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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도(道)와 하나 되어 (In accord with the Way)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숙명통을 얻고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한결같이 하면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닦아서 먼지가 제거되면 밝아지는 것과 같다. 욕심을 끊고 구하는 바가 없으면 숙명통을 얻게 될 것이다.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위대한 것입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참된 것은 도(道)를 실행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위대한 것은 듯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삶을 초월하는 데 있다. 삶은 바로 목적을 깨달을 기회인 것이다. 목적은 삶 속 깊이 숨겨져 있어서 바깥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그대는 중심을 바로 꿰뚫어야 할 것이다. 삶은 씨앗과 같다.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씨앗이 발아하여 나무가 되고 꽃이 피기까지 그대는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삶이 삶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 중의 하나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중도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고 있어서 삶이란 그보다 더 깊고, 더 높고, 초월적인, 훨씬 초월적인 어떤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잊는다.
만일 삶 자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마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대학에 집착한 나머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학은 그저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위하여 교육시키는 곳이다. 대학은 준비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대학(university)이라 부른다. 그 자체로는 우주(universe)가 아니라……단지 준비 과정일 뿐이다.
동양에서, 삶은 그보다 훨씬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위하여 수련하고 훈련하는 대학과 같다. 삶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그대는 다시 또다시, 해마다 대학에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익하고 의미 없는 일이다. 대학은 준비하는 곳이다. 대학은 어느 날 반드시 그만두어야 하는 곳이다. 그것은 준비 과정일 뿐이다. 준비가 끝없이 지속된다면 짐이 될 뿐이다.
그러한 일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삶을 목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끝없이 준비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들은 끝끝내 여행은 떠나지 못하고 단지 준비만 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이 무감각한 몸짓이 될 때, 거기 경이란 없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대 자신을 생각해 보라. 늘 계획만 세우고, 늘 떠날 준비만 하고, 늘 여행사에 문의만 할 뿐, 결코 떠나지는 않는다. 결코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그대는 미칠 것이다.
삶 자체로는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그대의 자세가 이렇다면, 삶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때 그대의 모든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삶에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진정한 의미는 삶을 초월하는 데 있다. 그대는 그것이 나타내는 핵심을 꿰뚫어야 할 것이다.
삶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운의 가장자리에 머무르는 것이다. 붓다는 그 원주를 수레바퀴라고 부른다. 수레바퀴가 상징하는 것은 참으로 심오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원주를 붓다는 수레바퀴라 부른다……그것은 끊임없이 돌고 있다.
소가 끌고 가는 수레의 바퀴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라.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 위에서 움직인다. 바퀴의 축은 움직이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움직이지 않는 축 위에서 수레바퀴는 계속 돈다.
만약 바퀴만을 본다면 일시적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바퀴의 축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대는 영원을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원주만을 바라본다면 우연적인 것만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중심―수레바퀴의 축에 이를 수 있다면, 그대는 본질적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똑같은 일을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세상은 수레바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사물은 끊임없이, 다시 또다시 반복되고 있으며, 그대도 점점 반복적이 되기 때문이다. 반복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지루해진다. 지루해지면 질수록 그대는 더욱 둔하고 어리석어진다. 그대는 에너지를 잃고, 신선함을 잃고, 각성을 잃는다. 그대는 로봇, 즉 기계적인 존재가 된다.
주변의 사람들을 지켜보라. 그들은 로봇이 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을 그들은 판에 박힌 행동을 한다. 당연히 그들은 활기가 없어 보인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 생기도 없고, 어떤 광채도 찾아볼 수 없다.
붓다는 이 수레바퀴의 끝없는 반복을 삼사라(samsar)라고 부른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 이 판에 박힌 순환을 벗어나는 것이 니르바나(nirvana)이다.
경전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삶은 놀이 중의 놀이, 궁극적인 놀이라는 것이다. 삶을 놀이로 취급하고, 삶에 대해 심각해지지 않을 때 삶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만약 그대가 단순하고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 놀이는 많은 것들을 그대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한때 그대는 호랑이였다. 한때 그대는 바위였다. 어느 때는 나무가 되었다가 때로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는 개미였고 또 언젠가는 코끼리였다. 붓다는 이러한 모든 것을 놀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삶을 알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수천 번의 놀이를 해 왔다. 놀이 뒤에 놀이……놀이 하는 사람은 놀이 재료의 순서를 바꿔 가며, 전개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대가 나무처럼 존재할 때 그대는 한 가지 방식으로 삶을 아는 것이다. 나무 외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나무는 나무 자체의 시각을 갖고 있다. 하늘에 구름이 흐르고 태양은 빛나고 무지개가 떠오를 때, 나무가 어떻게 느끼는가는 오직 나무만이 안다. 나무는 스스로의 지각력을 갖고 있다.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 그것이 어떻게 적시고 지나가는지는 나무만이 안다. 새가 노래 부를 때의 그 음색과 아름다운 선율은 나무만이 알고, 나무만이 들을 귀가 있다. 나무는 삶을 배우는 자신만의 방식을 갖고 있다. 그 길은 오직 나무만이 안다.
호랑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안다. 그는 또 다른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개미는 완전히 다른 놀이를 한다. 수만 가지의 놀이를…….
이러한 모든 놀이들은 대학의 수업과 같다. 하나의 수업을 통해서 어떤 것을 배우면 다른 과목으로 옮겨 간다. 인간은 그 마지막 지점이다.
인생의 모든 과목과 인류의 과목을 다 배웠을 때만 그대는 바로 삶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신이 무엇인지, 니르바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이러한 모든 놀이를 통하여, 수많은 방황을 통하여, 수많은 길을 통하여, 수많은 지각력을 통하여 신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목적은 동일하다. 모두 진리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삶의 비의(秘意)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며,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끝없이 존재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자면서 걸어다니는 몽유병 환자처럼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과목에서 다른 과목으로 옮기기만 할 뿐이라면, 하나의 과목에서 다른 과목으로 질질 끌려 다닐 뿐이라면, 사려 깊고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것을 놓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지점에 이르렀으면서도 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수업을 놓쳤고, 수업을 피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수업에는 들어갔지만 핵심을 얻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단계에 도착한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종교적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과 종교적이 되는 것은 동의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종교적인 사람이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주일마다 교회에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기독교인이나 모하메드교인, 힌두교인, 자이나교인, 불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그대가 어떤 종교 단체에 소속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종교적인 사람이란 삶이 초월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모든 곳에서 삶이 그보다 더 큰 무엇으로 넘쳐흐르고 있음을……걸음걸음이 그대를 신, 진리, 니르바나, 자유를 향하여 이끌고 있음을……알든 모르든 자신이 그 궁극의 사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기 시작할 때 인간은 종교적이 된다. 그는 교회에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그것은 상관이 없다. 그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나 불교인 혹은 힌두교인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그는 전혀 이름 붙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단체에 속할 수도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허나 그는 신에게 속한다. 그리고 내가 신이라고 말할 때―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신이란 초월이라는 것을―그것은 언제나 그대 앞에 있다. 그대는 항상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접근하지만, 그것은 항상 그대 앞에 머문다.
신은 언제나 목적지로남아 있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이다. 그대는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을 그 속으로 오롯이 떨어뜨려 용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때에도 여전히 그대는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알면 알수록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다고 느끼게 된다. 알면 알수록 그대는 더욱 겸허해진다. 그 신비, 무한, 불가사의함은 고갈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신은 바로 그 다함없는 근원, 그 초월적인 근원이다. 그리고 내가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때, 나는 그 초월적인 것에 민감한 사람을 말한다.
초월적인 것에 민감해질 때 그대의 삶은 아름다운 멋과 우아함을 지닌다. 그때 그대의 삶은 힘과 지혜를 갖는다. 그때 그대의 삶은 민감성과 창조성을 지닌다. 그때 그대의 삶은 성스러운 기운을 지닌다. 초월적인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대는 그 초월적인 것의 일부가 된다. 그것이 그대의 각성 속에 스며들었다. 그대 영혼의 어두운 밤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고, 더 이상 존재계의 이방인이 아니다. 그대는 그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그대의 집이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존재계를 자신의 집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존재란 자기가 사라지고 모든 환영이 사라져, 무한성과 영원성만이 남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높이 더 높이 나아가는 것이라고 느낀다.
따라서 이 삶의 놀이는 아주 기술적으로 해야 한다. 붓다는 그것을 기술, 방편, 우파야(upaya)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가 사용한 가장 아름다운 말 중의 하나이다. 그는 기술적이 되라고 말한다. 만약 기술적이지 못하면 많은 유용한 것을 놓칠 것이다. 기술적이 되라는 것은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반쯤은 졸고 반쯤은 깨어서 자신을 끌고 다니지 말라. 그대 자신을 흔들어 깨워라. 삶의 모든 행위에, 그대 존재의 걸음걸음마다 깨어 있으라. 그때 비로소 그대는 눈을 뜨고, 평상시 그대가 잠들었을 때나 무의식적이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보기 시작한다. 눈에 있는 모든 먼지들을 털어 내라.
기술적이 되어라. 그리고 의식적으로 삶을 살라. 안 그러면 삶은 지루해진다. 그대는 그것을 느낀다. 그대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안다. 조만간 모든 것이 지루해지고 싫증이 날 것이다. 계속 사는 것은 자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조만간에 자신이 죽는다는 희망,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세계 여행을 떠났다. 처음 유람선 여행을 한 그는 심하게 뱃멀미를 하였다. 선장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20년 간 선장으로 일해 왔지만 뱃멀미로 죽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물라가 말했다.
“맙소사! 죽는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당신은 그 희망마저도 빼앗아 가는구려!”
사람들은 언젠가 죽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줄곧 스스로에게 말한다.
“상심하지 마,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만약 그대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면, 만약 그렇게 삶이 지루하다면 거기 신과 만날 가능성은 없다. 신과의 만남은 오직 환희 속에서, 민감함 속에서, 각성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지루해지는가? 불교적인 설명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그대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해 왔기 때문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단지 이번 생에서 뿐만 아니라 수만 생 동안 계속해서 그 짓을 해왔다. 그러므로 지루해진 것이다. 그대는 기억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은 그대의 무의식 깊숙이 기억되어 있다. 기억에 관한 한 줄어든 것이라곤 없다.
거기에는 기억의 저장고가 있다. 붓다는 그것을 알리야식(alayavigan)이라 부른다. 그것은 바로 융(Jung)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이다. 그대는 그것을 지니고 다닌다. 육체나 동일시의 대상은 바뀌지만, 기억의 꾸러미는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건너뛰어 계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모이고 축적된다. 그것은 점점 불어난다.
기억의 기록에 관한 한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다. 자신을 들여다보면, 그대 안에 존재계의 모든 기록이 있다. 만약 거기 시작이 있다면 그대는 바로 그 시작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항상 여기 있었다. 그대는 이 존재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존재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이 그대에게도 일어났다.
그대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수만 번이나 사랑에 빠졌었다.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얘기이다.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은 그대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해 왔던 일이다. 그대는 야망을 가졌었고, 갈망했었고, 부를 축적했었고, 매우 유명해졌었고, 명예와 권력을 가졌었다. 이러한 일들이 수도 없이, 수천 번이나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대는 무의식 깊은 곳, 기억의 저장고에 그것들을 실어 나른다. 그대가 하고 있는 것 모두가 헛되고, 가치 없고, 무의미해 보인다.
들은 얘기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그의 100번째 생일날, 한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똑같은 실수를 또다시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으나 마나지.”
늙은 물라가 대답했다.
“당장 시작하겠지. 당장 시작할 거라구…….”
이것이 보통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실수에서 그대가 배우는 것은 오직 어떻게 하면 보다 빨리 실수를 하는가이다. 그대는 실수를 버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대는 오직 그것들을 빨리 시작하는 법과 어떻게 하면 다음 번엔 더욱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를 배운다.
붓다는 말한다.
“만약 그대가 이 기억의 저장고를 관통할 수 있다면 정말로 이로울 것이다.”
그때 그대는 볼 것이다. ‘나는 똑같은 짓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을. 그러면 그 각성의 상태 속에서 그대는 처음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감동과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시간 개념이 있다. 서양에서는 직선적 시간 개념이 일반적이다. 기독교도, 유대교도, 모하메드교도, 그들은 유대교적인 삶의 관념에서 파생된 개념들을 믿고 있다. 그들은 시간은 직선으로 움직인다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을 믿어 왔다. 힌두교나 불교나 자이나교의 동양적인 개념은 다르다. 그것은 원이다. 시간은 순환하고 있다.
만약 시간이 직선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물질계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직선은 계속해서 움직이므로 절대로 되돌아와 마주치지 않을 것이고 똑같은 옛길을 다시 돌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시간이 순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 또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동양의 시간 개념이 더 진실되어 보인다. 모든 움직임은 순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들을 한번 지켜보라. 계절은 일 년을 주기로 돌고 있다. 다시 여름이 오고……다시, 또다시. 그것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지구는 돈다. 태양도 돈다. 별들도 돈다. 그리고 이제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전 우주 또한 순환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 순환 공간 개념이라는 대단히 이상한 개념을 소개했다. 모든 공간은 순환한다.
아이가 태어난다. 탄생은 순환의 시작이고 죽음은 순환의 끝이다. 노인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아이처럼 무기력해진다. 만약 그가 옳게 가고 있다면 아이처럼 순수해질 것이다. 그러면 순환은 완성된다. 그러면 그의 생애는 완성된 꼴을 이룬다. 그때 그의 삶은 우아함을 지닐 것이다.
만약 순환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뭔가를 놓친 삶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삶엔 구멍이 생기고 긴장이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완결되지도 우아하지도 않을 것이다.
각각의 삶은 수레바퀴가 한 번 돌아가는 것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순환이 완성되면 또 다른 삶이 다시 수레바퀴를 굴린다. 바퀴의 살은 똑같다. 다시 어린 시절, 다시 청춘기, 다시 노년기, 똑같은 꿈들, 똑같은 열정, 똑같은 욕망, 똑같은 분주함, 똑같은 야망 그리고 똑같은 좌절, 똑같은 불행, 이것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진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가장 깊은 기억 속을 꿰뚫을 수 있다면, 그대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만 번씩이나 되풀이해 왔던 것들이다.
그래서 고거의 기억 속을 꿰뚫어 통찰하는 것이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모든 수행자들의 방편이 되었다.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붓다는 그대가 되풀이되는 이 모든 난센스를 보지 않는 한 되풀이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대가 그 모든 기록과 맞닥뜨리게 되면 자신이 수만 번씩이나 사랑에 빠졌었고 그때마다 불행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충분히 그것을 이해할 때가 되었다. 이제 다시 그런 어리석은 짓은 되풀이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수만 번씩이나 태어났고 또 죽었으며, 모든 탄생에는 죽음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 삶에 매달릴 까닭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버려라. 만약 그대가 매번 기대했다가 좌절당했고, 기대는 결코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면, 자 무엇이 핵심인가? 이제 그대를 떨쳐버려라.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기본적인 명상이 되었다. 한 생애만 보더라도 그대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되풀이를 볼 것이다. 나이 들어서도 그대는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산다. 그것은 그대가 경험의 기록을 보존하고 관찰해서 그것들을 통하여 일종의 지혜를 쌓은 것이다. 화가 나서 그대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었다. 다시 그대는 화가 나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다시 그대는 화가 난다. 그러나 그대는 그 분노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 기계적인 행동에 대해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그대는 그 속에서 교훈을 배우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경험은 했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단순히 경험만 한다면, 그대는 그냥 늙어갈 뿐이다. 만약 배운다면, 그대는 현명해진다.
노인이라고 해서 다 현명한 것은 아니다. 지혜는 나이를 먹는 것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느 때라도 현명할 수 있다. 어린이라도 현명할 수 있다.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단 한 번만 분노를 경험해도 그대는 그것을 끝낼 것이다. 분노는 참으로 추하다. 탐욕을 단 한 번만 경험해도 그대는 탐욕을 끝낼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해로운 것이다.
들은 얘기이다.
“집을 나가겠습니다!”
마하무드가 그의 아버지 물라 나스루딘에게 소리쳤다.
“저는 술과 여자와 모험을 원합니다!”
물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를 막으려 하지 마십시오!”
마하무드가 소리쳤다.
“누가 너를 막는단 말이냐?”
늙은 물라가 말했다.
“나도 너와 함께 가겠다.”
똑같은 어리석음이 지속된다. 젊음과 늙음, 교육과 무지, 가난함과 부―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배운다면, 그대 삶에 전적으로 다른 비전이 일어난다.
들은 얘기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지방을 돌면서 곡예비행을 할 때였다. 한 노인이 그 비행에 신경과민이 되어 급기야 땀까지 뻘뻘 흘렸다. 흔들흔들하던 비행기가 착륙하자, 노인이 기어서 밖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선생, 비행기를 두 번 태워줘서 고맙소.”
“무슨 말씀입니까? 한 번밖에 안 타셨는데요.”
비행사가 물었다.
“아니오, 나는 두 번 탔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약 그대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그때 그것은 그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그땐 그대에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때 그것은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이다.
오늘 이 경전은 한 사문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숙명통을 얻고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붓다는 수없이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먼저 과거를 향해 움직여라. 먼저 거슬러 가라. 그곳은 그대가 천 년 간 살았던 곳이다. 바로 그대가 거기서 했던 것들을 보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는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 속에서 교훈을 모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거기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연의 메커니즘이 있다.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날 때 금생의 틈 사이에 망강의 층이 생긴다. 그것은 자연적이다. 전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된다면 삶이 몹시 힘들어질 테니까. 삶의 종말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그것은 일어난다.
하루 동안 수만 가지의 일들이 일어난다. 그대가 그것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기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전부 기록되고 있다. 마음이 얼마나 사소하고 작은 일들까지 기록하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대 주변에 일어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대는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하는데 마음은 줄곧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내 얘기를 들을 때 그대는 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대는 나에게 깊이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그대는 전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후에 누가 그대에게 묻는다.
“기차가 지나갔나? 그 소리 들었어?”
그대는 말한다.
“못 들었어. 나는 강의에 몰두하고 있었거든.”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그것을 기록했다. 비록 그대가 그것을 모른다 해도 마음은 끊임없이 기록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최면에 걸리면 마음은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만약 내가 갑자기 “1970년 1월 1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지? 기억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그저 막막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내와의 말다툼이라든가, 두통을 앓았다든가 하는 식의 일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1970년 1월 1일, 24시간 사이에 틀림없이 어떤 일이 일어났었다. 24시간 내내 아무 일도 없을 수는 없다. 그랬다면 그대는 붓다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24시간 동안 텅 비어 머물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니르바나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만약 그날 그대가 교통사고로 거의 죽을 뻔 했다든가 하는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대는 기억할 것이다. 또는 다른 종류의 어떤 사건―그대가 결혼을 했다―이 있었다면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상흔처럼 남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몽땅 잊어버린다.
그러나 최면 상태에서 최면술사가 그대에게 “지금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0년 1월 1일을 기억하시오.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시오.”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굉장히 사소한 일들까지 말할 것이다.
“차는 식었었고, 나는 그것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밤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악몽을 꾸었다.”
그대는 이런 일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억할 것이다―아침에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개가 지었다. 컵이 떨어져서 깨졌다 등의 작은 일들―그대가 나무 곁은 지나갈 때 나뭉네 꽃이 만발했고……그대는 그 향기를 기억할 것이다. 혹은 그날 비가 와, 대지에서 향그러운 냄새가 솟아 나왔다. 그대는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명하게 느낄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분명해질 것이다.
모든 것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필요한 정보로 어지럽혀져 삶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 안에 있는 것들을 계속적으로 분류해 내는 자연의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일들이 24시간 동안 지속되고, 거대한 분류 작업이 진행된다.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지하실로 던져진다. 그것이 다시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렇게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필요할지 모르는 두 번째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새겨진다. 언젠가 그대가 필요할 때면 의식 속으로 그것들을 되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일상에서 필요한 극소수의 것들만이 의식 속에 남겨진다.
예를 들면, 둘 더하기 둘은 넷, 음?―이런 것은 의식 속에 남는다. 매일, 매순간 그것은 필요할 것이다. 이 사람은 그대의 아내이고 이 사람은 그대의 남편이라는 것은 의식 속에 남겨진다. 만일 그러한 것을 습관적으로 계속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생활에 곤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대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
따라서 모든 것이, 거의 99.9%가 지하실로 떨어지거나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배면에 남는다.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상기시킬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프라이멀 테라피(primal therapy)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의 통로로 사라졌던 것을 모두 상기시키고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한번 그것이 드러나게 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현재 프라이멀 요법가들이 하고 있는 일은 붓다가 보다 위대하고, 보다 깊은 방법으로 이천오백 년 전에 했던 것이다. 이번 생 뿐만 아니라 과거 생 전체에 대해서 그는 그 일을 했다.
그대는 기억 속에서 다시 자궁을 통과해 지나가야 한다. 지난 생에 일어났던 죽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길은 끊임없는 과거로, 과거로 움직여가는 것이다. 훈련하면 할수록 더욱 그대는, 그대가 날아 왔던 모든 불가사의를 벗기는 일에 능숙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엄청난 기록을 날아 왔다. 만약 그것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거기에서 몇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훈들은 굉장히 유익할 것이다. 그것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과거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
한번 그대가 과거로부터 해방되면 미래로부터도 자유롭다. 거기 투사될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그대가 전생들로부터 해방되면, 그대는 삶 자체로부터 해방된다. 그때 삶에 달라붙어 있던 모든 꿈들이 사라진다. 그대는 다시 태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그대는 집착을 원하지 않는다.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어떤 자궁에도 갇히길 바라지 않는다. 그대는 다시 형태를 갖길 원하지 않는다. 그대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싶다.
이러한 배움은 두 가지 길로 행해질 수 있다. 그대는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배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서서히 그대는 붓다가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 적이 없다면,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경험과 과거의 삶들을 해방시켜라.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숙명통을 얻고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과거의 생들을 먼저 이해해야만, 그 속에서 벗어나는 길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구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붓다가 길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나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삶 속으로 들어왔다. 이제 출구는 어디인가?
들은 얘기이다.
일전에 미키가 더블린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인 패티가 큰 도시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디에 가야 할지, 몇 가지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동물원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니?”
미키가 물었다.
패티가 충고했다.
“동물원에서 주의할 점은 ‘사자에게로’, ‘코끼리에게로’, 이런 말만 따라가면 너는 멋진 동물들을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출구로’, 이건 절대로 따라가지 마. 그건 속임수야. 그것을 보러 갔을 때 나는 밖에 있는 나를 발견했지.”
그것이 우리가 해 왔던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문을 피해 왔다. 우리는 그것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것을 피해 왔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무지했었다. 설혹 그것을 만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출구로’이러한 낱말은 너무나 시들해졌다. 그것들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오직 삶의 입구만을 알 뿐, 출구는 모른다.
물론우리는 수없이 들어간 적이 있기 때문에 입구를 안다. 우리는 거듭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서 거의 수초 안에, 적어도 며칠 안에는 들어간다. 여기에서 죽고……죽는 동안에도 그대의 마음은 어디로 들어갈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그대는 벌써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하는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다시 공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기억하라, 자궁 속에 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결정이다. 그래서 그대는 들어가는 것이다. 그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입구가 존재하듯이 출구도 존재한다.
한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숙명통을 얻고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한결같이 하면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하나로 지키는 사람들……머리는 언제나 과거에 있으므로 머리로 사는 사람들은 과거로 향하기가 몹시 어려울 것이다. 머리는 기계적으로 미래를 계획한다. 그것은 항상 그대보다 앞서 움직인다. 그것은 레이더와 같다.
그대는 비행기에서 레이더를 보았을 것이다. 레이더는 비행기를 앞질러 움직인다. 그것은 이백 마일 앞, 사백 마일 앞을 가리킨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당도하므로 비행사는 그보다 앞서 그것을 알아야 한다. 속력이 엄청나서 만약 당도한 후에 안다면 너무 늦은 것이다.
마음은 레이더이다. 그대의 머리는 레이더망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미래를 더듬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머리는 결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그것은 과거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과거는 벌써 사라져 버렸다.
머리의 모든 관심은 미래에 있다. 설령 가끔 과거를 본다 할지라도, 미래를 위한 야간의 실마리를 발견할 따름이다. 때때로 과거를 들여다보고 싶어할 때도, 그것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관심은, 관심의 중심은 미래에 있다.
붓다는 말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하나로 지킨다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은 지난 생애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가슴은 잠재의식에 가장 가깝고, 머리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가슴은 배꼽의 중심에 더욱 가깝다. 몸에서 배꼽 부위는 무의식의 대응점이다. 그대는 가슴으로 와야 한다. 가슴은 머리와 배꼽의 중도이다.
그대가 더욱더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가슴이 풍부해지면 그대 전생들의 거대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일대기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일대기이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대는 나무였으므로 나무였을 때의 모든 기억들을 마음속에, 무의식 깊숙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대는 호랑이였고, 언젠가 그대는 고양이였으며, 언젠가는 코끼리, 언젠가는 여자, 언젠가는 남자였다. 수만 가지의 기억들이 거기에 있다. 삶의 전 드라마가 압축된 형태로 거기에 있다. 만약 그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다시 그러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걸면 최면 상태에서 자기가 지금 호랑이가 되었고, 사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대는 최면술사들이 최면을 거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한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여자였습니다. 자 걸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남자는 여자처럼 걷는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그는 해낸다. 그는 여자처럼 걸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지금 갑자기 여자처럼 걷게 되었는가? 여자의 몸과 남자의 몸은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어렵다. 여자의 몸 안에는 자궁이 있어서 골격 구조가 다르다.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녀의 움직임은 더 곡선적이고 맵시가 있다. 그녀는 빨리 달릴 수 없다. 하지만 최면의 영향 아래 남자는 여자처럼, 여자는 남자처럼 걸을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랍어나 라틴어나 중국어를 단 한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최면 상태에서는 중국어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기적이다. 최면술사는 여태껏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대가 붓다의 가설을 이해한다면 설명은 간단하다. 인간은 과거 생에서 그 모든 것을 했었다고 붓다는 말한다. 동양의 모든 스승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대는 중국에도 있었고 일본에도 있었으며, 독일에도 있었고 티벳에도 있었다. 따라서 그대의 기억 속 깊숙한 어딘가에 중국 사람으로서 살았던 삶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최면 상태에서 그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드러날 수 있다. 그대는 중국어로 말할 수 있다. 그대가 현생에서 중국어를 단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고,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인간 존재는 광대하다. 그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제한적이지 않다. 그대는 자신이 힌두교도나 불교도, 기독교도 혹은 인도인이나 일본인, 또는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곧 의식적인 마음에 붙어 있는 장애물들이다. 잠재의식 속에서 그대의 영역은 무한하다. 그대는 모든 것이다. 힌두교도, 불교도, 기독교도일 뿐만 아니라, 호랑이, 고양이, 쥐, 사자, 나무, 바위, 구름이기도 하다. 그대는 광대하다. 그대는 이 우주만큼이나 광대하다.
한번 그대가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한계들은 믿음의 일종이다. 그대가 믿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가 버린다면 그것들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한결같이 하면…….
가슴 중심적인 사람은 뜻이 한결같다. 그들은 심성이 왜곡되거나 교활하지 않다. 머리는 매우 교활하다. 머리는 여우처럼 아주 계산적이고 교묘하다. 어떤 것을 원할 때 머리는 결코 곧바로 가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을 원할 때 머리는 지그재그로 갈 것이다. 그것은 실재와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하여 다른 무엇인가를 얻으려 할 것이다. 머리는 아주 정치적이고 외교적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 속에서 지켜볼 수 있다. 머리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머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존재하는지를. 머리는 절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머리는 그럴 수가 없다. 가슴은 진실하다. 가슴은 속일 줄을 모른다. 가슴은 솔직하다. 가슴은 직선적으로 움직이고 머리는 완전히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숙명통을 원하는 사람은 뜻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붓다는 말한다. 왜곡된 사람은 할 수 없다. 인간은 정직하고, 단순하고, 곧은 길을 따라야만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단순하고, 가슴 중심적이고, 단일하고, 곧고,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은 쉽게 들어간다.
전생으로 들어가는 일은 붓다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욱더 어려워졌다. 붓다의 시대에 그것은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단순했다. 붓다가 입문시켰던 대부분의 산야신들은 과거의 경험을 거쳐 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하비라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 왕자가 산야신이 되어 마하비라에게 입문했다. 그러나 항시 편하고 부유하게 살았던 그가 마하비라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그는 나체로 살아야 했고, 잘 때도 옷을 입지 않은 채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자야 했다. 그것은 힘겨웠다.
첫날 밤 그는 이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니므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엔 모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인도에서는 언제나 모기가 많았는데, 모기는 명상가들에게는 영원한 적으로 보인다. 그는 명상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모기떼들……게다가 그는 나체였고, 밤은 춥고, 그의 잠자리는 거기에 머물고 있는 수백 명의 산야신들 중앙에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통에 그는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사람들은 대단히 붐볐고, 그는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살아온 길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밤에,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밤중에 마하비라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하비라가 말했다.
“나는 그대를 계속 지켜보았다. 나는 그대의 어려움을 안다. 하지만 이 일은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사실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대는 다른 생에서도 두 번 입문했지만 매번 떠났었다.”
그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하비라는 그에게 전생을 기억하는 방법인 자티 사마란(jati smaran)이라는 명상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밤새 이 명상을 하라. 명상 속에 앉아 있으라. 그리고 아침이 오면, 그대가 어떻게 결정을 하든지……”
그는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그 일은 아주 간단했던 것 같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단순했을 것이다. 그는 쉽게 과거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그가 왔을 때는 신선한 빛으로 흘러 넘쳤다. 그는 마하비라의 발을 만지고 나서 말했다.
“저는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저는 전생을 들여다보았고……그렇습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언제까지 그것을 또다시 되풀이하겠습니까? 산야스를 받고 또 떠난다는 것은 욕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천박한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같은 용사가 모기를 겁내고, 약간의 불편함을 겁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두 번씩이나 그런 일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나는 입문해서 첫날 밤이면 불안해져 다음날 아침에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그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상기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똑같은 짓을 처음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저질렀을 것입니다.”
붓다와 마하비라의 모든 산야신들은 자티 사마란, 즉 모든 전생의 기억들을 거쳐야 했다. 오늘날 그것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머리가 너무나 무겁게 되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지나치게 무거워 대부분의 에너지가 머리에 국집되어 가슴으로는 전혀 흐르지 않는다. 그리고 전생으로 가는 통로는 가슴을 통해 나 있다.
따라서 전생을 기억하고 싶다면―그것은 엄청난 경험이고, 바로 해방이며 자유이다―몇 달이나 몇 년 동안 아주 단순하게 가슴적인 삶, 느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이 그대를 점유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느낌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이성이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말라. 사랑이 결정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이윽고 그대는 볼 것이다. 가슴의 길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그들은 뜻이 한결같다.
가슴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문제가 없다. 그때 그대가 사랑하는 대상은 오직 그대만을 위해 존재한다. 가슴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때 세상에 여자는 오직 그녀뿐이다. 다른 모든 여자는 그대의 관심에서 사라진다. 가슴은 뜻이 한결같다.
그러나 머리가 사랑에 빠진다면―사실 머리는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단지 그런 체할 뿐이다―매우 곤란해진다. 거리에 지나가는 모든 여자가 그대의 마음을 끌고, 자극시킨다. 지나가는 모든 여자에게서 자극을 받고 마음이 산란해질 것이다. 사랑은 진실로 가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목적만을 안다.
그대가 가슴을 통해 나와 함께 여기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관계이다. 그때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죽을 수도 있고 그대도 죽을 수 있지만 관계는 죽을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머리만 함께 있다면, 그대는 내 존재에 설득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 말에 설득된 것이다. 만약 내 말의 논리적인, 나의 논법의 힘에 의해 설득된 것이라면, 이 관계는 아주 일시적인 것이다. 내일이면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설득당할 것이다. 내일 다른 누가 더 나은 논법을 줄 수도 있다. 그러면 이 관계는 사라진다.
바로 이틀 전 밤에 산야신의 남편인 어느 젊은이가 서양에서 왔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무슨 일로 내게 왔는가?”
“제 아내가 가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그대는 그저 우연히 왔을 따름이다……. 그대는 내게 온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아내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길이 아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가 그의 아내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는 말했다.
“산야신을 받을까 생각중입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생각? 그럼 더 힘들 것이다. 설령 그대가 생각으로 납득한다 해도, 그대는 외부적으로만 산야신이 될 뿐, 내면에서는 결코 산야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은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산야스는 논리적인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사랑으로의 전환이다.”
그러나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온다 해도 그것은 실제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오는 것은 단지 그가 설득당했기 때문에, 그의 머리가 설득당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므로. 그는 나에게 설득되어서 오는 게 아니라, 그의 머리나 아내에게 설득되어서 올 것이다. 아마 그의 아내가 그를 설득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유럽에서 여기까지 오도록 설득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가 또 다른 옷으로 바꾸도록 설득할 수 있다. 그는 어쩌면 약간의 합리화를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죄다 무의미한 일이다.
가슴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가슴을 통해서 내게 당도한 것이 아니라면, 전혀 당도한 것이 아니다. 기억하라. 종교란 그대 느낌의 근원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생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한결같이 하면 최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한번 전생들을 보게 되면, 그대는 문득 밖으로 나가는 길을 본다. 왜냐하면 그대는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왔던 길은 또한 밖으로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대는 그 반대편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
길은 같다. 입구와 출구는 둘이 아니다. 그 방향만 다를 뿐이다. 집으로 들어올 때 그대는 같은 문으로 들어온다. 밖으로 나갈 때도 같은 문으로 나간다. 단지 그대가 움직이는 방향만 다르다.
따라서 붓다는 말한다. 전생들 속을 들여다보면 그대가 거듭거듭 삶에 집착하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야망, 애교, 탐욕, 질투, 소유욕에 집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그대가 반복해서 들어왔던 길이다.
만약 탐욕이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라면, 무욕은 밖으로 나가는 길이다. 에고가 들어오는 길이라면, 무아(無我)는 나가는 길이다. 욕심, 꿈, 열정이 들어오는 길이라면, 열정 없음, 꿈 없음, 욕심 없음은 나가는 길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닦아서 먼지가 제거되면 밝아지는 것과 같다. 욕심을 끊고 구하는 바가 없으면 숙명통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마음을 순수하게 하라. 둘째, 뜻을 한결같이 하라. 그리고 셋째, 그대의 의식은 그대의 거울이 반사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어질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참으로 투명한, 맑고 아름다운 거울을 가지고 있어서, 그대가 움직이는 곳 어디든지 의식의 거울로 그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거울을 과거로 향한다면 과거가 드러날 것이다. 거울을 미래로 향한다면 모든 미래가 드러날 것이다. 거울을 현재로 향한다면 현재가 드러날 것이다. 그대의 의식은 그대의 열쇠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닦아서 먼지가 제거되면 밝아지는 것과 같다.
너무나 많은 생각의 먼지, 너무나 많은 인상(印象)의 먼지들이 그대의 거울을 덮고 있다. 그대는 까맣게 잊었다. 거울이 벽돌같이 보일 정도로. 거울을 닦아라. 거울을 씻어라. 우리가 명상 속에서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명상은 바로 거울을 닦아서 그 속에 있는 것을 비추려는 노력이다.
욕심을 끊고 구하는 바가 없으면 숙명통을 얻게 될 것이다.
사문이 붓다에게 물었다.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위대한 것입니까?
붓다께서 대답하셨다.
참된 것은 도(道)를 실행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위대한 것은 뜻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것에 대한 붓다의 정의는 참으로 아름답다. 가능한 한 깊이 그것을 이해하라.
참된 것은 도를 실행하는 것…….
먼저 인간은 도를 알아야 한다. 무욕, 비폭력……모두 부정적이다. 그대가 긍정적으로 아는 것은 무엇이든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들을 배제하면 나가는 문을 발견할 것이다.
참된 것은 도를 실행하는 것…….
붓다는 말한다. 확실히 도를 깨닫고 나서 처음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다. 그저 깨닫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못 된다. 그저 깨닫는 것만으로는 그대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실행하고, 수련해야만 한다.
참된 것은 도를 실행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실행할 때, 거기엔 약간의 노력이 따르게 된다. 그대 자신을 수련시킬 때, 거기엔 약간의 노력이 따르게 된다. 그대의 묵은 습관이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항상 탐욕적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그대의 온갖 과거가 그대를 가로막고, 그대를 산란하게 할 것이다. 묵은 습관들이 다시금 그대를 휩싸면 또다시 그대는 잊어버리고 동요될 것이다. 거기엔 헤매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붓다는 그것을 참되지만 위대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위대한 사람은 노력이 사라지고 수행도 사라진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도와 하나가 되어 단순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도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붓다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토록 수용적이어서 그것은 이제 그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일반적으로 욕망이 자연스럽듯이 그에겐 무욕이 자연스러워졌다. 사람들에게 야망을 품는 일이 자연스럽듯, 그에겐 야망을 품지 않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도에 일치하지 못하지만, 그는 도와 일치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피타고라스는 이 상태를 하모니아(Harmonia)라 부른다. 그것은 정확한 단어이다.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조화 속에서……. 노자는 이것을 도(道)라 부른다. 붓다는 이것을 담마(dhamma)라 부른다.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마치 헤엄치지 않고, 투쟁 없이, 완전한 휴식 속에 강과 함께 흘러가는 것과 같다. 강과 그대 사이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대는 강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그대는 어떤 희망도, 어떤 개인적 목적도 갖지 않는다. 그대는 강과 함께 대양으로 흘러간다.
조화, 합일, 도, 담마의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피어난 존재이다. 그는 의식의 연꽃이다.
위대한 것은 뜻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는 없다. 먼저 그대는 수련을 해야 하고, 그 다음 그 수련마저도 버려야 할 것이다. 먼저 그대는 휴식할 수 있게끔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엔 그 휴식마저 버려야 할 것이다. 먼저 그대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습관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번 그들에게서 벗어나면 옛 습관들과 싸우면서 생겨난 새로운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먼저 그대는 명상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나면 언젠가는 명상마저 버려야 한다.
명상은 좋은 것이지만, 명상을 버리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성자가 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신성한 것은 위대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위대하지는 않다. 착한 사람은 아직도 악과의 미묘한 갈등을 지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끊임없이 악마, 즉 자신 속에 있는 악마와 투쟁한다. 그는 편안하지 않고 휴식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이 휴식한다면, 그 오래된 과거가 커지고 힘이 생겨 그를 점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는 균형을 잃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균형을 잡아야만 한다. 착한 사람이나 성자는 아직 완전하게 도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다.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야 한다. 붓다가 그런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이유이다.
따라서 절대로 착한 사람에 만족하지 말라. 기억하라. 위대한 것에 이르는 것이 목적임을……. 그렇게 깊은 합일 속에서 그대는 단순히 사라지고 오직 담마, 도(道), 본성만이 남는 것이 목적임을……. 그대는 바로 대양 속에 있는 파도이고 그대는 대양과 분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분리되어 있는 존재, 자아는 버려야 한다.
악한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법을 거슬러, 본성을 거슬러 투쟁함으로써 생겨났다. 악한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는 담마를 거슬러 투쟁함으로써 생겨났다. 그는 모든 선(善)을 거슬러 싸움으로써 자아를 창조한다. 착한 사람도 또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가 과거에 만들었던 나쁜 버릇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그 투쟁 때문에 그 또한 자아를 갖는다.
악한 사람도 자아를 가지고 있고, 착한 사람도 자아를 가지고 있다. 악한 사람의 자아는 해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착한 사람의 자아는 도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양쪽 다 자아이다.
위대한 사람은 자아가 사라진 자, 자아가 완전히 가라앉아 전체 속으로 녹아든 자이다. 그렇게 전체 속으로 녹아드는 것, 그러한 조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절대로 그 통찰력을 잃어버리지 말라.
삶은 바로 훈련이다. 인간은 선에 대한 만족마저도 초월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사라져 전체만이 존재하는 이 최고의 초월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불만 속에 있어야 한다. 그대가 완전히 헌신했을 때……그대는 전체에 바쳤을 때……그대는 바로 허공이 된다.
만약 비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그것을 신에의 헌신이라 불러도 좋다. 그대가 텅 빌 때, 신은 그대에게 내려올 수 있다.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붓다는 말한다.
“그대는 거기 없다. 오직 법의 작용만이, 오직 담마만이, 도(道)만이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한 일치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지복이며 사치다난다(satchidananda)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