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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물과 악어의 눈물
누가복음 19:41-44
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42.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43.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와
44.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이죠.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데서 붙여진 이름(요12:13)입니다. 부활주일 전 주일로서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성경에 종려나무로 지칭되는 것은 ‘대추야자 나무’입니다. 히브리명으로는 타마르, 헬라명은 포이닉스죠.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존경과 기쁨,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레 23:40, 시 92:12, 사 9:14). 또 의인(시 92:12), 신부의 품위(아 7:7~8), 이스라엘 통치자(사 9:14)와 멸망(요엘 1:12) 등에 대한 의미로도 사용되었죠.
구약 시대에 상인과 순례자들이 사막을 여행할 때 멀리 종려나무가 보이면 깊이 안도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종려나무가 있는 곳에는 샘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오아시스 근처에는 길이가 무려 15m 넘는 종려나무들이 신기할 정도로 쑥쑥 자라 숲을 이루었습니다. 종려나무는 뿌리가 100m 이상 깊이까지 뻗어가기 때문에 사막성 기후에도 잘 자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사는 사람들은 종려나무를 ‘생명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생명력이 강한 이유도 있지만 열매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야자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열매는 대추 모양과 비슷하나 크기는 대추보다 3~4배 크며, 맛은 꿀에 절인 듯 달콤하다고 합니다. 종려나무는 100~150년을 살며 풍성한 열매를 맺어 유대인들에게 다산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한 나무에서 100kg 정도의 열매를 수확한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또한 열매는 말리면 3년 정도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크로드가 개발되고 대상들이 먼 길을 왕래할 수 있었던 것도 종려나무 열매 덕분이라고 하죠. 지금도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은 말린 종려나무 열매를 주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종려나무의 생명력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식물학에서 종려나무는 불사조를 뜻하는 Phoenix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강력한 태풍이 불어도 서너 시간 정도 구부러져 있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종려나무는 구부러져 있을 때 그 뿌리가 오히려 강해진다고 하죠. 그러니 강풍을 이겨낸 후 더 튼튼하고 크게 자라납니다. 종려나무는 그루터기를 불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자랍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종려나무는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예루살렘 점령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입성시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 것입니다. 군중들은 새 시대를 열어 줄 지도자를 환영하고, 그가 가져다줄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독립과 경제적 풍요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려주일에 있었던 이야기 중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시며 슬피 우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며 환호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38절)"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 끼여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39절)" 하고 항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40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화 이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한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2-44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시며 우신 이유는 무얼까요? 적어도 3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는 유대 백성들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들은 로마의 식민지 상황 속에서 정치적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로마군대와 친로마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고 새 유대를 세우리라는 희망에서 였죠. 그들은 곧 왕위에 오를 예수님을 환영하며 그가 이루어 줄 평화와 하느님의 영광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와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정치적 행동으로 일어날 소요와 그에 대한 결과를 우려하여 백성들의 선동을 막아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요구를 일축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군중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외치는 소리, 즉 평화에 대한 요구는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청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군중들이나 바리새인이나 하느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그 평화는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저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이루시려는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평화를 역행하고 식민지배와 민중 착취의 현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외세에 기대어 호의호식하며 종교를 병들게 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이 득실거리고 있죠. 무도한 권력과 돈의 노예가 되어 탐욕스런 삶을 살고있는 기득권 무리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런 배역의 땅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최후의 싸움을 위해 입성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싸움의 의미를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군중들은 정치적인 왕으로서 입성하여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장차 닥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은 외관상으로는 평안하고 활력이 넘치는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 상황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것을 그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거듭 경고했지만 친로마 기득권 세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오늘 예수님의 예언대로 결국 이 일은 40년 뒤, AD 70년에 이루어 집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기 바로 직전은 유월절이어서 순례자를 포함해 백여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 성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티토장군이 이끄는 정예부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외부의 모든 공급을 차단시켜 버렸죠. 결국 AD 70년 8월 27일에는 그토록 웅장하고 장엄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 버리고 9월 24일에는 예루살렘 전역이 정복당합니다.
그 멸망의 현장에 있었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티토가 예루살렘을 에워싸자, 예루살렘의 기근은 극에 달했으며, 그들은 나중에 먹을 것이 없어지자 가죽 제품이란 가죽 제품은 모조리 삶아 먹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느 여자는 살아있는 자기 자식을 삶아 먹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나중에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함락 후에 약탈하러 각 집을 방문했다가 굶어 죽은 시체들이 방에 가득한 것을 보고 망연자실할 정도였다.
티토는 몇 번이나 항복을 권유했지만, 강경파 유대인들에게 장악된 예루살렘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로마군에 의해서 죽은 사람 보다 굶거나 강경파에 의해서 살해된 사람이 더 많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무려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결국 로마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으며, 성은 초토화되었고, 성전의 돌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 국가는 와해되었다. 이때가 AD 70년이었다. 남은 백성들은 병약한 자들은 로마군에 의해 학살되고 건장한 자들은 노예로 끌려갔으며, 나머지 유대인들은 나라 없이 떠돌게 되었다.>
세 번째는 죄 없는 민중들이 당할 처절한 고통 때문입니다.
44절의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 시 닥칠 무서운 현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40여 년 뒤 로마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무너지고, 죄 없는 백성들이 어린 양처럼 바위에, 나무에,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저 처절하게 죽게 될 것을 아시기에 우시는 것입니다.
이 끔찍한 멸망을 막지 못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만든 유대의 지도자와 어리석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로마에 기대어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며 착취한 유대의 권력 집단들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그리고 그들 편에서 자신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추종자들이 그 다음입니다.
무지해서 지배 계급에게 착취를 당한 백성들도 면피할 수는 없습니다. 불의에 항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 진리와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분 상승과 사익을 추구하려는 심뽀가 그들 역시 멸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현실을 보며 슬피 울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평화 실현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 고난을 택하신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이란 말 들어 보셨죠. 가짜 눈물로 동정심과 연민을 유도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정치인들의 거짓 눈물 또는 위선적인 행위를 조롱할 때 많이 쓰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고대 서양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옛날 옛날 ‘이집트의 나일강에 악어가 살았고 그 악어는 사람을 보면 잡아먹는데, 그럴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눈물샘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악어가 먹이를 삼키기 좋게 입 안에 수분을 보충시켜주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눈물도 나온다는 것이죠.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하품을 크게 할 때 눈물이 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먹이를 먹고 난 뒤 체내에 과잉된 소금을 없애기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사람도 악어처럼 음식을 먹을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죠. 코끝이 찡해지는 고추냉이나 혀끝이 알알해지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눈물이 납니다. 이는 자신에게 제공된 먹잇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죠. 그저 미각적 자극으로 일어나는 눈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악어와 다른 점은 생리학적인 자극뿐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으로도 눈물을 흘린다는 점입니다. 슬플 때, 아플 때, 서러울 때, 기쁠 때, 때로는 감동적일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깨우침을 얻는 순간에도 눈물 납니다. 깊은 은혜에 감사하고, 회개와 용서의 경험을 하고 흘리는 눈물도 있죠.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흘리는 눈물. 내 삶의 고난의 정체를 마침내 깨닫고 쏟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심지어 가짜 눈물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가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동정심을 사기 위해 억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악어는 아니지만 사람에게는 ‘악어의 눈물’, 즉 위선자의 눈물이 실재한다는 것이죠.
눈물에 대한 의학적 견해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어떤 감정에 대해서 인지할 때 뇌에 있는 변연계라는 곳을 사용합니다. 슬픔과 기쁨, 사랑과 분노와 같은 감정을 인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 감정은 시상하부에 전달되고, 시상하부에서는 신체 기관이 이에 대해 반응하도록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인체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뇌의 역할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처리하는 기관입니다. 뇌는 주변 상황에서 여러 가지 조건과 정보를 수집하여 생존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구별하는 역할을 수행하죠.
우리는 이러한 뇌의 처리 과정을 기쁨이나 행복 그리고 슬픔이나 고통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뇌의 역할은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전전두엽 즉 주변적인 기능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감정적인 충동을 받을 때 눈물이 날까요?
첫째, 눈은 해부학적으로 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뇌의 상황에 따라 민감한 표현이 가능한 기관이라는 것이죠. 둘째, 사회적 진화과정에서 눈물은 감정표현의 수단으로 발전되어왔습니다. 인간은 역사 발전과 더불어 여타의 동물들처럼 강한 이빨과 발톱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보다는 사회적 공감을 토대로 높은 지위를 얻어 왔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사회생활에 훨씬 유리해진 겁니다.
의학적으로 눈물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이 많이 함유돼 있다고 합니다. 펑펑 울고 난 뒤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감정의 종류에 따라 눈물 성분 또한 달라진다고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교감신경이 흥분해 눈물의 수분은 적어지고, 대신 염화나트륨 농도가 짙어진다죠. 짠맛이 더 진하다는 뜻입니다.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은 산성도가 높아 신맛이 나고, 기쁘거나 감격해서 나오는 눈물엔 약간의 단맛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 2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8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서해수호 55 용사를 일일이 호명하며 눈물을 짜냈다고 합니다. 김건희씨도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데 어느 유튜브 진행자는 김건희 씨가 카메라와 눈이 마주친 후에 눈물 연기를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눈물을 보인 윤석열 대통령이나 김건희씨의 눈물은 매우 섬뜩한 퍼포먼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1차연평해전은 1999년 6월에, 2차연평해전은 2002년 6월에 발생했습니다. 대통령이 10년이 훨씬 넘은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감성이 풍부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윤 대통령의 1년 행적을 살펴 본다면 너무 섬뜩한 일입니다.
더 큰 문제는 55명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태도에 있습니다. 이 죽음과 희생에 대한 일방적 애도와 북한에 대한 적대감 표출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에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적대를 해소하기는커녕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결 태세를 유지하면서 툭하면 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물난리 속에 죽어간 반지하 희생자들의 방을 방문했을 때나, 10·29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이러한 공감을 보여 준 바가 없습니다. 특히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의 경우 그 이름을 부르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이 부르지도 못하게 철저히 막았죠. 희생자의 이름을 어렵게 입수해 공개한 언론사에는 압수수색과 구속 영장 청구 등 위해를 가하기까지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선택적으로 처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염려스럽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기준과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서 죽음조차 등급을 나누고 피아를 나눈다는 것이죠.
더더욱 대통령이 자신이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희생의 경우에는 인간적 감정의 작동을 억제하거나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제대로 대비하거나 대처하지 못해서 일어난 재난의 경우에 더욱더 미안함과 책임감을 느끼고 함께 눈물 흘리며 위로하는 게 당연한 데도 적반하장입니다.
오늘 종려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흘린 눈물이 이 땅에서 다시 흐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악어의 눈물로 백성을 조롱하는 못된 권력과 기득권 세력이 사라져 백성들 눈에서 눈물이 걷히는 세상이 오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힘쓰고 행동하는 모든 이들에게 부활의 은총이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2023.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