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37년 갑진(1604,만력 32)
6월25일 (갑진)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대대적으로 봉하다
공신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다. 서울서부터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삼고,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한 자를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삼아,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봉호(封號)를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에는 이항복·정곤수(鄭崐壽), 2등에 신성군 이우(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李琈)【이 분이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다.】·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심우승(沈友勝)·이호민(李好閔)·윤근수(尹根壽)·유성룡·김응남(金應南)·이산보(李山甫)·유근(柳根)·이충원(李忠元)·홍진(洪進)·이괵(李)·유영경(柳永慶)·이유징(李幼澄)·박동량(朴東亮)·심대(沈岱)·박숭원(朴崇元)·정희번(鄭姬藩)·이광정(李光庭)·최흥원(崔興源)·심충겸(沈忠謙)·윤자신(尹自新)·한연(韓淵)·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순령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신잡(申磼)·안황(安滉)·구성(具宬), 3등에 정탁(鄭琢)·이헌국(李憲國)·유희림(柳希霖)·이유중(李有中)·임발영(任發英)·기효복(奇孝福)·최응숙(崔應淑)·최빈(崔賓)·여정방(呂定邦)·이응순(李應順)·절신정 이수곤(節愼正李壽崐)·송강(宋康)·고희(高曦)·강인(姜絪)·김기문(金起文)·최언순(崔彦恂)·민희건(閔希鶱)·허준(許浚)·이연록(李延祿)·김응수(金應壽)·오치운(吳致雲)·김봉(金鳳)·김양보(金良輔)·안언봉(安彦鳳)·박충경(朴忠敬)·임우(林祐)·김응창(金應昌), 정한기(鄭漢璣)·박춘성(朴春成)·김예정(金禮禎)·김수원(金秀源)·신응서(申應瑞)·신대용(辛大容)·김새신(金璽信)·조귀수(趙龜壽)·이공기(李公沂)·양자검(梁子儉)·백응범(白應範)·최윤영(崔潤榮)·김준영(金俊榮)·정대길(鄭大吉)·김계한(金繼韓)·박몽주(朴夢周)·이사공(李士恭)·유조생(柳肇生)·양순민(楊舜民)·경종지(慶宗智)·최세준(崔世俊)·홍택(洪澤)·이춘국(李春國)·전용(全龍)·이희령(李希齡)·오연(吳連) 등 총 86인이요, 내시(內侍) 24인, 마의(馬醫) 6인, 의관(醫官) 2인, 별좌 사알(別坐司謁) 2인이다.
선무 공신은 1등에 이순신·권율·원균, 2등에 신점(申點)·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에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충원(柳忠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 등 총 18인이다.
청난 공신은 1등에 홍가신(洪可臣), 2등에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 3등에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 등 모두 5인이다.【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의 호를 내리고, 2등은 갈성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효절협책의 4자를 줄였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효충장의적의협력(効忠仗義迪毅協力)의 호를 내리고, 2등은 적의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협력 2자를 줄였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분충출기합모적의(奮忠出氣合謀迪毅)의 호를 내리고, 2등은 합모 2자를 줄이고, 3등은 또 적의 2자를 줄였다.】
【원전】 25 집 694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原文]
宣修 38卷, 37年(1604 甲辰 / 명 만력(萬曆) 32年) 6月 25日(甲辰) 1번째기사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대대적으로 봉하다
○甲辰/大封功臣。 以自京城至義州, 終始隨駕者爲扈聖功臣, 以征倭諸將及兵糧奏請使臣爲宣武功臣, 以討平李夢鶴爲淸難功臣, 皆分三等, 錫號有差。 其扈聖一等: 李恒福、鄭崐壽, 二等: 信城君珝、定遠君諱琈、【是爲元宗大王】 李元翼、尹斗壽、沈友勝、李好閔、尹根壽、柳成龍、金應南、李山甫、柳根、李忠元、洪進、李、柳永慶、李幼澄、朴東亮、沈岱、朴崇元、鄭姬藩、李光庭、崔興源、沈忠謙、尹自新、韓淵、海豊君耆、順義君景溫、順寧君景儉、申磼、安滉、具宬, 三等: 鄭琢、李憲國、柳希霖、李有中、任發英、奇孝福、崔應淑、崔賓、呂定邦、李應順、節愼正壽崐、宋康、高曦、姜絪、金起文、崔彦恂、閔希騫、許浚、李延祿、金應壽、吳致雲、金鳳、金良輔、安彦鳳、朴忠敬、林祐、金應昌、鄭漢璣、朴春成、金禮禎、金秀源、申應瑞、辛大容、金璽信、趙龜壽、李公沂、梁子儉、白應範、崔潤榮、金俊榮、鄭大吉、金繼韓、朴夢周、李士恭、柳肇生、楊舜民、慶宗智、崔世俊、洪澤、李春國、全龍、李希齡、吳連, 凡八十六人。 內侍二十四人, 馬醫六人, 醫官二人, 別坐司謁二人。 宣武一等: 李舜臣、權慄、元均, 二等: 申點、權應銖、金時敏、李廷馣、李億祺, 三等: 鄭期遠、權悏、柳忠瑗、高彦伯、李光岳、趙儆、權俊、李純信、奇孝謹、李雲龍, 凡十八人。 淸難一等: 洪可臣, 二等: 朴名賢、崔湖, 三等: 辛景行、林得義, 凡五人。【扈聖一等賜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之號, 二等減竭誠二字, 三等又減効節協策四字。 宣武一等賜効忠仗義迪毅協力之號, 二等減迪毅二字, 三等又減協力二字。 淸難一等賜奮忠出氣合謀迪毅之號, 二等減合謀二字, 三等又減迪毅二字。】
【태백산사고본】 8책 38권 5장 A면
【영인본】 25책 694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1월15일 (정축)
해창군 윤방·영의정 신흠·좌의정 오윤겸 등이 인성군 이공을 처벌하라고 연일 정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해창군 윤방(尹昉), 영의정 신흠(申欽),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김류(金瑬), 좌찬성 이정구(李廷龜), 우찬성 이귀(李貴), 계림 부원군 이수일(李守一), 겸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 완풍 부원군 이서(李曙), 영안위 홍주원(洪柱元), 전창군 유정량(柳廷亮), 판돈녕부사 이덕형(李德洞), 좌참찬 서성(徐渻),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달성위 서경주(徐景霌), 금양위 박미(朴瀰), 한평군 이경전(李慶全), 공조 판서 신경진(申景禛), 능성군 구굉(具宏), 길성위 권대임(權大任), 연원 부원군 이광정(李光庭), 원계군 원유남(元裕男), 지중추부사 이홍주(李弘胄)·이진(李瑱)·박동선(朴東善), 판윤 김자점(金自點), 지중추 박정현(朴鼎賢), 경양군 이사공(李士恭), 석릉군 전룡(全龍), 이조 판서 장유(張維), 동지중추 오백령(吳百齡)·이상길(李尙吉)·유영순(柳永詢)·한효중(韓孝仲)·원탁(元鐸), 공조 참판 윤양(尹暘), 이조 참판 홍서봉(洪瑞鳳), 순흥군 김경징(金慶徵), 예조 참판 한여직(韓汝溭), 청운군 심명세(沈命世), 창산군 성대훈(成大勳), 청천군 유순익(柳舜翼), 진양군 강인(姜絪), 동성군 신경연(申景禋), 행 부호군 송석경(宋錫慶)·윤휘(尹暉)·정두원(鄭斗源), 좌윤 최내길(崔來吉), 행 사직 박경업(朴慶業), 진천군 유구(柳䪷), 호조 참판 이경직(李景稷), 영안군 최산립(崔山立), 행원군 기여헌(奇汝獻), 당계군 홍택(洪澤), 완릉군 유파(柳坡), 분흥군 김몽상(金夢祥), 평흥군 신준(申埈), 행 부호군 오준(吳竣) 등이 아뢰기를,
“인성군 이공은 일찍이 광해가 모후를 폐하던 때에 하인준(河仁俊)이 올린 흉소(凶疏)를 가리켜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한 것이고 초야(草野)의 공론이라고 하였으니, 그 죄가 하인준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근년 이래 역적들이 역모를 획책할 적마다 공을 기화(奇貨)로 여긴 것이 전후의 초사(招辭)에서 매우 낭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법을 굽혀가면서 더욱 곡진히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지금 이 흉참스런 역변은 전고에 없었던 것이고 역적들이 자복한 공초를 살펴보더라도 공이 바로 와주(窩主)인 것입니다.
민대 형제는 공과 절친한 사이이고 김응호는 공이 친히 하여 믿는 사람이니, 공이 역적들의 와주인 것은 단연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역적들의 공초에 ‘인성과 궁내의 일은 민설(閔渫)이 주관하기로 했다.’ 하고, 또 ‘민대가 인성을 만나 직접 약속하고 왔다.’ 하고, 또 ‘거사할 때 인성이 건장한 가동(家童) 90인을 동원하기로 했다.’ 하고, 또 ‘인성이 매양 분통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어미의 상사(喪事)를 보지 못한 것을 한하고 있다.’ 하고 또 ‘이미 성인을 얻었다.’ 하고, 또 ‘폐주를 복위시키는 일을 인성이 강력히 주장했고 폐주가 보낸 밀서를 인성이 받았다.’ 하고, 또 ‘폐주를 맞이하여 상왕으로 삼고 인성이 임금이 된다.’ 했습니다. 이런 등등의 흉패스런 말들은 이루 다 거론할 수가 없는 정도인데 모두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지어 내어 사람들을 꾀기 위한 계책으로 썼다는 것이 유효립의 공초에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화란을 야기시킬 마음을 품고 자전의 밀지를 받았다고 속인 죄는 위로 하늘에까지 사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하가 되어서 이런 죄명을 졌으면 어떻게 하루인들 용서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왕법은 지극히 중한 것이고 대의는 지극히 엄한 것이니, 속히 법에 의거 처치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흉역스런 도당들이 이미 모두 복주되었으니 지금 용서하여도 다시 불궤(不軌)를 도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로부터 연일 정청(庭請)하였다.
【원전】 34 집 251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原文]
仁祖 18卷, 6年(1628 戊辰 / 명 천계(天啓) 8年) 1月 15日(丁丑) 1번째기사
해창군 윤방·영의정 신흠·좌의정 오윤겸 등이 인성군 이공을 처벌하라고 연일 정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丁丑/君尹昉、領議政申欽、左議政吳允謙、右議政金瑬、左贊成李廷龜、右贊成李貴、鷄林府院君李守一、兼禮曹判書金尙容、完豐府院君李曙、永安尉洪柱元、全昌君柳廷亮、判敦寧府事李德泂、左參贊徐渻、東陽尉申翊聖、達城尉徐景霌、錦陽尉朴瀰、韓平君李慶全、工曹判書申景禛、綾城君具宏、吉城尉權大任、延原府院君李光庭、原溪君元裕男、知中樞府事李弘冑ㆍ李瑱ㆍ朴東善、判尹金自點、知中樞朴鼎賢、慶陽君李士恭、石陵君全龍、吏曹判書張維、同知中樞吳百齡ㆍ李尙吉ㆍ柳永詢ㆍ韓孝仲ㆍ元鐸、工曹參判尹暘、吏曹參判洪瑞鳳、順興君金慶徵、禮曹參判韓汝溭、靑雲君沈命世、昌山君成大勳、菁川君柳舜翼、晋陽君姜絪、東城君申景禋、行副護軍宋錫慶ㆍ尹暉ㆍ鄭斗源、左尹崔來吉、行司直朴慶業、晋川君柳䪷、戶曹參判李景稷、寧安君崔山立、幸原君奇汝獻、唐溪君洪澤、完陵君柳坡、盆興君金夢祥、平興君申埈、行副護軍吳竣等啓曰: “仁城君珙, 曾於光海廢母之日, 以河仁俊凶疏, 爲宗社大計、草野公論, 則其罪與仁俊無以異也。 頃年以來, 諸賊謀逆, 輒以珙爲奇貨, 前後招辭, 極其狼藉, 而聖上屈法伸恩, 待之有加。 今玆逆變之凶慘, 前古所未有, 以諸賊輸情之招觀之, 珙乃其窩主也。 蓋閔濧兄弟, 珙之切親, 而金應虎, 珙之親信人, 則珙之爲諸賊之主, 斷無疑矣。 賊招有云: ‘仁城、宮內之事, 閔渫主之。’ 又云: ‘閔濧見仁城, 親約而來。’ 又云: ‘擧事時, 仁城有壯奴九十人。’ 又云: ‘仁城每有憤惋之心, 以不見母喪爲恨。’ 又云: ‘已得聖人。’ 又云: ‘復立廢主事, 仁城力主之, 廢主有密書, 而仁城受之。’ 又云: ‘迎廢主爲上王, 而以仁城爲君。’ 凶辭悖語, 不可悉擧, 而如出一口, 至於做出不忍言之說, 以行誑誘之計者, 明出於孝立之招, 其包藏禍心, 矯誣慈旨之罪, 可謂上通於天矣。 爲人臣子, 負此罪名, 何可一日容貸? 王法至重, 大義至嚴, 請亟命按法處置。” 答曰: “兇逆之徒, 已盡伏誅, 今雖容貸, 似難更圖不軌。 諸卿體予至意, 勿更煩論。” 自此連日庭請。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1장 A면
【영인본】 34책 25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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