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필자가 근무하던 직장은 전문 분야를 제외하고는 사고 예방과 다양한 업무 습득을 위해 2~3년 주기로 순환 근무를 한다.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업무를 맡았을 때 업무 방법서(manual), 전임자의 설명과 기존 처리 문서를 참고하고 따로 공부하거나 상급자의 조언을 받아 업무를 습득한다. 새 부서로 전입했을 때 상품가격 조정하는 업무를 맡았다. 제품에 들어가는 수십 가지의 국내외 각각 원재료의 원가를 계산하고, 그 원료를 투입하여 생산한 제품 원가를 계산하고, 광고 및 판매 제비용 등을 계산하여 일정한 이윤을 붙여 상품 판매가를 결정하는 업무였다.
일반적인 업무처리 방식으로 처리가 어려워 원가계산에 애를 먹였다. 포괄적 처리 순서인 매뉴얼이나 인수인계 때 받은 간단한 설명으로는 도저히 업무 추진이 어려웠다. 동료직원은 업무가 다르고, 전임자에겐 경쟁자(승진시험)고 자존심 때문에 계속 물어볼 수 없었다. 단순히 시간만 투자한다고 되는 - 계산기 두드리고 베껴 쓰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뜬구름 잡는(?) 것 같아 막막했다. 당시는 통금이 있던 시대라 일거리 싸 들고 여관에서 밤샘하기도 했지만, 업무 진척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차상위 책임자에게 문의하여 업무처리를 어렵게 어렵게 처리했다.
몇 년 전 수사 중인 검사를 코로나 역학조사 지원단에 파견하였다고 대전지검 검사가 법무부를 멍부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조직 관리자는 멍부(멍청하면서 부지런한), 멍게(멍청하면서 게으른), 똑부(똑똑하면서 부지런한), 똑게(똑똑하면서 게으른)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똑게 상사는 업무의 핵심을 짚어주고 추진 방향을 제시하고 개입을 최소화하여 부하 직원의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똑부 상사는 부하를 닦달하며 업무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지휘하여 부하들이 주눅 들고 의기소침하게 한다. 멍게 상사는 업무에 무관심하고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태만하여 후배들도 따라서 태만하고 게을러진다.
멍청하다는 것은 지능은 모자라지 않지만,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일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멍부 상사는 온갖 쓸데없는 일을 시키면서 쉬지 않고 부하를 들볶아,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부하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고갈시킨다. 필자의 상사는 똑게형으로, 제품 원가계산을 하라고만 지시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필자는 아는 지식과 전임자 처리 서류 등을 참고해 업무를 추진했지만, 조금만 진도가 나가면 막히기 일쑤였다. 상사는 업무 진척을 확인하고는 막힌 그 부분만 가르쳐주고, 또 막히면 그 부분만 가르쳐주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원가계산은 여러 단계가 있다. 원재료, 원재료 배합, 제품 생산, 판매 관리 등 각 단계마다 제동이 걸려 상급자 도움을 받았다. 부산까지 가는 것과 비유하면, 서울요금소를 지나 오산에서 막혀 상급자에게 문의하면 오산 통과 방법만 가르쳐 주고, 평택에서 막히면 평택 부분만 가르쳐주고, 또 천안에서. 이렇게 고생고생하여 제품 원가계산을 마무리하고 이익을 더한 상품가격을 결정하여 전 사무소에 판매 가격(변경)을 통보하였다. 두 달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시로 여관에서 철야를 하며 고생을 한 덕에 관련 업무를 빠르고 자세하게 터득할 수 있었다.
쉽게 배우면 쉽게 잊히듯이 남에게 쉽게 배우는 것은 기억을 잘 못 하지만, 자기가 노력해서 체득한 지식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여러 번의 간접 경험보다 한 번의 직접 경험이 나은 것과 같다. 공짜로 생겼거나 쉽게 번 돈은 헤프고, 고생해서 번 돈은 허투루 쓰지 못한다. 로또 당첨으로 거액을 받은 사람이 돈을 헤프게 낭비해서 알거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전 재벌 회장이 인터뷰할 때 사회자가, 당신 아들은 돈을 잘 쓰고 다니는데 회장님은 왜 돈을 그렇게 아껴 쓰는가 라고 물으니, 내 아들은 아버지가 회장이지만 나에게는 회장인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바쁘고 성실한 것 같지만 무의미한 노동으로 가득 차 있다. 핵심에 집중해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단순히 반복하거나, 보여주기식 일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생산 현장에서는 체계적인 시스템보다는 감(感)이 우선하는 경우가 많고, 사무실에서는 상부 지시에 따라 쓸데없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조성과 자료 축적에 소홀하여 장시간 노동을 통한 시행착오가 많다. 경험이 축적되지 않고 일회성의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러니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평균(64.7달러)의 73%에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