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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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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동학 입교 2. 동학농민운동과 갑진개화운동 전개 3. 천도교 정비와 계몽 활동 4. 3∙1운동 5.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6. 환원과 박인호의 삶의 의미 | ||
1. 출생과 동학 입교
박인호(朴寅浩)는 1855년 2월 1일(음력 1854년 12월 25일)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 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막골에서 밀양 박(朴)씨 명구(明九)와 온양 방(方)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명은 용호(龍浩), 이명은 남수(南壽), 자는 도일(道一)이며, 천도교의 도호(道號)는 춘암(春菴), 존호(尊號)는 상사(上師)이다.
그의 신분은 상민(常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계로 미루어 보면, 신분이 더 낮았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천민이건, 평민이건, 그가 양반과 중인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경제적으로 박인호의 집안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는 주장으로 미루어 보면 매우 곤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인호는 성격이 온순하였으나 힘이 장사여서 덕산 읍내에서 씨름 장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그는 힘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술도 잘 마시고 걸음도 빨라서 ‘용호도사(龍虎道師)’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박인호는 11살 경 한문교육을 받았다. 후일 그가 작성한 시서(詩書)를 통해 보건대, 그는 소학과 통감절요, 논어·맹자·중용·대학의 사서를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명경과와 진사과의 시험과목인 경전(經典)과 시(詩)·부(賦)·표(表)·전(箋)·책문(策問) 등의 공부에 매진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는 그가 15세에 지가서(地家書)와 의서(醫書) 등을 공부하였다고 한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잡과를 보아 풍수나 의관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꿈마저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는 과거제의 폐지가 거론될 정도로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참’과 ‘도리’를 중요하게 여긴 그가 세류에 영합하여 소신을 굽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출사의 길이 좌절된 농촌의 지식인에게, 조선의 부패와 모순은 점점 더 또렷이 부각되었다. 박인호가 출생한 예산의 하포리 지역은 내포 최대의 곡창지대여서, 이 지역의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심한 착취를 받고 있었다. 또한 관리의 가렴주구와 양반 지배층의 신분적 차별도 매우 심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그에게 조선은 문제투성이로 비쳐졌고, 개혁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 2015년 3월의 독립운동가 -
이 무렵 그에게 전해진 동학사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충남 예산에는 이미 1880년대 초에 동학이 전파되었다. 1880년대 초 예산읍내와 삽교읍 내포지역에는 동학 신자가 더러 있었다. 박인호는 1883년 김월화가 경영하는 예산읍내의 오리정 주막에서 김월화 부부로부터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동학을 믿으면 차별과 착취와 질병이 만연한 당시의 사회를 평등한 이상적 사회로 개벽할 수 있다는 주장을 듣자, 그에게 동학은 전염병에 걸린 세상을 구원하는 명약처럼 인식되었다.
동학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3년 3월 18일, 박인호는 충북 목천에 머무르던 최시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고 바른 마음으로 한울님을 믿어야 세상이 포덕천하가 된다.”라는 말을 믿고 동학에 입교하였다. 즉 그는 동학을 믿으면 사람이 차별 없이 존중받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동학에 입교하였던 것이다.
입교 후, 박인호는 동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정진하였다. 1884년 공주의 가섭사 사은암에서 49일간 기도와 수련을 하였다. 그리고 10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魚肉酒草)를 금지하며 교리를 공부하고 심성을 연마하였다. 심지어 그는 낫자루를 베고 잠을 잘 정도로 성(誠)과 경(敬)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동학의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고덕면 구만리의 최병헌과 이진해, 용리의 마준성과 임세영, 덕산면 북문리의 고운학 등에게 포교를 행하였다. 그리고 예산읍의 김명배, 동읍 간양리의 박덕칠과 박응하, 종경리의 장석준, 대흥리의 차경천 등에게 포교를 행하였다. 그의 포교 활동에 힘입어 그는 수천 명의 교인과 십여 개의 포를 관할하는 대두목으로 성장하였다.
동학 임명장(1928년) ⓒ독립기념관
2. 동학농민운동과 갑진개화운동 전개
1892년부터 동학교단이 동학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아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죽음을 당한 교조 최제우의 원통함을 풀어주려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였을 때, 박인호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이 서울에 올라와 궁궐 문에 엎드려 상소를 올렸을 때, 박인호는 소두(疏頭) 박광호, 제소(製疏) 손천민, 서사(書寫) 남홍원, 봉소(奉疏)인 손병희·김연국·박덕칠 등과 함께 봉소로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893년 3월 보은취회 때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덕의포의 관할 교인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이 취회에서 그는 ‘척왜양창의’, ‘민씨 축출’ 등의 사항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박인호는 제2차 봉기 시 기포(起包)1)하였다. 1894년 10월 1일 기포한 박인호는 예포대접주 박덕칠 등과 해미, 덕산, 예산, 온양, 당진, 홍성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 그리고 민보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0월 27일 당진군 면천면 승전곡에서는 일본군 400명과 관군 500명, 민보군 수천 명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894년 10월 말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박인호는 도피하여 숨어 지내야만 하였다. 삽다리 부근의 언덕에 누워 있다가 깨어난 박인호는 오리정 주막의 교인 김월화의 도움으로 위급을 피하였다. 그리고 김월화의 도움으로 주변 금오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다가 칠갑산 느티정에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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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 뒤인 1897년 박인호는 김명배, 김의형, 김주동과 함께 최시형을 찾아감으로써 동학교단과 다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898년 박인호는 최시형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보다 여섯 살이나 연하인 손병희를 스승으로 삼는 예를 행하였다. 1898년 4월 최시형이 체포되자 박인호는 홍주군 김주열의 논 10두락을 팔아 최시형의 구명활동을 벌였다. 또 그 해 6월 최시형이 교형을 당하자, 그 유해를 수습하여 안장하기도 하였다.
1898년 최시형의 사후 동학교단이 도통전수 문제로 갈등할 때, 박인호는 김연국이 아닌 손병희를 지지하였다. 그는 1900년 7월 풍기에서 개최된 설법식에 참석함으로써 손병희의 도통 승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손병희가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파 교인의 요구를 좇아 문명개화운동으로 동학의 노선을 전환하려고 할 때 이를 지지하였다.
1901년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자, 박인호는 손병희의 심복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1년 10월 박인호는 손병희의 명령에 따라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를 다니며 문명개화운동의 필요성을 설유하였다. 그리고 서북지방을 비롯한 각지에서 청년 24명을 선발하여 교토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시켰다. 1904년 초 동학의 지도자들과 일본 도쿄에 간 박인호는 손병희로부터 민회 설립에 대한 지시를 받고 돌아와 1904년 3~4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민회의 명칭을 중립회(中立會)로 하였다가, 10월 초에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흑의단발(黑衣斷髮)을 하고 이른 바 갑진개화운동2)을 전개하였다.
3. 천도교 정비와 계몽 활동
최초의 천도교 중앙총부 ⓒ독립기념관
1905년 12월 1일 동학이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후, 1906년 2월 10일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교제와 교리와 교인의 근대화를 추진할 때, 박인호는 손을 꼽는 지위를 지니고 천도교의 근대화 활동을 이끌었다. 박인호는 1906년 2월 성도사(誠道師) 밑에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육임(六任)을 두었을 때, 그는 교장이란 원직(原職)3)을 받았고, 1906년 7월 26일에는 교장에서 경도사(敬道師)로 승급되었다. 그리고 1906년 2월 20일 중앙총부의 최고기구인 현기사(玄機司)의 고문과원, 1906년 4월 16일 현기사장 대리, 1906년 6월 14일 금융관장, 1906년 7월 24일 중앙총부 고문, 1906년 8월 31일 충청남북도 교구 순독(巡督)등의 주직(住職)4)에 임명되어 교무를 처리하였다.
이런 그의 활동으로 1907년 2월 10일 대도주 김연국 다음의 지위인 차도주(次道主)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김연국이 천도교에서 나가 이용구가 이끌던 시천교로 가자, 1908년 1월 18일 박인호는 4세 대도주에 임명되었다.
대도주 박인호는 천도교의 대표자로서 포교를 확대하고, 교제를 정비하였다. 박인호의 지도에 따른 포교활동의 결과, 1914년에 경기도의 경성·수원·이천, 충청남도의 서산, 충청북도의 청주, 평안남도의 평양·강동·성천·안주·중화·덕천, 평안북도의 의주·초산·삭주·정주·선천·영변·구성·강계, 함경남도의 함흥·영흥·북청, 함경북도의 경성, 전라남도의 장성·순천·강진, 전라북도의 전주·익산, 황해도의 서흥·안악, 경상남도의 진주, 경상북도의 대구, 강원도의 춘천·평강·횡성 등지에 대교구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대교구 산하에 총 200개 정도의 교구가 설립되어 있었다. 심지어 총인원(叢仁院)이란 의회(議會)를 설립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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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총부 사범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1910.1.27.)
둘째 줄 왼쪽 4번째부터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의암(손병희), 춘암(박인호) ⓒ『춘암상사유첩』
박인호는 강습소와 학교를 설립·운영하여 교인들에게 근대적인 지식을 교육하고,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교리강습소규칙을 제정한 후 전국에 700여개소의 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인들에게 천도교의 신교리와 서양의 신지식을 교수하였다. 이를 통해 교인들에게 문명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교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박인호는 1909년 동덕여학교, 1910년 보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보성소학교, 이외 용산 문창학교, 마포 보창학교, 대구 교남학교, 일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하여 운영함으로써 고등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3·1운동과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등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점에서, 천도교의 민족운동의 역량을 증대하는 데에 있어, 그가 기여한 공적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4. 3·1운동
3·1운동 때 그는 2선에서 드러나지 않게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후원하였다. 그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천도교의 조직을 보호하려 한 손병희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손병희는 1919년 2월 28일 오전 11시 “나(孫秉熙)는 시국을 위하여 일어선다. 너는 천도교 쪽의 일을 잘 맡아서 경거폭동을 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포교의 일에 힘쓰라.”라고 박인호에게 특별히 당부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그는 법에 저촉될 만큼 드러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3·1운동을 지원하였다.
먼저 박인호는 1918년 12월 교인들에게 새해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 기도를 실시하도록 지시함으로써 3·1운동의 준비와 전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49일간의 특별기도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활동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모종의 운동, 즉 3·1운동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 특별기도회를 통하여 교인들은 거족적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다졌다.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지에서는 각기 4명의 독신교인이 선발되어 보다 구체적으로 3·1운동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지시로 전국의 대교구에 등사인쇄기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3·1운동 시 독립선언서와 격고문 등의 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49일 기도가 끝나는 2월 22일 이후에 전국의 교구장들이 상경하여 교구상황을 보고하게 함으로써 독립선언서의 서명과 배포 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음으로 박인호는 3·1운동 거사 자금의 모집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박인호는 1918년 대교당 건축의 명목으로 수만 원의 특별 성미를 거두게 하였고, 1919년 3~4월에도 수만 원의 기도미를 내게 하였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성금이었지만, 거두는 쪽이나 내는 쪽이나 이것이 독립운동에 쓰이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박인호는 넓은 의미에서 천도교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박인호는 3·1운동의 추진을 위한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천도교의 자금 사용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던 그는, 1919년 2월 21일 권동진이 “5,000원을 주라”고 쓴 손병희의 명함을 갖고 와 자금의 지원을 요청하자, 금융관장인 노헌용에게 명령하여 5,000원을 주게 하였다. 이 돈은 기독교 측에 전해져 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에 큰 도움을 주었다.
3․1운동을 후원한 혐의로 2년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년 10월 31일 출옥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
특히 그는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서의 발표, 대표들의 순국결의와 신탁 등의 소식을 알려 독립의식의 고취와 독립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조선독립신문』을 제작하는 데 간여하였다. 즉, 박인호는 1919년 2월 28일 이종일이 『조선독립신문』의 발간 계획을 언급하자 이에 동의하였다. 이후 그는 이종린으로 하여금 신문의 원고를 작성케 하자는 이종일의 제의에 찬성하고, 사장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 윤익선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윤익선을 사장으로 하는 『조선독립신문』 1호가 3월 1일 보성사의 김홍규의 감독 하에 발간될 수 있었던 것은 박인호의 후원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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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는 3·1운동을 후원하고 『조선독립신문』의 발간에 간여한 혐의로 1919년 3월 10일 중앙총부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경무총감부에 송치된 후 소위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신문과 조사를 받고 기소되었다. 박인호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다음날 출옥하기까지 근 2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박인호는 천도교의 대도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밀리에 후원하였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자금의 지원이 쉽지 않자, 그는 상해와 북경에 세워진 전교실을 통하여 자금을 제공하였다. 상해와 북경의 천도교 전교실에 제공된 자금은 상해와 북경에서 활동하던 최동오와 신숙을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과 그 개혁을 위하여 활용되었다. 심지어 박인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의 개최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모종의 활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았다는 혐의로 대종사장인 정광조, 현기관장인 오상준, 경성대교구장인 장효근, 천도교청년회장인 정도준과 함께 체포되어 모종의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5.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천도교 교회제도의 변경에 따라 1922년 1월 18일 교주로 취임한 박인호는 교단의 통합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의 사망 이후 천도교단이 자신의 교주 인정과 교회의 운영과 민족운동의 노선 등에 따라 천도교연합회, 천도교 구파, 천도교 신파, 천도교 육임파로 분화할 때, 박인호는 천도교 통합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그는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고 하며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1925년 중반 천도교가 중앙종리원, 교인대회, 통일기성회로 분열하였을 때에도 “이러한 큰 도에 적은 일을 힘쓰지 말고 믿음으로 통일하고 규모로 일치하라는 신성의 가르침을 따라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이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윤고문(輪告文)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25년 말 천도교의 중앙종리원을 장악한 최린 등이 자치운동을 전개하자, 박인호는 1925년 12월 권동진·오세창 등의 통일기성회 및 오영창이 이끄는 교인대회와 합하여 별도로 천도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월 중앙위원회의 명칭을 중앙종리원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그는 이른 바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보성초등학교 제14회 졸업식(1921.3.19., 우측 상단은 校主인 박인호 선생)
ⓒ독립기념관
천도교 구파의 영수인 박인호는 천도교 구파의 원로인 이종린·권동진, 천도교청년동맹의 간부인 박래홍·박래원 등과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는, 1925~6년 일제의 자치권 부여 소문과 함께 김성수·이광수·최린 등의 민족주의 우파들이 자치운동을 모색하자, 사회주의세력과 제휴하여 3·1운동과 같은 일대 시위를 벌임으로써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