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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월 10일 실시한 월레강의 내용의 일부입니다. 20250111/ 최익제(敎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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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행복 메뉴얼 (4)/ 강점
2025년의 첫 강의 시간입니다. 새해가 되었지만 세상은 온통 우중충합니다. 입 가진 사람들마다 아니 판세를 조금은 내다볼 줄 아는 사람들은 다 이제 곧 ‘미친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좋게 말해서 사상 초유의 ‘초초(超超)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릴 거라는 말입니다. 나라 밖으로는 트럼프 시대의 재개막으로 트럼프발 미친 세상을 대비하느라 세계가 동분서주, 뒤숭숭합니다. 게다가 그 장본인 트럼프까지 며칠 전 자기 입으로 ‘지금이 미친 세상’이란 말을 입에 담았다니 더더욱 징조가 불길합니다. 벌써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에 혓바닥을 널름거리고 캐나다의 옆구리를 마구 찔러 댑니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는 푸틴, 김정은 역시 또 어떤 미친 세상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계엄과 탄핵으로 난장판이 된 나라 안 사정은 더욱 절박합니다. 이미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건국 이후 초유의 이재명 발 ‘무정부 상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29번 줄 탄핵으로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하나하나 무너뜨려 나갑니다. 진작에 감옥 가야 할 범죄자는 지금 대통령 자리가 코앞에 와있다는 착각 속에 기세등등합니다. 특히 이번 계엄, 탄핵 사태를 통해 우리는 국가안보의 근간인 군과 국정원의 기밀 정보가 줄줄 새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국가의 중추적 기관들은 이미 미래권력의 애완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가히 동물적 감각으로 학습된 비겁한 공직자들이 민주당의 부역자가 되어 서슴없이 나라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중동 언론을 선두로 이 땅의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조차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슨 귀신에 홀린 듯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자꾸 달이라고 우기면서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 반란 세력인 여의도를 휩쓸어야 할 내란죄 광풍이 오히려 국가 수호세력인 용산을 휩쓸고 있습니다. 미쳐버린 세상입니다. 누군가 지식인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했습니다. 민중의 열기를 내려주는 ‘해열제’가 되고 민중의 백내장을 수술하는 안과의사가 되어야 한다지만 그것도 맞는 말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제 눈에는 이 나라에서 제대로 된 지식인은 품절 된 듯 보입니다. 대부분 눈알이나 굴리면서 침묵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양비론에 올라탄 채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먹물들 뿐입니다. 오히려 이 지독한 엄동설한에 광화문, 한남동 길거리에서 날 밤을 보내며 투쟁하는 애국 시민세력들이 이 나라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들은 오늘의 현실을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땅의 아이러니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나라를 제대로 살려놓으라고 국민의 손으로 뽑아 세워놓은 선출된 권력들은 날마다 나라를 자살로 몰고 갑니다. 헌재와 사법부가 마지막 보루라고 하지만 이곳 역시 정치적 청정지역은 아닙니다. 게다가 만약 이재명 재판에서 사법부가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탄핵에 이골이 난 이재명 민주당이 과연 사법부를 그대로 둘까요?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만약 이 지경에 이르면 이 나라는 완벽하게 이재명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재명 민주당의 주문에 토를 달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내란죄 공범으로 몰아가는 인민재판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일찍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한 국가의 멸망을 ‘사자의 죽음’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는 외부의 공격으로 죽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내부가 병들어 죽을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이 나라가 멸망 직전의 로마와 같다는 지적을 부정할 자신이 없습니다. ‘겉만 번드레할 뿐 속은 온갖 독소로 썩어 문드러진 회칠한 무덤 같은 나라, 이대로라면 사자처럼 스스로 죽어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지금 제 눈에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그 어떤 분석도 전망도 화려한 이론도 다 필요없어 보입니다. 단 하나, 우리 앞에는 지금 3가지 질문만이 우리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여의도의 늪에서 이런 식으로 무너져 내려도 좋은가? 이런 막장극을 손 놓고 구경할 만큼 우리는 정말로 한가로운가?’라는 질문입니다. 다음은 ‘아무리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기로, 아무리 세상에 인재가 없기로 친 형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붓고 10개 범죄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는 희대의 전과 4범 패역(悖逆)에게 이 위대한 나라를 맡겨도 우리의 자존심은 과연 무탈할까?’라는 긴 질문입니다. 끝으로 이재명 지지자들을 향한 질문입니다 ‘이러고도 당신들은 자식, 손주 세대에게 바르게 살아야 큰 사람이 된다고 가르칠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절박한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이재명 선거법 사법처리 종료 이전에 탄핵이 인용되어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이후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까딱하면 192명 국회의원을 병정놀이하듯 수족처럼 부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 극좌파, 독종 대통령이 등장할 가능성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후 이 나라에 펼쳐질 혹독한 좌파 전체주의 세상을 우리 시대가 견딜 수 있을까요? 만에 하나 이렇게 되면 이 나라는 인간 생지옥, 김정은의 북한과는 무엇이 과연 얼마나 다를까요?
만약 그래도 좋다면 다 함께 그냥 뒤죽박죽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다 함께 깨어 일어나 이 난장판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살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시대의 양심들이 깨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비록 지금은 이재명이란 희대의 독종에게 발목 잡혀 끌려다닐지라도 어둠의 세력은 결단코 빛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준엄한 역사의 교훈입니다. 저는 국민의 집단지성이 이같은 난세를 기필코 바로잡을 것으로 믿습니다. 서서히 민심의 향방이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긴 합니다. 갤럽을 비롯한 많은 여론조사들은 윤석열의 끝이 결단코 이재명의 시작일 수 없다는 민심이 70%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무거운 마음 그릇을 들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 마음 그릇에 한줄기 내일의 소망을 담아내야 합니다. 간절한 구국의 기도로 이 거대한 분열과 증오와 절망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의 막막하고 혼탁한 어둠 속에서 새 아침을 알리는 먼동을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한국인이 지닌 위기에 강한 민족성, 즉 한국인 특유의 강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늘 아래 그 어느 나라의 국가(國歌)에도 이런 구절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들이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보우하신다는 믿음을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강점을 주셨으니 그 강점을 통해 이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 주제는 웰니스의 네 번째 모듈인 ‘강점’을 메인 주제로 정했습니다. 각자의 삶 가운데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의 강점들, 즉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강점들을 다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흘러 바다로 모이듯이 우리 각자의 강점들이 모여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와 우리 사회의 강점을 이루고 그 강점들이 모여 오늘의 이 난국을 극복할 나라와 민족의 강점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만의 고유한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강점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고 세상의 변화에 맞설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웰빙을 원한다면 우선 나의 강점을 발견하고 계발하고 이를 발현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왼발을 잘 쓰는 축구선수라면 구태여 오른발까지 잘 쓸려고 애쓰지 말고 그 왼발의 능력을 키우는 게 훨씬 더 유리합니다. 물론 양발을 다 잘 쓰면 좋겠지만 그것은 타고난 왼발을 잘 쓴 다음의 얘기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가진 핵심 강점을 먼저 키우고 그다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채워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늘 허기를 면치 못합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육신의 허기지만 나의 약점, 즉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마음의 허기이기 때문입니다.
강점은 능력이나 재능과 구별해야 합니다. 예컨대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은 재능이지만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 성실하게 연습하는 것은 강점입니다. 주식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다면 재테크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끈질기게 자료를 분석하고 신중하게 매수, 매도 시점을 결정하는 성격은 강점에 속합니다. 피아노 연주 재능이나 재테크 재능은 누구나 타고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격적 특성 분야에 속하는 강점은 누구든 이미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든 자기의 의지로 발현시킬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재능과 강점의 다른 점입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먼(M.Seligman)은 ‘강점의 계발은 선택의 문제일 뿐 학습과 훈련을 통해 계발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발견과 창조를 통해 자기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나에게 ‘다정함’이란 강점과 ‘끈기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고 칩시다. 이런 경우 내게 부족한 끈기를 기르기 위한 훈련보다 내게 이미 있는 다정함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또 나이가 들수록 사회생활을 할수록 강점은 상승하기도 하고 그 순서가 바뀌기도 합니다. 어쨌든 강점은 발휘할수록 연마되고 성장과 변화를 끌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국인에게 최적화된 강점 분류 체계가 있습니다. (1) 다정한 사람/ 포용, 공감, 친교, 친절, 희망 (2) 유쾌한 사람/ 친절, 희망, 유머, 감탄, 호기심 (3) 열중하는 사람/ 호기심, 창의, 탐구, 열정, 끈기 (4) 성실한 사람/ 끈기, 진솔, 책임, 조절, 신중 (5) 지혜로운 사람/ 조절, 신중, 통찰, 판단, 공정 (6) 의로운 사람/ 판단, 공정, 촉진, 용기, 신념 (7) 섬기는 사람/ 신념, 초월, 겸손, 감사, 포용을 각각 속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강점은 이전 강의에서 다루었던 ‘수용’과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강점이라면 자신이 잘 못하는 것, 혹은 못 가진 것을 인정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용입니다. 외모를 한번 예로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눈이 작고 피부도 하얗지 않은데 치열은 매우 곱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눈이 작고 피부가 하얗지 못한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그게 수용입니다. 하지만 희고 고른 치열로 사람들에게 웃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면 그것은 강점이 됩니다. 결국 희고 고른 치열이라는 강점을 활용하는 반면 눈이 작고 피부가 하얗지 못한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을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일 때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용과 강점은 별개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강점은 일상 가운데 적용될 수 있고 활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친교가 강점인 사람은 아침에 친구나 동료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공정이 강점인 사람은 친교를 위해 커피를 산다고 할 때 그리 상쾌한 기분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커피는 번 갈아 사는 게 공정하고 이런 방식을 지키는 게 좋은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 내가 관리자라면 각 구성원의 강점을 파악해서 일을 맡긴다면 적재적소에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공정이 강점인 사람에게는 당직표를 짜게 한다거나 책임이 강점인 사람에게는 급한 프로젝트를 맡긴다거나 친교가 강점인 사람에게는 장기적 프로젝트를 맡기는 방식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고정관념이 그렇습니다. 잘하는 것을 키우기보다 부족한 것을 채우기에 더 급급합니다. 모든 교육시스템도 그렇습니다. 잘하는 과목은 잘하니까 그냥 그대로 두면서 못하는 과목을 어떻게든 실력을 키우려고 매달립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가장 잘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못하는 것을 잘 할때 보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할 때 자신이 느끼는 행복의 강도와 질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경우 젊었을 때부터 제가 못하는 예체능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걸 잘하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오히려 강의와 글쓰기 같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장점에 집중했고 이를 통해 교직에 있을 때나 퇴직 이후에도 수많은 나름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런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여담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언젠가 교회에서 젊은 교인에게 ‘나는 운동신경도 너무 둔하고 예능 감각도 너무 둔하다.’라고 했더니 ‘장로님, 장로님이 그런 것까지 다 잘하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 자기의 강점을 활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긍정 심리학자 프레데릭슨(Barbara Fredrickson)이 제시한 ‘긍정 정서의 확장 및 구축이론’이 있습니다. 즉 긍정적 감정이란 단지 신호에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결과까지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때 긍정, 부정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는가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연구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즉 A,B 두 사람에게 이들이 전혀 모르는 C의 성격 리스트를 제시하고 그 반응을 살피는 실험입니다. 먼저 A에게는 C의 성격적 특성 가운데 긍정적 측면을 먼저 나열하고 그다음 부정적 측면을 배치한 리스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B에게는 C의 성격적 특성 가운데 부정적 측면을 먼저 나열하고 그다음 긍정적 측면이 배치된 리스트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A가 B보다 C에게 더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각자가 지닌 강점과 단점 가운데 어느 분야를 우선 하느냐의 경우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유독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긍정적인 강점보다 부정적인 약점을 훨씬 더 크게 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경향을 잘 설명해 주는 실험이 있습니다. 2013년 미국에서 ‘리얼 뷰티 스케치’라는 영상 프로그램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실험 담당자는 전직 법의학 몽타쥬 전문가이자 미국 FBI에 근무했던 길 자모라(Gil Zamora)였습니다. 먼저 피험자 여성들이 칸막이 너머에서 길 자모라에게 자신의 외모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게 합니다. 그러면 길 자모라가 그걸 듣고 몽타주 기법으로 아주 편견없이 여성들의 묘사에 따라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 다음 길 자모라는 피험자 여성들의 얼굴을 직접 본 또 다른 실험 참가자들로부터 그녀들의 생김새를 말로만 전달받은 내용으로 또 초상화를 그립니다. 이렇게 한 사람 피험자의 초상화를 2장씩 그립니다. 그리고 2개의 초상화를 대조해 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본인이 묘사한 대로 그려진 초상화가 제3 자가 묘사한 초상화에 비해 훨씬 못난 얼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실험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여성은 자신에 대한 최악의 평론가이다. 세계적으로 오직 4%의 여성들만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방해꾼이 많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을 통해 나를 위축시키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의미의 방해꾼으로는 나 자신도 있고 주변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이 방해꾼들을 구태여 내게서 떼어놓으려고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오로지 나의 강점을 바라보고 방해꾼에게 눈 돌리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면 훼방 받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훼방꾼들은 사실 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이런 것들의 존재 여부 역시 다 나의 선택사항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든 강점을 바탕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변화의 초석을 다질 때도 의미있는 존재와 연결할 때도 자신의 강점을 매개로 하면 수월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점을 활용한다는 것은 좋은 삶으로 연결된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시소와 같습니다. 내려갈 때도 있고 올라갈 때도 있습니다. 이때 바닥을 박차고 시소를 위로 끌어 올리는 힘이 바로 강점입니다. 즉 회복탄력성을 강화해 주는 것이 바로 강점입니다. 또 강점을 활용했을 때 역경을 이겨내는 마음 근력이 강화되고 행복이 증진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강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강점을 잘 활용하면 문제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도 문제를 덜 심각하게 보이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강점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발견하고 활용하고 연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강점은 더 강한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의 강점을 확인받고 지지받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안의 강점 스위치가 켜지고 환하게 불이 켜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육이든 가정교육이든 모든 교육은 강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교사는 ‘강점 촉진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 그의 강점을 찾아내 활용하도록 도와주면 미처 알지 못했던 엄청난 잠재력을 스스로 끌어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훌륭한 사람은 나 자신의 충실한 강점 촉진자이자 동시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강점 촉진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색의 삼원색은 파랑, 빨강, 노랑인데 섞으면 검은색이 됩니다. 빛의 삼원색은 빨강, 파랑, 초록인데 서로 섞이면 흰색, 즉 백색광이 됩니다. 그래서 빛이 우리 눈에는 흰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색의 삼원색이 섞인 것처럼 어둡고 칙칙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상대의 강점은 무시하고 단점은 지적하고 늘 끌어내리려 하고 갈등으로 가득합니다. 한국의 정치판이 딱 이 모양입니다. 하지만 빛의 삼원색이 섞인 듯한 공동체도 있습니다. 만나면 서로의 강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격려하고 감싸 안는 밝은 빛으로 가득한 공동체입니다. 강점은 서로 섞일 때 물감처럼 검은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흰색이 되어 환하게 빛납니다. 가정도 다를 바 없습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결혼생활이 자신의 대표적 강점을 발휘하는 일상의 수단이 될 때 부부는 더욱 행복해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간에도 친구와 직장동료 간에도 서로의 강점 촉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강점이라는 프레임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과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단점이 모든 관계에서 느끼는 결핍감의 원인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강점만이 이런 결핍감을 없애주는 최고의 치료약인 셈입니다.
한국 정부기관에서 공인 동시통역사로 활동하는 임종령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명문대에 유학하는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자신이 책 읽고 공부하는 모습만 보여줬다고 합니다. 엄마가 거실에서 공부하면 아이들은 TV를 끄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공부했고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끓이면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공부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엄마의 강점인 성실함과 끈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고 엄마는 아이들의 강점을 지지하고 기다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본질은 부모와 교사가 얼마나 강점 촉진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사람은 누구에게나 강점이 있는 것처럼 약점과 단점 역시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어디에 나의 시선을 묶어 둘 것인가에 따라 내 인생이 바뀔 뿐입니다. 만약 주변에 강점 촉진자가 없다면 나와 같은 강점을 가진 사람을 찾아 그의 삶을 벤치마킹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요컨대 강점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의 ‘나다움’을 발견하고 아울러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우리 인생길의 든든한 가이드입니다. 2025년 새해에는 나의 강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강점 촉진자로서 참 행복을 누리는 소망의 한 해가 다 되시길 기원하며 본 강의를 마칩니다.
첫댓글 최박사님
글 잘읽었습니다
2025년에는 강점을 살려보도록 노력하지요...