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게오르기오스는 이렇게 말했다: "비잔틴 문명에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 오리엔트 문화가 공존한다. 비잔틴은 문명이 조잡하게 섞인 잡동사니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체이다."

Hagia Sophia
이러한 비잔틴 문명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은 정치,경제적 요충지로,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로마제국을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면서 제국 수도로서 자리매김한다. 이후 유스티아누스 대제 때에는 로마의 옛 영광을 재현한 인구 백만의 거대도시로 성장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오리엔트 문명까지 합쳐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독자적인 비잔틴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로마 멸망 이후 계속 상승세를 타던 비잔틴제국의 세력도 결국은 쇠퇴하면서, 영토도 줄고 군사력도 약화되어 1204년에는 제 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은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한다. 비잔틴인들은 57년만인 1261년 미카엘 8세를 필두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지만, 이미 기울어진 조국을 감당하기는 점점 버거워져서, 15세기 초에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영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의 속국이 되어 황제 즉위도 그들의 자문을 구해야 했으며, 투르크의 정복활동에 그나마 조금밖에 남지 않은 군대를 지원병력으로 보내야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삼중성벽
이런 비참한 정세 속에서도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아시아와 유럽 간 활발한 교역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으며, 베네치아나 제노바, 앙코나, 피사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업 세력권이기도 했다. 이런 도시를 그리스 너머 트라키아 지방까지 정복한 투르크가 가만히 놔둘 리는 없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몇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도시의 삼중성벽은 동시대 유럽 전체에서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하고 있어 공격은 번번히 실패를 거듭했다.

Sultan Mehmed II
그 중심에 콘스탄티누스 11세와 술탄 메메드 2세가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온후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수십 년에 걸친 외세의 침략과 불길한 예언(비잔틴 제국은 초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와 이름이 같은 황제 때에 멸망한다는)등으로 공포에 휩싸인 민심을 수습하기에는 그의 능력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선대 술탄들의 업적과 영토를 이어받아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보여지는, 군사적 감각이 뛰어났다.
메메드 2세는 도시를 함락시킬 목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 양쪽에 요새를 지어 상업을 봉쇄하고, 헝가리 출신의 기술자 우르반으로 하여금 공성용의 거대한 대포를 만들게 했다. 결국 1453년 5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고, 산으로 배를 올려 도시 뒤쪽의 금각만을 차지한 투르크군에 의해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무슬림의 손에 넘어가고, 비잔틴 제국도 멸망한다. 여기서 제국군의 패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같은 유럽세력인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은 거의
무관심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뻗어있었고, 독일은 선제후들간 권력투쟁으로 대외적인 일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스와 세르비아 지방은 이미 투르크 영토였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교황 역시 내분과 권력투쟁으로 비잔틴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전선인 헝가리와 폴란드는 바로 몇 해 전 바르나에서 투르크 군대에 박살났기 때문에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이들 서유럽 군주들의 마음속에는 이번에도 콘스탄티노플이 잘 견딜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예전에 몇 차례에 걸쳐 투르크의 공격을 막아낸 콘스탄티노플이니, 이번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사방이 포위된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이런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 서유럽 군주들의 원군을 미미해서, 용병 2000명 정도가 지원병력의 전부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민들 중에 끌어모아 만든 제국 방위군이 5000명, 거기다 용병 2000명까지 총 방어병력은 7천에 불과했고, 공격측인 오스만 투르크는 반(反)비잔틴 유럽 병사들까지 포함해 17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흉흉한 민심에 매일같이 날아오는 300kg짜리 석제 포탄, 개미떼같이 기어올라오는 적군에 제국 수도는 50일을 버텼다. 서유럽의 본격적인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결국 지원병력 같은 건 오지 않았고, 오스만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넘어 레스보스, 키오스 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을 점령해나가면서 결국 오스트리아 빈까지 밀고 들어간다.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는 그때까지 유럽 군주들은 앞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전에만 집중하다 엄청난 결과를 불러 일으키게 된 꼴이다.

Constantine XI Palaiologos - by Tilemahos Efthimiadis, 9 August 2009
제국의 패전 요인
두번째. 그당시 2000여명의 용병을 이끄는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주스티니아니라는 용병대장이었다. 투르크의 침공이 가시화되었을 때부터 그는 황제와 더불어 전군을 시찰하고, 훈련을 감독했다. 하지만 치열한 공방전 중에 부상을 입은 그는 전투중에 도망쳐버린다. 용병대는 그를 따라 도망쳤다. 물론 목에 치명상을 입은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록 그가 도망쳤지만, 그로 인해 생긴 구멍은 남은 방위군이 금방 메웠고, 전투에 큰 지장을 초래한 건 아니기 때문에, 패전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황제와 함께 방어측의 상징이었다. 매일같이 모습을 드러내고 병사들을 격려하고, 콘스탄티노플 공성이 계속됨에 따라 그는 단순한 용병대장이 아닌, 다른 비잔틴 중신들보다 더욱 중요하고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실제로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도시를 훌륭하게 방어한 전략들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도망치는 모습을 본 부하들과 도시 방위군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물론 주스티니아니는 부상을 당한 뒤 배를 타고 도주한 지 사흘만에 배 위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같은 군 지휘자로서 개떼 투르크군에 뛰어들어 산화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와 대비된다. 주스티니아니가 지도자, 리더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부상을 당한 마지막 순간에 '쫄았다'. 자신을 내려친 투르크의 칼에 '쫄아서', 점점 힘들어지는 전투에 '쫄아서'
그는 리더로서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다. 그것도 불명예스럽게.

Painted by Fausto Zonaro
비잔틴 멸망을 이끈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에는 이 두 가지 결정적인 패인이 존재했다. 동맹국이면서도 안일한 생각에 빠져 결국 자신들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서유럽 군주들과,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지도자로서의 기개를 보여주지 못한 주스티니아니의 태도, 또 결정적인 패인은 아니었지만 적군이 도시를 공격하고 있는데도 서로간에 협력은 어렵다고 떠들었던 종교분쟁 덕분에, 술탄 메메드 2세와 그 후대 투르크 군주들은 소아시아를 기반으로 그리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중해의 수많은 섬들을 공략하여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사진자료: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