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믿었던 선수, 오승환이 3점 홈런을 맞으면서 한국 야구는 이번 도하 아시안게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습니다.
팬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죠. 지난 3월, WBC때 쏟아졌던 찬사는 저주에 가까운 악다구니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서로 연관돼 있습니다.
WBC 예선 때 한국과 일본이 본선에 올라가고 대만은 아시아 예선 3위에 그쳤습니다. 이때부터 대만은 절치부심, 아시안게임에서까지 망신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의를 다졌을 겁니다. 만약 한국이 여기서 대만에 패했다면 - 해외파가 출전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이럴 수 있었죠 - 아마 이번 아시안게임에는 전 선수가 삭발을 하고 나오든가, 무슨 수를 썼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떻게 보면 아시안게임에서의 졸전은 WBC 4강때 이미 예고돼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3월에 세계 4강까지 한 선수들에게 풀시즌을 뛰고, 상당수 주축 선수들은 코나미 컵까지 뛰고, 12월의 아시안게임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프로를 운영하는 나라라면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시도하는 건 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WBC를 할 때부터 '여기 출전한 선수들은 올 시즌에 체력 저하를 겪을 것'이라는 것이 예견되고 있었죠.
결과론이겠지만 이승엽이 WBC를 치르지 않았다면 시즌 막판에 부상으로 우즈에게 홈런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WBC에서 얻은 자신감이 올시즌 이승엽의 호성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단기전이면 몰라도 장기전에서 이런 애기를 하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지만 체력저하는 생각보다 큰 문젭니다. 평소 야구선수들이 12월-1월의 체력훈련을 거쳐 3월부터 서서히 실전 감각을 올리는 것에 비교하면 한달 빨리 실전 모드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시즌을 깎아먹었다는 뜻이죠. 이 선수들에게 12월까지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라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선수처럼 프로에 처음 뛰어들어 체계적인 체력관리 프로그램 없이 첫 시즌에 MVP까지 따내는 등 오버페이스를 한 선수는 이제 쉴 때가 됐습니다. 류현진은 이미 한국시리즈에서도 어느 정도 한계를 드러냈죠. 며칠 쉬면 좋아질 것도 같지만, 사람 몸이라는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무리라고 치면 사실 대표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프로 선수들에게는 무리인 일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무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근을 던져주는 일입니다.
한국은 일단 당근을 쓰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병역면제'라는 먹음직스러운 당근이죠. 프로 선수들에게 한창 때의 2-3년은 몇십억원에 해당하는 현찰로 바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는 아주 짜릿하게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당근을 먹은 선수들, 즉 면제 혜택을 받은 선수들은 무엇으로 동기 부여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돈과 명예'라는 것입니다.
WBC와 당연히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대회는 야구 종주국이라는 미국을 비롯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세계적인 스타들이 모두 자국 유니폼을 입고 뛰는 대회였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메이저리거들과 국내의 톱스타들을 긁어모았죠.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글자 그대로 세계 최고 무대에서 기량을 뽐내는 것이었죠.
당연히 위에 보이는 선수들에게도 충분한 자극이 됩니다. 특히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이 대회에서의 선전이 바로 돈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호조건도 따랐습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은 이들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아직 병역도 해결되지 않은 이대호 같은 선수들에겐 충분한 도전의 동기가 있는 셈이지만, 이병규 박재홍 손민한 박진만 같은 선수들에겐 별다른 의욕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금메달. 따면 좋지만 야구 아시안게임 금메달 땄다고 누가 칭찬을 해 줍니까. "아시안게임? 그거 일본은 원래 2진 나오고 대만은 한국보다 한수 아래 아냐?" 라는게 정상적인 생각이죠. 금메달 땄다고 연봉을 더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게임을 뛰다 보면 안 아프던 곳도 아파지고, 어딘가 자꾸 잡 생각이 끼어들게 됩니다.
결국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은 '자존심'이나 '애국심'이라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좀 간지러운 얘기죠. 특히 한국처럼 '아마추어 스포츠'라는 것이 아예 없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시안게임이며 올림픽에 나가는 '아마추어 종목' 선수들 중에 진짜 아마추어는 단 한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있어 국제대회 준비는 일반인들의 승진시험이나 고시공부와 다를 게 없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못 따고 은메달에 그쳤을 때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 사람들이 금메달과 은메달의 차이에서 오는 연금의 차이, 혹은 나중에 지도자로 변신할 때의 점수 차이를 이해할 리가 없잖습니까.
이처럼 순수 아마추어라고 불리는 선수들도 모두 먹고 살기 위해 국제대회를 나가는 나라에서 프로 선수들보고 '나라와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몸을 바치라는 건 역시 무리입니다. 어디 스포츠맨들만 그렇습니까. 어느 동네에 아파트를 갖고 있느냐를 갖고 인격을 평가하는 한국같은 나라에서 스포츠맨들만 순수하라고 노래를 부르는 건 공염불일 뿐입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냐. 제 생각에는 이번 아시안게임의 '졸전'으로 분통을 터뜨리지 않으려면 다음 중 한 방안을 취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병역 면제 혜택을 받지 않은 선수들을 최우선으로 팀을 짠다 (잠시 정 반대의 제목이 나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연한 거지만 정말 최선을 다할 선수들을 데려갔어야 합니다. 이번 대표팀도 병역 미필 선수 위주로 짜여지긴 했지만 좀 어정쩡했죠.
김재박 감독은 '고참들이 아쉬웠다'고 얘기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과연 대만전이 고참들이 없어서 진 경기일까요. 경기를 본 분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고참들은 전혀 투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WBC 출전 선수들을 전면 배제하고, 정말로 죽을둥 살둥 뛰는 선수들만 뽑는게 나았을 겁니다. 공식적으로도 여론몰이를 해서 '고참 선수들 중에는 정말 자진해서 가겠다는 선수들만 선발하겠다'고 했으면, 가는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도 할 수 있었죠.
게다가 병역 혜택에 목을 맨 해외파 선수들이 제외된 건 큰 실잭이라고 생각합니다.
2.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에겐 해외 진출 혜택을 준다
자, 축구선수들은 왜 기를 쓰고 월드컵에서 뛸까요. 명예욕도 중요하지만, 국제 대회 진출이 곧 선수 본인의 국제 무대 진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구는 어떻습니까. WBC에서 발군의 활약을 편 오승환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뛸 수 있을까요. 못 갑니다. 국내 야구 규약상 FA신청까지는 아직 먼 세월이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프로로 나간 선수들은 마음대로 국내에 복귀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폐쇄적인 시스템 속에서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안 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3. 협회나 KBO 차원에서 선수들에게 거액의 보너스를 약속한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미 몇 차례의 대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탈락 때에도 '당근이 없어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됐습니다.
물론 이게 좋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이런 방법도 있다는 얘깁니다.
WBC때의 서재응입니다. 헷갈리지 마시고...
하도 답답해서 써 본 얘깁니다. 하지만 현재대로 대표팀이 운영되는 한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겁니다. 그 전에 가치의 판단이 있어야겠죠. 과연 아시안게임이라는 대회가 그렇게 목을 매어야 하는 대회인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바보라서 아시안게임에 사회인야구 팀을 파견한 건 아니죠.
국내 리그를 운영하는 프로 종목에서 과연 모든 국제대회에 1진 대표팀을 보내야 하는가. 이런 대회에서의 성적인 국내 리그 운영에 지장을 준다면 어느 선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가치 판단을 누군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1.2.3의 선택이 의미를 갖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결국 이제 야구도 축구처럼 해외 진출이 개방되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세계 시장에 나가는 '한국야구'의 강화를 위한 방안입니다. 이런 조치가 국내 야구의 흥행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국내 야구가 언제 관람객이 몇명 오느냐에 의해 운영됐느냐는 반론이 나오면 역시 할 말이 없어지죠.
뭐 그냥 그렇다는 얘깁니다. 진짜 고민은 야구기자나 야구인들이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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