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노래’는 신구약에 모두 나오는 말이지만, 아직도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prophesy(예언하다)’로 나와 있는데 비해, 신약에선 ‘spiritual songs(영적인 노래)' 로
나온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먼저는 예언하는 것, 즉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미리 알게 된 계시를 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 때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런 역할을 했는데, 그들이 역대상 25장 1~3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악기 연주에 맞춰서 늘상 예언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무엘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악기에 맞춰서, 예언하는 장면이 나온다(삼상 10:5).
그러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본인이 악기를 휴대해서 갖고 다니거나, 연주자들을 동반하고 예언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무반주 예언’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나라의 시조나 판소리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마치 OST와 같이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연주 음악이 깔렸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다윗 왕 때는 이런 식의 예언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악기로 신령한 노래를 하는 사역팀을
구성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예언(미리 설교 준비를 하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한 즉각적인 말씀 선포)와
음악을 결합시킨 사역팀을 만들었을까? 그것도 ‘군대 장관들’과 함께 말이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대상 25:1).“
적어도 다윗은 음악이 결합된 예언이야말로 가장 큰 전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찬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말씀 사역자, 말씀의 능력을 제대로 아는 찬양 사역자가 더욱 더 필요한
요즘 같은 시대에도 음악에 맞춘 예언 사역은 꼭 회복되어야 할 영적 무기이다.
그렇다면, 음악 없이는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수 없었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감옥처럼 음악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사역을 했을 테니 말이다.
엘리사 선지자는 아래 말씀에서 예언하기에 앞서 악기 연주자를 요구했다.
아마도 본인은 악기를 못 다루었던 것 같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왕하 3:15)”
위 말씀을 보면 거문고 연주가 엘리사를 더욱 쉽게 그리고 빠르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게 해주는
촉진장치 역할을 한 것 같다.
어쨌거나 지금도 음악은 설교와 기도를 돕는 역할로 교회 안에 널리 쓰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때론 영적이 아니라 감정적, 정서적으로 쓰이는 문제도 많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오늘날의 교회의 예배 속에 이러한 사역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에 맞춘, 단지 연주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음악에 맞춘 예언 사역자들이 있는가?
있다 해도 그들에게 사역할 기회와 권한이 주어지고 있는가?
오히려, 거짓 이적과 은사 사용의 위험성에 대한 지나친 경계 때문에 ‘음악에 맞춘 예언’은 커녕
그냥 ‘예언’이란 말조차도 대부분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새 영적이 아니라 지식적, 감성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외국에 경우 음악과 예언 사역을 병행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다.
최근 일어나는 24시간 기도의 집 사역 안에서도, 아직도 국내에선 이단처럼 거부감을 받고 있는
빈야드(Vineyard)안에서도, 몇몇 “목마른 사슴”의 작곡자 마티 나이스트롬 등 몇몇 개인 사역자들도
이런 사역을 활발히 하고 있다.
예수님께도(계 1:16), 그리고 성도들에게도(시 149:6) 좌우에 날이 선 양날 검이 있다.
그 검은 성령의 검이며, 성령의 검은 곧 말씀이다(엡 6:17).
말씀의 날과 찬양의 날이 제대로 하나가 되는 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예배를 드리며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