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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무거운 주제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분들이 저의 신앙에 관하여 질문을 해 오셨습니다.사실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글쓰기를 주저해 왔습니다. 카페의 전체적인 분위기, 현역증인분들, 신앙을 가지신 분들, 불가지론과 무신론적인 분들..까지 고려하자니 선뜻 저의 생각을 말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점에서 조심스럽게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침, 상담방에 이와 관련된 질문이 올라온 터라 이제는 글쓰기를 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증인생활을 하였고 어줍잖게 장로생활까지 10년정도 하면서 성서를 잘 안다고 착각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성서공부를 참 좋아했고 WT출판물을 종합적이고 세밀하게 연구해 왔다고 자부했었습니다.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도 정립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믿음과 이론에 자신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신학대학생,목회자들과의 성서토론을 즐겼으며 어떤 경우에도 밀리지(?)않았습니다. 삼위일체와 영혼불멸, 그리고 천년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성서만 가지고도 하루 종일 열변할 수 있었죠.
이렇듯 JW이론에 자신 있었던 제가 어느 날 JW조직과 교리적 모순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성서를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학구열은 성서가 무엇이고 JW조직은 진정 하느님의 조직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장로생활 8년차무렵부터 상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름 왕성한 증인장로생활을 통해 활약(?)을 하던 시절, 저는 착잡한 심정으로 아무도 모르게 밤마다 성서를 다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JW식 개인연구가 아닌 각종 신학서적, 인문서적, 철학서,고고학서, JW비판해외자료 그리고 WT출판물들의 과거와 현재의 것들을 가지고 말입니다.
[편협은 기운 센 무지를 낳는다]라는 말을 믿으며 출판물을 중심으로 한 그 동안의 성서연구를 뒤로 하고 총체적이고 분석적인연구에 돌입한 것이죠. 처음에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많은 학설과 논문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놀라울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들에 정신이 아득해 질 지경이었죠.
당연한 수순이지만, 점차 JW교리는 학문적 체계없는 초등적이고 졸속으로 만들어진 모순덩어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종교고고학을 알게 되면서 성서의 대홍수, 모세와 이스라엘 열 두 족속,이집트에 내려진 재앙같은 이야기들이 성서보다 더 오래된 수메르인의 길가메시Gilgamesh 등 을 모방했다는 주장에 대해 알게 되었죠. 고대의 많은 신화적 이야기들이 성서로 섞여 들어가고 기원 후로 넘어오면서 구전에 의한 많은 책들이 당대의 종교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성서라는 이름으로 편집되었다는 주장 또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연구과정을 통해 과연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불안했던 저의 성서연구는 불가지론과 무신론, 자유신학을 넘나 들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제가 깨달은 몇 가지 사실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는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여야 할 필요는 없다(No need to think the Bible must be literally true to be true)”라는 것과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흔히 성경의 절대성과 무오성을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의 끝에는 항상 과도한 신학적 열정으로 인한 신앙적 독단과 신비적 열광주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가장 비견한 예가 여호와의 증인등을 비롯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인 것처럼 해석하고 때론 자신들 종교조직을 합리화 하기
위한 억지 해석까지 제시하면서 극단적 종교선민주의와 우월주의,배타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고대와 중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방식의 성서해석을 현 문명세대에 그대로 답습하면서 수 많은 억측과 종교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죠.특히 이 근본주의 이론은 중세 교회 군주주의에서 근대의 북미로 건너 와 미국식 백인우월주의로 진화하였습니다.
성경 특히 구약의 기록을 보면 현대인들의 상식으로 볼 때 너무나 모순되고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많습니다. 창세기록 특히 1장과 2장의 도저히 양립될 수 없는 모순과 비과학성,죄없는 어린아기까지 전멸시킨 전세계적인 노아의 대홍수, 대역죄를 진 다음에도 하느님의 종을 시험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할 수 있었던 사탄,사탄의 시험으로 죽인 자녀들을 보상한다고 새로운 자녀를 수여하는 우스운 일들, 왕이 잘못했다고 백성들 수만명을 죽이는 하느님, 여성과 장애인을 차별하는 등의 반인륜적 내용이 가득한 율법, 복수위주의 형벌,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수시로 어기는 기름부음받았다는 이스라엘 왕들, 타 민족을 파리목숨처럼 죽이는 이른바 신의 전쟁, ...등등의 것들은 문자적으로 꾸역꾸역 믿어야만 하는 비상식적인 사건들입니다. 마치 고대 신화나 전설속에서나 나오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죠. 이런 기록속의 하나님은 온 인류의 보편적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여성과 장애인과 타민족을 차별하는 편협하고 잔인한 존재로 밖에 비춰지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이런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속 깊은 내면이 있다고, 아무리 우긴다 해도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지 않습니까.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선악으로 구분되어 이름 지어져 있습니다. 악인들은 대부분 나쁜 뜻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태어나면서부터 자식의 이름을 나쁜 의미로 짓겠습니까. 이름에 의해 선악이 구분되는 것은 고대 신화나 설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공식입니다. 실명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작명한 인물들에 의해 그려지는 만화같은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문자적으로 사실일까요. 성서의 모순되어 보이는 역사기록을 현학적으로 합리화하여 [이해 못하는 너희들이 무지한거야]라는 식의 우격다짐이 과연 지금의 시대에 맞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성서를 문자적으로 (때론 자기식의 해석대로)믿어야 한다고 전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특히 고대의 성서 사건은 대부분 문자적으로 일어났고 그것을 의심하면 배교자, 무신론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 신앙일까요.배타주의,근본주의,성경무오사상,성서문자주의,원리주의에 빠졌던 그래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철저히 정죄했던 중세의 교직자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전쟁이 촉발되었습니다.
근세들어 100년간 인류에게 전쟁이 없던 날은 14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 수 많은 전쟁의 90%가 종교가 원인이었다고 하니 (기독교,회교,이슬람,토속신앙을 아우르는)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배타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가십니까.
성서와 종교 본연의 보편적 아가페 사랑과 종교적 다원주의를 인정했다면 이 많은 전쟁이 과연 일어났을까요.
지금 세계의 기독교는 배타주의에서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적이고 절대적으로 따르는 자만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를 상대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그것에 기록된 많은 역사들이 알려주는 지혜와 교훈을 자신의 생활에서 적용하는 사람이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서를 문자적인 절대서가 아니라 숭고한 교훈서이자 생활안내서로서 받아들여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타협이 아닌 지성과 철학을 가진 문명인으로서의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존 셀비, 폴 닉터, 존힉, 한스 큉, 오강남, 함석헌, 김진홍같은 분들입니다. 모두 저명한 종교학자이고 열렬한 크리스챤들입니다. 누가 이들을 배교자 혹은 무신론자라고 비난하겠습니까.
캐나다 리자니아 대학교의 비교종교학 강의를 했던 교수 오강남씨는 자신의 책에서 합리적인 神觀과 파울러교수의 신앙의 6단계를 언급하면서 이른바 [철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략 정리를 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철수는 어릴 때 자신의 아빠가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가장 힘이 세고 돈도 젤 많고 잘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다른 아이들이 아빠를 흉보면 성을 내면서 싸우기도 했습니다.어느 날은 아이들과 싸우다 울고 들어오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최곤데, 애들이 아니래, 그래서 한 대 쥐어박았지”그러다 소년으로 자란 다음에 보니 아빠가 최고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기 아빠보다 잘 생긴 사람도 많고 돈 많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최고였던 아빠는 최고도 아니고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아빠에게 반항을 합니다. “아빠는 구식이야,아빠가 나한테 해준게 뭐야, 남들은 다 잘 사는데..” 이제 장년이 된 철수는 조금씩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도 우리 아빠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야,아버지가 오래 사신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텐데..” ..이때 철수가 아빠가 최고라는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문자적으로 자기 아빠가 젤 힘이 세고 젤 돈이 많다는 유아때의 생각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자신의 아빠는 객관적으로는 절대로 세상에서 최고가 아니지만,자신을 키워주고 가르치고 삶의 방식에 있어 자신보다 훨씬 지혜롭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린 대부분 이런 인생의 단계를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자,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단계입니까. 철수에게 있어 유아기입니까, 소년기입니까, 어른입니까. 돌이켜보면, 저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어린 철수처럼 떼를 썼습니다.내 종교가 최고고 여호와가 최고고 다른 그 무엇은 다 거짓이고 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듯 유아기의 철수처럼 자신만 아는 단계의 믿음을 고집부리는 자들이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성서를 문자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믿는 경우에 생기는 정신적 위험성과 삶의 질의 저하는 말도 못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문맹률 99%시대 사람들이 믿던 방식대로 성서를 이해하려는 것은 오히려 성서를 모욕하는 것이고 참 믿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로서의 믿음,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고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신앙이 아닌 성서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교훈을 파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의 성장을 지향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성경의 믿을 수 없는 고대역사들이 문자적이냐 알레고리냐를 따지는 문제는 무의미한 논쟁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 자유의지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아담의 범죄를 예상했느냐 못했느냐, 예수께서 어떻게 중력을 이기고 물위를 걸었느냐 하는 등등의 문제들은 논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 아닐까요.
이 글로 해서 얼마전 한 회원님이 올리신,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 성서를 문자적으로 볼 때 생기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의 단계, 어른으로서의 단계, 성서를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의지하는 단계, 성서의 특정해석을 강요하지 않는 단계,신의 존재를 따지기 전에 성서가 알려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들을 기꺼이 돕는 단계, 다른 종교를 증오하지 않는 단계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인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그릇된 선민주의의 대표인 여호와의 증인들을 도와주는 일은 그래서 시급한 일입니다.
아프리카에서만 하루 20,000명 이상이 굶어 죽는 이 안타까운 지구를 도와 줄 박애정신은 커녕, 정보통신이 없던 2000년전 집집으로 방문하라는 성경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보통신이 찬란한 현 시대에도 0.1%의 성공률도 없는 호별방문을 매월 수십시간씩 하고 있는 증인들을 보면서 한심한 기독교 근본주의에 분노가 끓어 오릅니다. 우매한 수백 만 증인전도인들만이 십시일반으로 거둬 들이는 매년 수조원에 달하는 종교기금이 프리메이슨계통인지 카톨릭계통인지 모를 암흑속으로 빠져 나가는 한심한 오늘의 현실이 너무나 슬프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성서를 그릇 이해시켜 배타주의로 온 세계를 사탄으로 만드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관념의 포로들을 사심없이 도와주는 미션이 제가 풀어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숙제가 될 것입니다.
증인을 포함한 많은 종교조직들이 성서이해를 오도함으로 인해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으며 이로써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허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도와 주시겠습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다음 문헌들을 통해 지금의 성서적 이해를 폭 넓게 확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추천도서: [성경 바로 읽기] - 민영진 저 / [열린 종교와 평화 공동체]- 크리스쳔 아카데미
[성서 해석의 길잡이] 유태엽 저
[신앙의 성숙을 위한 지침서]-Teasdale Wayne
[도덕경]역, [장자]역, [예수는 없다]-오강남 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함석헌과 파니카와의 대화]-김진 저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로널드 L 넘버스 저
그 외 조나단 에드워드, 김남준 의 글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수많은 책을 읽으시고 그중에 길가메시 에서 영향을 많이 받으셨네요.
성경은 현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결론은 어느 신을 믿던지, 꼭 성경의 하나님일 필요는 없는 거네요.
모든 종교의 가르침 중에 좋은 가르침만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가 되겠네요.
이런 성숙한 신앙을
다신론자 또는 범신론자로 분류를 할 수 있나요?
저의 의도와는 좀 다른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다신론과 범신론은 제가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 글쎄요...그렇게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게 믿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특정한 그 무엇으로 규정짓고 절대화하는 것이 문제지 않을까요. 규정이 아니라 포용과 박애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서의 저변에 있는 고귀한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성서를 그 무엇으로 절대화 하면서 그 해석도 절대화 되고 그런 무리들이 조직을 만들고 사업화하여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여호와의 증인 조직입니다.그것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아,그리고 저는 길가메시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냥 그런주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시길
진정성이 묻어있는 합리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아내와 함께 읽었습니다. 아내가 던진 첫 마디는 "자기랑 생각이 똑 같네"였습니다. 님의 말씀에 한치에 오차없이 공감하며
성서가 쓰여진 양식 신화.설화 그리고 역사, 이 세가지 기록 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진실을 아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성서에 있는 신화나 설화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진실로 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신화나 설화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결코 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신화나 설화로 이해한다고해서 경전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서를 신화나 설화로 이해하신다니...저는 히브리11장3절 과6절의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보이는것이 보이지않는것으로 만들어졌다는것을 압니다" 그리고 6절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없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사람은 그분이 계시다는것과 또 그분을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생각하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고리타분한(?) 사람도 이곳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블루스카이님... 믿음에 관해서 저와 같은생각이였으면 좋았을것을...참으로 아쉽습니다..
망치님, 님께서는 고리타분한 분이 아니라 기독교근본주의자이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성서전체를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랑의 교훈을 받아 들입니다. 근본주의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석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며, 그 해석을 가지고 종교사업화하는 사람들(JW같은 이들)이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 점은 저와 의견이 맞지 않습니까^^
망치님 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성서를 하나님 말씀으로 소중히 여기고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또 성서말씀을 삶에 지침으로 인생에 교훈으로 삼아 적용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성서 특히 창세기에 나와 있는 신화나 설화적인 요소를 신화나 설화로 이해한다고 해서 성서가 잘못된 책이거나 오류가 있는 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수많은그리스도인에게는 훌륭한 경전이고,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성서에는 특히 히브리 성서에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문 과학이나 자연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부족신관을 벗어나지 못했던 수천년 전의 사람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했고 그들의 눈으로 신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헤아릴 수 있는, 그들의 눈을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하게 성서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워치타워는 수백 만명의 사람들을 매트릭스안에 가두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에 함정,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그곳, 교리에 함정 속에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곳, 그곳은 분명 지옥입니다.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한 성서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독버섯이 될 것입니다.
성서기록을 신화나 설화로이해한다는것은 하나님의말씀을 격하시키는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의 어떤부분이 이해되지않으면 이해되지않는대로 기다리시고 내가알고있고 이해되는대로 하나님의 뜻을 내생활에서 적용하려고 노력하면 될것입니다. 짧은사람의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려고 한다면 워타와같이 교만해지는것입니다...
망치님의 의견은 저의 의견과 근접합니다. 이해되는 한도내에서 그 뜻을 생활에서 적용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서기록 일부가 신화나 설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절대성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겠습니다. 저 역시 좀 더 연구해 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생각을 모두 이해하려고 한다면 워타처럼 교만해 지겠죠. 우리 카페는 그런 분들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군요. 읽고나니 100% 공감입니다.
창세기를 신화나 설화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어져 갈 수 있나요? 성서를 생활 안내서 자기 개발서로 보고 읽고 적용하는것은 아담이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세상을 살아가는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것 까지 사고를 확장하고, 멈추는 부분에서 같이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말씀 하지 않은 곳 까지 사고를 확장시키는 것은 하느님께 순종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의견 감사합니다. 그러면 편운님은 구약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문자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많은 기록들의 허구성 문제, 타신화 모방문제, 반인륜적 기록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다 알 수 없다]와 같은 기독교적 오묘론 말고요, 다른 실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알고 계시면 알려 주십시오. 진심으로 알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서의 절대성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알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 그리고 편운님, 제가 말한 성서이해의 한 측면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1세기 당시 율법을 문자그대로 믿고 지켰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라고 하셨죠. 문자대로 행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내면에 있는 교훈과 정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논조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읽었습니다. 저도 길가메시 역사책에서 잠깐봤습니다. ^^ 저는 요즘 스티븐호킹이 모든것은 무에서 생겨났다는 망언에 더 신경이 쓰이는 ^^ '시간의 역사'책 예전에 봤었는데.. 그때만해도 안그랬었거든요... 아.... 제 생각에는 인격체의 하느님은 분명 계신것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제 한계를 넘어서는 거라... 글을 읽어보니 어쨌든 블루님은 하느님을 하느님을 믿는 분이라는 걸 알았네요! 저도 믿고싶습니다. 인격체의 하느님을...
갑론을박이 많군요 ..성서66권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된것으로"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해석에 있는것 같습니다. 문자적인 해석과 비유적인것이 있습니다. 숫자의 해석도 마찬가지 입니다. 창조의 날들과 기록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시대에 없었고 보지못했다고 해서 믿지않는다는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며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여.증의 조직에서 촛점을 여.증에 두고 해석한다는것에 있습니다. 예를들면 1914년 이라든지 큰무리가 땅에서 (자기들만)살고 인류 대다수는 아마겟돈때 죽는다든지 하면서 여.증만 옳다고 하는 편견과 아집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렇군요, 그런데,,,뭐가 상징적인지 비유적인지..어떻게 구분할까요?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런 논쟁이야말로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 끝 없는 논쟁을 할 게 아니라..
성서의 정신..아가페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게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일 것 같습니다.
..그깟 성서 한 두구절 해석안하면 어떻습니까. 남을 돕고 사랑하는 게 성서를 따르는 진정 아름다운 삶이지요.
성서 자체가 신화도 아니고 거짓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베스트 셀러가 되겠습니까? 성서는 절대적으로 믿으시고 해석에 있어서 올바른 해석과 진정한 마음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신화가 아니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그리스로마신화는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습니까. 성서를 절대적으로 믿는것과 특정(종교의)해석을 절대적으로 믿는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종교적 분쟁과 문제는 해석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며 나의 해석이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들 최대의 걸작이죠..거기에 전세계인들이 수천년간 낚였으니..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너무도 많은 내용이라,..여기 자료실에 있는 대부분의 내용들이구요, 제가 쓴 칼럼의 [혼란의 시작]이라는 글에도 어느 정도 나옵니다. 참고해 보시길...
길가메쉬 서사시는 세계 최초의 서사시로 길가메쉬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죽음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길가메쉬 서사시는 그리스의 일리야드나 오딧세이에도 영향을 줍니다. 원래는 수메르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바빌론 시대에 완성됩니다. 여기서 홍수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데 흥미롭게도 그리스 신화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특이한 점은 성경과 매우 유사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바벨탑 이야기, 구원자, 부활 등과 비슷한 신화를 갖고 있습니다.
모세가 쓴 창세기가 B.C. 1440년에 쓰여졌으므로 창세기 보다 1000년 전에 쓰여진 수메르 신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이 수메르 신화를 따라한 것 아니야는 오해를 사게 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1.29 11:34
감사합니다. 수메르신화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알려주신 책들 감사합니다..
저는 하느님에 관한 맹신이 있었고 증인으로 개종했어요. 지금은 하느님에 대한 존재 자체에 의문이 듭니다. 저의 무지를 깨달았죠. 진리를 알려고 하는게 교만인거 같습니다
많은생각이 드네요. 감사할따름입니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