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부원군 최원직공 묘와 묘비 문화재 지정 신청(안)
東 原 府 院 君 崔 元 直 公 墓 墓 碑 文 化 財 指 定 申 請 (案)
1.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
2. 소 유 자 : 동주(철원)최씨 대종회 종중
3. 시 대 : 고려시대 말기
4. 묘 조성년월일 : 고려 충혜왕 1년 신미(서기 1331년)
5. 묘비 임석년월일 : 고려 우왕 12년 12월(홍무 19년(서기 1386년)
6. 묘주인공과 묘소명 : 동원부원군 최원직공 묘소
고려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유명한 교훈적 명언을 남긴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汝當 見金如石)라는 유훈을 한
동원부원군 최원직공의 묘소이다.
7. 묘 비 명 : 동원부원군 최원직공 묘비
고려시대 가장 저명하고 훌륭하고 유명하였던 동국영웅 문하시중 최영(崔瑩)
장군이 입석한 선친인 동원부원군 최원직공의 묘비이다.
8. 최원직공의 연혁 : 사적(史蹟)
(1) 고려개국공신이며 삼중대광과 태사를 역임하신 최준옹(崔俊邕)공의 후손으로
본관은 동주(철원)이며, 조상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2) 부친은 최옹(崔雍)공이며, 자는 대화(大和)이고 고종 45년 3월에 문과(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관직에 발탁되어 대승(大丞)에 이르고, 누천하여 전리사의
좌랑과 밀직사의 부지밀직사사와 문한서의 문한학사와 국자감의 경사교수 등을
역임하시고, 치사하시었다. 공은 학식이 해박하여 충열왕이 태손일 때 자치통감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후 문하생이 많이 와서 이들을 양육하여 공을 공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대학자이었다. 충렬왕 18년 임진(서기 1292년) 돌아가시었다.
(3) 최원직공은 국자감의 경사교수를 역임하신 최옹공의 둘째 아들로 충렬왕 1년
을해(서기 1275년)에 출생하였다.
(4) 형님인 최원중(崔元中)공은 문과(진사)시험에 충렬왕 33년 11월(서기 1307년)
에 합격하였고, 호부시랑 이부상서까지 역임하고 치사하였다.
(5) 공께서는 문과(진사)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여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홍주의
지흥주사밑에 판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에 아들 영을 출생하였다고 사료된다.
(6) 공은 누천하여 사헌부의 규정과 상서형부의 정시랑을 역임하시고 치사하시었다.
(7) 공은 충혜왕 1년 신미(서기 1331년)에 춘추 57세에 돌아가시었다.
(8) 묘지는 고양현 대자산에 자좌로 모시었다.
(9) 공은 청백리로서 유명하였으며 임종할 때16세된 어린 외아들 영을 불러다 놓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하는 유훈을 하고 돌아가시었다.
아들 영은 아버지의 유훈을 일생동안 마음에 새기고 항상 실천하며 지켰다. 장군일
때도 재상일때도 죽을때까지 아버지의 유훈을 생각하며 지켜 청백리로도 유명하였다.
그리고 이 유훈이 68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교훈이
되고 명언이 되고 있다.
(10) 아들 최영장군이 국가에 대하여 큰 공적이 많았고 종2품 이상되는 재상이라
그의 부모(최원직공 부부)에게 우왕이 7년(서기 1381년)에 종 이품 이상의 관원의
죽은 부모 조부모에게 벼슬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있어 최원직공 부부에게 벼슬을
우왕이 벼슬을 증하였다. 또는 추증하였다고도 한다.
(11) 후손들은 동원부원군 할아버지라 부른다.
9. 묘비 입석 경위
(1) 최영장군은 국가에 충성만 하고 살다가 70세가 넘으니 늙어서 그때서야 부모에 대한
효를 생각하였다. 부모의 산소에 묘비를 세울 생각과 계획을 하였다고 사료된다.
(2) 당시의 최영장군의 직책은 문산계 품계로는 벽상삼한삼중대광이며,문관직으로는
영삼사사이며,군직은 군계급 최고인 상호군이며, 군직책은 판중방사이다. 또 작위로는
철원부원군 정1품이었다. 국가의 재정과 군권을 한손에 쥐고 있던 막강한 권력을 소지
하고 있었다.
(3) 최영장군은 마음만 먹으면 묘비를 그 당시로는 가장 거대하고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예술품으로 만들어 세울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최영장군은 아버지의 유훈을 한평생
생각하며 새기며 지키고 살았기 때문에 청렴결백하고 검소하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살았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 현존하고 있는 묘비와 같이 비의
크기는 왜소하고 돌의 재료는 고급이 아닌 것을 썼고 당시의 지위에 비하여 격에 맞지
않게 어떻게 생각하면 초라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묘비를 세웠다.(우왕 12년 12월)
(4) 그러나 630여년이나 보존되어 있는 최영장군이 세운 이 묘비가 왜소하고 돌의 재료가
고급이 아니라고 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과소평가 할수 없다고 본다. 더 높게 평가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10. 묘소의 역사적 가치
(1) 묘소의 주인공인 동원부원군 최원직공은 생존시 관직은 사헌부 규정과 형부정시랑을
역임하였지만 사후에 우왕께서 7년(1381년)에 문산계 품계와 관직과 작위를 증하시었다.
문산계 품계로는 최고 정1품인 벽산삼한삼중대광과 관직으로는 중앙관청 최고 1번 서열
부서인 문하부의 판사와 군직으로는 군 최고 계급인 상호군과 작위로는 최고 정1품인
동원부원군을 봉하시어 최고 높은 분이 되셨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최고의 높은 벼슬을
한 분의 묘소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아주 크다고 평가된다.
(2) 묘소의 주인공인 동원부원군 최원직공은 돌아가실 때 외아들 영(瑩)을 불러다 놓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 하는 말씀을 유훈으로 하셨는데 이
말씀이 680여년이 지난 현대에도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알고
있으며, 아주 유명한 말씀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개인이 말한 명언이 이렇게 오래
도록 길이 남아 많은 사람의 흉금을 울리게 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훌륭하고 유명한
교훈적 명언을 남긴 분의 묘소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고 평가된다.
(3) 국가문화재 지정기준(법 시행령 제11조 제1항)에 보면 이 묘소는 문화재의 종류 중에서
사적종류에 해당된다고 보며 사적 기준 중에서 제1항의 라목과 제2항의 마목에 해당된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므로 국가나 도문화재로 지정됨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1. 묘비의 역사적 가치
(1) 동원부원군 최원직공의 묘비는 당시 최고의 공신이며 재상이며 전국민이 다 우러러
칭송하는 훌륭하고 저명한 인물인 최영장군이 부모를 위하여 손수 비문을 짓고 손수
비문을 쓰고 사자(아들)로서 비를 세우고 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2) 묘소의 주인공인 동원부원군 최원직공은 돌아가실 때 외아들 영(瑩)에게 유훈하신 말씀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汝當 見金如石) 라는 말씀이 680여년이 지난 현대
에도 한국사람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말씀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상 개인이 말한 명언이 이렇게 오래도록 길이 남아 많은 사람의 흉금을 울리게 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훌륭하고 유명한 교훈적 명언을 남긴 분의 묘비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3) 국가 문화재 지정기준(법 시행령 제11조 제1항)에 보면 이 묘비는 문화재의 종류중에서
보물종류에 해당된다고 보며 보물지정기준 중에서 제1항 건축물에 해당되며 건축물 중
나목에 석조 건축물에 해당되며 석조 건축물 중에 비갈(碑碣)에 해당 된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므로 국가 보물(寶物)로 지정됨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2. 동원부원군 최원직공 묘비문 내용
원문
앞면
증 순충 아양 염검 보세 익찬공신 벽산삼한삼중대광
贈 純忠 雅亮 廉儉 輔世 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판문하부사 상호군 겸 판예문춘추관사 동원부원군 최공묘
判門下府事 上護軍 兼 判藝文春秋館事 東原府院君 崔公墓
뒷면
홍무 십구년십이월일 사자진충분의 선위 좌명 안사공신
洪武 十九年十二月日 祠子盡忠奮義 宣威 佐命 安社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 영삼사사 상호군 겸 판중방사 철원부원군 영 입석
壁上三韓三重大匡 領三司事 上護軍 兼 判重房事 鐵原府院君 瑩 入石

첫댓글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고양시민의 한사람으로써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있다면 뭐든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