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7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흑백티브이"에 다리가 달려 있었고, 미닫이 문도 달려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엔 이게 찬장처럼 쓰였던 기억이 있네요
우리는 **시절 "빌리진"과 "영일레븐"의 열풍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동네마다 모래를 실고 다니던 "시발차"나 계란을 실고 다니던 "삼륜차"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부엌에 나가 "곤로"에 유엔성냥으로 불을 붙여 밥을 하시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동네로 뛰어나가 "스카이 콩콩"을 타고 놀았습니다.
우리는 해가 져 어두울 때 까지 형,누나들과 "얼음땡","다방구",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잣치기", "고무줄", "나이먹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동사무소에서 박정희씨의 사진을 봤고, 최규하씨와 전두환씨의 사진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나풀거리면서 떨어지던 "삐라"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북한군 때려잡는 "똘이장군"이 우상 이었습니다.
우리는 밤 12시 넘어서 바깥에 돌아다녀도 된다고 좋아하던 어른들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우리는 "오후반"이 있던날은 늦잠을 잘 수 있다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하교길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가던길을 같이 멈춰 서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웅변학원", "주산학원"을 다녔습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백골단"의 무자비한 폭력과 난무하는 "최루탄"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랩으로 눈을 감싸고 마스크를 쓴채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야구단"을 가입하며, 백인천과 이만수, 김봉연에 열광했었습니다.
우리는 "아시안게임"을 통해서 잠실이라는 동네를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임춘애"에게 열광하던 찌라시 기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쇼 비디오 자키"에서 나오는 뮤직비디오가 참 재미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교시절 군인들처럼 "교련복"을 입고 군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올림픽"을 보며 "손에 손잡고"를 따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문화교실"을 통해서 단체로 극장에 갔습니다.
우리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한국에 와서 "싸랑해요 밀키스"라고 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는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한국에 와서 "반했어요 크리미~"라고 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 했습니다.
우리는 "롤러장"에서 사람이 날라다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런던보이즈", "모던토킹 cc캐치"라는 예술가들을 통해서 유로댄스를 접했습니다.
우리는 "뉴키즈 언더블록"이 내한했을때 지금 우리의 와이프나 누님뻘들이 콘서트 장에 몰려서 사고가
나는 모습도 봤습니다.
우리는 2000원 짜리 음료권을 사서 "디스코텍"도 가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다이제스트"나 "썬데이 서울"을 몰래 보다가 들키곤 했습니다.
우리는 "승마바지"를 입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우리는 "이랜드, 브렌따노, 헌트, 쉐인, 제누디쎄"가 국가 기업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성문기본영어, 수학의 정석, 멘투멘"을 마스터 하기 위해 단과학원을 다녔습니다.
우리는 "드레곤 볼"을 읽기 위해 청계천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매점에서 "회수권(승차권)"을 다발로 구입하고, 그걸 아끼려고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무자위로 전화를 걸어 여자가 받으면 데이트 신청을 하는 "폰팅"이 재미 있었습니다.
우리는 500원씩 넣고 노래 한곡을 부를 수 있는 "노래방"에서 동전을 교환해 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테이블에서 술 마시며 그자리에서 춤을 춘다는 "락카페"가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무척 놀라웠고, 이건 뭐니? 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이 죽었다 깨어나도 "AIWA"같은 카세트는 못 만들 주 알았습니다.
우리는 국민청바지 "게스, 케빈클라인,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등을 하나씩 구입해서 친구들끼리 돌려 입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엄정화의 "눈동자"가 수술한 눈인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홍정욱의 7막 7장"을 읽고, 미국으로 날아가는 많은 친구들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대학생 전방입소교육으로 군사훈련을 받았고, 입소하는 친구들을 배웅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성수대교, 서해훼리호, 구포열차, 삼품백화점"사고들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우리는 밤 12시가 넘어서 새벽까지 술집에서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다는게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공중전화 박스옆에 가서 "씨티폰"을 꺼내 통화하며 뿌듯해 했습니다.
우리는 IT열풍에 힘입어 취업을 위해 학사학위를 버리고, 6개월 과정의 컴퓨터 학원에 몰려 들었습니다.
우리는 제도의 변화란 변화는 다 겪으면서 그렇게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닥쳐왔던 불리한 사회적여건을 원망했지만...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느날 문득 뒤 돌아보니 벌써 40대가 되어 있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군시절 땀흘리며, 줄빳다와 빵빠레의 모진 고초와 특공모기가 입에 들어가는 것을 참아내면서
맛없는 짬밥을 먹어가며 군생활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