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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곡애 정인보
고곡애(古曲哀)
□ 1
저[笛]피리 생황(笙簧) 소리 길이 늘어 높으려니
이저것 어우러져 종경(鍾磬) 함께 북[鼓]이 울어
되돌아 잦은 `고비'에 남긴 듯이 끝쳐라
□ 2
들고만 있는 저 때 잊은 듯한 북채로다
쟁(箏) 안고 더듬는 손 줄 항여나 울릴세라
이윽고 박(拍) 소리 나니 꿈 잃은 듯 하여라
□ 3
높낮이 늘그만이 곤소린가 결쉰물가
어룡(魚龍)은 잠이깊고 달은 퍼저 만경(萬頃)이라
일게란 무엇없으니 뫼들조차 낮아라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구룡연 정인보
구룡연(九龍淵)
□ 1
개울아 흘러 저리 나는 굴로 넘으련다
반공의 쇠사다리 근덩 휘청 그도 경이
비바람 몰리는 소리 벌써 요란하고너
□ 2
절벽을 만난 물결 듸글듸글 구는고야
굴 데도 바이없어 공중으로 몇 백척고
비 뿜어 안개가 되니 골 안 자욱 하더라
□ 3
벽이니 바닥이니 틈도 없는 한돌이니
풀폭의 솔뿌린들 부터 어이 자라나리
저 밑이 확되기 전은 솟쳐 어떠 했을고
□ 4
이 위에 여덟 못이 칭칭으로 고였다네
세찬 힘 기르랴고 쉬고쉬고 쉬셨것다
구룡연 장타만 마라 쌓인 공이 어떠니
□ 5
어느제 룡(龍)아드님 못 속 깊이 계셨던고
훼엉청 달 밝은 밤 소리 그윽 들린다네
두어라 나리는 저게 룡아니고 무에뇨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국화사삼첩 정인보
국화사삼첩(菊花詞三疊)
□ 1
울섶 밑 두어 송이 서리빨에 더 새롭다
인왕산(仁王山) 솟은 수색(秀色) 유정(有情)한 듯 와서 비춰
인간(人間)에 알 이 없음을 한해 무슨 하리오
□ 2
되 친다 안 변(變)하니 도움일네 서리 도로
황금(黃金)을 간 듯한 빛 다사론 때 보올껏까
인사(人事)도 이러할랏다 뜻 있는이 아소서
□ 3
자 넘는 파리한 몸 적다려건 적다 하소
된내기* 겪고 나니 이 키 아니 높으이까
찬 기운 어리신 얼굴 곱다 감히 하리오
* 된내기: 된서리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근화사삼첩 정인보
근화사삼첩(槿花詞三疊)
□ 1
신시(神市)로 나린 우로(雨露) 꽃 점진*들 없을소냐
왕검성(王儉城) 첫 봄 빛에 피라시니 무궁화(無窮花)를
지금도 너 곧 대(對)하면 그제런듯 하여라
□ 2
저 뫼는 높고 높고 저 가람은 예고 예고
피고 또 피오시니 번으로써 혜오리까
천만년(千萬年) 무궁(無窮)한 빛을 길이 뵐까 하노라
□ 3
담우숙 유한(幽閒)코나 모여 핀 양 의초롭다
태평연월(太平烟月)이 둥두렷이 돋아올 제
옛향기(香氣) 일시(一時)에 도니 강산화려(江山華麗)하여라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마의태자릉 정인보
마의태자릉(麻衣太子陵)
□ 1
임해전(臨海殿) 등지시고 알천수(閼川水) 건느실제
버리고 간다 마소 못 버리어 가노매라
이제껏 산소 어름을 릉(陵)아니라 하더라
□ 2
불구내(弗矩內) 오랜 왕업(王業) 무열문무(武烈文武) 넓히서를
흙덩이 옮겨갈 손 의(義)야 어이 놓을것가
안은 채 눈 감으시니 거룩하도소이다
□ 3
고교(古敎)의 도장(道場)이던 봉래풍악(蓬萊楓嶽) 이 산중(山中)에
마의(麻衣)초식(草食)으로 일생(一生)을 마치시니
성골(聖骨)의 빛난 보람을 막어 보이시니라
□ 4
봉(峰)이라 비로자나(毘盧遮那) 어떤 마마 마의태자(麻衣太子)
무치사 여기시니 가치 높아 천고(千古)로다
심메꾼 영구드림이 대제(大祭)인줄 압내다
□ 5
태자성(太子城) 암자(菴子)터가 두 곳있다 전하더라
한암자(菴子) 계셨거냐 또 한 암자 뉘 있은고
동궁(東宮)을 뫼셨던이들 조차 몇 분 오니라
□ 6
태자(太子)는 해 달이라 천추만세(千秋萬歲) 두렷다만
저네들 누구누구 의(義)론 자취 적막(寂寞)코나
내 번맘 내 지킴이니 알련 무삼 하리오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마하연암 정인보
마하연암(摩訶衍菴)
□ 1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문무대왕(文武大王) 즉위초(卽位初)에
이 땅에 이 절 짓고 비시던 일 뚜렷하다
그 정성 자취 없고여 산천(山川) 다시 보여라
□ 2
우거진 저 숲 속에 어느 풀이 지공(指空)*초오
뜰 계수(桂樹) 버힌 원님 욕심(慾心)많다 뉘 이르뇨
거짓에 싸여온 분(憤)을 남게* 풀려 함이니
□ 3
나옹(懶翁) 예배석(禮拜石)이 예런 듯이 제로 향(向)해
법기봉(法起峯) 앉은 모양 인간세월(人間歲月) 모르는 듯
백운(白雲)이 뜰 앞에 차니 익재(益齋) 생각 나더라
□ 4
중향봉(衆香峯) 나린 맥(脈)에 첫 명구(名區)가 마하(摩訶)로다
옥룡자(玉龍子) 풍수설(風水說)을 잠깐 제처 두고라도
룡(龍)턱 밑 제일(第一) 구슬은 여기런듯 하여라
□ 5
백운대(白雲臺) 기엄기엄 저 홀론줄 알었으리
숨 허위 내쉬기전(前) 천봉(千峯) 언제 따라온고
쇠줄껏 없었을세면 진연(塵緣)더욱 멀랏다
* 고법사(古法師)의 이름
** 나무에게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만폭동 정인보
만폭동(萬瀑洞)&
□ 1
맑고도 넓은 개울 몇 폭포를 얼러 온고
들어선 아람드리 기우신 양 더예롭다
골바람 지났것마는 숲은 아직 울려라
□ 2
숲 새로 솟는 취와(翠瓦) 장안사(長安寺)가 저기로다
절동구(洞口) 접어들어 장터같다 허물마오
계산(溪山)엔 물 아니드니 잠깐 속(俗)돼 어떠리
□ 3
해 뉘웃 점그는데 우수하니 비뿌린다
이십리(二十里) 마하연(摩訶衍)을 어이 갈고 노배기*로
명산(名山)의 김서림이니 옷 젖은들 어떠리
□ 4
둘 붙인 남우다리 물소리에 날리을 듯
명연담(鳴淵潭) 뿜는 눈(雪)발 오든 비는 어대간고
분명(分明)히 막힌 앞길이 어느결에 열려라
□ 5
한 구비 돌아드니 향로봉(香爐峯)이 푸르렀다
청학(靑鶴)은 어디가고 대(臺)만 홀로 높았는가
암벽(巖壁)이 좌우(左右)로 벌려 나래 편 듯 하여라
□ 6
돌인가 옥(玉)이런가 흰들저리 훤할손가
너례기* 펼친 채로 만곡수(萬斛水)가 내리닫아
곳곳이 나는 눈발이 높자낮자 하여라
□ 7
사벽(四壁)을 덮은 수목(樹木) 쌓이다 못 덩이덩이
고울사 일홍징담(一泓澄潭) 초록색(草綠色)을 뉘들인고
신나무 처진가지가 반(半)쯤 물에 잠겨라
□ 8
숲 새로 볕이 새니 금광(金光)이 일렁인다
일렁여 나가다가 되오르긴 무슨 일고
잇다감 어리운 올이 넓어 점점 멀어라
□ 9
이 좋은 이 수석(水石)에 바둑판야 오활하다
명구(名區)에 운사(韻事)로서 두음즉도 아니한가
두어라 고인유적(古人遺蹟)을 흘러 무삼하리오
□ 10
옥녀(玉女)의 늦은 세수 같허염즉 하다마는
비취병(翡翠屛) 굳이 닫고 누를 끄가 *여 숨으신고
앞길야 머다할선정 안 머물고 어이리
□ 11
바람은 없다마는 잎새 절로 흔들리고
냇물은 흐르렸만 거울 아니 울즉인다
백룡(白龍)이 허위고 들어 잠깐 들썩하더라
* 노배기: 우장(雨裝) 없이 그대로 맞고 가는 것
** 너례기: 대반석(大盤石)
** 끄가여: 꺼리낀다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매월당석각 정인보
매월당석각(梅月堂石刻)
□ 1
그제도 싫다섯건 이제드면 어떠시리
반(半)내산 삭임 위에 다래덤불 걷지마소
글씬들 창상잔겁(滄桑殘劫)을 보서 무엇하리오
□ 2
오세(五歲)에* 맺히신 한(恨) 그대로로 천추(千秋)로다
무단(無端)히 느꺼우니 뵙는 듯도 한저이고
노릉(魯陵)*은 한(恨)없으서라 울음끼처 두시니
□ 3
산(山) 올라 우셨다니 산 보시면 설더니까
물 당해 우셨다니 물 보시면 설더니까
님 보신 산(山)과 물이야 그대 설다하리까
* 매월당이 5세 때 세종을 뵈었다
** 단종 장릉(莊陵)을 일컫는 말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매화사삼첩 정인보
매화사삼첩(梅花詞三疊)
□ 1
쇠인양 억센 둥걸 암향부동(暗香浮動)* 어인 꽃고
눈바람 분분(紛紛)한데 봄소식을 외오가져
어즈버 지사고심(志士苦心)을 비겨볼까 하노라
□ 2
담담(淡淡)중(中) 나는 낯빛 천상선자(天上仙子) 분명(分明)하다
옥란간(玉欄干) 어드메뇨 인간연(人間緣)이 무겁던가
연(緣)조차 의(義) 생기나니 언다 저허하리오
□ 3
성긴듯 정다웁고 고우신 채 단정(端正)할사
천품(天品)이 높은 전차 우음*에도 절조(節操)로다
마지못 새이는 향내 더욱 그윽 하여라
* 암향부동: 그윽한 향내가 떠돈다
** 우음: 웃음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매화칠장 정인보
매화칠장(梅花七章)
□ 1
내 어디 앉았는가 여기 아니 타곳인다
불연듯 매화 생각 저 꽃이야 옛 내렸다
방 안에 그림자지니 가지 벌써 반겨라
□ 2
눈 펄펄 나는 새벽 분(盆)소식이 어떠한고
어제껏 겨우 희끗 하루 밤에 불었는가
향기야 어느새리만 맡히*는듯 하여라
□ 3
분홍도 엷으실사 그런듯다 도로 희다
다섯 입 반 벌어져 속술 잠깐 보이단말
마초아 달도 다오니 어이 잘가 하노라
□ 4
앞으로 고운자태 등 보이랴 돌아선가
어디는 드문드문 다닥붙어 헤프기도
맨 위의 외오 핀 송이 더욱 엄전하여라
□ 5
옆에선 괴괴터니 멀즉어니 알았오라
잠깨여 두굿찬데 향내 왈딱 몇 번인고
행여나 말으려마소 맘 없어야 오느니
□ 6
자겨오 넘는 남기 철을 먼저 당기는다
산고대* 바로 한참 `문풍지'야 떨고말고
봄소식 눈에 들오니 겨울 몰라 하노라
□ 7
바다가 뭍이 된 날 외오 어이 변치않아
옛향기 가득 품고 이 산골을 찾아든고
꽃 귀염 받으려거니 끼 넘긴들 어떠리
* 냄새가 코로 들어오는 것
** 눈 오는데 산곡간(山谷間)으로부터 대풍(大風)이 불어 섞여되는 것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문호암애사 정인보
문호암애사(文湖巖哀詞)
□ 1
산같이 믿던 님을 바람같이 여의다니
이 말이 어인 말고 생시아냐 꿈이런가
인생을 거품이라자 꺼진 새는 언제니
□ 2
엊그제 같습덴다 고하(古下)하고 같습덴다
잠 잠간 드셨다기 안 깨오고 왔습덴다
그 잠이 존 잠 아닐 줄 생각이나 했겠소
□ 3
나보다 다섯 해 우 점잖기 일찍부터
상해서 처음 보긴 대신여관 우일러니
진영사(陳英士) 마중하던 날 같이 거나 했것다
□ 4
남 보매 겁 있는듯 불덩이를 품으셔라
인경전 모퉁이서 그 글 어이 읽었던고
별고생 다하셨건만 끝내 뻣뻣하시니
□ 5
붓대에 어린 구름 오천년이 뭉울뭉울
날 두고 님 가시니 향하려니 데가 없다
벗이란 어떠한 줄을 님 잃고야 알과라
□ 6
막다른 깊은 골목 날 보려고 아침 저녁
비오는 어느 밤에 옷이 흠뻑 젖었겄다
고깃근 청어마리를 손조 들고 오시니
□ 7
먼소식* 업박잡박* 같이 속을 끓이면서
언제나 헤질 적은 바랄 무엇 들췄더니
그날이 까마득한데 눈을 어찌 감은고
□ 8
넋 잃고 뛰어가니 문 앞 벌써 뵐르구나
안팎에 울음소리 날 보더니 더 터진다
삼십년 알뜰한 정이 눈물될 줄 알리오
* 중일전쟁이 벌어진 뒤 전황(戰況)에 관한 기별이 퍽 궁금하였다
** 사승사부(乍勝乍負)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박연행 정인보
박연행(朴淵行)
□ 1
산허리 드믄 단풍 성거관(聖居關)이 저기로다
그림에 몸이 드니 꿈이란들 안 좋으냐
운전수(運轉手) 차 몰지 마소 내 흥겨워 하노라
□ 2
한 구비 도라들 제 청천풍우(晴天風雨) 급히 들려
반공에 걸린 폭포 눈에 벌써 어리인다
맘 아니 바쁘리마는 곧 보일가 저허라
□ 3
사산(四山)이 물러서니 성낸 물결 장(壯)할시고
백오척(百五尺) 검은 석벽(石壁) 한 낮에도 음삼(陰森)하다
쪽빛 못 깊이 모르니 용(龍)계신가 하노라
□ 4
광풍(狂風)을 부려내고 되불리어 이리저리
어느 덧 수정 발이 덩이덩이 눈이로다
골안에 때 없는 안개 비나리 듯 하여라
□ 5
창(槍)들고 내리닫다 유소한삼(流蘇汗衫) 어인 춤고
뇌성(雷聲)에 섞인 생황(笙簧) 드문드문이 옥경(玉磬)이라
만물초(萬物肖) 어디라드뇨 나는 옌가 하노라
□ 6
정자(亭子)옆 좁은 산길 이즌 칭대 몇 번 돈고
어둑한 홍예 궁게 드나들손 풍엽(風葉)이라
흥망(興亡)이 수* 있다 한들 정도수를 알리까
□ 7
절경(絶景)에 절로 취(醉)코 술집에 거저 앉아
성길사 나무 그림 온 하늘이 물 같고나
어즈버 달 아니신가 야폭(夜瀑) 구경 가리라
□ 8
달이야 제 높건만 폭포 어이 더 급한고
범사정* 올라서니 천상천하(天上天下) 물소리뿐
인간루(人間累) 중(重)하다한들 남을 무엇 있으리
*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한 고시조를 인용한 것
** 박연폭포 앞에 있는 정자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백마강 뱃 속에서 정인보
백마강(白馬江) 뱃 속에서
□ 1
줄로신 사시나무 산그림과 마주 잠겨
흰 모래 푸른 언덕 동서남북 두루 좋다
술 없이 취하는 흥을 못내 겨워 하노라
□ 2
높대야 만질만한 미인(美人)같이 앉은 산들
결 없는 넓은 강(江)이 바라수록 호묘(浩渺)하다
공중(空中)에 도는 구름도 나즉한 듯 하여라
□ 3
물 위에 퍼진 태양(太陽) 뛰노느니 금 빛인데
게으른 노(櫓) 소리에 양안청산(兩岸靑山) 옮겨간다
대재각(大哉閣) 저기라하니 수북정(水北亭)은 어댄고
□ 4
낙화암(落花巖) 저 석벽(石壁)아 너만 어찌 남았는다
강풍(江風)에 날린 홍상(紅裳) 백제번화(百濟繁華) 마지막을
자취나 지켜 보려고 무딘 듯이 있소라
□ 5
계실 제 꽃이로대 떨어지니 빙옥(氷玉)이라
지나며 숙는 고개 어제런듯 느꺼워라
이 넋엔 낙시 없으니 용(龍)을 영(靈)타 하리오
□ 6
흐르는 인생백년(人生百年) 저 물길과 어떠하니
머물 듯 붙드랴니 그일 아니 우스운가
내던져 되오는 목숨 알 리 없어 하노라
□ 7
유리(琉璃)가 흐르다니 물결치는 거울 본다
못 믿건 예 와 보오 백마강(白馬江)에 배를 타오
노 저어 유리(琉璃)로 드니 경기 어떠 하닛고
□ 8
남 순인 겹스란의 어른대는 고운 결을
십리청강(十里淸江)에 그 뉘라서 옮겨온고
산경(山影)도 흥(興)겨운듯이 우줄우줄 하더라
□ 9
하늘빛 산그림자 사자수로 갓불났다
게다가 배를 실어 헤치면서 가단말가
벽유리(碧琉璃) 예런듯하니 지났던지 몰라라
□ 10
긴 강에 배를 저어 흘러흘러 나려갈 제
산들야 맘 없을손 사람이니 정없으랴
구름이 저기서오니 내 시름가 하노라
□ 11
초하구(草河口)* 궂은 비에 깊이 매진 영릉*지통(寧陵至痛)
저 비답(批答)* 하오실 때 상하(上下)아니 울었으리
그제가 성세(盛世)로 뵈니 산 줄 몰라 하노라
* 초하구: 효종조(孝宗朝) 시조의 일부
** 영릉: 효종의 능호(陵號)
** 비답: 신하의 상주문(上奏文)의 밑에 적는 임금의 대답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비로봉 정인보
비로봉(毘盧峯)&
□ 1
단발령(斷髮嶺) 넘어들 제 하늘 닿던 높은 봉들
발아래 떨어트려 웃고 굽어 보단말이
웃가슴 늦추기전에 서늘 가득하고녀
□ 2
목 넘어 올라오자 급히 도는 천봉만봉(千峰萬峰)
잉어 등 지르레미 펄펄할사 중향성(衆香城)을
산(山)굼틀 모두 산 것을 이제 본줄 아노라
□ 3
하늘 참 넓은지고 상하사방(上下四方) 훤츨하다
일월출(日月出) 충충 걸어 오다 마저 숙는고야
반공(半空)에 긴 바람만이 돌아 휘휘하더라
□ 4
저기 저 열*푸른 것 구름아냐 동해(東海)로다
솟은 듯 삐죽삐죽 있다 없다 그 무엇고
어렴풋 열린 너머에 괴불 예뻐하노라
□ 5
안산은 희끗희끗 검푸른 건 밖산이라
발 밑에 바윗구비 팔담구룡(八潭九龍) 제 있다네
올로듯 예제 드디어 온 금강(金剛)을 돌과저
□ 6
쪽깔린 측백(側柏)나무 그런대로 태고색(太古色)이
꿀 같은 거자물을 봄에 오면 먹는다네
가즈레* 풀 자란 저기 콩밧등가 하노라
□ 7
골 속에 자던 구름 게으른양 나오더니
어느덧 구름바다 만산(萬山)거기 나락들락
해금강(海金剛) 또 있다함을 내 안 믿어하노라
□ 8
삼천수(三千首) 영랑풍월(永郞風月) 이어름서 불럿던가
구름야 있다없다 산야아니 옛산(山)이리
저산아 말물어보자 어이 놀고 가더니
□ 9
열구름 검어지며 측백밭에 비 뿌린다
여기도 인간(人間)이라 거* 갈 주막 있다하네
옆으로 볕 지나가며 푸른 하늘 뵈더라
* 열: 담(淡)
** 가즈레: 제(祭)
** 거: 비를 피한다는 말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비봉폭 정인보
비봉폭(飛鳳瀑)
□ 1
하늘단* 저 높은 산 흙 하나가 없단말이
은하수 새여나려 길 아닌 길 만드시니
돌마저 희였었던들 바란다나 하리오
□ 2
첫칭에 부서진 물 나려 칭칭 몇 몇 번고
눈[雪]이다 비[雨]일러니 안개 도로 실구름이
어느덧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하더라
□ 3
안산은 아늑하다 밖산이야 장할시고
검푸른 열갈백 길 태를 감히 묻자오리
물 한 줄 간드러지니 온 데 몰라 하노라
* 하늘 닿은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소광암 정인보
소광암(昭曠巖)
□ 1
공산(空山)에 사람 없고 수류화개(水流花開) 뿐이로다
희암(希菴)의 노든 그때 글씨 아니 머무른가
허량(虛凉)은 예런듯한대 간 일 아득하고녀
아심도 많거니와 영롱(玲瓏)함도 짝이 없네
□ 2
금강산(金剛山) 옛시권(詩卷)에 이만한 이 몇 분인고
내 그예 정음(正音)에 옮겨 널리 뵐까하노라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숙초 밑에 누운... 정인보
숙초(宿草) 밑에 누운...
원제 : 숙초(宿草) 밑에 누운 고우(故友) 송고하(宋古下)를 우노라
□ 1
어젯밤 두굿 차니 마틔느니 간 해 이때
겨울은 또 겨울이 버님고만 꿈이라니
스무 해 유난턴 사이 알 리 없어 하노라
□ 2
화개동 어느 아침 인사라고 한둥만둥
그냥 그랬던들 하마 아니 덜 슬프리
정이야 있는다할 손 의초 어이 하리오
□ 3
흰갓 흰옷으로 마즈막들 울구 불 제
그 누구 어느 친고 님의 말을 전했것다
한 일*에 시여질* 마음 둘업슨줄 아노라
□ 4
신문사 집을 짓고 키고 길러 몇 몇 해오
하면서 아니 매어 부새 의면* 한 방치로
그 호외 나돌았던들 빈터 아니 됐으리
□ 5
이 다음 뜻있는 이 계산골*을 잊을것가
막바지 종 치는데 어듸 찜이 숙직실 터
십삼도 만세 아우성 그뉘 예서* 터친고
□ 6
뜻 깊고 기운차고 음응 능청 솜씨 있고
성긴듯 주밀터니 몇 수 넘어 내보더니
손발톱 다다를 때에 누으실 줄 알리오
□ 7
이궁안 뜻밖 북세 하마트면 일이 컸다
돌팔매 들오거라 왜 모르고 이리저리
놀자고 물 맑어지니 님의 공이 비춰라
□ 8
얼음목 충무산소 님의 손에 높으셨다
그렁성 겨레 일을 한번 솟궈 올리랴고
온천서 떠들던 밤이 알풋 아득하고녀
□ 9
나무꾼 뉘시것기 을지공 날 전했는고
듣기가 무서웁게 어느덧에 평양으로
비 셀 날 가차웁건만 님은 머니 설워라
□ 10
한 조각 깊은 마음 이 겨레뿐 자나깨나
단군 세종대왕 예처내친 이충무공
말씀이 구름될시면 하늘 가득 했으리
□ 11
술 거나 날 붙들고 반울음에 뭐라셨다
적이다 우리의 적 알라알라 부를 떨어
스무 해 장그소리니 뜻 맺힌 줄 아노라
□ 12
내 오활 곱다하고 님의 주정 좋다했네
사날 못 만나면 그야말로 삼년인듯
생초목 불붙다해도 생별이면 하노라
□ 13
추란화(秋蘭花) 여원 줄기 댓엽*에서 고닷소라
내일 볼 작별에도 하시더니 자중하오
까치놀* 더 떠오르니 키* 그려워 하노라
□ 14
멀리서 말로 듣고 님께 보내 물었더니
내 편지 받아 들고 눈물날 듯 반겼다고
보려던 그 새벽 빛을 반 못 보고 가다니
□ 15
병꽤도 한둘 아냐 남의 입을 보탰느니
자기 말 자랑인 듯 모를 것도 잘 아는 듯
두어라 뒤 보일수록 옥 값 더욱 높아라
□ 16
북문골 후미진 때 날보려고 돌아 들어
들창문 똑똑하면 묻지 않고 님일러니
내 병은 예런 듯한데 찾아올 이 뉘온고
□ 17
작년 섣달 스무 사흘 운동장서 나젯것다
그제가 영결일 줄 어느 누가 알았으리
한번 더 돌아나 볼 걸 가슴 메어 하노라
□ 18
신문은 살이 한 돌 님 가심도 또 한 돌이
설움이 고개고개 붓대 자주 가쁘구나
이 노래 님 못 들리니 길언 무삼하리오
* 일: 독립운동
** 시여질: 죽음
** 부새 의면: 부시어 의(義)일 것 같으면 한 방망이로 부시어 버릴 마음을 가졌다는 말
** 계산골: 중앙학교 소재지
** 예서: 국내 을미운동의 근원지는 중앙학교 숙직실이었다
** 댓엽: 대나무 잎
** 까치놀: 해상에서 이 놀이 뜨면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 키: 조향타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십이애 정인보
십이애(十二哀)
□ 1
불살러 날렸단들 님의 안을 가실것가
못 감은 눈이 남어 오늘 우리 보시려니
구름이 북(北)에서 오니 새로 느껴합내다
―고(故)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생각하고
선생이 노령(露領)에서 돌아간 뒤 유언(遺言)대로 살라 날렸다
□ 2
골목도 눈에 선타 동막(東幕)길이 어느젠고
감추신 님의 한(恨)이 풀이 되여 우굿탄 말
사신이 돌아오시니 가슴 막혀합내다
―고(故) 민영달(閔泳達) 선생을 생각하고
□ 3
글월은 몇 째랏다 속공부로 절개 높아
계오서 이제러면 온 의지가 되실 것을
웃음 띤 님의 신색이 눈물될 줄 알리오
―고(故) 박은식(朴殷植) 선생을 생각하고
선생은 양명학(陽明學)의 조예(造詣)가 높았었다
□ 4
박히고 박힌 설움 금강석(金剛石)도 뚫을낫다
황포강(黃浦江) 여윌 적이 어제런대 삼십삼년(三十三年)
넋 응당 오셨으련만 바라 아득 하고녀
―고(故) 신규식(申圭植) 선생을 생각하고
내가 상해(上海)를 떠날 때 황포강(黃浦江) 부두(埠頭)에서 나를 보냈다
□ 5
풍상(風霜)을 맞이라고 날 모르고 이 땅이네
설멍킨 학이러니 성이 나면 범이러니
이 소식 님 못드리고 어이 살가 합내다
―고(故) 유진태(兪鎭泰) 선생을 생각하고
□ 6
뼈띵망정 일을 하자 유언(遺言)아직 새로워라
온몸이 정성되어 머리 센 줄 모르서를
심으고 꽃 못 보시니 아니 울고 어이리
―고(故) 이승훈(李昇薰) 선생을 생각하고
돌아간 뒤에 해부하여 뼈를 생리표본으로 써달라고 유언했다
□ 7
두타산(頭陀山) 한 구비에 굶고 말러 그냥 묻혀
지키신 그 일생(一生)이 적막(寂寞)할 손 광휘(光輝)로다
아우놈 외오 우는 줄 굽어 예뻐 하소서
―고(故) 족형(族兄) 학산(學山) 선생[寅杓]을 생각하고
□ 8
다존듯 하신 속에 숨어 깊은 한쪽 마음
술이니 글 글씨니 바둑 두어 수 높으니
내게만 비취던 얼굴 두굿그려 합내다
―고(故) 이범세(李範世) 선생을 생각하고
□ 9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존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고(故) 용운당대사(龍雲堂大師)를 생각하고
□ 10
보자신 오늘 일을 오늘 되니 못 보서라
땅속이 깊다한들 님의 한과 어떠 하리
내 아니 목석(木石)이온가 남아 혼자 보고녀
―고(故) 이희종(李喜鐘)선생을 생각하고
□ 11
종이도 예* 것이면 버리고야 마시던 님
강산(江山)이 돌아오니 님은 벌써 추초(秋草)로다
고유할 아들 있은들 이 느낌을 어이료
―고(故) 유창환(兪昌煥) 선생을 생각하고
□ 12
가기를 어찌간고 만리(萬里)뿐가 도산검수(刀山劒水)
옥(玉)도곤 귀한 선비 계서고만 흙이라니
안 헤져 다시온단들 뉘라 그가나 줄 알리요
―고(故) 김찬기(金燦基) 군의 서보(逝報)를 듣고
* 왜(倭)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여수서 목포까지 정인보
여수(麗水)서 목포(木浦)까지
□ 1
짐 먼지 사람 법석 어느덧에 멀었는고
물 넓고 하늘 낮고 섬 하나 둘 뒤로 선다
눈뗑이 떼 저 나르니 해오리라 하더라
□ 2
산그늘 거뭇한데 돛폭마다 해 바읜*다
용총줄 늦춰둔가 반이 넘어 기우단말
물 절로 배 밀어가니 저어 무삼 하리오
□ 3
물결도 자란자란 먼 산 점점 어렴풋이
여기가 어대쯤고 백야섬이 돋아난다
앞만을 좋다지 마소 돌아 다시 보시오
□ 4
해 아직 안 떴는데 섰는 돛들 희끗거뭇
울두목 저저기라 천둥소리 은은하다
옛날일 들추려 마소 안 들춰도 느꺼라
□ 5
나로도(羅老島) 그림같다 산은 어이 휘여 낮아
그 넘어 푸른바다 활시윈양 그엇구나
동청(冬靑) 숲 처진 가지가 반잠긴 듯하여라
□ 6
실같은 긴 섬들이 들어가면 막히기도
두르고 또 에워싸 함박꽃 속 같으시니
바다가 그림에 들어 무놀*마저 잊어라
* 빛남
** 파랑(波浪)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여수옥천사 정인보
여수옥천사(麗水玉泉祠)
지나는 나그네들 노래소리 문득그치
거룩한 충무대감 사당여기 기시다네
그 당시 배 한 척 위에 나라실렸더니라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옥류동 정인보
옥류동(玉流洞)&
□ 1
단풍숲 터진 새로 누어 넘는 어여쁜 물
저절로 어린 무늬 겹친 사(紗)와 어떠하니
고요한 이 산골 속이 더 깊은듯 하더라
□ 2
고인물 밑이 뵈니 유리(琉璃)어찌 이리 맑아
나무잎 근덩여도 모르는 듯 결이 없다
산우로 가는 구름을 굽어 좋다 했노라
□ 3
물 밖은 신나무 뿐 나무말곤* 물이로다
잎새로 새는 해가 금가루를 뿌리단 말
이 경야 없으리마는 예서 보니 달러라
* 말고는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유모 강씨의 상행을 보내면서 정인보
유모 강씨의 상행(喪行)을 보내면서
원제 : 유모(乳母) 강씨(姜氏)의 상행(喪行)을 보내면서
□ 1
칠십년 갖은 고생 다시 없을 외론 신세
숨질 때 날 찾다가 고만 감아 버린단말
단 하나 믿고 바라던 그 맘 느껴 하노라
□ 2
못참아 왝왝하기 잘하고도 유명지인
허위*는 고만이오 인정많아 병이랏다
두어라 다 밉다 해도 나는 구수하여라*
□ 3
경툇절* 불공갈 제 나를 어이 속였든가
놀다가 엄마 생각 베정적이* 어제런듯
달래던 님 안 계시니 이제 운들 뉘 알리
□ 4
집조차 못 지니고 다 늙기에 곁방 신세
박동서 저즘 보니 해진 치마 속알파라
그래도 뒬 바랐더니 빈 맘만이 님아라
□ 5
보고자 보고자던 공능(恭陵)장터 `양완실'*이
찾아다 몹시 일평생에 못이 박혀
저승을 뉘 믿으리만 모자 만나 보는가
□ 6
사내라 술군이오 딸 아우라 범연하다
거적에 싸다시피 막 꾸리어 치어내니
내세던 젖먹인 아들 얼굴 없어 하노라
□ 7
차디찬 단간방에 밤중 사경(四更) 누었을 제
목 몇 번 말랐던가 속쓰린 들 뉘 알았으리
마지막 하려든 말도 있었을 줄 아노라
□ 8
사노라 내 얽매어 범연한 적 많았도다
한만한 늙은이냥 오면 오나 가면 가나
야속해 더 설웠을 일 가슴 뭉클 하여라
□ 9
초종일 걱정하기 어이런줄 몰랐더니
저녁상 받고나니 눈물 돌자 목이 메어
가는 넋 섭섭다 마소 내 못 잊어 하노라
□ 10
불공도 즐기드니 반 거의나 보살 할멈
승행(僧行)야 있으리만 말쎄로는 어여쁘다
죄없는 불쌍한 이 넋 존 데 가게 하소서
* 허위: 남 주기를 좋아한다는 말
** 구수하여라: 소박(素樸)
** 경툇절: 정토사(淨土寺)의 와전(訛傳)
** 베정적이: 어린애가 떼부리는 것
** 유모의 아들 이름. 우리집에 들어온 뒤 그 아들이 보고 싶어서 국문(國文)을 배우면서 쓴다는 것이 `공능장터 양완실이' 이 여덟 글자뿐이었다. 그 뒤에 데려다가 장가까지 들여서 몹시 일허싶다.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이화사삼첩 정인보
이화사삼첩(梨花詞三疊)
□ 1
이백사(李白沙) 나신 곳에 배꽃도 흰저이고
티 없는 저 얼굴을 뉘 마음에 비겨볼꼬
홍자(紅紫)야 번화(繁華)타마는 `드려'* 무삼 하리오
□ 2
희기야 희다할손 분(粉)야 어찌 맑다릿가
맑고도 고우시니 어름도곤 어떠하뇨
눈(雪)에다 향(香)을 얹으니 달(月) 새울가 하노라
□ 3
비바람 겪고 겪어 눈보라에 진눈깨비
얼면서 지킨마음 맘은 얼지 아녀삥나니
봄 거기 잠겨 있는 줄 그제 누가 알리요
* 드려: 염(染)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자모사 정인보
자모사(慈母思)
□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지 달려 삽내다
□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아니 못보심가
내 없어 네 미워진 줄 어이 네가 알것가
□ 7
눈 한번 감으시니 내 일생이 다 덮여라
질* 보아 가련하니 님의 속이 어떠시리
자던 닭 나래쳐 울면 이때리니 하여라
□ 8
체수는 적으셔도 목소리는 크시더니
이 없어 옴으신 입 주름마다 귀엽더니
굽으신 마른 허리에 부지런히 뵈더니
□ 9
생각도 어지럴사 뒤먼저도 바없고야
쓰다간 눈물이요 쓰고 나니 한숨이라
행여나 님 들으실까 나가 외워 봅니다
□ 10
미닫이 닫히었나 열고 내다보시는가
중문 턱 바삐 넘어 앞 안 보고 걸었더니
다친 팔 도진다마는 님은 어대 가신고
□ 11
젖 잃은 어린 손녀 손에 끼고 등에 길러
색시꼴 백여가니 눈에 오즉 밟히실가
봉사*도 님 따라간지 아니 든다 웁내다
□ 12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어라
□ 13
썩이신 님의 속을 깊이 알 이 뉘 있스리
다만지 하루라도 웃음 한번 도읍과저
이저리 쓰옵던 애가 한 꿈되고 말아라
□ 14
그리워 하 그리워 님의 신색 하 그리워
닮을 이 뉘 없으니 어딜 향해 찾으오리
남으니 두어 줄 눈물 어려 캄캄하고녀
□ 15
불현듯 나는 생각 내가 어이 이러한고
말 갈 데 소 갈 데로 잊은 듯이 열흘 달포
설움도 팔자 없으니 더욱 느껴 합내다
□ 16
안방에 불 비치면 하마 님이 계시온 듯
닫힌 창 바삐 열고 몇 번이나 울었던고
산 속에 추위 이르니 님을 어이 하올고
□ 17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게서 자라날 제 어인 줄을 몰랐고여
님의 공 깨닫고 보니 님은 벌써 머셔라
□ 18
태양이 더웁다 해도 님께 대면 미지근타
구십춘광(九十春光)이 한 웃음에 퍼지서라
멀찌기 아득케나마 바랄 날이 언제뇨
□ 19
어머니 부르올 제 일만 있어 부르리까
젖먹이 우리 애기 왜 또 찾나 하시더니
황천(黃泉)이 아득하건만 혼자 불러 봅내다
□ 20
연긴가 구름인가 옛일 벌써 희미(熹微)해라
눈감아 뵈오려니 떠오느니 딴 낯이라
남없는 거룩한 복이 언제런지 몰라라
□ 21
등불은 어이 밝아 바람조차 부는고야
옷자락 날개 삼아 훨훨 중천 나르과저
이윽고 비소리나니 잠 못 이뤄 하노라
□ 22
풍상(風霜)도 나름이라 설움이면 다 설움가
오십년 님의 살림 눈물인들 남을 것가
이저다* 꿈이라시고 내 키만을 보서라
□ 23
북단재 뾰죽집*이 전에 우리 외가(外家)라고
자라신 경눗골*에 밤동산은 어디런가
님 눈에 비취던 무산* 그저 열둘이려니
□ 24
목천(木川)집 안방인데 누우신 양 병중이라
손으로 머리 짚자 님을 따라 서울길로
나다려 말씀하실 젠 진천인 듯하여라
□ 25
뵈온 배 꿈이온가 꿈이 아니 생시런가
이 날이 한 꿈되어 소스라쳐 깨우과저
긴 세월 가진 설움 맘껏 하소 하리라
□ 26
시식(時食)도 좋건마는 님께 드려 보올 것가
악마듸* 풋저림을 이 없을 때 잡숫더니
가지록 뼈아풉내다 한(恨)이라만 하리까
□ 27
가까이 곁에 가면 말로 못할 무슨 냄새
마시어 배부른 듯 몸에 품겨 봄이온 듯
코끝에 하마 남은가 때때 맡아 봅내다
□ 28
님 분명 계실 것이 여기 내가 있도소니
내 분명 같을 것이 님 가신지 네 해로다
두 분명 다 허사외라 뵈와 분명하온가
□ 29
친구들 나를 일러 집안 일에 범연타고
아내는 서워라고 어린아이 맛없다고
여린 맘 설움에 찢겨 어대 간지 몰라라
□ 30
집터야 물을 것가 어느 무엇 꿈아니리
한 깊은 저 남산이 님 보시던 옛 낯이라
게섰자 눈물이리만 외오 보니 설워라
□ 31
비 잠깐 산 씻더니 서릿김에 내 맑아라
열구름 뜨자마자 그조차도 불어 없다
맘 선뜻 반가워지니 님 뵈온 듯하여라
□ 32
마흔의 외둥이를 응아하자 맏동서께
남없는 자애렸만 정 갈릴가 참으셨네
이 어찌 범절만이료 지덕(至德)인 줄 압내다
□ 33
찬 서리 어린 칼을 의로 죽자 내 잡으면
분명코 우리 님이 나를 아니 붙드시리
가서도 계신 듯하니 한 걸음을 긔리까*
□ 34
어느 해 헛소문에 놀라시고 급한 편지
네 걸음 헛디디면 모자 다시 안 본다고
지질한 그날 그날을 뜻 받았다 하리오
□ 35
백봉황(白鳳凰) 깃을 부쳐 도솔천궁(兜率天宮) 향하실 제
아득한 구름 한점 옛 강산이 저기로다
빗방울 오동에 드니 눈물 아니 지신가
□ 36
엽둔재 높은 고개 눈바람도 경이랏다
가마 뒤 잦은 걸음 얘기 어이 그쳤으리
주막집 어둔 등잔이 맛본상*을 비춰라
□ 37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鴨綠)이라 엿자오니
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 38
개울가 버들개지 바람 따라 휘날린다
행여나 저러할라 돌이고도 굴지 마라
이 말씀 지켰다한들 누를 향해 사뢸고
□ 39
이만 사실 님을 뜻조차도 못받든가
한번 상해드려 못내 산 채 억만년을
이제와 뉘우치란들 님이 다시 오시랴
□ 40
설워라 설워라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풀 욱은 오늘 이 살붙어 있단 말가
빈 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 밤송인 쭉으렁: 우리 속담에 쭉으렁 밤송이 삼년 달린다는 말이 있다. 다병(多病)한 사람이 그대로 부지하는 것을 이에 견주어 말하며 못 생기고 오래 사는 것을 이에 견주어 말한다.
** 우긋이: 茂盛한 모양
** 배이는: 점읍
** 므가나: 미운
** 양자(樣子): 모양
** 질: 저를
** 봉사: 봉선화의 와(訛), 소녀들이 봉선화를 짓찧어서 손톱에 홍색을 들이니 이를 봉사들인다고 한다
** 이저다: 이것 저것 모두
** 뾰죽집: 천주교당(天主敎堂)의 속어
** 경눗골: 정릉동(貞陵洞)
** 무산: 무산(巫山) 십이봉(十二峰)
** 악마듸: 억세인 것
** 긔리까: 만과(瞞過), 속여 넘김
** 맛본상: 겸상으로 보아 놓은 밥상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정양사 정인보
정양사(正陽寺)
□ 1
흘성루(歇惺樓) 예로구나 앞을보니 눈부시다
천봉(千峯)을 주름잡아 둘러 어이 저러한고
어즈버 나죄* 하늘이 화폭(畵幅)인줄 알리오
□ 2
솟은 양 갖가지라 둥그러니 네야 높다
첩첩(疊疊)도 한저이고 넘겨보긴 무삼 일이
해 뉘웃 어스레하니 구불구불 하여라
□ 3
하늘에 닿은 채로 나즉한듯 이상할사
괴괴한 한뜰 앞에 천봉만학(千峰萬壑) 모이단말
구태여 나눠 보려고 예니제니 하느뇨
□ 4
희달까 허여해라 연푸름도 드뭇 섞여
높낮은 연화(蓮華)송이 멀쯔가가즉 둘렀으니
난간(欄干) 밖 어떠한 빛을 일런 무삼 하리오
□ 5
금강산(金剛山) 제일명구(第一名區) 응당 이곳 치을 것이
일루천봉(一樓千峰)이 세상 밖에 그윽하니
반(半)기운 옛 집 얼굴이 더 귀한 줄 아노라
□ 6
기운들 어떠리만 보니아니 느꺼운가
정양사(正陽寺) 거의거의 흘성루(歇惺樓)가 저렇단말
두어라 금강용상(龍象)을 바이 없다 하리오
□ 7
육각전(六角殿) 헌 그림을 국보(國寶)인 줄 뉘 알것가
오도자(吳道子)* 열이오면 가도(可度)*도곤 더 귀할가
개칠*야 있을 법할손 신운(神韻)아직 남으니
□ 8
도원도(桃源圖) 쌍절(雙絶)이라 다시 없다 하였더니
쥐거미 더렌 벽(壁)에 남아 은은(隱隱) 보배롭다
필획(筆晝)을 다 못 볼세면 뜻만 아니 좋으니
* 나죄: 저녁 때
** 오도자: 당(唐)의 명화가
** 가도: 안견(安堅)의 자(字)
** 개칠: 원화 위에 가필(加筆)하는 것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조춘 정인보
조춘(早春)&
□ 1
그럴사 그러한 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 2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듯는다 없을손가
도드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개 어이 더딘고
□ 3
이른 봄 고운 차취 어대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는타 말고 헤쳐본들 어떠리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첫 정 정인보
첫 정
□ 1
그 기별 듣던 밤에 온 하늘이 별이더니
꿈이면 어서 깨자 꿈아니면 어찌할고
배 떠나 바다 넓으니 곧 미칠듯 하여라
□ 2
그러니 그럴라구 집에 가면 만나려니
건너 방 덧문 닫고 마당조차 다른 듯다
어머니 반 울음으로 너왔느냐 하서라
□ 3
내 건너 골을 닫넘어 드뭇 성긴 솔아래로
가르쳐 저기라니 님 아니고 흙이로다
밤낮에 그리던 남편 여기온 줄 아신가
□ 4
이월달 생일기거의 더 안 묵고 떠났것다
어머니 뒤따라서 중문까지 나오던 님
말 없이 서로 헤져서 다시 볼 길 없고녀
□ 5
하늘 위 옥련화가 삼간난리 인간으로
늘 보기 바라리만 너무 총총 이다지오
씨남겨 새잎 나오니 정 머문 줄 아노라
□ 6
뼈깊이 맺힌 정을 내가 어찌 다 안다리
아니본 상해 남경 눈에 오즉 그렸을까
그 배로 지어 논 옷은 사람대신 반겨라
□ 7
어려서 놀던 동무 내외라니 더 달리라
철 아즉 나기 전도 바라보고 좋았었다
첫 정이 어혈(瘀血)이 되니 님만 불상하리오
□ 8
세월이 약이라고 이제와선 어렴풋다
잊기야 잊을신정 인간맛은 섬거워라
나그려 못갔으려니 제사과인 받는가
□ 9
큰딸애 사십 거의 아들딸해 여덟이외
눈썹새 엷은 결이 볕에 서면 더 어머니
닮고도 저는 모르니 가슴 찌연하여라
□ 10
어머니 일평생에 며느리로 못이 박혀
잃건만 하는 때는 바로 목이 메시더니
산소가 뫼 앞이시니 어루만져 주시리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칠보암 정인보
칠보암(七寶菴)
금강산(金剛山) 다듬을 제 본 하나를 먼저 오려
옥도끄가 끝나기 전 가끔가끔 보셨것다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표훈사 정인보
표훈사(表訓寺)
□ 1
릉파루(凌波樓) 시원쿠나 사방(四方)모두 물소리라
다리는 없을선정 냇경치(景致)야 더늘었다
예 앉아 달까지 봄야 바란다나 하리오
□ 2
드높은 석대(石臺)위에 날개 치는 취루채전(翠樓彩殿)
사산(四山)은 낮잠 들고 세내 홀로 바쁘구나
물소리 마저 없던들 고요조차 모르리
□ 3
소리란 물소리 뿐 새 짐승도 괴괴하다
루동로(鏤銅爐) 가는 연기(煙氣) 불향(佛香)얼려 피어나니
구름이 법(法)듣는 듯이 지나 천천하더라
□ 4
법기(法起)를 나승(羅僧)이라 고증(考證)삼아 뉘 망녕고
화엄(華嚴)의 그냥한 말 하상 실제(實際) 아니거니
이 금강(金剛) 이 불상(佛像) 가져 우리란들 어떠리
□ 5
반 바랜 저 단청(丹靑)이 어이그리 돋뵈는고
오래서 부연 기새* 그도 또한 덜 미워라
세월(歲月)이 시긴 단장을 뉜들 거러* 보리오
□ 6
펀*할사 이 산(山)속에 바위하나 바라뵐까
함칠*한 솔빛 너머 물소리만 높낮아라
빈 터야 이 절 뿐이랴 섬거* 무삼 하리오
□ 7
낭선군(朗善君) 비해(匪懈)* 유법(遺法) 몇몇 군데 남았는고
옛 비(碑)에 끼운 잇*을 씻어 볼 새 없었으니
금석서(金石書) 모든 고심(苦心)을 다시 생각하노라
* 기새: 기와
** 거러: 대항(對抗)
** 펀: 평탄하고 넓은 모양
** 함칠: 가지런하고 윤이 나는 모양
** 섬거: 서운
** 비해: 안평대군의 당호(堂號)
** 잇: 이끼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