을 향유할 권리를 잃었습니다. 자기 세금내고 자기 정서에 맞지도 않는 문화예술을 억지로 수혜 받아야 하는 시민만 불운합니다. 나는 이것을 시민의 세속화- 비신화화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서비스 산업이 날로 커지는 현대사회에서 예술 유통은 협소하고 예술은 사회의 창조적 동력으로 활용되질 않습니다. 예술은 인문과 사회와 과학기술과 언론문화를 통섭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통섭의 힘이 있습니다. 이제는 가상과 현실이 예술의 통섭력으로 도약하고 증강하는 사회를 자주 목도하게 됩니다. ‘새로운 영화는 다시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에니메이션과 개임과 미디어 아트와 통섭하고, 문학과 미술과 공연예술은 역시 유비쿼터스 미디어를 이용하여 책과 전시장과 공연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서 도시 전체로 확산되’고, 가상현실이 ‘증강현실’로 도약하는 제3의 시공문화가 이루어집니다. 가상공간 아고라에서 하나의 의견을 가진 불꽃을 시작으로 수십·수백만 촛불의 바다를 이루는 게 증강현실입니다. 예술은 살아있는 불꽃같은 존재로 어디든 가연성을 준비한 곳과는 불을 붙일 수 있어서 통섭력을 가지는 존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유비코터스(컴퓨팅) 예술입니다. 분리 고립되어 있는 사람과 세계들을 실시간 컴퓨터로 연결하고 컴퓨터가 모든 것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에 예술은 과학기술과 인문학과 사회학의 통섭으로 신화시대는 신화가 혼일한 힘의 원천이었던 것을 세속시대에는 예술이 대신합니다.
세속시대에는 예술의 도움 없이는 창조적 대안문화를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술은 한 사회의 문화 창조력의 기초 동력입니다. 예술의 원소스로 시작한 것이 사회화와 문화산업화로 멀티유스 하는 것입니다. 원소스로서의 예술, 그것은 기초과학의 탄탄한 육성으로 응용과학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과학기술이 편리와 효용의 메카니즘에 갇혀 있을 때 예술은 창조사회로 가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예술의 이런 기이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역시 신화의 힘입니다. 신화시대를 갔어도 신화의 정통 적자인 예술은 영혼의 소통을 계속 시도하는 직능으로 신화적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 신화 없는 신화적 행동은 중세시대 신화 없는 신화적 의례와 마찬가지로 비언어·비문자의 은유적 형식을 빌어서 도시를 유령처럼 떠돕니다. 신화 없는 시대의 신화의 역할을 예술이 하고 있습니다. 신화가 관계의 신성한 힘에서 출발하는 영혼문화라는 점에서 신화를 대신하는 예술은 모든 사회분야에 초월적 매개가 됩니다. IT강국의 소프트웨어, 문화산업 경쟁력, 시민사회의 공공자산, 관광문화자원, 문화치유 프로그램, 노동의 생산력 재충전, 시민의 정서소통, 자기 정체성 개발의 형식, 인간 창의력의 원천, 민족적 집단무의식의 원형, 사회와 과학과 정치의 통섭 등 어느 필요를 위해서라도 예술의 통섭력은 한국사회를 활력 있는 선순환 사회로 괘도 수정을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세가지 특징 물질주의, 유물주의, 국가주의를 타고 넘는 희망의 빛은 신화적 예술입니다.
과학시대 신화와 예술의 필요성
고대 신화나 현대의 신화창조는 모두 공통점을 가집니다. 서사성과 서정성이 결합하고 신체적 감각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통전하고 생활의 일상과 일탈의 초월이 만나고 말(노래) 가락과 상징의 이미지가 융합하는 것이 신화적 예술입니다. 과거의 신화시대 세계에서나 현대의 과학시대 세계에서나 예술은 본래 통섭적입니다. 근대의 예술분과론이 특수하게 이질 적입니다. 탈근대기에는 다시 통섭의 세계로 과거로 돌아가는 반복이 아닌 새로운 진화가 계속될 것입니다. 과학기술과 인문과 예술과 사회를 유령처럼 넘나드는 새로운 신성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신화를 대체하는 예술의 시대입니다. 도시와 자연 사이 거대한 벽이 현대인류처럼 심각히 느껴본 적이 없는 위기의 시대에 인류는 선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근대적 자본주의의 해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모든 분야에 원시반본적 자연회귀나 ‘무책임한 상대주의’(포스트모던이즘)로 기운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신화(예술)과 과학의 대화와 통섭의 노력 없이는 지금 착종상태가 되어버린 현대문명의 대혼돈(빅카오스)과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칼렌 암스트롱은 신화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나 민족이나 국가, 이상에 따라 속한 집단에 구애 받지 않은 채 서로 동질감을 느끼게 도와주는 것이 신화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화는 실용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이 세상이 충분히 생산적이지도 능률적이지도 않다고 치부해 버린 연민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신화다.”(신화의 역사, 문학동네)
정말로 신화는 인류에게 던져준 소중한 인류문화유산- 세계에 대한 사유와 감각의 혼일함, 이중적 모순을 인지한 전일성의 진실, 본성적 질서로 끝없이 재생해 내는 사랑의 세계와 연결합니다. 이런 세계가 신화를 잃어버린 마지막까지 몸의 유희로 통섭하려는 예술이야말로 신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신화의 적자라고 봅니다. 과학과 유토피아를 만나게 충동하고 사회적 질서와 본성적 질서를 화해시키려하고 법칙과 혼돈 사이를 중계하는 것은‘화를 계승한 예술이 할 몫이 있다고 봅니다. 근대주의 봉건주의에 이미 포섭된 예술 말고 자연의 영혼과 열려 있는 신화적 예술의 몫입니다.
현대의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서 인류의 윤리적 통제와 자연의 선순환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본과 권력과 유착되어서 과학기술이 거대한 집단지식을 이루며 자연과 인류에 대한 통제 불능의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선거에 의한 문민지배로 민주주의 정치에 희망을 걸기에는 워낙 상황이 어렵습니다. 오늘날 정치는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회귀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고 포퓰리즘과 상업대중문화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정치경제가 인문학과 예술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삶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곳이 그래도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과 예술은 근대주의가 쳐 논 울타리, 민주주의의 대리형식을 벗어나 스스로 자기 삶을 성찰하려하는 마지막 자율지대입니다.
인문과 예술이 자율지대에서 새 싻이 돋고 숲을 이루려면 ‘신화의 중재’가 필요합니다. 인문학이 아직 근대주의의 타성에 젖어 합리주의 사고만으로 예술을 신비주의적이고 비과학적이란 비판과 거리를 두며 인문과학주의의 자기오류를 성찰하지 않는 한, 또 예술이 인문학의 오성 우위에서 감성을 지배하려하는 한 인문학과 예술 사이 간극은 좁혀질리 없습니다. 인문학과 예술은 통섭이 절실하지만 그 전재가 되어야 할 것이 근대적 합리주의 사유 넘어 삶의 문화를 공유하려는 사유의 지평이 필요하고 행동하지 않는 냉소주의의 극복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것을 인류의 신화적 사유의 계승과 재신화의 행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시개발과 자연보존의 사회적인 갈등도 과학기술주의 독주에 대한 경계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신성한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신화적 사유는 인문학과 예술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과 예술마저 우리의 삶의 현상을 입증 가능한 과학적 이성주의에 매몰되어버린다면 지난 월드컵 응원축제와 촛불집회에서처럼 이후의 발전적 사회전망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 거대한 대중의 물결에서 일고 있었던 희망의 에너지는 분명 신화의 재창조, 재신화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니 이성주의니 하는 경계를 넘어서려면 신화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신화적 사유의 핵심은 ‘초월적 영혼’의 문제이고 유아론唯我論적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초월적 가치를 경험하는 신화적 삶으로의 실천입니다. 영혼은 삶을 초월적 가치로 안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각기 울타리 쳐놓은 근대적 도그마에서 벗어나서 영성, 영혼, 아우라, 기가 서로를 소통하는 신화의 세계를 회복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탈근대를 열고 있었던 문화사상가들의 공통점은 신화적 사유의 회복에 있다고 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사고, 칼융이 재발견한 영혼, 함석헌 장일순 김지하의 생명사상, 조지프 캠벨의 본성의 질서, 이런 탈근대적 사유의 지평에서 예술과 인문학, 문예와 대중은 유쾌히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무한 질주를 견제하며 인류와 자연이 상생하는 길은 신화의 과학의 통섭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인류유산의 두 축인 과학과 문예가 지금처럼 서로 다른 길, 과학은 실증 가능하고 편리한 미래만을, 문예는 갈등을 초극하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식으로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이미 과학기술이 지금처럼 자본과 권력의 편이라면 삶의 충족, 사랑, 인정, 성찰 등이 결여되어 인간성은 점점 더 피폐해 질 것입니다. 만일 예술, 꿈, 신화의 중재가 없다면 인문학이 홀로 권력과 자본의 통제에 들어간 과학기술주의와 맞설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인문학의 성찰이 다시 요구됩니다. 신화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문학, 철학, 사상, 종교, 예술, 의례, 민속의 각기 다른 부분적 접근을 넘어서 메타신화학으로서의 문예학의 통섭이 필요합니다. 인문학적 지혜가 사회에 열의를 갖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냉소주의 사고가 만연한 사회가 된 것은 인문학 스스로 신화를 버린 결과이고, 연구자 자신이 나의 신화를 갖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성이 배제된 객관주의 학문은 삶의 연구와 성찰마저도 타자화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냉소주의가 만연한 것은 사회문제를 일으킨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회를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류는‘이름 붙일 수 없고 해명할 수 없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가진 포괄적 신화로 사유하기를 포기하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과학적 이성주의에 완전히 몰입한 현대는 직관적 방식의 지각을 완전히 외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화적 사유와 행동은 사람들에게 근원을 알 수 없는 정체성의 상실감과 죽음 이후의 허무와 일상생활의 고독을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나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과학적 이성주의가 밝힌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만족하고 안심을 해야 했습니다. 이 테두리를 벗어난 죽음 고독 재앙 전쟁 같은 비이성적 현상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피해왔습니다. 애써서 잊어버리는 방식, 입력된 정보와 교육 받은 의식으로 그 상황을 외면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이 제공하는 이미지의 입력과 권력이 쳐 놓은 사회적 질서를 벗어나는 사유는 미신이었습니다. 신화의 상실은 과학주의가 마녀사냥 한 결과입니다.
현대의 위기는 과학적 이성주의의 자기오류를 철저히 성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어떤 문제를 일으킨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마사키 ‘나비문명’ 재인용)
현대사의 신화 부활
현대 사회에서도 신화는 창조됩니다. 논리적으로 아직 설명이 부족하고 합리적으로만은 이해하기 힘든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집단적 꿈이나 유령 같은 가상이 현실로는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신화창조는 계속되었습니다. 신화는 개인의 상상공간에서 머물기만 할 수는 있지만 사회공간으로 확장되면서 증강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현대신화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닙니다. 고대 토템신화에서는 동물에서 다른 이미지를 매개로 초월하며 집단적 상징력을 가진 문화로 창조 됩니다. 토템신화는 자연신화로 출발하였지만 날개달린 상상의 지신은 한 사회집단의 초월적 힘을 상징하는 차원으로 바뀌며 문화영웅이 됩니다. 나가, 이무기, 용, 선녀, 천사, 케찰쿠와 등의 예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상징과 의례와 신화는 상상의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염원을 실현하는 데로 능동적으로 이용됩니다. 이런 현상은 서해안 조선 후기에 갑자기 확산된 임경업장군 신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서해안 바다 어촌에서 삽시간에 번졌던 임경업 신화의례는 한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군의 신격화로 어촌의 평화와 풍어 기원으로 고립된 섬들을 이어서 거대상징으로 출현합니다. 임경업신장은 서해안뿐만 아니라 중국황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는데 이런 것도 신화가 사회화 하는 예입니다. 신화는 자연공간과 개인공간과 사회공간의 닫힌 공간들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어주는 동력이 됩니다. 치우천왕 가면을 든 붉은 악마의 시민응원, 미선이 효순이를 부활시킨 촛불소녀의 추모집회는 거대한 현대 신화로서 신화의 사회화를 봅니다. 최근 촛불소녀 신화, 노무현 죽음신화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억울하게 죽은 자를 향한 타자 연민과 자기 연민이 통섭하며 거대한 대중적 꿈의 부활이 신화가 됩니다.
지금은 영혼 없는 물질주의 세속사회가 주류이다 보니 신화란 개념도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세속사회에서는 물질적으로 큰 부와 명예를 가진 성공사례를 말할 때나, 기업의 성공사례 등까지 신화의 반열에 올립니다. 그리고 허황된 이야기를‘신화 같은 소리’하지 말라면서 비합리적인 이야기로 격하시키는 표현을 씁니다. 극소수의 물질적 성공사례나 비판적 지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신화이고 진실이라면 소외와 고독이 일반화된 현대의 대중은 어디서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화는 입증될 수 없는 것으로 종교에서는 폐기하였고 이성적 비판에서는 종교는 예외로 하고 예술과 인문학에는 모두 적용한 것입니다. 입증되지 않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이라는 단정이야말로 근대사회 최악의 반문화적 범죄입니다. 진리가 엘리트와 권력에 의해 독점돼 버린 현대의 대중은 아득한 절망, 정신적 마비, 집단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자기 치유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신화가 죽은 시대에 자기를 치유할 대안이 부재한 대중은 세속적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받으려 하지만 자기애에 갇혀버린 사랑타령, 자기욕망의 해소에 그칩니다. 신화는 본래부터 자기의 내면화와 사회화의 이중교호이며 자기 연민과 사회적 연민의 연대적 상상입니다.
나는 신화의 시대를 넘어 변하지 않는 원리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1)삶의 근본이나 토대에 관한 꿈과 현실의 신성한 교감의 이야기입니다. 2) 자아(인류)와 세계(자연)사이의 신성한 영혼의 혼일混一한 교류의 정서형식을 가집니다. 3)죽음을 넘어는 기적적 영웅성, 초월적 재생성에 공감을 이루는 것입니다. 4) 삶의 욕망과 죽음의 허무의 이중모순과 갈등을 넘어 대극의 초월로 승화하는 문화방식입니다.
변화한 원리로서의 현대신화는 엄밀히 말하면 유사신화이지 신화가 아닙니다. 죽었는데 살은 척하는 좀비입니다. 영속성이 없고 자아가 세계와 동질하게 소통하지 않으며 욕망의 극대화를 실현하는 세속적인 성공을 신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1)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세속적 성공담의 이야기, 2)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창출되고 활용되는 신화적 이미지, 3)일시적 열광이나 자아상실, 세계상실의 맹목적 숭배 등은 현대의 좀비신화이지 진정한 신화는 아닙니다. 그것과 다른 종류로는 신화적 행동과 예술이 있습니다. 신화적 이미지나 가상현상의 현실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술이 세속시대에서 신화의 몫을 담당합니다.
이 책의 첫 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신화는 세속적인 물질주의가 아닌 육신이 담은 신성한 힘의 작용이 자아와 세계에 투사되어야 합니다. 신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상관없이 핵심은 신성한 이야기, 영혼의 혼일한 교류, 죽음의 재생이 공감함, 욕망의 초월적 승화 등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신화는 가시적으로 들어난 거대한 물량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풀꽃 하나가 우주와 교감하며 어둡고 축축한 대지를 밀고 나와서 활짝 꽃피우는 신성한 생명력이 신화이고 인류의 기적적 재생에서 신성을 이야기하고 자연과 우주 현상의 이해가 신화를 창조합니다. 신화는 본래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신화적 사고는 현대에도 계속 유효합니다. 그래서 신화는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오랜 미래로 죽지 않고 영속적일 것입니다.
현대의 신화는 인식론적 공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신화적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감각이 온몸으로 살아나는 예술이거나 평화순례 같은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감각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지도하고 통제하려는 관념적 지성으로는 신화의 길로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현대에서 신화는 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화적 행동의 주최인 몸에 있습니다. 신화를 관념적 지성에 가두거나 유아론唯我論적 감각에 가두는 것은 신화가 아닙니다. 둘 다 아닙니다. 신화행동이 숨은 채로라도 들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연민의 감각이 붙는 행동하는 지성이 현대의 신화를 만듭니다.
워크나인 평화순례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한국의 전국을 100일간 걷기
작년 가을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으로 일본인들의 한국100일 순례단 워크나인Work9이 방문하였습니다.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해 걷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낯선 이국에 와서 100일 동안 걸으며 전국을 다녔습니다. 추은 늦가을과 겨울을 거쳐 한 바퀴 전국을 돌았습니다.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들이 고생을 자처하며 낯선 타국의 삼천리 길을 걸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이들의 기행이 궁금하던 차에 원주를 지나가는 그들을 환영해 맞이하기로 하였습니다. 첫날은 부론면 손곡리 모두골 극장에서 보내고 둘째 날은 문막 취병리 신화미술관에서 숙박을 하며 하루를 같이 있었습니다. 역시 그들은 걸어서 신화미술관까지는 문막에서 8키로미터의 산길을 올라왔습니다. 아침에 문막에서 출발한 그들은 점심때 되어서 취병리 우리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사단법인 오랜미래문화연구회 깃발과 물통을 들고 환영을 나갔습니다. 취병저수지에서 마을 중간쯤에 있는 구융박골에서 마중하였습니다.
워크나인의 진취적 행동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지도자 마사키(正木高志)씨는 전후세대 196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인도로 건너가 7년간 인도철학을 공부한다며 동양사상에 심취합니다. 그 때 서양의 청년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서양의 정신문명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며 대거 이곳 인도와 네팔 등지로 건너와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을 하던 때였고 동양문명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던 그들은 20세기에 일어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습니다. 서양문명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던 서양젊은이들 이들을 피토, 히피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특징을 마사키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피토는 철학적이고 진지하게 사회문명을 부정하고 반항했던 것과는 달리 히피는 무척 가벼워 보일 정도로 밝았고 꽃무늬 판탈롱바지에 사이키델릭한 염색무늬의 티셔츠를 입고 러브나 피스를 키워드로 삼았습니다. 히피는 분노와 반항에서 졸업하고 대안문화창조를 새로이 열었습니다. 피토도 히피도 현대문명에 대한 감수성(스텐스)는 같았습니다. 문명의 죽음을 예감하고 현대사회에서 탈출해 새로운 비젼과 라프스타일을 찾으려 했습니다.(생략) 사르트르와 까뮤는 문명사회에 대한 회의를 아주 분명하게 털어 놓곤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에는 ‘성난 젊은이들’이 태어났고, 또 미국에는 ‘이유 없는 반항’을 하는 피토가 되었습니다.”
서양 스스로 문명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정직하고 예민한 서양 청년세대에서 시작한 것인데 그 대안문화를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찾은 것도 특이한 일입니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터키로, 터키에서 내륙으로 네팔 카투만두까지 버스가 운행되고 직항로까지 개설되었다고 합니다. 힌두문명과 불교문명의 산지인 그곳에서 사랑과 평화의 근원적 문명을 그곳에서 찾으려했던 것이고 수양하는 정신적 지도자들과 교우가 이후 서양의 명상수행문화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대안문명을 찾아 동서문명의 신교류는 이미 이런 루트로 시작하였고 오늘날 서양 포스트모던 문화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서양은 세계의 빈곤문제 해결과 전쟁의 종식과 약탈적 시장을 철회할 생각을 갖지 않았으니 1968년 프랑스학생혁명의 실패이후 변혁의 기세는 꺾였고 새로운 문명적 대안을 모색하기는커녕 자기성찰의 기회를 놓친 것 같습니다. 오늘날 보다시피 다시 침략전은 이어지고 문명은 충돌하고 에너지 약탈전은 자기합리화를 하며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쟁과 평화의 담론보다 성찰의 기회를 놓친 서양의 지성입니다. 전쟁은 국가 간에 치러졌지만 전쟁의 가해는 사람에게 행한 폭력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며 그 상처는 분노로 내제되고 폭력의 대물림으로 이어집니다. 전쟁의 피해는 개인의 경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집단적 상처로 대물림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증오감도 오랜 전쟁의 역사적 산물입니다. 신라에서 패하고 상처 깊은 가야의 왕족과 백제의 왕족은 일본에서 나라를 세우고 전쟁에서 참혹하게 당한 그날을 기억하며 와신상담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 킨메이 천황의 기록문을 조금 만 봐도 그들의 치떨리는 복수심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라는 서방의 작고 더러운 나라로 하늘을 거역하고 도가 없는 나라다. 은혜와 뜻을 위배해 우리의 궁궐을 부수고 백성과 군현을 침탈했다.(생략) 우리 백성이 신라에 무슨 원한을 끼쳤다고 신라는 긴 창과 활을 가지고 임나를 침략해 예리한 활과 창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간을 빼고 다리를 자르는 것으로 부족한지 뼈를 부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 잔혹함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는가.(생략) 이 사실을 듣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나와 태자 그리고 대신은 우리 후예로서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있으니.(생략) 우리 다함께 천하의 몹쓸 놈들을 죽이고 천지에 그 아픔을 뿌려 구부君父 앞에 바칠 수 없다면 죽어도 신자神子의 길을 가지 못했음을 통곡할 터이다.”
일본의 지배권력은 한반도에서 넘어간 가야와 백제의 왕가였습니다. 글들은 왕가의 비참한 최후를 겪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일본의 가야의 옛 국명)을 세운 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채 천년 왕국을 이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문화에는 피해자의 슬픔과 왕가의 화려함이 함께하는 화려한 비애의 미가 미의 특징으로 이어왔던 것입니다. 가부키의 가면을 보면 하얗게 바랜 비분을 감춘 입가와 원수를 갚겠다는 분노의 눈매를 볼 수 있습니다. 왕가의 그림이나 장식도 화려하지만 비애가 서린 싸늘함이 있습니다. 고대국가의 잔인한 폭력과 대물림하는 비애는 한일간에 천년이 넘도록 화해 없는 증오의 관계로 이어옵니다. 우리는 최근세사에 당한 식민지 경험이라서 일본인 보다 그 비애와 분노가 더욱 큰 앙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워크나인이 우선 했던 행동은 침략전쟁에 대한 사과이고 피해자에 대한 애도였습니다. 평화를 권하러 온 일본인들로서는 당연한 행동같지만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양국은 자기들 역사에서 전쟁 경험을 용맹과 위업으로 말하며 자기 슬픔과 고통만을 언급합니다. 상호간에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점을 알려고 하지 않고 감추기만 한다면 전쟁폭력에 죄의식을 느낄 수도 없고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전쟁재발은 폭력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비애만을 품는 마음에서, 원수를 갚겠다는 앙갚음에서 일어납니다. 한·일간 전쟁사는 일방적 침략과 피해의 관계가 아니라 폭력의 대물림관계입니다. 물론 우리가 훨씬 더 많은 피해의 아픔을 갖고 있지만 폭력은 객관적 수치로 아픔의 크기를 잴 수 만은 없습니다. 일본은 집단무의식으로 대물림하며 잊지 않았으니 일본 역사기는 물론이고 미의식에까지 원한의 미를 예술적 상징으로 이어왔던 것입니다. 승자는 승리의 도취로 아픔을 금방 잊을 수 있어도 패자의 아픔은 통증으로 살아나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신라와 가야의 전쟁을 신라는 잊었어도 일본은 잊지 않고 벼르고 있었고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 침략을 일본은 잊었어도 조선과 한국인은 잊지 못하는 역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 반복되는 비대칭은 가해자가 먼저 깊은 애도와 사과로서만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애도의 표시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피해자의 열린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애도의 의례로부터 서로 간 연민의 마음을 형성시키게 되고 평화의 삯이 돋아 날 것입니다. 평화의례를 국가 간 대표자들이 솔선해서 매년 정례화하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신라의 폭력과 일본의 폭력을 속죄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한·일간 평화의 신화의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화의례라 함은 국가주의 폭력을 넘어서 동일한 신화의 지대에서 어머니 대지와 바다에게 용서를 구하려는 행동, 어머니 대지의 연민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평화로 가는 길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폭력적 수단을 다 동원하여 서로 피맺히게 된 역사를 청산하는 길목에서 있습니다. 이 길목은 국가주의 이전이며 이후인 신화의 사유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서 시작합니다. 신화의 역사로 말하면 철기문명이 가져온 폭력문화를 극복하고 신석기문명이며 미래의 평화문명인 여신문명을 세우는 일입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다중고에 시달리고 있어서 문화적으로도 매우 복잡합니다. 분단의식의 극복, 미완의 민주주의, 문명적 변동기의 가치혼돈, 경제적 생존의 위기의식 등이 공시적으로 혼재합니다. 민주화의 역사는 저 ‘80년대 분노의 저항시대를 지나고 촛불로 상징되는 대안의 준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의회민주주의의 위기에 대응할 대안의 정치형식과 아울러 다원적 가치의 공존사회, 인간존중의 경제제도, 내적 행복과 평화의 라이프 스타일을 찾아야하는 신문명적 질서를 함께 해결해야하는 다중적 해법이 요구됩니다. 정치의 민주화, 상류층 의식의 선진화, 인간의 존엄성, 녹색문명으로의 선회 등 각 분야가 연동하는 해법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유와 방식을 모색하고 준비하는 시기가 지금시대인 것 같습니다. 유비쿼터스시대의 컴퓨팅이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는 때이며 생명평화의 대안가치가 녹색사회로의 신문명사회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방향은 그렇다 치고 우리 사회의 결정적 결핍은 네트워킹의 힘입니다. 서로 연대의 필요성은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연대를 형성할 힘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열의 없는 지성’을 개탄합니다만 의식의 성장만으로 연대의 행동이 되지 못합니다. 행동하는 지성은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의 해결입니다. 열성은 차가운 지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뜨거운 가슴과 몸이 만들며 연민과 공분의 감성 없이는 연대가 불가능합니다.
일본의 워크나인이 보여준 평화순례는 분노의 저항시대를 너머 연민의 감성을 가진 신화적 행동이었습니다. 미선·효순 양 추모 촛불집회에서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소녀’나 노무현대통령 국민장에서 보게 된 신화적 행동도 연민의 감성에서 발아한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냉소주의의 극복은 비판적 지성을 넘어 연민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서 시작하며 연대의 거대한 힘이 현실을 가상의 초월성과 결합시키며 신화세계를 창조합니다. 예술은 이런 현실적 비애를 초월적으로 통합시키는 신화적 행동양식이 됩니다.
2008년 광우병수입쇠고기 반대로 촉발한 촛불집회가 ‘명박산성’앞에서 잠시 소강기를 맞는 틈에 삼삼오오 모여서 토론과 휴식을 하는 모습
나는 지금까지 과학기술주의의 위기에 대응하는 예술과 신화의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했으며 국가주의를 넘는 평화행동은 신화적 사유로부터 재생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일본인의 워크나인 평화순례나 한국의 촛불집회, 그리고 서양의 반전평화운동과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에서 그리고 예술이 선도하는 유비쿼터스의 가상현실에서 자기 안의 신화를 재발견하며 지구촌 곳곳과 평화연대의 관계에서 재신화시대의 도래를 보게 됩니다. 예술에서조차 신화가 상실한 세속시대에 숨겨진 신화가 깃든 예술을 직시하기를 애써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화적 예술을 방향으로 하고 유비코터스 컴퓨팅의 통섭을 방식으로 하는 재신화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자 하였습니다. 재신화시대의 도래는 아바타처럼 머나먼 횡성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자기가 사는 땅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재 신화의 도래 이것을 적극적으로 깨어 일어나 맞이하러 가는 인류만이 위기의 지구를 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토도 히피도 프랑스 68학생혁명도 실패하고 떠난 마지막 기회가 동아시아로 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말할지니, 온통 조각이 난 세계를 예술이 통섭하는 유비쿼터스의 신화적 현실에 희망을 겁니다.‘달이 다 차오르기 전,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신화적 예술이 펼친 두 가지 가상현실. 위는 한국의 원주 단계동마을축제에 설치한 김봉준 의 신화상징 조형물, 아래는 미국 아리조나주 허드 뮤지움 앞마당의 인디안 5종족을 상징한 조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