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재임기간 |
내용 |
허 엽 |
1553. 8-1563. 9 |
삼척부사 재임 때 자신의 호를 따서 강릉초당(草堂)두부를 처음 개발했다. 나중에 경상관찰사 역임. |
허엽과 김효원은 사돈지간
허균은 허엽의 아들
허균은 김효원의 사위. |
김효원 |
1575. 12-1578. 4 |
우의정과 이조판서 역임. |
허 균 |
1607. 3-5 |
홍길동전 저술, 2014. 7. 4 방한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우호의 상징으로 허균의 시구를 인용. |
이세필 |
1703. 12-1705.가을 |
용산서원 생사당(生祠堂)의 주인공 |
이성조 |
1710. 11-1712. 10 |
죽서루의 ‘關東第一樓’와 ‘竹西樓’ 편액과 삼척향교 ‘大成殿’ 편액의 명필 주인공. 또 죽서루 시판(詩板)에는 영월군수 이준민이 명종 14년(1559)에 임억령의 시를 차운하여 쓴 시와 이준민의 증손이면서 강릉 부사였던 이지무가 효종 8년(1657)에 역시 같은 운자(韻字)로 쓴 시도 있고, 이준민의 5세손이자 이지무의 손주로 삼척 부사를 지낸 이성조가 숙종 37년(1711)에 역시 같은 운자를 사용하여 쓴 시가 새겨져 있다. 또 이어서 이준민의 8세손이며 이성조의 증손으로 삼척포진 영장 이윤국이 영조 47년(1771)에 죽서루에서 낡아 없어진 조상님들의 시판(詩板)을 새로 새겨 걸 때 쓴 글과 이준민의 12세손이자 이윤국의 고손(高孫)인 영장 이석호가 고종 31년(1894)에 조상님들의 시판을 중수하면서 쓴 글이 이어서 새겨져 있다. |
정 호 |
1715. 2-1715. 7 |
송강 정철의 현손으로 형조·예조·병조 참판을 지낸 분이 삼척부사로 온 것은 파격적인 인사. 삼척부사직을 마치고 나중에 여러 요직을 거쳐서 영의정에 까지 오른다. 향교 교생들이 보수를 횡령하고도 조직적으로 저항하여 폐해가 심했는데 이를 제압했다. 삼척부사로 부임하기 16년 전 1699년 순무어사로 삼척을 다녀갔고 불망비가 있다. |
이상성 |
1720. 2-1722.6 |
아들 광원(평릉찰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삼척서 근무함 |
이병연 |
1732. 윤5-1736. 4 |
화가 겸재 정선과 친구로 둘 다 용추폭포에 이름 새김 |
이보욱 |
1737. 10-1738. 9 |
암행어사와 부사로 삼척과 인연. ‘학소대(鶴巢臺)’ 제명(題名), 무릉반석에 이름 새겼음. |
정하언 |
1750. 10-1752. 11 |
무릉반석의 12글자(武陵仙源中臺泉石頭陀洞天)를 새긴 명필. 홍화문(弘化門) 현판도 썼다. |
이철상 |
1777. 9-1778. 8 |
1778년 신임 도백을 전부터 싫어해서 사직했는데 당시 도백은 이형규(李亨逵)로 확인 됨. |
홍명한 |
1758. 11-1759. 9 |
삼척부사를 하다가 10년 뒤 강원관찰사 역임(1769. 1- 1770. 1)할 때 집안 무신(武臣)인 영장 홍우보(1768. 6-1769. 12)와 모의하여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수십 근의 삼(蔘)을 캐왔다가 파직됨. |
윤 속 |
1792. 4-1796. 7 |
독도를 ‘羽淸島(우청도)’로 기록함. |
조 기 |
1798. 12-1799. 8 |
유일한 무관출신 삼척부사. 조기 부사의 손주 조존만(趙存萬, 1816. 2-12)이 삼척포진영장으로 근무했음. |
홍경두 |
1806. 7-1809. 정월 |
1808년 겨울 산에 갔다가 읍리(邑吏) 김홍관을 심하게 때려서 1809년 암행어사의 계로 파직됨 |
김용순 |
1845. 2-1846. 10 |
도백과 서로 싫어하는 사이라서 사직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