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4편 1-26
[서론] 신의 침묵,《사울의 아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때로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조리(Absurdity)와 비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선하게 살고자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닥쳐옵니다. 그 순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그리고 왜 지금 침묵하고 계십니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무런 개별적 죄목도 없이 가스실로 끌려갔습니다. 영화《사울의 아들》은 시체를 치우는 유대인 특수공작부대 ‘존더커만도’도 사울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된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현장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우슈비츠의 차디찬 연기 속에서 인류는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말한 ‘신의 은폐(Eclipse of God)’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셨는가?” 시편 44편은 바로 이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동일한 선상에서, 의인의 무고한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 앞에 부르짖는 공동체의 절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편 본문을 통해, 고난을 통과하는 성도와 교회가 붙들어야 할 영적 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고난의 부조리 속에서 지혜의 눈을 뜨라
본문 시편 44편의 표제어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입니다. 마스길(מַשְׂכִּיל)은 교훈, 지혜, 영적 통찰을 의미합니다. 고전 철학이나 당시의 인과응보적 세계관(신명기적 응보론)은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단순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죄를 지어서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본문은 단순한 절망의 통곡이 아니라, 기존의 합리적 틀을 깨뜨리고 고난의 진짜 의미를 묵상하게 만드는 ‘지혜(마스길)’의 노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시고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을 만날 때 무조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자책하거나 타인을 쉽게 정죄하지 마십시오. 욥에게도 그랬듯 고난은 때로 우리의 이성을 넘어섭니다. 비극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영적 안목을 잃지 않고, 나를 향한 깊은 영적 교훈과 통찰을 구하는 ‘마스길’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의 침묵 앞에서도 언약의 신실함을 지키라
본문 17절에서 시인은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셰케르)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항변합니다. 셰케르 (שֶׁקֶר)는 거짓, 속임, 배신의 뜻으로서 부정어 로와 결합하여 “배신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영화《사울의 아들》에서 사울은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안에서 소년의 시신을 거두어 유대 전통대로 장례를 치르려 목숨을 겁니다. 타자에 의해 인간성이 박탈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지켜낸 것입니다. 본문의 백성들 역시 신의 침묵이라는 부조리 속에서도 우상을 섬기지 않고 신실함을 지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버림받음의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완전한 의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침묵하는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언약을 지키신 참된 주체가 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고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 같은 순간에도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을 버리지 마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조롱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주를 배신하지(셰케르)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언약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사명으로 승화시키라
본문 22절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촌 티브하)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가 촌 티브하 (צֹאן טִבְחָה), 즉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도살할 양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홀로코스트 수용소로 향하는 열차에 실려 가던 유대인들의 무력한 모습이 바로 이 ‘도살할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무력한 고난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for Your sake)” 당하는 고난이자 순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6절에서 이 시편 44편 22절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37절에서 파격적인 반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구약에서 도살당하는 무력한 양이었던 하나님의 백성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 믿는 성도를 무력하게 보고, 때로 불이익을 주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수모와 불이익은 버림받음의 증거가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의 흔적입니다. 멸시받는 ‘도살할 양’의 자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침내 넉넉히 이기게 하실 주님을 바라봅시다.
넷째, 오직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대하며 부르짖으라
본문 23절에서 시인은 "주여 깨소서(우라)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라고 파격적인 탄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26절에서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속량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우라(עוּרָה)는 '깨소서'로서 동사 우르(עוּר) '깨어나다', '일어나다'의 강력한 명령형입니다. 그리고 헤세드
(חֶסֶד)는 '인자함', '언약적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주장했지만, 구원의 최종적인 근거를 자신들의 공로에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인 ‘헤세드’에 둡니다.
하나님의 이 완벽하고 끊어지지 않는 ‘헤세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우리가 마침내 부르짖고 의지할 유일한 소망은 우리의 잘남이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 ‘헤세드’입니다. 절망의 바닥에 엎드러져 있을 때, 솔직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의 헤세드가 마침내 우리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실 것입니다.
[결론]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영화《사울의 아들》의 비극적인 현실이나,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자고 계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의 가슴 아픈 탄식 속에서 4가지 영적 대지를 확인했습니다.
ㆍ부조리한 고난 속에서 단순한 인과응보를 넘어 신앙의 깊은 지혜와 통찰(마스길, מַשְׂכִּיל)을 가지십시오.
ㆍ신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지(셰케르, שֶׁקֶר) 마십시오.
ㆍ 우리는 도살할 양(촌 티브하, צֹאן טִבְחָה)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입니다. 주를 위해 당하는 수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ㆍ내 공로가 아닌, 결코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 חֶסֶד)만을 끝까지 의지하며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며 신실함을 지켜내는 성도에게, 마침내 부활의 아침과 승리의 은혜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모든 성도님들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