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순국,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 2008/08/14 11:29 김삼웅
안중근의 정치사상에 관해서는 공화주의자라는 주장과 근왕주의자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안중근은 이론가형이 아니라 행동가형에 속하기 때문인지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한 안중근의 정치사상이나 철학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안중근은 소싯적부터 호걸풍 내지 협객풍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많은 독서나 문적을 섭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초기에는 <천자문>, <동몽선습>, <논어>, <통감절요> 등 유학의 기초적인 책을 읽은 데 이어 천주교에 입문하면서 <주교요지>, <칠극>등 조선에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 사회운동에 눈뜨면서는 대한제국 학부에서 번역한 <조선역사>, <만국역사>, <태서신사>등을 읽고, <대한자강회월보>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공립신보> 등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안중근은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국민계몽과 반일투쟁의 논조를 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등을 열심히 읽고, 여기서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미국에서 발행되어 국내에 들어온 <공립신보>는 공화제에 대한 각종 논설이 많이 게재된 진보적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을 읽으면서 안중근은 서양의 근대정치사상에 눈을 뜨게 되고 관심을 갖게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 당시 문명개화론자들이 서양 근대문명의 근본이라고 소개된 천주교를 수용하면서 공화주의적 정치체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같다.
안중근은 의거 뒤 자신의 정치사상형성 배경에 관한 신문을 받을 때 "타인으로부터 들은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미국에서 발행하는 공립신문 또는 포조(浦潮)에서 발행하는 대동공보 등의 논설을 읽고 위와 같은 (진보주의 이념-저자) 생각이 들었다."(주석 12)고 진술했다.
안중근은 연해주 망명시절에는 <공립신보>와 접하게 되었다. 계동청년 임시사찰직을 맡고, <대동공보>기자와 계동학교 학감을 겸하고 있으면서 한인민회(韓人民會)의 고문 등을 맡았다. 계동학교는 공립협회 해삼위 지회이면서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의 노령지국이었다.
"안중근이 관여하고 있던 계동학교와 한인민회는 공화주의를 표방한 미국공립협회와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이들 기관을 통해 <공립신보>가 블라디보스톡에 배포되어 안중근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준 것이다." (주석 13)
공립협회는 군신과 빈부귀천, 사농공상이 모두 공립하여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하는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샌프란시스코 이주 한인들의 자치단체였다. 여기서 발행하는 <공립신보>는 국민국가수립론을 주창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목표를 공화정 수립에 두고 있었다.
하와이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도 해삼위지역에 배포되어 안중근을 비롯 독립운동가들이 접할 수 있었던 신문이다. 이강이 <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톡 통신원을 맡고있어서 안중근은 이 신문을 쉽게 구해 읽게 되었다. <신한민보>도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성향의 교포 신문이었다.
안중근이 그렇다고 공화제 정치체제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거나 언급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의거 뒤 검찰 신문과정에서 한국민의 무능 때문에 통감정치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국은 금일까지 진보하고 있으며 다만 독립자위가 되지 않은 것은 군주국인 결과에 기인하며 그 책임은 위에 있는지 밑에 있는지는 의문일 것이라고 믿는다."(주석 14)라고, '군주국'때문에 나라의 독립이 어렵게 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를 근거로 한 연구가는 안중근이 군주정을 비판하고 공화정을 염원했다고 주장한다.
안중근은 민권자유사상에 바탕을 둔 국권회복운동에 근거하여 전제군주정을 비판하였다. 전제군주정 때문에 국권을 상실하였고 나라가 쇠망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군주주권의 군주정을 비판하고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독립국가의 정체(政體)로 공화정을 염원하였다. 안중근의 공화주의 이념은 민권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블라디보스톡에 전파된 선진사상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주석 15)
이와는 달리 안중근이 근왕주의자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안중근이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인 군주제의 폐단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주제를 비판한 대목 역시 군주제 자체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군주제를 운영하는 친일파 대신들의 매국성을 질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엄밀히 말해 그는 군주제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가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에 대해서는 극도의 존모의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신민이 황실에 대해 불경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하얼빈의거를 벌인 것은 황제를 위해서였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안중근의 정치적 지향성이 황제체제를 지지하는 단계에 머물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중근은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를 충실히 받들어 모신 충직한 근왕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주석 16)
안중근이 국내외에서 직접 만났거나 알고 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근왕주의사상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다. 안중근은 철저한 근왕주의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안중근을 공화ㆍ근왕주의자의 양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는 국난기에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최전선에서 싸운 행동인이었다. "나는 산하 삼천만 동포를 위해 희생이 되려는 자이며 황실을 위해 죽으려는 자가 아니다."(주석 17)라는 결연한 선언에서도 우리는 안중근의 지향성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의 생애를 조망할 때 그는 대단히 진보적인 사고와 선진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소년시절의 동학농민군과 싸운 것을 제외하면, 당대 일반 청년들에 비해 훨씬 앞서 사고하고 행동했었다. 천주교에 입교하고서도 내세중심의 영혼구원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고 , 교육사업에 이어 직접 의병전쟁에 참여하고 국적 이토 처단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옥중에서 집필한 미완의 <동양평화론>이나 신문 과정에서 나타난 확고한 평화정신은 안중근사상의 본령이 어데 있는가를 말해준다. 일본 절대권력의 상징인 일왕을 제쳐주고 이토 처단으로 한국독립을 기대했던 것을 '한계'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100년 전 30대 초반의 '한계'도 이해해야 할 대목이겠다.
주석
12 - <피고인 신문조선>(피고인 안응칠), <자료>6, 5~6쪽.
13 - 한상권, <안중근의 국권회복운동과 정치사상>, <한국독립운동사> 82쪽, 2003.
14 - <피고인 제6회 신문조서>(피고인 안응칠)(<자료> 6, 173쪽)
15 - 한상권, 앞의 글, 84쪽.
16 - 오영섭, 앞의 글, 42쪽.
17 - <경(境) 경시의 신문에 대한 안응칠의 공술>(제11회) <자료> 7,4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