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보물
동네 부인들이 한데 모여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물을 자랑하였다. 금목걸이를 비롯하여, 각종 보석이 박힌 가락지와 팔찌 등을 제각기 가지고 나와 경쟁이라도 하듯 자랑하였다.
이 자리에 함께 있던 크라수스의 어머니는, 집이 가난하여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으므로, 두 아들을 안고 나와, 이것이 내가 지닌 최고의 보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를 본 여러 부인들이 무언가 크게 느끼고, 이때까지 자랑하던 귀중품들을 감춘 채 그 자리를 떴다.
크라수스는 뒷날 장군이 되어 로마를 공포에 몰아넣은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른바 제1회 삼두정치의 한 주인공이 되어, 장대한 로마사에 발자취를 남긴 주요한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뽐내려 한다. 다만 거기에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어느 무지한 졸부가 집 안에 책을 많이 진열해 두면 자기의 부족한 점이 묻힐 것이라 생각하고, 서점에 가서 책의 종류나 내용에 관계함이 없이, 서점의 한 면에 꽂힌 책들을 몽땅 사서 서재를 꾸몄다가, 오히려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로마 시대의 그 동네 부인들이나, 이 졸부처럼 격에 맞지 않은 하찮은 것을 자랑하는 것은, 진정 소중하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서 생긴다. 그런데 이들처럼 자랑하지 않아야 할 것을 자랑하는 것은 옳지 못하겠지만, 누가 보아도 자랑할 만한 값어치를 지닌 것을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고귀한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도 감동하고, 또한 거기서 진정한 가치를 배우며, 본받을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저명한 학자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야 하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조그만 집이었다. 낡은 한식 가옥이었는데 겉치장을 조금 바꾼, 요새말로 하면 리모델링한 집이었다.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그만 진열장이었다. 그것 이외는 별다른 장식물이나 게시물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 장 속을 들여다보니, 때가 묻어 낡아빠진 무명베로 된 담배쌈지 하나와, 짤막한 곰방대 하나가 진열돼 있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였다. 왜냐하면 보잘것없는 그 진열품들은 그분의 아버지가 생시에 사용하던 유품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또한 그것들은 결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아니라, 일반 농사꾼이나 머슴들이 사용하던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요새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흔히 보던 물건들이었다. 그것은 시골의 가난한 일꾼이나 머슴들이 주로 사용하던 일용품이었다.
무명베 담배쌈지는 집에서 짠 무명 천 조각을 사용하여, 지금 사용하는 가죽지갑의 카드꽂이처럼 그 속에 담배랑, 부싯돌 따위를 넣을 수 있도록 꿰맨 것이다. 휴대시에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이것을 둘둘 말고는, 윗부분에 무명베로 만든 끈을 달아, 이것으로 질끈 동여매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 집에 진열되어 있는 그 담배쌈지도 바로 이렇게 만든 것이었는데, 빨지도 않고 얼마나 오래 사용하였던지 때가 묻고 묻어, 흰 무명천이 거의 검은 베가 되어 있었다.
담뱃대는 담배를 넣는 담배통과 입으로 연기를 빨아 드리는 물부리, 그리고 가느다란 대나무로 된 담배설대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담배설대가 긴 담뱃대는, 주로 지체 높은 사람들이 사용한 데 대하여, 이것이 짧은 곰방대는 그렇지 못 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곰방대를 사용한 그 학자의 아버지는 결코 지체가 높은 분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듯 일반 사람들이 보면 자랑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추어 버리고 싶은 물건들을, 평생 일꾼으로 살면서 사용했던 자기 아버지의 유품이라 하여, 거실 진열장에 소중한 귀중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그 학자의 마음가짐에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졌다.
때묻은 무명베 담배쌈지와 오래 사용하여 담배통이 우그러진 곰방대를 어찌 값만 비싼 보석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신분이 낮은 일꾼 아버지가 남긴 물건이라 하여 어찌 명문대가나 고관대작이 남긴 값비싼 물품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진정 존귀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 귀중한 것을 진정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외형적 값어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귀중한 것으로 알아보는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대상에 배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탄하고, 또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에 감동한다.
여느 사람은 부끄러이 여길 만한 유품을 귀중품으로 내세우는 그분은 진정 자신의 존귀함, 곧 진정한 자존심을 가진 분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자존심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며, 자기가 자기를 존중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칭찬하거나, 업신여기거나, 멸시하거나, 욕을 하거나, 홀대를 해도 동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라는 글을, 어느 정신 의학자가 쓴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이러한 자존심을 갖지 않고는 여간해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서정주의 ‘자화상’이란 시는 우리들에게 강렬한 깨우침을 던져 주는 작품이며, 진정한 자존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자화상’ 일절)
아버지가 종이면 어떠랴!
임신한 어머니가 풋살구 하나를 먹고 싶어 하였으나, 사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으면 어떠랴!
때가 까맣게 찌든 손톱을 지닌 보잘 것 없는 환경이면 어떠랴!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매우 솔직한 어조로 고백하는 그의 발언에서, 우리는 그의 진정한 자존심을 읽는다.
참으로 귀중하고 존귀한 것은 외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 우리는 흔히, 누구는 자존심이 강해서 조금만 그를 무시하면 화를 낸다는 식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열등감을 자극 받지 않으려고 하는 열등감의 반동이라고 한다. 그러한 사람은 남이 내게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일 뿐이며, 진정한 자존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지 않는, 그러한 마음이 진정한 자존심이며, 석가가 외친 유아독존의 참의미라고 하겠다.
아들을 가장 귀중한 보물로 내세운 크라수스의 어머니, 일꾼 아버지가 사용했던 때묻은 담배쌈지와 우그러진 곰방대를 소중하게 진열한 학자 분, 보잘것없는 자신의 환경을 작품으로 고백한 미당은 다 진정한 자존심을 가진 분들이다.
어째서 그분들은 그런 높은 마음을 가졌을까? 한없이 우러르고 싶은 부러운 마음에, 내 앞섶을 내려다보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