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야 미친다. 정민. p333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먼지 쌓인 한적(漢籍)? ‘오래된 미래’ 읽기,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탐색한 글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에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미쳐야 미친다!)
우연찮게도 대부분 그 시대의 메저리거들이 아니라 주변 또는 경계를 아슬하게 비껴 갔던 안티 혹은 마이너들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그들의 뜨겁고 따뜻한 마음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워올린 노력가들, 삶이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그 자체로 삶이었던 예술가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한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 했던 나미아들의 삶 속에 나를 비춰보면 일은, 본받을 만한 사표()도, 뚜렷한 지향도 없이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건너가는 데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그때와 우리의 지금은 똑같은 되풀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있다.(역사는 반복된다?!)
#1부 벽(癖)에 들린 사람들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추호의 의심 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사람이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이다…”-박제가, [백화보서]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미친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런가?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어느 한 분야에 미쳐 독보의 경지에 올라선 마니아들
비록 작은 기예라 해도 잊은 바가 있은 뒤라야 능히 이룰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예술에 득실을 잊고, 영욕을 잊고, 사생활을 잊었던 사람들이다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잊는다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 가짜들이 그럴듯한 간판으로 진짜 행세를 하고, 근성도 없는 자칭 전문가들이 기득권의 우산 아래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몸 둘 곳이 없다. 설 땅이 없다. 그것이 싫어 가짜들은 패거리로 진짜를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한 시대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한 분야에 이유없이 미치는 마니아 집단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에 뚜렷한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질 때가 더 많다. 하지만 한 시대의 열정이 이런 진짜들에 의해 안받침되고, 우연히 남은 한 도막 글에서 그들의 체취와 만나게 되는 것은 한편 슬프고 또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다!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오?_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
일식이 있거나 혜성이 나타나면 그는 관상감에 불려들어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이의 추정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였다…문제 해결…그러자 관상감원들의 질투가 극에 달했고, 이제 무서울 것 없는 그들은 거리낌 없이 김영을 못살게 굴었다.
기질이 있었다? 서유본은 “그가 사색 공부에 힘 쏟음이 적었으므로 마침내 기질()이 되고 말았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하였다”고 적고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못 이겨 종내는 젊은날의 우울증 증세가 도져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홍길주는 [김영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그리고는 슬쩍 남의 것을 흠쳐다가 제 것인 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독서광 이야기_김득신의 독수기와 고음벽
정말 갸륵한 이는 진전이 없는데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바보다. 끝이 무디다 보니 구멍을 뚫기가 어려울 뿐, 한 번 뚫리게 되면 크게 뻥 뚫린다. 한 번 보고 안 것은 얼마 못 가 남의 것이 된다. 피땀 흘려 얻은 것이라야 평생 내 것이 된다.
1억 1만3천 번의 독서? 만 번 이하로 읽은 것은 아예 꼽지도 않고, 만 번 이상 읽은 36편 문장의 읽은 횟수를 적은 글이다.
저런 둔재가 있나?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았는가?”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 번 터진 식견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을 몇 번 읽고 줄줄 외웠던 천재들의 글은 지금 한 편도 전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그런 천재가 있었다는 풍문뿐이다. 김득신은 그렇지가 않았다.
옛사람들은 김득신의 노둔함을 자주 화제에 울렸지만, 그 속에는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외경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세상을 놀래키는 천재는 많다. 하지만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둔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한 때 반짝하는 재주꾼들은 있어도 꾸준히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한
는 이유다!
#지리산의 물고기_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책만 읽은 바보? 간서치(看書痴),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에 대해 적은 [간서치전(看書痴傳)]
그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 천하의 일은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욱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간다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_박제가와 서문장
대저 속된 자들은 선방()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가에서 풍악을 베푸니,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내게 와서 묻는다.
“산 속에서 풍악을 들이니 어떻습니까?”
“내 귀는 다만 물 소리와 스님이 낙엽 밟는 소리를 들을 뿐이오.”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_노긍의 슬픈 상상
품은 식견을 세상을 위해 쓰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삿갓 같은 시인의 존재는, 지식인을 고작 말장난이나 하면서 경계인으로 떠돌다 죽게 만든 병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일깨운다.
#2 맛난 만남
만남은 멋지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가진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이런 집을 그려주게_허균과 화가 이정
#어떤 사제간_권필과 송희갑의 강화도 생활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 학생은 있지만 제자가 없다. 스승과 제자의 자리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가만히 있어도 삶의 안표가 되고, 마음에서 우러나 그 뒤를 따르고픈 사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선비가 세상에 나서 스승이 없음을 근심할 일이지, 배움이 서지 못함은 근심할 것이 못된다…”
#삶을 바꾼 만남_정약용과 강진 시절의 제자 황상
만남은 멋지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가진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상대해진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3 일상 속의 깨달음
고수들은 뭔가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핵심을 찌른다.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맑고 깊은 눈,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이 담겨 있다.
#연기 속의 깨달음_이윽과 박지원의 소품산문
세상은 하나의 큰 향로
“향은 향 연기가 되고, 담배는 담배 연기가 된다. 연기가 비록 같지는 않지만 연기인 점은 서로 같다. 사물이 변화하여 연기가 되고 연기가 변화하여 무()가 된다. 연기가 나와서는 잠깐 사이에 함께 허무로 돌아가니, 네가 보았던 전각 가운데 향 연기와 담배 연기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세상은 하나의 큰 향로일세그려.”
#천하의 지극한 문장_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
글쓰기는 지식인의 기초 교양이다. 제 품은 생각을 오해 없이 충분히 전달할 수 있으려면 문필의 힘이 꼭 필요하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랬다. 글쓰기는 생각의 힘에서 나온다. 머릿속에 든 것 없이 좋은 글, 알찬 생각이 나올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글이 아닌 것이 없다? 삶이 곧 독서다!
꼭 문자로 된 종이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독서가 아니다. 삼라만상이 다 문자요 책이다. 삶이 곧 독서다. 죽은 지식, 아집과 편견만을 조장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독이다.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_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허균의 생각
눈은 자더라도 마음은 깨어있으라
잠이란 병이 들어오는 통로다…”번뇌는 독사이고, 잠은 네 마음에 달렸다. 독사가 떠나야 편히 잘 수가 있다. 잠을 즐기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번뇌라는 독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바가 되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번뇌는 왜 생기는가? 욕심 때문에 생긴다. 내가 남을 이겨야겠고, 더 많이 가져야겠고, 그것도 모자라 통째로 다 가져야겠다기에 생긴다. 잠자리가 편치 않고 꿈자리가 사나운 것도 모두 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 독사 때문이다.
텅 비고 고요하니
마음이 잠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어떻게 다스리나? 마음을 순리에 내맡겨 텅 비우면 된다
“텅 빈 고요 속에 몸을 맡기면 몸이 순해져서 천명에 맡기게 된다. 능히 남에게 응할 수가 있다. 툭 터진 데에 마음을 얹으면 마음이 순해져서 도에 내맡기게 되므로 능히 사물에 응할 수가 있다. 혼연()한 데에 세상을 맡기면 세상이 순해져서 때에 따르기 되어 변화에 응할 수가 있다. 자연스러운 것에 일을 맡기면 일이 순조로워 이치에 내맡기게 된다. 그래서 능히 기미에 응할 수가 있다. 능히 맡기고 능히 순조롭고 능히 응할 수 있게 되면 생각이 생겨나지 않으므로 절로 단련할 수 있게 된다…이와 같이 생각을 단련하여 닦아 성명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되면 천하의 능한 일을 다 마친 것이다.”-[위순잠]
위순()이란, 말 그대로 순리대로 내맡기는 것. 몸에 고요를 깃들이고, 마음에 허공을 담으며, 분별지로 세상을 가르지 않고, 자연의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마음 속에 잡된 생각이 일어날 까닭이 없다. 마음을 단련한다 함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를 닦는 것을 말한다. 텅 비고 고요하니 분노가 일어날 일이 없고, 앞서려는 다툼도 없고, 아무리 써도 축나지 않는다.
달이 허공에 떠서 천지 사방을 밝히듯, 맑은 물이 바닥을 훤히 비추듯 일렁이는 생각을 걷어내고 걷어내면 고요만 남는다. 그 고요가 바로 ‘본 마음’이요 ‘참 나’다!
생각 단련 어이 하나? 고요히 안정하여 정성을 다해 단련하고 단련하여, 무위로써 곧게 하다.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 텅 빈 허공이다
무념의 진아()를 찾아라. 그리하여 마침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경지에 들게 되면, 신선이 따로 없게 된다.
대자유의 경계가 눈앞에 활짝 펼쳐지려면 먼저 깨달아야 한다.
순리에 맡겨 생각을 없애는 위순잠의 단계, 벽곡 수련. 벽곡이란 불이 익힌 곡식을 먹지 않는 것, 생식(잠 않자는 도사 남궁두의 수련법)
나는 이제야 알겠다. 저 단학의 수련도 결국은 마음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것을. 그것은 결코 속세를 떠나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깊은 산속에서 풀뿌리나 캐어 먹으며 사는 삶을 부추기는 것일 수 없다. 생식하고 고기 안 먹고, 잠 안 자고 수련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하늘을 훨훨 나는 신선이란 것도 결국 잡념을 걷어가 해맑아진 마음이 얻게 되는 대자유의 경계를 비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검정 구경하는 법_정약용의 유기 세 편
욕심, 집착으로 인한 가파르게 고조된 삶의 속도감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언제나 자연을 꿈꾼다. 늘 곁에 둘 수 없기에 커진 꿈이다. 옛글 속에도 이런 꿈의 조각들이 남아 있다. 바쁜 벼슬길에서 한가롭게 귀거래()를 꿈꾸는 것은 일종의 버릇과도 같다. 갈 수 없고, 실상 가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지만, 귀거래의 관념은 마음속에서 자꾸만 공룡처럼 커져서 마침내 골수에 깊이 박힌 고질이 되고 만다.
후득이는 빗방울에 옷자락을 적힐 각오 없이는 세검정의 진면목은 구경할 수가 없다. 정말 좋은 것은 싫은 일을 감내한 뒤라야 맛 볼 수 있다. 하지만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오는 심화오처럼 우리네 일은 언제나 한 발 늦는다…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그의 안목이 부럽다. 절정은 미리 알고 기다린 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절정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 속인들은 언제나 버스가 다 지나간 다음에 난리를 치지만, 지혜로운 이는 천기(天機)를 먼저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