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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를 딛고 일어서는 초인(超人)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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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카피라이터?
백 마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것을 단어 하나 만으로도 감동적으로 표현해 내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말은 백 마디 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논리를 뛰어넘어 바로 가슴에 호소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쉽게 아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짤막한 경구로 감동적으로 표현함)의 말들은 재치와 지혜 뿐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수많은 경험과 사색이 쌓이고 숙성된 뒤에야 비로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이 달에 살펴볼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는 이렇듯 ‘수 백 권의 책으로 설명해야 할 내용을 불과 몇 구절만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철학자였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길고 정교한 논리는 오히려 하찮게 여겨진다. 니체는 짧고 강렬한 아포리즘(aphorism: 깊은 진리를 짧게 표현한 글)으로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것처럼’ 신앙, 도덕, 합리성과 같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가치들을 사정없이 부수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책제목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억압되지 않고 건강하며 생동감 넘치는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러나 아포리즘으로 가득 찬 그의 말들은 니체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표현 자체가 멋 적을 정도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뿐더러 심지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읽기는 성경 읽기와 같다. 전체를 읽고 이해하지 않아도 마음을 파고드는 경구들 하나 하나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생활 속에서 무디어진 감수성과 생명력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다. 진정 니체는 짧은 몇 마디만으로도 큰 가르침을 전달하는 ‘철학의 카피라이터’라고 할 만하다.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꼬마’
니체는 1844년 독일 작센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어머니도 또한 인근 마을 목사의 딸이었기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무척 경건하였다. 그가 태어난 지 다섯 해 만에 아버지가 숨을 거두고 연이어 어린 남동생도 병으로 죽는 바람에 니체는 완고한 할머니와 고모들, 어머니와 여동생 등 여자들로만 둘러싸인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니체 가족은 할머니의 뜻에 따라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런 모든 주변의 변화가 어린 그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웠던 듯 싶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심해지기 시작한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에 집착 뿐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크고 작은 갈등은 니체를 힘들게 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그의 사상에 줄곧 나타나는 강인함, 힘과 같은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은 이러한 어린 시절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곤 한다.
니체는 무척이나 경건하고 섬세한 아이로 자라났다. 그는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릴 만큼 성경 구절을 감동적으로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꼬마 목사’라고 불리어 졌으며 시와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이미 열살 무렵에 시와 짧은 곡들을 써내곤 했다. 그러나 이 섬세한 아이는 그 또래들 특유의 난폭하고 거친 세계에 잘 적응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벌써 ‘고독과 사색을 즐겼던’ 것이다.
어린 니체는 공부도 꽤 잘해서, 열 네 살 때 유명한 슐포르타(Schpforta)의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도 그는 수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이 시기에도 그는 문제아는 아닐지라도 ‘상담이 필요한 사교성이 부족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종종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서 ‘나는 남들과 다른 고귀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고독을 즐기는 학생들이 있는데, 니체는 바로 그런 부류였던 듯 싶다. 니체는 항상 그를 존경하고 높이 받드는 소수의 친구들과만 사귀었고 줄곧 시와 음악에 세계에 빠져 지냈다.
쇼펜하우어, 바그너와의 만남
1864년, 니체는 본(Bonn) 대학에 입학했다. 치기 넘치는 스무 살 나이에 걸맞게 니체는 한동안 맥주와 결투로 상징되는 독일의 낭만적인 대학 생활에 젖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항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서툴렀고 사람을 사귀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1865년, 니체는 유명한 문헌학자인 리츨을 좇아 라이프지히 대학으로 옮겨간다. 이 곳에서 그는 고전들을 다루고 연구하는 문헌학에 빠져들게 된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사상적으로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에게 매료되었다. 한 시골 서점에서 오래된 쇼펜하우어의 책을 접하고 어둡고 음울한 이 철학자에게서 강한 충격을 받는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맹목적인 삶의 의지가 지배할 뿐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매도하고 자신과 같은 천재들은 유별나기 때문에 사회적인 접촉을 끊고 산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뜩이나 고립적이고 자부심이 강했던 니체의 성격과 꼭 맞는 것이었다.
1867년, 니체는 군복무를 위해 포병 기마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훈련 도중 말에서 떨어져서 가슴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이루지 못한 것은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니체의 사상에는 무사적 기질, 잔혹성, 엄격한 자기 규제와 인내 등 군대 냄새가 풍기는 개념들이 자주 등장하곤 하는데, 아마도 이 짧은 군 생활은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의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을 더욱 더 강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제대 후 그는 곧바로 라이프지히(Leibzig)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문헌학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한편, 자료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설명을 요구하는 문헌학의 작업은 니체가 어릴 적부터 갖고 있었던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깊은 반성 없는 무조건적이고 감성적인 신앙이 정밀하고 냉철한 이성 앞에서 버티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니체는 어떤 모임을 통해 위대한 음악가 바그너(Riehart Wagner:)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한 당시에 최고 권위를 누리던 니체 아버지 벌되는 위대한 음악가와 점점 명성을 얻어가던 풋내기 문헌학도는 둘 다 쇼펜하우어 사상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 사실에서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바그너와의 우정은 이후 니체의 삶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비극의 탄생』
1869년, 니체는 리츨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스물 다섯 살에 불과한 나이에 바젤(Bazel) 대학 문헌학 교수로 초빙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것은 당시로서도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젊은 문헌학자는 항상 강의실에 많은 학생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 절정의 강사’였을 뿐더러, 학자로서도 상당한 자질을 보였다. 다른 유명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을 정도였다. 그는 평범한 대학 교수가 말년에야 이룰 수 있는 일들을 이미 20대 중반에 거의가 이루어 놓았다.
또한, 이 시기의 그의 삶은 ‘구름 한 점 없이’ 행복했다. 게다가 인근 시골 별장에는 바그너가 살고 있었는데, 이 곳에는 언제든지 니체가 쓸 수 있도록 방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바그너 가족과 니체는 가족과 같은 친밀함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로 니체는 행복의 꼭대기에서 끝없이 비판받고 무관심 속에 소외되는 ‘고난의 가시밭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니체가 스스로 용감하게 ‘자원’한 것이다. 1871년, 스물 일곱 살 때 발표한 『비극의 탄생』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이 책은 원래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밝히려는 문헌학적인 저술이다. 그는 그리스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눈다. 태양신 아폴론은 질서와 조화, 명석한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한다. 반대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자유분방함과 도취, 격정과 황홀감을 상징한다. 원래 그리스 예술에서는 아폴론적인 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합리성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소크라테스 이후로,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이를 죄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냉철하고 건조한 이성만을 중시했을 뿐 열정과 도취, 쾌락이 삶에 주는 생명력을 잊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논리적 사고와 합리성만을 강조하는 유럽 문명은 병들고 타락하였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려면 역사 속에서 잊혀져 왔던 디오니소스적인 자유로움과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음악이다.
『비극의 탄생』은 젊은 문헌학자로서의 니체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떨어뜨려 버렸다. 주장 자체가 파격적이었을 뿐더러 문헌학에서 요구하는 엄밀한 자료 분석과 비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 리츨 조차도 이 책을 ‘재기 넘치는 술 주정’이라고 깎아 내렸을 정도였다. 니체의 고전학 강의에 참석하는 학생 수도 열 명 이하로 줄어들어 버렸다
사실 기질 상으로만 본다면 니체는 엄격한 분석과 논리를 중요시하는 문헌학자보다는 감성적이고 정열적인 시인에 가까웠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독립적인 직위’를 원했기에 교수직을 맡고 있었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문헌학적인 작업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약자의 원한이 세계를 지배한다.”
이후로, 1879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교수직을 그만 둘 때까지 니체의 건강은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바젤 대학 교수가 된 직후 니체는 보불전쟁에 간호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염병에 걸려 두 달만에 다시 제대하고 말았던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죽 그의 건강 상태는 계속 좋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특히 두통, 경련, 그리고 시력 감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니체 특유의 아포리즘이 나타난 시기도 바로 이 때이다. 눈이 아파 오래도록 책을 보고 쓸 수 없었을 뿐더러 건강을 위해 쾌적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여행을 했어야 했기에, 긴 주장보다는 짤막한 경구 위주로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프고 괴로우면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도 줄어드는 법이다. 그는 이 시기에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는 아마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니체는 그토록 의지했고 좋아했던 바그너와도 결별하고 만다. 여러 가지 미묘하고 개인적인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기독교의 성인(聖人)인 ‘파르시팔’을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 있었다. ‘꼬마목사’였던 니체는 성년이 된 이후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증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그너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라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
그에 의하면 겸손, 순종, 친절, 동정 등 우리가 품고 있는 ‘선함’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에 의해서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것은 ‘노예들의 도덕’일 뿐이다. ‘주인의 도덕’은 원하는 대로하는 것이다. 주인은 밝고 당당하며 거침이 없고 냉혹하다.(옛날 귀족들을 생각해 보라.) 주인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주인이 되는 사람들조차도 지금은 ‘노예들의 도덕’을 따르고 있다. 아무리 영리하고 강하다고 할지라도 노예처럼 자신의 힘을 감추고 겸손해 하지 않은 인간은 약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도덕은 강자를 약자처럼 만들어 버렸다. 약한 자의 품성과 덕목이 강한 자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약자의 원한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 ‘주범’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는 불구자, 악한, 부끄러운 병을 앓는 자, 구제할 길 없는 범죄자들을 모두 주인과 같은 인간으로 보고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 결과 인류 전체를 모두 열등한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 버리고 말았다. 인류에게 중요한 과제는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뛰어나고 강한 개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그리고 아무도 위하지 않은 책”
바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둔 이후, 그는 줄곧 건강을 위해 쾌적한 곳을 찾아 여행을 계속하는 방랑자의 생활을 했다. 루 살로메 등 몇몇 여인들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지만, ‘마치 사막에서 온 사람이 세속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렀던 니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결코 세련되지 못했다. 결혼을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 본 적도 있지만, 이런 모든 시도는 결국 ‘철학자에게 결혼은 코메디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튼 1885년, 그는 인류의 기념비적 저작이라고 할 만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펴낸다. 짜라투스트라는 고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를 독일어식으로 읽은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짜라투스트라는 실재 조로아스터와는 별 상관이 없다. 요새 표현으로 한다면, 유명인의 이름만 빌린 일종의 ‘패러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서 그는 ‘최후의 인간’과 '초인(超人:Übermensch)'을 대비시킨다. ‘최후의 인간’은 쾌락과 만족에 빠져 지내며 종족을 남기겠다는 생각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모든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특별한 꿈과 비전 없이 TV 등으로 소일하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이런 ‘최후의 인간’에 해당될 듯하다. ‘더 높아지려는 열망’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듯 무가치한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반면, 초인은 지성과 긍지로 가득 찬 사람이며, 넘치는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며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그는 투사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그는 소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위대함을 갈망하고 있다. 그는 ‘주인의 도덕’을 따르며, 선과 악조차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사다리’이며, 인류의 역사는 모두 이러한 초인의 탄생을 향한 역사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모두를 위한, 그러나 아무도 위하지 않는 책’이라는 작은 제목을 붙였다.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위대한 예언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엄청난 내용이라 받아드려질 수 없으리라는 뜻이다. 그는 이 책을 쓰고 매우 만족하여 ‘독일어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사회적 반응은 거의 없었다. 출판사가 선뜻 나서지 않아 결국 자신이 직접 돈을 대어 책을 내어야 했고, 그나마도 증정본을 빼고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선악의 건너편』, 『도덕의 계보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써 내려가지만 마찬가지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우울과 고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파국: 농락 당하는 초인(超人)
1888년, 44세의 니체는 한 해 동안에만 중요한 여섯 권의 책을 써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 속에는 어딘가 광기가 느껴진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그는 ‘나는 왜 이리 영리한가’,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라는 엄청난 소제목들을 붙이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를 인류 역사를 뒤바꿀 초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889년, 마침내 니체는 파국에 다다른다. 갑자기 광장에서 마부에게 매를 맞고 있는 말을 끌어안고 울다가 졸도해 버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미쳐 버렸고 1900년,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미친 니체를 그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돌보았는데, 이 누이는 니체를 유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신속하게 ‘니체 문헌 보관소’를 만들고 니체의 글을 체계적으로 모으고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그녀는 상당수 니체의 글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과장함으로써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입맛’에 맞추어 니체를 내놓았다. 비로소 니체는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도덕은 부정하고 삶은 긍정하라.”
엘리자베트는 말년에 히틀러를 ‘초인의 전형’으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의 니체 연구자들은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편집한 그의 책들이 상당수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내고 있다. 사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인종차별주의와 엘리트에 의한 독재를 정당화해주는 이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니체의 말은 그를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적으로 간주하게 만들었고, 도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를 타락하고 비윤리적인 철학자로 간주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덕의 파괴’도, 인종차별주의도 아니었다. 니체가 강조하려고 했던 점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주어진 규범에 주눅들어 스스로를 억압하지 말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긍정하면서 주어진 운명을 꿋꿋하게 개척해 나가라는 것이다. 그는 건강하지 못한 생애를 통해서 오히려 건강한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제시한 철학자였다. 이 점에 있어서 생명과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생(生) 철학자(Lebens Philosoph)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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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선생님께서 작성한 이 글은 '고교독서평설(지학사)' 2002년 3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상업적 이용에 대한 권리는 지학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