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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책망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1) 행위를 안다
믿음의 신앙 상태를 안다. 사랑과 채찍이 담겨진 생명의 말씀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붙잡으신 그 권능으로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를 아신다. 내 모든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의 행위에 대하여 세 가지 내용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첫째가 외형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그들의 건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원들이 찬란하다. 둘째는 이름의 의미이고, 셋째는 교회의 내면적인 모습이다.
고대의 사데는 위풍당당한 도시로, 천연적인 요새지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명성도 없고, 시민들은 과거의 명성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이런 시민들의 안일한 정신상태가 교회로 들어와서 이단의 고통이나 외부적인 핍박도 없었던 이 교회는 이교도의 환경과 쉽게 타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떠난 행위들은 죽은 것이라고 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이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책망하신다.
'행위'가 사데 교회의 과거 업적을 말하는지 아니면 과거의 명성만 주장한 채 현재는 생명을 상실한 모습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음 절에서 '온전한 것이 없다'는 선언으로 보아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Johnson).
사데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이단의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다. 사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죽었다'는 표현은 사데에서 약 11km 떨어진 언덕 같은 수많은 묘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표현이 종종 전통만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Kiddle, Moffatt) 사데 교회가 외적인 형식과 모습은 갖추었으나 신령한 모습은 상실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① 이교도와 타협하여 생명력을 잃은 교회.
②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교회.
③ 육적인 능력은 가졌으나 영적 생명력과 능력이 없는 교회.
* 사 59: 10 -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 마 8: 22 -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3) 사데 교회가 가지고 있었다는 살았다고 하는 믿음
① 주여, 주여 하는 외식적인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 마 7: 21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②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는 신앙은 있었다.
* 사 1: 12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③ 더러운 것으로 드리는 예물은 있었다.
* 말 1: 8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④ 땅에 묻어 둔 직분은 있었다.
* 마 25: 24-28 -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⑤ 불법을 행하는 권능도 있었다.
* 마 7: 22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⑥ 들 포도를 맺은 열매는 있었다.
* 사 5: 4 -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3: 2 -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1) 권면 -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책망에 이어 새로운 권고를 하신다. 주의 이런 권고에는 사데 교회가 아직은 소망이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게 한다.
(1) 일깨워.
'일깨워'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그레고논'(*)은 현재 미완료 시상과 현재 능동태 분사가 결합되어 계속적인 경성(警醒)을 시사한다(Moffatt, Beck, Robertson).
사데 지역이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안일에 빠져 두 번씩이나 점령을 당했던 사데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Mounce, Lenski). 그리스도께서는 '일깨워'라는 권면을 사데 교회에 하심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함과(3절) 동시에 사데 교회가 비록 죽음 직전에 있으나 완전한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Weymount).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으로 일깨우고, 회개로 일깨우고, 기도로 일깨우고, 순종으로 일깨워야 한다.
① 종말의 신앙 모습
* 마 25:1-13 = 열 처녀의 비유 -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쌔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쌔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② 종말을 기다리는 자의 태도
사데 교회에 주어진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끊임없는 관심과 그 관심을 통하여 아직은 희망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마 24: 42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 벧전 5: 8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2)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러면 '그 남은 바'는 무엇일까? 사데 교회의 신앙상태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은 교회의 생명이 되는 믿음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성경의 '남은 자' 사상은 전반적으로 흐르는 맥이라고 할 수 있다.
'굳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원문을 보면, '고정시키다, 단단하게 하다'를 의미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있는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순종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교회의 내적 생명인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자'였으나 그 소망이 완전히 끊겨진 상태가 아니라 아직은 믿음의 소망이 남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적으로는 중세 가톨릭의 타락이 종교 개혁을 기점으로 극치를 이루는 지경에 와 있을 그 때에, 중세 교회의 모습은 '죽은 자'같지만 '남은 자'인 종교 개혁자들이 있었음을 입증한다.
① 남은 바
* 사 6: 13 -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사 10: 22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 겔 5: 1-4 - 1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2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3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가져 네 옷자락에 싸고 4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 롬 11: 2-5 -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② 죽게 된 것 - 신앙의 행위로 회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죽게 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에메론 아포다네인'(*)은 미완료 능동태 시상으로 사데 교회가 부분적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Swete). 이 말씀은 죽기 전에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조금 남은 것이라도 꼭 붙잡으라는 것이다. 교회가 다 타락했는데, 루터 개혁파만 남아 있었다. 그것이라도 붙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완전히 망한다. 바로 이런 의미다.
* 슥 11: 16 -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 마 6: 2-4 -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눅 22: 31,32 -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③ 굳게 하라.
'굳게 하라'의 헬라어 '스테리손'(*)은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아직 남아있는 영적 생명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시사한다. 그들의 영적 진단은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직 살아남아 있는 적은 부분이 있었다. 이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성 할 소망까지 뿌리째 뽑히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굳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을 그루터기로 하여 다시 세워 나가라는 말씀이시다. 이들은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성도의 영적 수준의 척도를 측량할 수 있다.
⒜ 서론적인 수준으로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이는 시작한다.
⒝ 목록적인 수준으로 계시록의 줄거리를 말할 정도로 영원한 복음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 본론적인 수준으로 복음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이라고 본다.
성도가 복음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려고 하면 힘들고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주시기까지 도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는 두 부류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말세의 교회에 비밀이 있다. 신령한 영적교회(계 12: 1-6)이거나 음녀교회(계 17: 1-3)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 진리와 비진리, 알곡과 쭉정이, 붙들린 별과 떨어진 별, 신령한 영적교회와 음녀교회가 함께 할 수 없다. 별의 비밀과 촛대의 비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종이면 다 종이 아니고, 교회면 다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론적인 수준, 목록적인 수준에 있으면서 그 자리에 머무르거나 만족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인 것은 알기에 말씀을 전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에 진리와 생명이 본론적인 수준에 비하면 부족하다. 본론적인 수준에 이르러야 그 안에 생명의 기운이 역사하기에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행위의 온전함 -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온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메나'(*)는 충만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플레로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라기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온전함을 말한다.
* 왕상 11: 4 -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 겔 34: 8-10 - 8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9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 사 56: 10 -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① 사데교회가 외적으로 보기에 풍성하며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시기에 허망하였음을 시사한다(Greijdanus). 신앙의 행위가 장성한 자가 아니요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들의 신앙이라는 말씀이다.
* 히 5: 12-14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② 온전(穩全)한 자란 장성한 자로써 결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과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 장성한 자요 온전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 선지자들의 신앙 위에 자기를 건축하여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장성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 엡 4: 13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 엡 2: 20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성도(사도와 선지자)들의 옳은 행실이었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 온전한 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이다.
* 계 19: 6-8 -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③ 신(神)만이 온전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神)이 되어야 한다.
* 요 10: 35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④ 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의의 옷을 입은 자들이 없으며 자기의 옷을 찾아 입고 다니는 자들이 없으며 거룩한 성에 들어가기 위하여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 계 16: 15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계 22: 14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⑤ 성도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온전한 자들이 되어야 하며, 성경으로 온전(穩全)한 자들이 되어야 하며, 도(道)의 초보를 버리고 온전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 마 5: 48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눅 6: 40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 딤후 3: 16,17 -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히 6: 1,2 -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 고전 3: 1-3 -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말씀이 없으면 재창조를 받을 수 없다. 기도는 몇 시간도 할 수 있는데, 말씀을 10분도 읽지 못한다면 영적 기능이 한 쪽으로 쏠린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을 줄이고 말씀 읽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기도응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말씀이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 말씀이 없다는 것은 예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으로 재창조하시는 역사는 된 일의 말씀이 아니라, 될 일의 말씀이다.
⒜ 될 일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 겔 3: 1-3 -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 계 10: 8-10 -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 말씀이 우리 속에 채워져야 한다.
* 히 4: 12,13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심령의 성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과 용기, 자신감과 담력이 가득해진다. 그러나 교만해지지 않는다. 주를 향한 마음이나 복음을 향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감정을 따르지 않고 감동을 따른다.
⒟ 머리가 재창조 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정신, 즉 생각과 판단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개조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을 맞는 역사다. 이러한 수준에 이를 때에 지혜와 총명, 명철, 영감에 통달하는 영이 오게 된다.
⒠ 체질이 재창조 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변화체, 알곡 열매, 예수 형상을 이루는 역사를 의미한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여주시는 역사다. 체질의 변화가 되면 새 힘을 받아 가벼움을 느끼게 된다. 심령, 머리, 체질의 재창조를 받은 사람은 그 삶에 변화가 오게 된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자신이 재창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밑 빠진 항아리가 아니라면 물을 부으면 물이 채워지는 것과 같이 우리도 말씀으로 끊임없이 채워져야 한다. 어느 정도 채워지면 변화되는 느낌이 있게 된다. 은혜가 충만해지면 육체의 피로나 졸리지 않고 배고픔도 잊게 된다. 그 때 말씀을 읽어야 한다. 심령의 변화는 자신의 신앙과 관련이 있으니 필요하고, 머리의 변화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하다. 체질의 변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들이 살기위한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