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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니어촌계 (드르니 자율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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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이야기 스크랩 판목운하 나루터
위원장 추천 0 조회 104 12.09.17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판목운하 나루터

 

  안면곶이 안면도가 된 연유는 이러하다.

  고려시대 삼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조곡을 개경이나 한성으로 운반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조운선이 이용되었고 조운로의 특색은 해안에 가까운 도서 사이를 이어 나가는 항해를 하며 육지에 근접한 항로를 선택한 점이었다. 조운선이 항해하기 가장 힘든 곳 중 하나로 태안의 관장항 이었다. 이곳은 해안 전역에 크고 작은 도서가 산재하였고 해안의 기복이 심하고 해저구릉과 해저산맥이 발달한 지역도 있으며 지형의 변화가 심하고 외양에 접한 협수로로 조류가 빠르고 휘돌아쳐 항해가 더욱 어려웠다. 이에 천수만과 가로림만 사이를 관통하는 수로인 굴포운하를 개통하기위해 고려 인종12, 1134년에 시작하였으나 암반으로 인하여 작업이 순조롭지 못한 채 조선 현종10, 1669년까지 535년간의 길고긴 개착사업을 중단하고 송시열의 건의로 천수만과 가로림만에 남창, 북창, 상창, 중창, 하창을 건축하여 평저선인 조운선으로 세곡을 운반하여 남창에 하역하고 사람과 말을 동원하여 가로림만의 북창지인 조운선으로 운송하기에 이르렀다.

  조운선의 빈번한 파손은 국가 재정과 왕실, 지배층들에게 큰 손실을 입혔을 것이다. 난행량을 안흥으로 개명하고 긴 세월동안 운하개착사업을 시도하였고 안파사를 짓고 파도가 잠잠하기를 용왕님께 기원했다는 흔적이 남아있고 안면도 신야리에는 세곡선이 파선되어 쌀이 썩었다는 ‘쌀썩은녀’라는 지명도 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조선 인조에 이르러 안면곶의 연육이 가장 좁은(당시 폭 200m) 목 부분을 굴착하여 운하가 되었고 안면곶은 안면도가 되었다.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토정 이지암(?~1578)이 안면곶을 방문하여 이 지점이 반드시 끊어져 섬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는 <여지도서>(영조 33~41년, 1757~1765) 태안군 고적조의 기록과 이지암 생존 시(1578년) <숙종실록>의 안면곶 기록으로 미루어 1578년부터 1677년 사이에 개착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인조 14년부터 16년까지 충청감사 김육이 영의정 재임기간에 태안의 향리 방경영이 충청감영에 건의하여 착항공사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인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중앙정부차원의 공사는 아니었고 지방차원의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면곶이 안면도가 됨에 따라 섬을 오고 가는 나루터와 나룻배가 생기고 그 주변으로 주막, 술집이 자연스레 형성되어 활성화되었으며 1970년 연육교가 가설되었을 때도 한동안 운영되다가 점차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연육교 옆쪽으로 구 나루터가 있었고 후에 신 나루터로 옮겨진 곳이 지금의 드르니항과 백사장항을 오가던 나루터로 남면에 버스가 생기면서 버스시간에 맞추어 운행하였고 화물운반이나 차량을 실어 나르는 선박도 있었다.

 

 가을, 햇살이 맑아 하늘이 더없이 푸르렀다.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은 닿기만 하면 무엇이든 푸른 물을 들일 것만 같았다. 학교대항 운동회에 릴레이 선수로 뽑힌 열세 살 까까머리 소년은 그런 하늘을 보며 운동장을 뛰었고 자신의 꿈도 푸르게 물들이고 싶었다.

  소년은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나루터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나룻배에 올랐다. 구리 빛 피부의 뱃사공아저씨는 햇살아래 물살을 가로저으며 노를 저을 때마다 굵은 팔뚝에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소년은 아저씨의 팔뚝을 보며 달리기를 할 때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굵은 다리의 힘줄을 떠올렸다.

  처음 타보는 배는 짧은 거리를 건너는데도 너울거리는 물결에 어질 거려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르게 머리가 뱅그르르 돌았다. 건너편 땅에 다다라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작은 이상한 차에 콩나물시루처럼 꽉꽉 눌러 탔고 소년의 일행은 겨우겨우 운동회가 열리는 창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운동장은 만국기가 펄럭였고 하늘 높이에는 커다란 둥근 공이 둥실둥실 떠있어 푸르른 하늘을 더 예쁘게 채웠다. 어떤 사람들은 소풍날처럼 돗자리를 펴놓고 삶은 계란에 사이다를 먹기도 했고 아이들의 응원소리와 사람들의 밝은 웃음소리는 멀리로 멀리로 흘러갔다.

어릴 적 도회지에서 살다가 어머니를 따라 태안으로 오게 된 소년은 아직도 비릿한 바다내음이 낯설고 때론 무섭기도 하여 도무지 맘을 붙이지 못하다가 집과 학교를 오가며 산이며 들, 바다를 뛰어다닌 것이 학교대항 릴레이 대표선수까지 된 건 아닐까 하여 슬며시 웃음 짓기도 했다.

  운동회의 꽃인 달리기는 맨 마지막에 진행되었고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삽시간에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응원소리로 운동장은 가득 채워졌다. 소년은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첫 번째 주자부터 엎치락뒤치락 종잡을 수 없이 막상막하로 달리다가 소년에게 바톤이 넘겨졌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일등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 밀려왔지만 이등을 한 것도 기쁘고 벅찼다. 번쩍거리는 트로피를 받았고 선생님이 사주시는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소년은 배를 타고 섬에 갔던 것처럼 다시 그 배를 타고 뭍으로 돌아왔다.

  그 오랜 기억이 판목 나루터로 이끌었다. 지금은 그 어느 곳에도 남지 않은 흔적들을 찾기 위해, 혹시 어딘가에 배를 묶어 두었던 돌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빛바래고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는다.

  ‘나룻배를 탔던 곳이 이곳이었을까? 아님 드르니항 저 안쪽이었을까?’

 

  시원한 음료수가 그리워 들어간 슈퍼에서 만난 주인아저씨는 아예 자리를 내주시며 옛 시절을 떠올리며 말씀을 해주신다.

  “여기가 옛날부터 태풍도 심했고 물발이 엄청 셌어. 오죽허면 오리다리가 부러진다고들 혔지. 그래서 여기를 자른 거고 판목이라고 하는거여.”

  “그랴서 나룻배가 다닌거지. 어렸을 적엔 많이 봤어. 맨 처음 나룻배는 저그 다리 너머에 있었어. 배를 타러 왔다가 못타거나 버스를 놓치면 하룻밤 묵어가는 밥집, 술집 두 많었어. 그 때 뱃사공들도 다 돌아가시고 후손들은 외지에 나가 사니께 아무도 없지.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저 다리 건너 파란 스레트집이 옛날 뱃사공이 살던 집이여. 장씨라구. 그러다가 드르니항 안쪽으로 나루터가 옮겨갔는디 말하자면 신 나루터였지. 그쪽은 노사공이 아주 유명했어. 서산군 내에서 당할 자가 없다구 헐 정도로 팔 힘이 셌지.”

  “그때 조그맣고 이상한 차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세요?”

  “있었지. 마이크로버스라고. 말하자면 미니버스 같은 건데 안면도에서만 다녔었지. 지금 말하면 한 11인승 승합차지. 그냥 막 태웠어. 사람이 다 타면 그게 정원이었어.”

  “저 아래로 건너가면 뱃사공 살던 집까지 가까이 가서 볼 수는 있을 거야. 지금은 아무도 안살어서 들어갈 수는 없지. 신 나루터에는 배를 타러 갈 때 갯벌위에 놓인 돌 징검다리를 밟고 갔었는디... 마침 물이 나갈 때니께 혹시 남아 있으면 볼 수 있을지두.”

  “난, 여기서 나고 자라고 늙어가고 있는디... 오랜만에 옛날 얘기 허니, 참 새삼스럽네 그려...”

 

  바다 끝에 맞닿아 있는 뱃사공 장씨 아저씨의 집을 돌아보고 드르니항 안쪽으로 들어가 이번에도 슈퍼에 들른다. 마을 부녀회장인 슈퍼 주인아주머니와 이장님은 구수한 입담으로 나루터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신다.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에 인천에서 시집왔지요. 그때는 바다도 너무 좋았고 모든 게 신선했어요.”

  “이 자리도 옛날에는 색시집 이었대요. 요 앞이 다 나루터였지요. 물살도 셌고 깊었는데 최근에는 자꾸만 퇴적물이 쌓여서 배들이 어려움이 많어요.”

  “옛날하고 잡히는 고기도 많이 달라지고... 저기 스레트건물이 조선소였어요. 목선을 만들었는데 유리섬유를 사용하면서 마을사람들의 건강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어요. 그 때 밥집을 하면서 직원들 밥을 해줬는데 얼마나 바쁜지 돈 받을 시간도 없어서 직원들이 돈을 앞치마 주머니에 꾹 눌러 넣어주었어요. 나중에 돈이 임산부 배만큼 불룩하게 올라오면 구겨진 돈을 하나하나 피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 때를 생각하면 즐겁다가도 또 아픔이 파도를 치는 때도 있었으니 참 인생이 왔다갔다 하네요 호호.”

  “저 집이 버스정류장 자리였고 저기 교회자리가 당산자리였어. 연육교가 생기고서도 얼마간은 나루터가 있었지. 그러다 점점 사람이 없어지니께 없어진 거여. 그 때 유명한 노사공도 저 위쪽 장사공도 다 돌아가셨지. 지금 생각허면 참 귀한건디 터라도 좀 보존을 혔으면 좋았을것을... 나이 먹은 우리 덜 다 죽으면 이젠 기억허는 사람 하나 없이 완전히 잊혀지는 거지. 군청이나 어딘가는 자료는 남아 있을거여.” 아쉬움을 담은 이장님의 말씀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옛 이야기 속에 잠시 머무니 어릴 적 소년의 기억은 저녁 어스름을 비추기 위해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 불처럼 조금씩 밝아지는 듯하다.

 

  점점... 잊혀져가는 흔적이 그리워지는 건, 빛바랜 사진속의 기억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나이를 먹는 탓일까!

판목나루터에서 소년이 열세살적에 보았던 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다.

 

* 판목에 대한 자료는 <태안의 역사와 민속문화>, <남면읍지>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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