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신인상 당선자 스크랩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12월호, 제170회 신인상 수상작] 살구나무 한 그루 - 김미숙
신아출판 추천 0 조회 114 15.12.08 19: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스산한 바람과 함께 짧아지는 햇살에 살구나무는 하나 둘씩 잎을 떨어뜨리고 몸을 움츠리며 하루하루 앙상함이 더해 간다. 마침내 나뭇잎 하나 없이 차디찬 칼바람을 맞으며 고통을 인내하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다. 온갖 고생하시며 육남매를 길러내신 어머니의 모습인 듯 애잔하다.
   차가운 겨울밤 살구나무는 함박눈에 몽실몽실 눈꽃을 피우고 새하얀 아침을 선물해 준다. 나와 누렁이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거대한 공룡이 너럭바위에 발자국을 새기듯 온 마당을 뛰어다니며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긴다. 한참을 뛰어 숨이 찬 나는 고개를 들어 살구나무를 쳐다보았다. 하얀 눈송이가 화선지에 물감이 번지듯 서늘하게 얼굴에 스며든다."

 

 

 

 

 

 

 살구나무 한 그루        -  김미숙


   봄이 한창이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연둣빛을 머금고 솟아오르던 잎들은 어느새 초록으로 물들어간다.
   이젤 위 그림에 정신을 빼앗기다 무심코 창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하얀 벚꽃이 수만 개의 옥수수 튀밥을 흩뿌려 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었다. 3층 미술실에서 바라보는 꽃은 눈높이가 딱 맞아서 벚꽃 뭉게구름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듯하다. 눈부신 봄꽃을 보니 고향집 마당의 살구나무 한 그루가 생각난다.
   새집을 짓고 이사한 후 곧바로 내가 태어났으니 살구나무도 그때쯤 심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마을 뒤엔 나지막한 산이 있고 작은 집들은 속삭이듯 옹기종기 앉아 있다. 찬바람을 헤집고 살구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마당은 온통 꽃 세상이 된다. 봄날 살구나무 아래 평상은 새참 감자를 깎는 소녀와 순진한 눈을 껌벅이며 졸고 있는 누렁이 차지다. 감자를 깎던 숟가락은 닳아서 반달이 되고 시나브로 나무는 초록 열매를 맺는다. 풋살구를 한 개 따서 살짝 깨물면 입 속에 침이 가득 고이고 신맛이 얼굴과 온몸의 세포를 톡톡 깨운다.
   살구는 한동안 초록과 주황이 어우러지더니 언제 초록이었나 싶게 주황색으로 익어간다. 그 무렵 우리는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노랗게 익은 살구를 줍는 상상을 하며 나무 곁으로 달려간다. 그러면 보답이라도 하듯 나무는 먹음직한 살구를 서너 개씩 선물로 준다. 말랑말랑한 살구를 먹으면 부드러운 속살이 입 안에 사르르 녹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 퍼진다.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에 나뭇잎도 지쳐 시들어가는 여름이면 냇가에서 주워온 자갈을 꺼낸다. 무슨 의식이라도 하듯 치마에 자갈을 담고 나무 그늘로 옮겨 동그라미 안에 쏟아 붓는다. 그리곤 친구들과 둘러앉아 손톱이 닳도록 공기놀이를 한다. 어떤 날은 나무에 올라가 안내양 흉내를 낸다. 발을 쾅쾅 구르고 “오라이!” 하며 나뭇가지를 흔들면 살구나무는 눈 깜작할 사이 서울, 부산에 도착하는 요술버스가 된다. 덕분에 이마에는 그날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는 증표 하나 희미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나무 위에서 저 멀리 동구를 내려다보면 물비늘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냇물에 내 마음도 강물처럼 일렁였다. 그 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물수제비도 뜨다가 입술이 파래지면 나와서 엄마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자갈에 누워 몸을 데우고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일요일이면 나무 아래 평상에 엎드려 동화책을 읽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강가를 거닐다 예쁜 꽃을 발견한다. 청년은 꽃을 꺾어 연인에게 바치려고 강을 헤엄쳐 갔다가 급류에 휘말리고 만다. 꺾은 꽃을 애인에게 던지며 “나를 잊지 마세요.” 하며 죽어갔다.’는 물망초 꽃말에 얽힌 전설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꽃말 하나하나의 전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밤늦도록 읽다가 품에 안고 잠들기도 하고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 고종사촌 언니가 선물해 준 동화책은 또 한 명의 친구였고, 지금도 선물하면 그 책이 먼저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가을이면 살구나무도 진초록과 주황, 붉은 잎이 한동안 공존한다. 이즈음 나무 아래 평상은 나와 막내오빠의 놀이터다. 뜨거운 고구마를 한 개씩 들고 왼손, 오른손으로 옮기며 후후 분다. 무릎을 치켜들고 영국 근위병처럼 걸으며 오빠 뒤를 졸졸 따라 마당을 한 바퀴 돈다. 그러면 먹기 딱 좋을 만큼 알맞게 식는다. 평상에 앉아서 고구마를 먹고 또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먹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즐거운 놀이고 설렘이었다. 행복한 순간들이었기에 그립기만 하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짧아지는 햇살에 살구나무는 하나 둘씩 잎을 떨어뜨리고 몸을 움츠리며 하루하루 앙상함이 더해 간다. 마침내 나뭇잎 하나 없이 차디찬 칼바람을 맞으며 고통을 인내하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다. 온갖 고생하시며 육남매를 길러내신 어머니의 모습인 듯 애잔하다.
   차가운 겨울밤 살구나무는 함박눈에 몽실몽실 눈꽃을 피우고 새하얀 아침을 선물해 준다. 나와 누렁이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거대한 공룡이 너럭바위에 발자국을 새기듯 온 마당을 뛰어다니며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긴다. 한참을 뛰어 숨이 찬 나는 고개를 들어 살구나무를 쳐다보았다. 하얀 눈송이가 화선지에 물감이 번지듯 서늘하게 얼굴에 스며든다.
   고향집 살구나무는 사계절을 함께한 다정한 친구이다. 그렇게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더니 언제부터인지 봄이 와도 잎도 꽃도 열매도 맺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 이듬해 봄 혹시나 잎이 날까 연둣빛을 찾아 매일 나무 주위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잎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찬란한 봄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무는 베어졌다. 가슴 한편에 휑하니 바람이 지나갔다. 늘 곁에 있어서 몰랐던 소중함을 살구나무를 잃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지 못함에 미안함과 후회가 밀려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함과 아쉬움에 가슴이 아렸다. 지금 나와 더불어 함께하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왜 그렇게 몰랐을까.
   이제는 고향집도, 동무들도, 어린 시절도 사라졌지만 살구나무 한 그루만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내 마음속에 있다.

 

 

김미숙  ----------------------------------------
   영남대 국문학과 졸업, 창원대 특수교육학 박사, 진등재수필문학회 회원, 현 통영잠포학교 교사

 

 

당선소감


   아침 바다가 잔잔한 날, 출근과 함께 날아온 당선 소식은 기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마음에 가득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것이 녹록지 않아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속의 어지러운 방황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 용기를 내어 봅니다.
   유년의 추억으로 또 다른 출발선에 섰습니다. 작은 설렘과 기대로 가슴이 뜁니다. 조급해 하지 않겠습니다. 뒤늦게 찾아온 수필이란 동반자와 천천히 한 걸음씩 끝까지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이끌어주시고 항상 격려로 자신감을 주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예쁘게 봐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드립니다. 마음 약해질 때 서로 격려해주며 함께하는 문우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비 온 뒤의 햇살이 유난히 반짝이는 오늘, 창밖은 온통 가을빛입니다. 가슴에 품은 이야기 하나 둘씩 펼치며 따뜻한 차 한 잔의 향기를 머금은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