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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청(淸)의 북경(北京)은 사막지대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북경은 사막지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북경은 가짜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청의 북경이 사막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의 북경이 사막에 있었다는 것은 사서(史書)에 대한 오역(誤譯) 또는 잘못된 기록이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청(淸)의 북경(北京)을 찾기위한 그나마 가장 좋은 자료는 조선의 사신들이 남긴자료일 겁니다.
청(淸)의 북경(北京)으로 가기까지의 여정 중에서 조선의 사신들이 기록한 자료들을 근거로 청의 북경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요동 벌판을 들어선 뒤부터 오가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고 모래가 먼지처럼 가늘어, 바람이 살짝 불어도 곧 휘날려 흡사 연기나 안개 같고, 이따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 듯 자욱하고, 사람의 의복ㆍ모자ㆍ얼굴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며, 입안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그래서 비록 열 벌 바른 상자일지라도 모두 스며든다. 또 시장 점포나 인가에 둔 기물과 수레 안의 자리는 닭꼬리비[鷄尾箒]로 끊임없이 털어 버려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한 치 남짓 쌓인다. 도성의 큰 거리는 매양 물을 뿌려 적셔 주고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영평부(永平府)-서쪽으로 연경이 500리 떨어져 있다.(중략)
사하역(沙河驛)-이곳에서는 길이 모래돌 가운데로 나 있는데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힌다. 만약에 바람을 만나게 되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사람은 길을 가지 못한다. 연(燕) 땅의 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곳인데, 모래 길이 수십 리나 된다. 역 마을에는 역시 무너진 성이 있다.
찬바람 눈을 불고 들판 길 평평한데 / 寒風吹雪野途平
바다 넓어 하늘 같고 해는 멀리에 가로놓여 있다 / 海闊如天日遠橫
말을 묻어 버리는 황사 삼십 리 / 沒馬黃沙三十里
넓은 수레바퀴 느려서 소리 없이 구른다 / 廣輪遲轉不成聲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책의 저자도 서로 다른 사람 입니다. 그런데 거의 동일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대륙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록입니다. 현재의 대륙은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는 모래땅이 아닌 거의 초원지대가 주를 이룹니다.
지금의 대륙이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이는 산업이 발달되면서 환경공해로 인한 환경재앙의 결과입니다. 이 책들이 기록된 시기가 약 250년 전후인데,250 여년 전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고,
지금처럼 환경공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지금처럼 사막화가 진척되기 훨씬 이전의 상황입니다. 어느 혹자는 제가 위의 기록을 토대로 청나라의 북경까지 가는 길은 사막의 길이었다.라고 말하자,
구체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단순 모래일수 있으므로 근거로서 빈약하므로 사막일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일반 평지의 단순모래라고 가정 합시다.그런데 어찌해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의 기록처럼,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일반 평지의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역이 사막 말고 그 어느 지역에서 가능하냐?고 묻자,
어느 혹자는 아무 답변을 하지도 못했습니다.사막이 아닌 지역에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압록강 건너서 부터 모래지역 즉 사막지역인데,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중에 요동,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위의 기록처럼 조선의북쪽은 사막지대 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중종실록 59권 22년 의 기록을 보면,
"신이 또 보면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지방은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든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하여 끝없이 징렴(徵斂)하고 있습니다."
(臣又觀, 平安、永安, 地濱沙漠, 人物凋殘, 猶以掩耳之毛; 溫身之物, 求索如林; 徵斂無極.)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송김안변(送金安邊)
鐵嶺橫天限一隅。麗時爲界卽通衢。北連沙塞三千里。南擁函秦百二都。
또, 철 령은 좌우 하늘을 경계로 한 모퉁이다. 고려 때의 지경으로 곧 갈림길이다(衢). 북쪽으로 사막변경(요새) 3,000리가 이어져 있다. 남쪽으론 진의 함 관 102개 도회지를 끌어안고 있다.
철관은 북쪽 사막으로 통하고 / 鐵關通朔漠 압록강은 유연 지방과 연접했나니 / 鴨水接幽燕 -"상촌집 9권"
사조(四祖 이 태조 이상의 사대조)께서 막북(漠北)에서 일어나 대대로 원(元)의 천호(千戶)ㆍ만호(萬戶) 등 직책을 갖고 있었으므로 북쪽 지방 노인의 마음을 본디부터 끌고 있었다.-"상촌집 34권"
"...회령은 곧 막북(漠北)의 춥고 고통스러운 지역이어서 누구나 온갖 계책으로 피하기를 힘쓰게 되는데..,"-"중종실록 18년"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성종실록 134권, 12년"
위의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고려시대의 동북면은 사막(沙漠)지대 였습니다. 왜냐하면 "상촌집 34권"을 보면 "(조선의)사조(四祖 이 태조 이상의 사대조)께서 막북(漠北)에서 일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막북(漠北)은 사막을 말합니다. 조선 태조의 선대는 고려의 동북면에 즉 함경도 일대에 살아왔는데 그 동북면 지방을 막북(漠北)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고려의 동북면은 한반도 일수는 없고,
현재의 만주 즉 동북삼성 지역일수도 없습니다. 동사강목에서 같은 고려시대 관련 기록에서 막북(漠北)에 대한 사용 용례를 보면,
"몽고는 막북(漠北)의 북쪽 땅, 외몽고(外蒙古))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를 멸하고 완안(完顔 금나라의 전신인 완안부(完顔部)를 말함)을 강압하여 문득 중국의 반을 차지하자 동진(東眞)도 항복하여 요심(遼瀋 요양(遼陽)ㆍ심양(瀋陽)) 일대가 또한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동사강목 제10하"
조선 태조의 선대가 살았던 막북(漠北)지역은 고려의 동북면 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실록"의 기록에서 "(함경도 지역)회령은 곧 막북(漠北)의 춥고 고통스러운 지역"이며 평안도와 함경도가 사막에 접해 있다고 기록했고,
"상촌집 9권"에서는 "철관은 북쪽 사막으로 통한다"고 했고 "해봉집"에서는 철령이 고려때의 경계로 사막 변경 3000리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세종실록 지리지 안변도호부 의천군의 역(驛)인 철관(鐵關)지역이 사막지대와 통할수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회령 지역이 막북지역 즉 사막지역 일수는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평안도와 영안도(함경도)가 사막과 접할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압록강이 유연(幽燕)지역과 접할수도 없습니다.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조선이 북원과 국경을 접할수가 없습니다.
이 고려의 동북면을 고려시대에 윤관장군이 개척을 했는데,이 동북면에 대해 현재의 사학(史學)에서는 한반도를 벗어날수 없고,현재의 재야사학 조차도 동북삼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려가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를 어느정도 알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동사강목 제8상갑신 고려 숙종(肅宗) 9년부터, 병인 고려 인종(仁宗) 24년까지 43년"의 기록을 보면,
"임의(任懿)를 권판동북면 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使)로, 김연을 부관(副官)으로 삼았다.
추7월 왕이 구성을 장차 철폐(撤廢)하려고 하여, 임의 등으로 하여금 변사(邊事)를 조치하게 하려고 부월(鈇鉞)을 친히 주고 교외에 나아가서 전송하였다. 이때 최홍정(崔弘正)이 이미 구성을 철폐했는데 임의 등은 행동이 느려서 국경에 관한 일을 한 가지도 조치한 것이 없으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중략)...........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변방을 개척한 실수는 숙종(肅宗)에게서 시작되어 예종(睿宗) 때에 이루어졌는데,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사역(使役)하여 북쪽 사막(沙漠)을 정복한 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오랑캐의 분심만 돋우어 놓은 것뿐이니, 얻은 것이 어찌 잃은 것을 보상(報償)하겠는가?”
여기서 변방개척은 숙종에서 예종까지 이루어졌고 북쪽사막을 정복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의 동북9성이 사막(沙漠)지역이었다는 근거의 기록입니다. 이는 한반도와 동북삼성 지역을 대입해도 있을수 없는 기록입니다.
위의 기록처럼 조선의 북쪽 사막과 관련 북경으로 가는 길은 사막지대 였습니다. 북경으로 가는 길만이 사막지대가 아닙니다. 북경 그 지역 자체도 사막지대에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
인구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중략)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수레와 말이 갈고 다니는 통에,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점포들이 모두 닭털 총채를 들고 손 놀릴 새 없이 물건에 쌓인 먼지를 턴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불때고 숨쉬는 훈훈한 기운이 따뜻한 기운을 펼치는 것인가 보다."
---(담헌서(湛軒書)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6권 기미년(1799, 정조 23) 2월[7일-30일] 15일
"대개 산해관 안팎이 다 너른 들이요, 검은 흙이라. 여기에 이르러 지기(地氣)가 명랑(明朗)하여 갑자기 별계(別界)를 이루었으니, 먼 산이 푸른빛을 띠어 출몰(出沒)하여 고움을 드리우며, 일대 난하 물이 둘러 반월형(半月形)이 되었는지라."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1720년) [잡지(雜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이 정자는 북경 지방과 요동(遼東) 지방을 바로 누르고 있어 넓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다른 누각(樓閣)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가까워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고, 먼 산이 어렴풋이 보이는 가운데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송골산(松鶻山)이라고 했다. 호인(胡人)들이 사신 일행을 구련성(九連城)에서 기다리고 있어 밥 짓는 연기가 하늘에 떠 있다. 세속(世俗)에서는, 북경에 가는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는 것을 꺼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오르지 말라고 권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올라가 보았다. 거기서 계속하여 취승정(聚勝亭)에 올라가 보았다. 이 정자는 전배(前輩)들의 시에 여러 번 들어 있어 가장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이미 퇴락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중강(中江)에서부터는 길을 따라 갈대가 있는데, 그 길이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고 노목(老木)들이 많은데 그 가지에 의관이 걸린다. 어떤 것은 길가에 가로누워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만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 땅은 모두 검은 모래이고, 더러 습한 곳도 있다. 대개 하루 종일 가는 길이 모두 거친 벌판과 황량한 들판뿐이어서 보이는 것마다 모두 쓸쓸하다. 구련현(九連峴)을 넘어서 신시(申時)에 구련성에 도착했다. 이곳은 비록 성(城)이라고는 하나 어느 해에 허물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거친 빈터에 사람 하나 살고 있지 않았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4권 계사년(1713, 숙종 39) 1월 5일(계미)
"이곳은 비록 엄동이라도 매우 춥지는 않고, 금년은 앞서와 같이 온화하지는 않으나 오늘처럼 바람이 세었는데도 일기가 따뜻함이 우리나라의 2월과 거의 같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다."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2편 오화연필(五花沿筆)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25일(갑신)
길에서 낙타에 물건을 싣고 가고, 또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것을 보았다. 낙타는 머리는 작으면서 위로 쳐들었고 목은 길고 굽었으며 등에는 두 봉우리가 마치 안장을 얹은 듯하며, 다리는 세 마디가 있다. 먼데서 바라보면 거북과 같고 가까이서 보면 학과 같다. 700근을 실을 수 있고 하루 300리를 간다고 하는데, 실은 것은 거의가 석탄이다. 북경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쓰는데 한 번 불을 붙여 놓으면 며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하며, 수삼십 필씩 줄을 이어간다.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촉에는 죽탄(竹炭)이 많고 남방에는 목탄이 많고 북방에는 석탄이 많다.” 하더니, 그 말이 과연 그렇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1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1일-6일] 4일
해가 뜰 무렵에 길을 떠나 양장하(羊腸河)에 이르니, 물이 그다지 넓지는 않으나 여러 가닥이 있어 여름에 물이 지면 큰 들이 다 잠기며 배로 10여 리를 지난 후에 비로소 뭍에 오를 수 있다 하더라. 중안보(中安堡)에 이르러 하가(何哥)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떠나려 할 때 하가가 밥값이 적다 하여 종이와 부채를 달라 하고 온돌방 앞에 들어와 간청하니, 사람됨이 극히 불량하여 보기에 매우 불쾌하더라. 온돌방 아래 흙 화로를 놓았으니 부리가 좁아 겨우 다관을 놓을 정도였으며, 석탄(石炭)을 피웠으니 석탄이라 하는 것은 멀지 않은 산에서 나는데, 처음 땅에서 파내면 검은 흙 같다가 땅 밖에 나오면, 굳어 돌과 같으니, 불을 피우면 오래 사그러지지 아니하고, 물을 뿌리면 더욱 잘 피니, 음식 만들 때나 온돌에 불 넣을 때 이것을 쓰는 곳이 많으니 매우 중요하고, 타고 남은 것을 물에 축여 나무로 틀을 만들어 벽돌 모양같이 박아 내어 도로 피우면 나무 숯보다 화기가 좋으니, 심양부터는 이것이 아니면 불 때기 어렵더라.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 밭에 또한 조 짚으로 우마(牛馬)의 양식을 삼으니, 지나는 밭 길가에 조와 수수밖에 다른 것이 없고 간혹 밭벼를 심은 밭이 있으니, 밭벼의 쌀은 노미라 하며, 면화(綿花) 밭이 아주 드물게 있으니, 이는 중원(中原) 사람이 아주 춥더라도 옷을 두껍게 입는 일이 없고, 짐승의 가죽으로만 여러 겹을 입으며, 바지는 다 겹으로 하였으며, 가난한 백성(百姓)들은 웃옷이 변변치 않아서 우리나라 엷은 차렵 바지만 하게 만들어 입었더라.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의 공통된 기록은 북경(北京)과 북경 인근의 토질이 검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위의 기록들처럼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었습니다. 즉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는데 그 모래의 특징은 검은빛의 토양=회색빛의 토양을 지닌 지역 입니다.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지질적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아주 독특한 특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북경은 검은 모래 사막(회색빛 모래 사막)의 토양 입니다.
세계적으로 검은 모래 사막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이 유일 합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위의 기록상에서 전하는 어떠한 조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기록처럼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합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각기 다른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서로 공통된 기록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막지방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북경 지역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고 그 흔적 조차 없다고 합니다. 지금의 북경이 그렇습니까?
지금의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아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 입니까? 제가 아는 지인 중에 북경에 사업차 자주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현재의 북경의 겨울이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아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지인이 저보고 뭔 만화 같은 소리냐며 저에게 핀잔을 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지역 사막의 겨울 날씨가 보기 보다 온난한 날씨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을 근거해서 보면,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이며,역사에서 말하는 진정한 북경이 있었던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 일대로 추론 됩니다. 여기서의 카라쿰 사막의 카라쿰 이라는 뜻은 터키어로 "검은 모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카라쿰 사막의 주변을 경유하며 흐르는 강은 역사상의 난하이며 열하로 생각됩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를 기록한 연대가 서기 1832년 이므로 1830년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청(淸)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러시아와 관련된 영토분쟁에 관한 모든 사건은 주로 흑해와 카스피해 방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늘날의 동북삼성 지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건들 입니다.
또 위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사막을 대표하는 동물인 낙타가 나오는데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축중에 하필이면 왜? 낙타를 이용했을까요? 사막지대에서 사막에 적응된 동물인 낙타가 물자수송에 가장 적격이었다는 그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므로,즉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 부근에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북경과 그 부근이 사막지역임을
알수 있는 기록입니다. 사막이 아니고서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으며,또한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습니다. 또한 낙타는 혹한의 지역에서 살수 없는 동물 입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北京)은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위의 사실 그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즉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의 허구의 북경(北京)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겁니다. 위의 기록들에서 역사상의 북경(北京)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위의 사막과 관련된 또 하나의 기록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현재의 사학(史學)에서는 역사에서 거란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영주(營州)지역이 지금의 요녕성 이라 합니다.
현재의 사학은 참으로 기가막히고 어처구니 없는 역사학 입니다. 왜 어이없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학인지 다음의 기록을 봅시다.
요사(遼史) 卷三十九‧志第九 地理志三
興中府 古孤竹國。漢柳城縣地。(흥중부는 옛날의 고죽국이다. 한나라때 유성현 이다.)
연경재전집 외집 권48 지리류 서북강역변 하
土默特。本古孤竹國。漢之柳城縣。屬遼西郡。爲西部都尉治。...........隋復置柳城縣。爲遼西郡治。唐爲營州都督府治。後爲奚所據。遼太祖平奚置興中府。置興中縣。
(토묵특은 본래 옛날의 고죽국이다. 한나라때의 유성현이며 요서군에 속했으며 서부도위가 다스렸다........수나라때 다시 유성현을 두었으며 요서군이 다스리게 되었다. 당나라때는 영주도독부가 다스리게 되었다.후에 해가 살게 되었다.
요태조때 해를 평정하여 흥중부,흥중현을 두었다.)
魯陳。一名柳城。在西域中。經大川沙磧無水草。馬牛過此輒死。大風倏起。人馬相失。道傍多骸骨有鬼魅。行人失侶。白日迷亡。謂之旱海。西有流沙河。北有火焰山 . 山色如火。氣候和煖。土宜麻麥。有小蒲萄。甘甜無核云。所謂流沙河。蓋卽禹貢流沙也。
(노진 일명 유성이다. 서역 안에 있다. 큰 개천을 지나면 모래가 쌓여 있고 수초가 없다. 우마가 이곳을 지나면 언제나 죽은다.큰바람이 빨리 일어나 사람과 말이 서로 헤매어 잃는다.길가에 많은 해골에는 도깨비가 있어 행인이 동반객을 잃는다. 서쪽에 유사하가 있어 이를 일컬어 한해라 한다. 북쪽에 화염산이 있어 산이 불과 같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죽국의 또 다른 이름은 유성현 입니다. 위의 지봉유설을 보면 옛날의 고죽국이며 유성현 이었던 지역은 서역에 존재해 있었으며,또한 엄청난 사막까지 두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즉 고죽국이며 유성현은 요서지역에 속한 지역들 이었으며 이 요서지역이 사실은 서역지대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서역에 있었던 요서지역에 고구려의 근원지인 고죽국이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사학에서는 요서지역과 서역지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역사 입니다. 그러나 역사서를 세심히 살펴보면 요서지역은 서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의 영주 지역이라는 요녕성은 서역지대도 아니며,
사막 지대도 아닙니다.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조선의 북쪽은 사막지대 였이며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는 여정 중에 있었던 영주지역도 사막지대에 있었으며 북경 또한 사막지대에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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