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대학과 인생을
장순희
1983년 영어 영문학과, 2004년 국어국문학과, 2014년 문화교양학과, 2017년 행정학과대학원,2024년 사회복지학과를 입학하여 졸업을 한 학과도
있고 졸업을 하지 못한 학과도 있다.
내가 방송통신대학교와 인연이 맺어진 것은 1983년도 지금으로부터 41년 전 이였었다.
나는 그 때 고등학교를 24살에 졸업 했었다. 아버지가 딸아이는 상급학교 보내면 안된다는 가부장적인 생각과 아들선호사상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교는 부모님 농사짓는 일을 돌보다가 늦은 나이 18덜 에 중학교를 들어가게 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의 나이는 대학교를 졸업하는 나이가 24세가 되었다. 공부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4년제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작고로 엄마혼자 농사짓는 일을 해서 4년제 대학을 보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내가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방송대학을 선택하는 것 뿐 이였었다. 요쯤 이야 국가 장학금으로 얼마든지 대학교를 갈 수 있지만 그 시대는 국가장학금이라는 재도가 없던 시절이라 부모님의 경제사정이 대학을 갈 수 있나 없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조카에게 방송대학원서 구입해서 편지로 보내달라고 했었다. 조카가 방송통신대학원서를 보내와 나는 통신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성적이 우수한 편이라 통신대학은 무난히 합격을 했다.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 것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인문계고등학교를 졸업한지라 회계업무를 볼 수 있는 경리직업을 구하기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방송통신대학강의는 라디오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부디 처 보려고 서울 언니네 집으로 올라갔었다. 처음에는 취업을 할 수 없어 이일저일 을 했었다. 그러다 어느 작은 회사의 전화 받고 간단한 장부를 정리해주는 회사에 경리업무로 직업을 했었다. 경리업무를 보면서 일요일이면 가끔 동승동 있는 통신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 기도 했지만 막상 일주일 출석 시험을 출석 할 수가 없어 영어영문학은 그 것으로 끝났었다. 그리고는 계속 사회생활만 했었다. 공부에 대한 꿈은 접고 ,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못 다한 대학공부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을 입학하였다. 막연한 꿈 이였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을 하면서 글을 ( 시, 수필, 소설 등 )쓰고 싶었던 꿈을 생각하며 입학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부 랑 떨어진 생활을 하다 보니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학기는 한과 목 통과하고 다섯 과목이 과락 났었다. 그래서 너무 실망스러워 2학기를 더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2학기등록을 하고 다시 공부를 했었다. 2학기에는 1학기보다 한과 목 더 통과되었다. 그래 2학년 올라가야 되는데 가정살림을 하다 보니 들어가는 살림비용이 혼자 벌어 아이 둘을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는 것을 하기는 충분하지 않아 학교 휴학신청을 하고 직장 생활을 했었다. 직장생활 2년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해야 될 것 같아 조그마한 나의 가게를 음식점을 차리고는 다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기로 했었다. 오전에는 집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 늦은 시간에 나와 밤늦은 시간까지 음식장사를 하며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많은 선후배학우님들과 만남도 이루어지고 같이 동아리 활동도 하며 교우관계를 돈독하게 했었다. 동아리 그룹으로 글 무리라는 동아리활동으로 1년에 한 번씩 글무리 여행도 가고 국어국문학과 전국대회도 참석하고 하며 나름대로 대학생활을 하였다. 비록 젊은 층과는 다른 대핵생활이지만 뜻 있게 통신대학생활을 하며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었다. 1
그러나 대학3년차부터 집안에 우한이 들어오면서 애들 아빠가 아프기 시작하며 하던 음식업도 잘 안되며 내리막길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또 휴학을 하고 가게도 접고 다른 분이 운영하는 식당에 서빙을 다녔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2014년 국어국문학과를 문화교양학과로 편입해서 문학교양학과 공부를 했었다. 편입한 문화교양학과가 나의 공부와는 좀 다른 방향이라 행정학과교과목을 더 많이 수강신청해서 문화교양학과를 전공했었다. 그런 관계로 후일 대학원은 행정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문화교양학과와 행정학과 대학원 다닐 때는 딸 아이 둘도 대학생으로 진짜 벌어도 벌어도 모자랄 정도로 돈이 많이 필요했었다. 우리가족은 겨우 기초적인 생활을 하며 공부를 했었다. 맛있는 음식보다 좋은 책, 좋은 옷보다 질 좋은 독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딸아이들도 잘 견디어 주며 공부를 했었다. 지금은 그 시절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게 여겨진다. 젊은 사람들도 어려운 생활을 해봐야 후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견디어 낼 수 있는 강인한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만양 부모가 해주는 돈으로만 편하게 안일하게 공부만 한다면 만일 어려움이 닥쳐오면 포기하고 마는 것이 요즘젊은 층의 자살률로 이여 지는 현실이다.
문화교양학과를 다닐 때 잊지 못할 교우가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교우는 애들 아빠 학교 선배님의 배우자로 모 여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내 되는 분이였었다. 내가 어렵게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많은 배려를 해줘 기억에 남는 교우님이다. 몇 번 여쭈어 봤는데 그냥 어디 산다하고는 교장선생님 사모님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아 문화교양학과 졸업식 날 알게 되었다. 나도 애들 아빠도 지역대학교 졸업식장에 참석했을 때 선생님의 사모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때 참 고맙고 그 교우님의 인성에 감탄하였다. 사람은 작은 것에 큰 감동을 받는다. 문화교양학과 전국대회에 참석했던 날 그날은 참 즐거운 날로 기억된다. 배움은 나이에 관계없이 늘 젊은이 따른다. 20대의 청춘이나 30대의 청춘이나 40십 50대 중년의 청춘도 20대 30대 못지않은 청춘들이다. 문화교양학과 전국대회 때 40-50대 청춘들은 마치 20대 30대 청춘보다 더 멋진 공연들을 펼칠 수 있고 여유도 많은 중년들의 청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하고 우리대학교 행정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까지는 타인의 가게에서 서빙을 하며 공부를 했었는데 대학원생 데니까 공부를 심도 있게 더 해야 될 것 같아 다시 나의 사업장을 마련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높은 이자로 빌려서라도 나의 사업장을 마련하였다. 애들 아빠가 직장생활을 하는지라 그 신용으로 8년 전 당시 2천5백을 빌렸다. 그래서 25편정도 되는 가게를 마련하였다. 2017년 3월 2일에 대학원을 입학했었고 2017년 3월 6일에 나의 가게를 오픈하였었다. 대학원을 입학하면서 지역에서 학우님들을 만나던 것이 서울에서 원우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원생은 전국에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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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은 일반4년제 대학원 졸업한 분들이 더 많고 통신대학을 졸업한 원우님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대학원 세미나는 통신대학교본교에서 주로 했었고 가끔 세미나를 다른 곳에서 1박2일정도로 개최하기도 했다. 나는 세미나열리는 날에는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대학원세미나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주대학 교수님의 초청세미나로 건축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강의가 있었는데 현재를 기점으로 미래의 건축의 집에 관한 강의가 인상적 이였었다. 인구 감소로 인한 건축 지금부터 설계하고 대비해서 현제 건축되는 건축들을 어떻게 다음 미래 세대들이 잘 활용하고 이용해야 되는 지에 관한 강의였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오래전부터 인구감소에 대한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정부정책은 유비무한 같은 생각을 하게한다. 미리미리 대비하는 정책 그런 것은 본 받아야 할 정책인 것 같다.
대한민국정책은 소 잃고 외양간 곧지는 정부정책들이 대부분이다. 무엇이든 사고가 난후 그것을 수습하게위해 조사도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대부분 대한민국 정부정책에 속한다.
어쨌든 통신대학에서의 나의 공부는 참 오랫동안 지속되고 연결되어왔었다.
지금 2024년도에 사회복지학과에 입한 하게 된 것은 내가 방송통신대학공부를 지속 하는 동안 자원봉사를 꾸준히 해왔었다. 아니 처음에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더 공부하고 싶어 서울에 있는 국립 대학교박사과정을 몇 뻔 원서를 넣었다가 처음에는 면접에 떨어지고 두 번째는 교통사고로 면접에 응시 할 수 없었고 그리고 나서는 박사과장을 포기 했었다. 그 다음에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교육부에서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통신대학에서 박사과정 신입생을 받으며 원서를 넣어야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너무 공부를 또 놓고 있으면 나이가 더 들면 공부하는 것이 싫어질 수 있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사회복지학과는 전국에서 모여드는 학우님들이 많아 처음에 원서를 넣었다가 떨어지고 두 번째는 예비로 합격되어 있다가 최종적으로 합격되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가 인생 60을 넘게 살면서 참 많은 굴곡들이 있었다. 가끔 공부를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공부를 포기한다면 내 인생을 포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 같아 나는 힘든 인생도 공부로 이겨내며 살아왔다. 아마도 그런 굴곡들이 없이 쪽 고르게 삶을 살았다면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힘든 삶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가지고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삶에 응대하면 그 삶은 언제나 보답을 해준다. 내가 열심히 살면 주변에서도 인정해주고 함께 해준다. 만약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박사과정 신입생 원서를 받는다면 나는 내 나이에 관계없이 박사과정 공부를 더 할 것이다. 그것이 언제가 된다하여도 아무튼 나의 인생 반은 한국방송통신대학과 함께 해 온 것 같고 앞으로도 나의공부는 방송통신대학과 내 인생 다하는 날까지 공부는 함께 할 것이다.
2024년 현재도 나는 음식점 가게 영업을 하면서 통신대학 공부를 합니다. 이 글을 드리는 이유는 당첨되길 보다도 저 같이 이런 학우님들이 많아서 공부를 하고 싶은 학우님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인생 방송대학과 함께 라는 글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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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7일 방송통신대학교학우 장순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