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사랑의 향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여수문협에서 추진한 문학기행에 동참하여 영암 구림마을을 들렸을 때다. 그날은 처음 찾는 곳이라서 기분도 들뜨고 주위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깊은 인상을 받았다. 흔히 하는 말로 영남은 향교, 호남은 정자라고 하는데, 만나 본 고풍스런 정자 '화사정'은 그야말로 방문객의 마음이 푹 빠져들게 만들었다.
유서 깊은 대동계를 지켜온 건물인데, 향약(鄕約)의 전통이 무려 450여년이나 이어 온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 고장은 왕인(王仁)박사와 도선국사의 탄생지이기도 해서인지 마주한 것마다 신비로움이 가득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늑하게 자리 잡은 구림마을은 그 기운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뒤편에 수려한 월출산의 준봉들이 마을을 품고, 멀리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는 문필봉이 우뚝 속아서 상서러운 기운을 더 하였다.
이 마을 중앙에는 조선 중기 삼당파(三唐派) 시인의 한 분인 고죽(孤竹) 최경창 (崔慶昌)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었다.
고죽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유택은 경기도 파주군 교하리에 있다고 한다. 한데 그의 묘소는 세인에게 많이 회자가 되고 있단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고, 같은 묘역에는 기생 홍랑(洪娘)의 무덤도 함께 있기 때문이란다.
그녀의 무덤이 같은 묘역에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녀는 고죽이 신병을 얻어 45세로 세상을 뜨자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고, 11년 동안을 사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유일자(有一子) 도 한명 두었다는 것이다.
이름은 최즙. 그 후손은 지금도 핏줄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죽이 파직을 당한 것은 그녀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에 머물고 있는 그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홍랑이 관서에서 7일 낮밤을 걸어서 찾아왔는데 그 소문이 결국 조정에 까지 알려져 옷을 벗게 되었단다.
그녀의 고죽 사랑은 지극한 데가 있다. 당시는 관서지방의 사람이 도성에 입성하는 일은 철저히 금하고 있었는데 그 경계를 뚫고 들어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의 시문을 손수 챙겨 잘 보관하기도 했단다. 그러니 어찌 그 마음이 가상하지 않으며 지극정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은 1539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수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인 22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29세 때는 증관문과에 합격하여 북도평사를 지냈다, 그리고 말년에는 이곳 영암 군수을 역임했다. 그는 자질에 비해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뛰어난 인물이었다. 문무를 겸전했던 것이다. 전에 오는 말에 의하면 일찍이 선조임금은 그를 무척 총애했다고 한다. 하나 성품이 워낙 강직한 탓에 직언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일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젊은 시절 군막에서 김우서 장군을 돕고 있을 적에 한번은 장군이 활쏘기 시합을 제의했다. 그래서 다섯 발씩 모두 10순을 쏘게 되었는데 장군이 먼저 선시(先矢)를 했다. 장군이 일시를 실패하자 고죽선생이 말했다.
"이번에도 장군이 지셨습니다." 이렇게 맗 하고는 시위를 힘껏 당겨 정확히 흑점 정곡을 맞추었다.
한편, 당시에는 시풍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성과 논리를 중시한 송시풍이 유행했다. 하나, 선생은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감성을 중시한 당시(唐詩)를 지켜내었다. 그가 남긴 시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외로운 대나무가 가지와 잎도 없이
바닷가 산 위에 목숨을 붙였네.
해마다 서리와 눈 속에 묻힌 데다
벼랑마저 기울어 뿌리가 불안해라.
대나무를 어찌 재목으로 쓰랴마는
추위를 이기는 모습, 너무도 고귀해라.
(孤竹無枝葉 寄生海上山
年年霜雪埋 崖傾根未安
豈是材可用 所貴能傲寒 )
평소 강직함 때문이었을까. 그의 시 속에는 삶의 회한이 가득하다.
희뿌연 가을 안개는 새벽 강에 자욱하고
변방 기러기 올 때 나는 누각에 기대어있네.
내 집은 영암에 있는데 서신조차 끊겼으니
멀고 먼길 꿈속에도 아득하구나.
그렇지만 그는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명기였던 그녀와도 애틋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한양으로 잠시 만나러 온 그녀가 돌아가며 써 보낸 번방곡(飜方曲) 7언고시는 애모의 정이 가득하다. 가람 이병기 선생도 감탄에 마지 않았다는 그 시.
묏버들 글히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밧긔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임 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
이에 고죽은 다음의 시로 화답했다.
물끄러미 마주보며 고운 난초 건네노라
이제 하늘 끝으로 떠나면 언제나 돌아올까
홤관령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마라
지금도 구름과 비에 푸른 산이 어둡나니
고죽을 기리는 기념관은 한눈에 봐도 잘 정비 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선생의 시와 홍랑의 시가 함께 새겨져 있고, 기념관에는 당시 보던 서책를 비롯해 선생의 유품이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생시의 고죽을 뵈는 기분이 들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기분은 흐뭇했다. 반상의 법도가 엄히 지켜 내려오던 시대에, 한갓 관기에 불과했던 기생과 그토록 애절한 문우지정을 나누다니... 400여년의 시공을 넘어서 감동이 잔잔히 밀려들어 발걸음이 쉽게 돌릴 수가 없었다. (2004)
첫댓글 강릉 경포대에 가니
'호수'에도 홍랑의 전설을
새겨 놓아 보았는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렇군요. 홍랑은 시인으로도 길이 기려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뜰에 새워진 시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